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주일성서공부

마가복음 강해 58-세례 요한의 죽음과 부활(6:14~29)

작성자하늘샘물 퍼주는 사람|작성시간07.09.18|조회수534 목록 댓글 0
마가복음 강해(58)



세례 요한의 죽음과 부활



6:14~29

1.예수-세례 요한의 부활(6:14~16)
1)6:14은 대문자(Καί, 카이)로 시작한다. 그만큼 14절 이하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4절 이하는 세례 요한이 투옥된(1:14) 후 예수님의 말씀 전파와 행적, 제자 파송이 요한의 부활이라는 것을 말한다.

2)“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6:14)― 세례 요한이 투옥된 후 예수님의 활동, 즉 예수 운동으로 예수님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3)‘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다른 사본에는 ‘헤롯왕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하곤 했었다.(미완료)’로 되어 있다. 즉 헤롯왕은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 그분의 활동에 대해 들었다는 것이요,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라고 말해 왔다는 것이다.

4)‘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살아났도다’는 ‘일으킴을 받았다.’로 번역해야한다. 수동태이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활한 요한으로 보았을까? 세례 요한의 능력이 예수님에게서도 같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부활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그 능력, 성품, 정신, 삶이 살아나는 것이다. 헤롯 역시 그렇게 말했다.(6:16)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이 ‘회개’로 관통되어 있기 때문이다.(1:4, 15) 이것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6:12)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이란 부활한 예수이다. 나아가 오늘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는 부활한 예수들이다. 부활의 내용은 회개다. 돌이킴이 없는 삶은 부활이 아니다. 부활은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이란 사도 바울의 말대로 죄 속에 갇힌 것을 말한다.(엡 2:1) 특히 헤롯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세례 요한을 죽였다. 요한이 헤롯에게 회개를 촉구한 것이다.

5)‘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6:15)― 6:15은 8:28에서도 나타난다. 엘리야는 주의 심판의 날에 오시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말 4:5)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부활한 엘리야로 말했다.(마 17:13)

6)‘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회개를 촉구하는 요한과 더불어 예수를 사람들은 예언자의 맥을 이어가는 분으로 본 것이다. 옛 선지자들처럼 왕 앞에서 당당하게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요한의 죽음(6:17~29)
1)‘헤롯’(6:17)― 헤롯은 여기서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킨다. 예수님 탄생 시 팔레스틴을 지배했던 헤롯 대왕의 아들들 중 하나다. 그는 헤롯 대왕 사후 안티파스는 B.C 4~39 요단강 서쪽 갈릴리 지방과 강 동쪽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이 되었다.(헤롯 대왕 사후 세 아들에 의해 팔레스틴은 분할되어 통치되었다. 아켈라오스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빌립은 이두메와 드라고니티스 북부를 통치했다.)

2)헤롯 안티파스는 원래 아라비아 나바태아의 왕 아레타스 4세의 딸 멜사스와 결혼했으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했다. 이것으로 두 나라 간에 전쟁이 일어나 안티파스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사람들은 이 패배를 요한을 살해한 것에 대한 징벌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헤로디아는 원래 헤롯 대왕(10명의 아내를 두었다.)의 아내 중 하나인 마리암느 1세에게서 나온 아들 아리스토불의 딸이다. 헤로디아는 헤롯대왕의 또 다른 아내인 마리암느 2세의 아들과 결혼했다.(이 아들의 이름은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 이 결혼에서 살로메가 나왔다.(6:22의 ‘헤로디아의 딸’) 그런데 헤로디아는 자기 남편을 버리고 권력이 더 센 안티파스와 결혼했다. 그러므로 17절의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는 잘못된 기록이다. 빌립은 헤롯 대왕의 또 다른 아내인 클레오파트라(유대인)의 아들인데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했다. 그러므로 빌립은 헤로디아의 남편이 아니라 사위인 것이다. 참 복잡한 콩가루 집안이다. 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손녀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기 삼촌과 결혼하고, 이혼한 후 또 다른 이복 삼촌 안티파스와 결혼한 것이다.

3)세례 요한은 안티파스의 이런 근친상간을 두고 죄를 물은 것이다.(6:18, ‘옳지 않다’는 것은 율법에 기준해서이다. 레 20:21) 이에 대해 헤로디아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그래서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둔다. 순전히 헤로디아를 위해서였다.(6:17, ‘이 여자를 위하여’) 그러나 죽이지는 못했다. 그것은 안티파스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하면서도 달갑게 들었기 때문이다.’(6:20) 안티파스의 이중적 마음을 말해 준다. 의인이면서 거룩한 사람인 줄 알아 죽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 문책하는 사람이었기에 옥에 가둔 것이었다.

4)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헤로디아에게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6: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헤롯의 생일 날, 대신들과 고급 장교인 천부장(천명의 부하를 둔 장교)들, 그리고 갈릴리의 귀족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살로메)이 춤을 춰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켜준 것이다. 이에 안티파스는 이 딸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며 맹세코 들어주겠다고 한다.(6:22)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는 것이다.(6:23) 권력의 오만이다.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6:22)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안티파스의 오만함을 말해준다. 그러자 딸은 어머니에게 가서 무엇을 구해야 될지를 묻는다.(6:24) 아직 어린 아이다. 자기 의지가 없다. 그렇기에 어머니에게 묻는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이겠는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어머니다.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라고 말한다. 그 목을 얻기 위해 헤로디아는 만찬 석에 창녀나 다를 바 없이 딸을 춤추게 한다.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이런 연회석에서 춤은 창녀난 추는 것이었다. 죽임의 복수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어머니다. 이런 어머니를 만나면 그 자식이 어떻게 되겠는가? 혹 부모인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묻고 있는가? 욕심과 시기, 복수에 가득 찬 분에게 묻고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묻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가? 이미 내 욕심을 갖고 기도하지 않던가? 하나님의 의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살로메는 어머니의 의지를 안티파스에게 전한다.(6:25) 기도는 하나님의 주파수를 찾는 것이다.

5)“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6:25)― 생명이 살아난 생일, 죽임을 요구한다. 죽임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극적인 대조가 이루어진다. 안티파스는 죽이기 위해 살아난 존재다. 혹 우리 삶이 그렇지 않은가? 치열한 경쟁, 죽여야 사는 세상으로 우리는 살려고 왔다. 그렇다면 죽이고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이 사건 직후 오병이어의 사건과 이것은 대조를 이룬다. 두 식탁의 대조이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배고파 죽어가는 민중을 살리는 식탁에서 이루어진다. 살림과 죽임의 식탁이 대조된다. 살리는 음식을 담아야 할 ‘소반’에 죽임이 담겨진다. 우리의 식탁은 아닌가? 먹고 죽이고 누르기 위한 것이 아닌가? 부쉬의 식탁에서 얼마나 많은 살해가 벌어지고 있는가?

6)헤롯 안티파스는 신도시 건설과 대토목 공사로 경제 부흥을 일으킨 독재자다. 나름대로 큰 성취감에 젖어 있는 왕이다. 독재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 자신과 같은 권력이 있었기에 이런 경제 부흥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의인을 죽였던가?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부를 위해 소중한 인권과 생명을 도태시키는 현실이다.

7)헤롯 안티파스는 고민한다.(6:26) 의인이요, 거룩한 사람인 요한의 머리를 베는 것에 잠시 주춤한다. 그러나 자기가 맹세한 것을 생각한다. 맹세란 자기 의지, 자기 욕망, 자기 뜻을 두고 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의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맹세에 자기가 얽매인다. 우리의 서원 기도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자기 욕망을 맹세로 기도한다. 이미 맹세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8)또 걸리는 것이 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다.(6:26) 체면이 있지 왕이 맹세한 것을 어떻게 번복할 수 있겠는가? 체면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 그것도 의인을 죽인다.

9)“거절할 수 없는지라”6:26)― 오역이다. “거절하려고 하지 않았다.”이다. 맹세와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이 아니다. 이미 죽이려고 작정한 마음을 말한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 말라. 더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을 읽어라!

10)시위병에 의해 베어진 요한의 목이 소반에 담겨 딸을 통해 어머니에게 전달된다.(6:28)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신을 가져다가 장례를 치른다. (6:29) 세례 요한은 죽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다시 부활한다. 예수님으로 부활한다. 의인의 육신은 죽였지만 의는 죽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의와 거룩의 능력이 예수 안에서 부활한다.

11)제자들을 파송하고 나서 왜 헤롯 안티파스가 세례 요한을 죽이는 장면을 마가는 제시하는가? 제자들이 갈 세상이 바로 이런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임의 세상을 살림의 세상으로 바꾼다. 이것이 이어질 오병이어의 사건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