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의 꽃 으로 왔다 간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초상화
어렸을적의 덕혜옹주사진

고종이 덕혜옹주를 위해 세운 유치원에서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덕혜옹주시다.
윗줄 왼쪽에서 두번째는 민덕임으로 나중에 잊혀진 덕혜옹주를
찾아나선 기자 김을한의 부인되시는분.
경성 일출소학교를 다닐 때의 덕혜옹주

대한제국 황궁인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황실 가족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1923년때 덕혜옹주
고종은 덕혜옹주가 일본인과 결혼하게되는것을 두려워하셔
충신이었던 한 신하의 아들인
김정한과 약혼을 시키려하신다
김정한의 형은 나중에 덕혜옹주를 찾아나선
김을한이다.
덕혜옹주가 경성일출 심상소학교에서
일본급우들과 수업을 받는모습
뒤쪽에 수행원과 교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925년 3월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으로 보인다.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 3월28일)
이틀만에 동경에 도착한 덕혜옹주께서는
동경의 영친왕 저택에서 머무르게 되신다.
고종황제
경술국치(1910) 뒤인 1912년 덕수궁에서 출생하였다.
고종의 고명딸로서 5살때 즉조당에 유치원이 만들어질 정도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
일본에서는 모계의 출신성분을 문제삼아 왕공족으로 인정하는 것을 꺼려했으나
1917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명으로 일본 왕공족의 왕녀로 정식 입적되었다.
이름 없이 "복녕당아기(福寧堂阿只; 일본측 기록엔 福寧堂姬)"라고 불리다가
고종 사후인 1921년 5월 4일(양력) 옹주에 봉해지고 덕혜(德惠)라는 호(號)를 받았다.
그러나 조선식으로 따로이 휘(諱)나 자(字)를 지어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서울의 히노데(日出) 소학교를 거쳐 일본에 강제유학을 간 그녀는
1925년 도쿄 가쿠슈인 대학(学習院大学)에 입학하였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신경쇠약에 걸렸다.
1930년 모친 복녕당 양씨(귀인 양씨)의 죽음을 계기로
정신분열증(조발성 치매증) 증세를 보였으나 이내 호전되었다.
일본 데이메이 황후 의 명령으로
1931년 5월 8일 도쿄에서 쓰시마섬 도주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종무지)과
강제 혼인하여 이듬해 8월 14일, 딸 마사에(正惠, 정혜)를 낳았으나
출산 후 지병이 악화되어 1953년 남편 소 다케유키[2]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1955년에는 딸 마사에마저 행방불명되는 불행을 겪었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정신장애로
도쿄 인근의 마쓰자와병원에 입원하는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일한
김을한 기자에 의해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에 귀국하였다.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에 들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방자 여사와 만난 자리에서 덕혜 옹주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치며
“그런 분이 있었냐”고 말했고
그 뒤, 박정희 정권에서 제창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으로
구황족에 포함된 그녀는
1962년 1월26일 오후 12시35분 김포공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왔으며
이후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으며 창덕궁에서 생활하였다.
귀국 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양덕혜라는 이름의 호적을 받았다.
귀국 후에는 의민태자비 이방자 일가 및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기거하며 노환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수강재(壽康齋)에서 타계하였다.
그로부터 9일 후인 4월 30일, 의민태자비도 서거하였다.
현재 덕혜옹주의 묘소은 아버지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洪陵) 뒤에 있다.
제국주의에 파괴된 여인
1931년 5월 8일 도쿄에서
쓰시마섬 도주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종무지)과 강제 혼인하다
결혼식 사진에 신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반쇼인 萬松院 대마도주 무덤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해방후 동경의 마츠자와 정신병원에서
당시 김을한 기자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넘어왔으나
세월이 흘러 김을한 기자는 동분서주
그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의 도움으로
1962년 1월26일 낙선재로 귀한한다
그러나 수십년을 정신병원에 있었던
그녀가 낙선제에 들어서자
눈물을 흘리며 순종순명효황후 윤비에게
황실예법에 맞게 절을 올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972년 회갑상을 받은 덕혜옹주의 모습(좌측에서 두번째) 왼쪽이 유모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77세를 일기로 타계
덕혜옹주의 추모비가 있는 만송원 정문
덕혜옹주의 낙서
고종을 잃고 황실을 잃은 국민들에게
덕혜옹주는 그야말로 황실의 마스코트로
조선일보,동아일보같은 신문에서도
덕혜옹주의 기사를 자주 찾아볼 수 있었다고한다.
이에 일본은 덕혜를 우리 국민들의 기억에서 지우기위해
덕혜옹주나이 14세때 강제로 일본유학을 결정하게된다.
'옹주'는 왕과 궁녀 사이에서 낳은 딸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주어지는 작호였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은 1912년, 경술국치 경과 2년이었고
그때 아버지 고종의 나이는 환갑이었다.
하지만 옹주의 탄생과 조선 왕의 환갑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명치천황의 황후가 그 해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일제는 조선왕실의 자손이 하나 더 느는 것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 다섯 살에 주어지는 옹주 작호는 물론
왕의 정식 자녀로서의 입적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연로한 아버지는 어린 딸을 가여워했다.
그래서 왕은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즉조당에 유아원을 만들게 했다.
망국의 왕이라도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었나 보았다.
하지만 유아원의 교사를 한국인만으로 채용할 권한까지는 왕에게 없었다.
그래서 유아원의 교사로 일본인이 주로 채용되었다.
유아원에는 덕혜옹주를 비롯한 왕실 자제 10여 명이 다니게 되었다.
왕은 아침마다 즉조당에 들러서 어린 것의 재롱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왕은 어느 날 일본 총독을 덕수궁으로 초빙한다.
그러고는 총독을 왕궁 유아원으로 데려간다.
왕은 노래하고 유희하는 어린 것들의 앙증맞은 모습을 총독에게 보여 주었다.
갑자기 늙은 왕은 아이들 틈으로 들어가 함께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재롱을 떨었다.
그러더니 어린 딸의 손목을 잡고 와 총독에게 인사시켰다
총독은 어린 것을 안아 올렸다.
왕의 어린 딸은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이 일이 있은 후 총독은 본국 궁내성으로 전보를 쳐
덕혜옹주의 입적 문제를 서두르라고 한다.
다음 해 총독은 덕혜옹주를 일본인 자녀가 다니는 히노데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소학교를 마친 옹주는 일본에 있는 왕실 학습원으로 끌려가게 된다
주변 눈치 보기에 익숙해진 소녀는 그 때 벌써
자신의 삶이 제국주의자들의 정치적 놀음에 휘말리고 있음을 알았음일까?
소녀는 부모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틴다.
어린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빠 영친왕이 일본에 간 것은 일종의 인질이었고
그가 일본 여자와 결혼한 것도 강제라는 것을
어린 것은 이미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왕 역시 딸을 떠나보내기가 싫었다
하지만 아비가 한 일은 다소 옹졸했다
왕은 시종 김황진에게 아들이 있는가를 물었다.
시종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왕은 시종의 사내 조카 중에서 하나를
양자로 들여 놓으라고 어명을 내렸다
옹주와 정혼시켜서 옹주의 일본행을 막아 보려는 의도였다.
물론 이 일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종 김황진은 왕 대신 총독부 경무부에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종은 이듬해 봄 덕수궁에서 독살되었다.
영친왕비 이방자는 동경역으로 나가 덕혜옹주를 마중한다.
"긴 여행에 많이 피로하시지요?"
옹주는 창백한 얼굴에 유난히 검게 두드러진 속눈썹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어렸을적 나를 매료시켰던 명랑함과 빛나던 눈빛은 찾아볼수없었다"고 표현하고있다
덕혜옹주는 이때부터 주욱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한참 예민한 나이에 그녀는 날카로운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해 보였다.
이방자여사는 덜컥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로부터 5년, 옹주의 나이 17세 때에 그녀의 생모 양씨가 유암으로 죽었다
옹주는 순종이 죽었을 때 한번 고국에 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옹주는 어머니도 못 보고 강제로 일본에 돌아갔었다
이번에는 아예 옹주의 귀국 자체가 빨리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옹주는 도일 이후 생전의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대마도주 종 백작은 난데없이 조선 왕의 서녀인 덕혜옹주와
결혼하라는 지시를 일본 조정으로부터 받게 된다.
조선의 왕가에서도 우선 병을 치료하고 난 후 결혼해야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종 백작과 덕혜옹주의 결혼은 일본 조정의 스케줄대로 강행된다
덕혜옹주의 병은 낫지 않았다.
1953년 옹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제로 결혼하고 비밀리에 이혼 당한 그녀는 의지가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62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은 그녀의 귀국을 허용한다.
그녀의 귀국을 반긴 이는 창경궁 낙선재 윤대비와 어려서 젖을 물려준 유모 변씨였다
하지만 기억을 상실한 옹주는 37년 전 유모 변씨마저 알아볼 리 없었다.
그녀는 서울대병원의 병실에서 꼬박 10년을 더 지내야 했다.
계절의 변화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그녀는 1989년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게 된다.
덕혜옹주이야기
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은 우연히도 고종의 회갑 해인 1912년 5월 25일이다.
속담에 ‘회갑 해에 태어난 자녀는 그 어버이를 똑같이 닮는다.’는 말이 그대로 적중하여,
덕혜옹주는 아바마마 고종의 축소판같이 닮았다.
바로 그 전 해에 엄비를 잃고 울적하던 차에 덕혜옹주의 탄생이
노왕 고종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안겨 주었는가는 실록에 나타난 바로도 짐작할 수 있다.
아기를 낳자마자 즉시 그 산모 양씨에게 ‘복녕당’이란 당호가 내려지고,
그 다음날 왕이 산실에 아기를 보러 갔고,
3일째 되는 날에는 흥친왕을 비롯한 종친들이 덕수궁으로 달려와서 문안을 드리고,
다시 생후 일주일 되는 날에는 종척(宗戚:임금의 친족과 외척)들의 알현이 있었다.
그 다음날 6월 1일에는 순종 내외가 덕수궁에 부왕을 뵈러 와서
함께 산실인 복녕당으로 아기를 보러 갔다.
삼칠일 되는 날에는 종척 이하 칙임관 이상 직급에게도 왕이 축하의 내연을 베풀었고
생후 약 2개월 후인 7월 12일에는 아예 아기를 유모를 딸려 침전인 함녕전으로 옮겼다.
실록에 나타난 바로는 왕녀가 태어나서 이토록 환영받은 전례가 없다.
덕혜옹주 실화 소설밖 실제 기록속에 들어난 이야기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일생이 너무 슬퍼요(이방자여사의 말)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덕혜옹주의 말)
덕혜옹주께서는 항상 보온병을 가지고 다니셨다고한다.
그래서 한 급우가 "넌 왜 보온병을 가지고 다니니?" 라고 묻자
"독살을 당하지 않으려고 이안에있는 물만 먹어"라는 답을했다한다.
덕혜옹주는 일본에서도 독살의 공포를 잊지 못하셨던것이었다( 한 급우의 말)

덕혜옹주의 어머니셨던 양귀인
평민의 출신으로 후궁중 고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것으로 알려져있다
덕혜옹주께서는 1932.8.14 결혼 3년만에 따님을 출산하셨다
딸 마사에 (masae) 한국명: 종정혜(宗正惠)
마사에 (종정혜) 가 태어난 소식을 들은 순정효황후꼐서는
유아용당의를 보내셨다고합니다
정혜의 혜는 덕혜옹주의 이름에서 따왔고
정자는 아버지쪽 조상중 한 사람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현해탄에서 죽은게 아닌 걸로 나옵니다.
책에 따르면 마사에는 스즈키란 사람과 연애결혼했다가
1956년에 가출했습니다.
8월 26일 아침에 유서를 남겨놓고 집을 나갔습니다.
원인으로는 신경쇠약 기미를 보였던 거 때문이라고
가출한 마사에는 산 속에서 조난되었고,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장례식에는 아버지가 참석했었고,
어머니는 그 때 정신병원에 있어서 마사에가 죽은 것을 몰랐다고.
자살설, 가정불화설, 일제의 암살설 등으로 수수께끼로 남았던 문제였습니다.
덕혜옹주 나이 8살일때 고종은 독살을 당하셨고,
옹주께서는 이 광경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셨다하신다.
한 남자분께서 덕혜옹주를 만나고 난뒤 기록한 일기에따르면
소 다케유키백작과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도중 덕혜옹주가 들어와
갑자기 웃기시작하더니 기괴한 소리로 끊임없이 웃으셨다고 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패번취현"이란 정책을 단행하게 되었는데
이때까지 있던 "번주"란 집권층을 없애고 중앙집권적인 현을 구성하게 되었고
이때에 귀족의 작위를 잃은 소 다케유키는 평민으로 살아가야했다
그동안 모았던 재산도 잃게되었으며
정신분열증이었던 아내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강제적으로 집어넣고
이혼을 했으며 그해에 새아내를 얻었다고한다.
덕혜옹주는 이후로 김을한이 찾아올때까지 15년동안 병원생활을 하셨다.
동경 특파원으로 일본에온 김을한은 덕혜옹주를 찾았고
전화번호부에서 소 다케유키를 찾아 전화를 걸어 근황을 물었지만
"입원했다. 당신이 상관할일이 아니지않느냐."
하는 냉정한 대답을 얻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병원을 찾아낸 김을한은 덕혜옹주를 만나게 되었고
비참한 모습의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38년만에 고국의품에 안길수있었다.
이때 유모인 변복동 할머님은 비행기를 향해 절을하셨다고 한다
덕혜옹주께서 낙선재에 머무르실때
옹주의 전남편인 소다케유키가 찾아왔지만
당시 낙선재 비서실장이었던 이공재에 의해
옹주와의 만남을 거절당했다고 한다.
권비영 작가가 지난해 12월 중순 펴낸 장편 ‘덕혜옹주’
조선왕조의 마지막 옹주의 기구한 삶을 복원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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