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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샘 말씀

그리스도에게까지

작성자신동환|작성시간26.06.12|조회수25 목록 댓글 0

그리스도에게까지

2026614일                                                                                                          엡 4:11-15

 

1. 그날 이후

예수께서 어느 날 자신이 땅에 계시던 때에 기적을 베푸신 사람들이 그 후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여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께서 한 주정뱅이를 만나셨습니다. 그는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손발을 떨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형제여 어찌 이 꼴이 되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 절름발이 다리를 고쳐 준 예수시군요.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는 구걸을 하며 살아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는데, 건강한 두 발이 된 후로는 얻어먹을 수도 없고 마음에 맞는 일자리는 없고 하여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처럼 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번에는 갈릴리로 가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움질을 하고 있는 한 불량배를 만났습니다. “여보 젊은이 한낮에 이게 뭔 짓이요?”하고 말을 걸었더니 그가 예수를 알아보고 말하였습니다. “소경이었던 나를 고치신 예수님이시군요. 앞 못 보던 내 눈에 진흙을 발라 눈이 뜨이게 해 주셨을 때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온 세상이 나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나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소경으로 있을 걸 하고 후회도 하였습니다. 온 세상에 화풀이하면서 살다 보니 결국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하고 흐느껴 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얘기는 아일랜드의 시인 오스카 와일드가 쓴 그 날 이후란 단편소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지요.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키워나가는 것이 더욱 소중합니다.

 

신앙은 성장해야 합니다. 그 자리, 그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한 자리에 고여 있는 물이 썩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지점, 어떤 수준에 계속 머물러 있는 신앙은 퇴보합니다. 못쓰던 다리가 고쳐지는 것, 못 보던 눈이 보게 되는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대단한 기적이지요. 그렇지만 이처럼 놀라운 체험이 신앙의 궁극적인 완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란 점도 깨달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큰 은혜를 받았으나 나중에는 잘못된 길로 떨어진 이들을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사이비 신앙의 교주들도 처음에는 신령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만 그 이후에 잘못되어 그릇된 길로 가게 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비유컨대 신앙은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신앙이란 마치 마라톤과 같은 것이어서 부단히 달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사는 동안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을 믿었던 신앙의 선배들은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이라고 노래했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고 찬송을 했던 겁니다.

 

2. 에베소서 4:11-15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교회엔 다양한 직분들이 있다는 겁니다. 4:11입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직분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상황이기에 오늘의 교회 직제(職制)하고는 매우 다르지요. 그렇지만 교회 안에 다양한 직분들이 있다는 점에서는 일반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직분들이 얽혀서 일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두가 목사일 수 없고, 모두가 권사일 수 없습니다.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평신도로 모두가 서로 다르게 존재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서로 다르면서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또 하나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다양한 직분을 가진 우리는 모두 자라나야 하는데, 어디까지 자라나야하는가 입니다. 15절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어디까지 다다라야 한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신성모독의 내용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성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디까지 자라나야한다고요? 그리스도에게까지!

 

3. 그리스도에게까지

그러므로 교회에는 가르치는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에 속한 지체들이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는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굳건히 서서 꿈을 꾸며, 예언을 하는 젊은이들로 자라나게 해야 합니다. 이보다는 더 나은 다른 세상을 꿈꾸며 일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소망 없는 아이로 키울 때 우리의 내일은 소망이 없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한 노릇입니다. 옆을 돌아보지 못하게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이웃을 돌아보지 말고 나만을 위해 공부하고, 그렇게 살아가라고 한다면 내일의 우리 사회는 너무도 메말라질 겁니다.

 

우리 자녀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자라나야 합니다. 비록 육신의 성장은 멈췄을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성장해야 합니다. 속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구체적으로 미움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사랑으로 바뀌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해의 평안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속사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이기적인 삶이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웃을 섬기는 가운데 삶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빚진 자라는 심정에 이르게 되고,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하여 애쓰는 경지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종래에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함에 있어서 겸손한 태도는 두말할 필요 없이 소중합니다. 그렇지만 꼭 명심하십시오. “나는 부족한 죄인입니다.”란 말이 나의 신앙적 불성실을 변명하는 방패막이로 쓰여서는 안 됩니다. “나처럼 부족한 것이 뭘 해?”하는 이런 태도는 신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인이니까 이제는 갱생하여 새사람이 되어야지, 계속해서 죄에 빠진 생활을 해서는 안 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겸손을 가장한 태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부단히 성장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하던 때 제가 영은교회에 부임을 했고, 그때 청년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회원들이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교회에 부임하는 전날, 토요일에 청년회 수련회를 가버렸어요. 그때 교회가 해주는 밥을 먹고 설거지나 했습니다. 살림을 안 해봤으니 수십 명의 밥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멀쩡히 수십 명 교인들의 밥을 합니다. 성장한 것인가요? 성장한 것이지요. 그러나 밥 하는 것만이 아니지요. 모든 면에서 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능력 있는 일꾼들이 되어야겠습니다.

 

75일은 우리교회의 합병14주년기념주일입니다. 합병기념주일을 준비하는 가운데 우리는 어떤 교회를 이루어야 할까?’,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묵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바르게 예배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는 잘 가르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하늘샘교회는 우리 자녀들이, 그리고 우리가 모두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도록 가르치며 인도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우리교회가 이 가르침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애쓰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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