침묵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느님
오늘 새벽미사에서 들은 로드리고 신부님의 강론은 일본 가톨릭 박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침묵》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박해를 받았습니다.
신자들을 물속에 넣어 코만 내놓게 하거나, 뜨거운 온천물에 담가 고통스럽게 죽게 만드는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결국 그는 밀고로 체포되고, 자신은 고문하지 않는 대신 눈앞에서 신자들이 거꾸로 매달린 채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게 됩니다.
박해자들은 말합니다.
"이 성화상을 밟아라. 그러면 저들을 살려 주겠다."
신부는 깊은 갈등에 빠집니다.
신앙을 지켜 순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배교자가 되어 사람들의 목숨을 살릴 것인가.
마침내 그는 성화상을 밟습니다.
그 순간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나는 너희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심판하기보다 먼저 끌어안으신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소설의 제목인 《침묵》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의 침묵입니다.
두 번째는 배교자가 된 후 말없이 살아가야 했던 로드리고 신부의 침묵입니다.
역사는 대체로 승자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교회 역시 순교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공경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순교자들만이 아니라, 넘어지고 실패하고 배교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작가는 묻습니다.
"그들 안에도 하느님은 함께 계시지 않았을까?"
소설 말미에서 로드리고 신부를 밀고했던 신자가 다시 찾아와 고해성사를 청합니다.
그는 끊임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드리고 신부는 그를 외면하지 않고 사죄경을 바쳐 줍니다.
이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성경 속 유다가 떠오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뒤 절망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반면 베드로 역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눈물로 회개하며 다시 주님께 돌아왔고, 마침내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강함만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뿐 아니라 두려움과 실패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외면의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순교자의 용기 안에도 계셨고, 배교자의 눈물 안에도 계셨습니다. 고통받는 신자들 곁에도, 밟히는 성화상 속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하느님은 심판하기 위해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오늘 강론을 통해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 봅니다.
주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실수한 인간을 밀어내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품어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