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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반사회뉴스

[역사]'대책없는 징집' 수많은 희생에 책임도 없었다

작성자슈크림라떼|작성시간24.06.26|조회수175 목록 댓글 1

 

 

수십만 '민간인'으로 구성됐던 軍
극한 추위·배고픔 '지옥같은 고통'
故 유정수씨 일기 통해 참상 확인



한국전쟁 당시 국가의 부름에 응해 국민방위군으로 전장에 뛰어든 고 유정수씨가 남긴 일기장 복사 촬영본.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한국전쟁 70년, 6월의 역사는 치유되지 않는 민족의 슬픔이다. 그 슬픔의 가운데 기억 속에서 잊힌 군인들이 있다. 바로 '국민방위군'이다. 수십 만의 민간인으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은 이들에게 쓰여야 할 국고와 물자를 간부들이 착복해 수만명이 굶거나 얼어 죽는 비극을 겪었다.

참상 후, 이들에 대한 재조명이나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증언'만 있고, '사료'는 없다는 게 주된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경인일보는 이 사건의 결정적 사료가 될만한 국민방위군의 일기를 발굴했다.

고(故) 유정수씨가 남긴 일기에는 국가의 부름에 응해 전장에 뛰어들었지만, 지옥 같은 현실과 마주한 국민방위군의 처절한 생활상이 담겨 있다. → 편집자 주

 


'사랑하는 내 어머니와 아내와 동생들에게 이 기록을 드리노라'.

국민방위군 사건을 재조명해 줄, 유정수(1925~2010)씨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수원군 양감면 요당리(현재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그는 국민방위군에 징집된 1950년 12월 23일부터 이듬해 3월 10일까지 76차례 일기를 작성했다. 그중 내용 없이 날짜와 요일만 명기한 게 2차례고 가장 긴 일기는 759자, 가장 짧은 일기는 단 3자만 기록했다.

극한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 이동하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들은 대체로 짧고, 교육대에 도착한 뒤 일과와 심경을 담은 일기는 상대적으로 긴 편이다.

징집령에 따라 수원에 집합한 그는 대오도 갖추지 못한 채 국민방위군 제22교육대가 있는 경상북도 청도로 향한다. 용인-장호원-문경-상주-의성-영천을 거쳐 청도에 도착한 뒤, 대구-김천-보은-청주를 지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일기의 중심이다.

이 시기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해 국군과 유엔군이 전선을 남하하는 상황이었다. 북한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한 1·4후퇴를 앞두고 국민방위군이 먼저 소개되기 시작했고, 그들은 인솔자도 지휘계통도 없이 목적지만 전달받고 무작정 남행길에 나섰다.

지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이 사건을 조사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당시)정부는 미처 관리대책 등을 마련하기도 전에 중공군의 남침으로 인하여 급속히 수십만에 달하는 국민방위군을 남쪽으로 무리하게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주민통제가 강화되고, 수집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등 무리가 잇따랐다"면서 "워낙 급작스런 이동작전이었으므로 피복, 식량, 의약품, 수용시설 등 모든 면에서 준비가 부족하여 대규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하였다"고 설명한다.

정부의 졸속행정이 피해를 낳은 셈이지만 현재까지 국민방위군 희생에 대한 어떤 보상도 사과도 이뤄지지 않았다.

김태성·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1-2편 [故 유정수씨 일기 속 '그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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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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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후암동 | 작성시간 24.06.27 감히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을정도로 그 고통을 헤아리질 못하겠습니다
    그저 너무 감사드리고 꼭 모두가 보상받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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