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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정책 제안하기

삶과 학습에 필요한 능력, 그것을 기르고 묻는 교육제도와 시험제도가 필요합니다.

작성자최재원|작성시간12.12.04|조회수44 목록 댓글 0
시험에서 검증하는 능력이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요. 당연히 시험의 목적, 즉 대학입학시험이라면 대학 학습능력을 검증해야 하겠지요. 시험문항과 과목이 대학에서 학습할 능력과 과학적으로 인과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건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이게 정확히 연결되고 구현되는 것이 바로 미국의 대학부터의 대학원까지의 입학시험의 체계이지요.

첫째, 토플시험으로 살펴보는 학습능력과 연결되는 시험문항.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유학생, 미국으로보면 외국인이 치게 되는 시험인 토플을 보면 정확하게 그 측정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지요. 먼저 미국대학에 입학한 유학생이 수업을 준비하고 수업시간에 보여줘야하는 행동들을 상상해 보면 토플시험 출제자의 출제의도, 시험의 목적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외국어 수업을 듣는 것이니 사전에 예습을 통해서 대충 어떠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습을 마치고 수업에 들어가면, 교수님이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까요? 미국 대학 강의실은 1학년이 처음 접하는 서베이 강의라고 해도 최소한의 질의응답식 수업을 진행합니다. 토론자 또는 발표자를 미리 정해놓는 방법으로 대규모 강의에도 토론수업을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질의응답을 하는 목적은 학생들이 수업내용을 이해하고 있는지, 수업목표를 이해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학생들이 이해하고 있는지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학생이 이해한 내용을 학생의 언어로 얘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책을 그냥 읽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이 부분이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수업이나 시험에서 가장 잘못된 부분이지요. 책 내용을 그대로 쓰면 쓸수록 고득점을 하는 구조이니까요. 이해를 하지 않고 무조건 암기하는 공부를 하게되는 문제점을 낳구요.

다시 미국의 대학 수업시간으로 돌아오면, 교수님은 오늘 학습할 분량 혹은 학습한 내용의 주제, 특정 키워드의 의미, 중요한 문장의 의미, 다음에 공부할 내용 혹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여기에 학생들이 대답을 하게 되지요. 이 능력을 시험을 통해 묻는 것입니다.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시험을 치게되지요.

즉, 토플시험을 볼 때, 독해지문은 일차 빠른 눈짙으로 한번 훑습니다. 예습에 해당하지요. 그런 다음 교수님이 특정 키워드, 문장을 얘기하면 얼른 교과서(독해지문)의 해당부분을 찾아서, 해당 지문의 앞뒷 줄 관련 부분을 읽어서 그 단어나 문장의 의미와 일치하지만 다른 단어 즉, 학생의 언어로 재구성을 해서 답을 해야 합니다. 이게 소위 패러프레이즈(paraphrase) 라는 것이지요. 토플시험에선 보기중에서 독해지문과 동일한 의미로 재구성된 문장을 찾아야 하지요.

둘째, 공부는 설명문으로 하는 것인데 문학시험을 보면 안되지요.

대학에서 공부하는 교재는 어떠한 방식으로 쓰여져 있을까요? 아무리 문학을 전공하는 학과라 해도 그 책은 설명문이지요. 그러니 설명문을 잘 이해하고 그 구조를 빨리 익히는 학생을 뽑아야 하지요.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각종 대학원 시험, 그리고 각종 공무원시험에서 사용하는 다수의 지문은 무엇일까요? 바로 문학지문입니다. 소설 등이 출제가 되지요. 반면, 토플이나 미국의 수능, 각종 대학원시험의 지문은 100% 설명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셋째, 학생의 변별력은 문제의 난이도가 아니라, 학습할 능력 즉, 독서의 속도나 독서량이 많은지로 변별시켜야 하겠지요. 어려운 단어를 쉽게 이해시켜야 하는게 강의아닌가요?

책을 읽을 때 가장 필요한 능력은 이해력 이외에도 독서속도가 있습니다. 예습과 복습에 더해서 수업중 교수님의 질문에 답을 잘 하려면 빨리 질문과 관련된 해당 부분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건 철저히 독서량과 관련이 있지요. 독서량이 많은 학생일수록 긴 지문을 빨리 읽을수가 있으니까요. 미국의 대학, 대학원 입학시험의 지문은 아무리 우수한 학생이라도 100%읽을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긴 지문으로 구성이 되지요. 일정한 독서량이 없을 경우 지문을 다 읽을수 없도록 해야 변별력이 생기니까요. 문제를 어렵게 해서 변별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문을 길게해서 독서량을 확인해 보는 것이지요. 독서량이 많은 학생이 당연히 교재를 많이 읽고 이해도 빠를 것이니까요.

넷째, 문과적성은 그렇지만 공학적성의 아이들은 어떻게 하느냐구요? 수학으로 보정을 하게 되지요. 게다가 대학, 대학원에서 필요한 수학지식은 해당과정에서 가르치게 되니 전공공부나 삶에 필요하지 않은 어려운 수학을 고등학교과정에서 배울필요도 없구요.

다만 공학적성, 남성호르몬 우위의 우뇌형 적성을 가진 아이들은 시야각이 좁아서 문장을 반복해서 읽게되고, 뇌가 빨리 지루해져 집중력있게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짧지요. 어른이 되어서도 만화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런 경우가 많지요. 문과적성, 좌뇌형 적성을 가진 아이들이 당연히 독서를 더 좋아하게 되고, 독서량도 많지요. 그래서 미국은 언어시험과 함께 수학시험만을 봅니다. 언어에서 독서량 부족으로 잃은 점수를 수학으로 만회할 수 있게 구성된 거죠. 대학원시험도 마찬가지로 구성되구요. 물론 수학도 우리나라의 중3 수준에 해당하는 난이도로 구성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대학과정의 학습량이 우리나라보다 많아지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고등학교과정과 대학과정에서 학습하는 것을 미국은 대학과정에서 모두 가르쳐야 하니까요. 그러나 고등수학을 필요로 하는 전공학생만 배우게 되니 훨씬 효율이 높겠지요. 문과전공중에선 경제학전공자, 이과전공들, 그리고 대학원진학시에는 통계를 필수로 배우게 되지요. 설문조사나 실험 등 통계가 필요한 논문작성시에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배우죠.

다섯째, 우니나라에서 독서량, 지문의 길이로 시험의 변별력을 가리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요? 기존 시험에 맞춘 학원식 학습방법 탓에 기본적인 독서량이 적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대학에 들어오면 전공공부량에 힘들어하지요. 학습흥미도를 떨어뜨는 공부방법 탓에 대학에선 고3때 만큼 공부하지도 않구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지문을 길게하면 학생들이 풀수가 없습니다. 전반적으로 독서량 자체가 적기 때문입니다. 학원식 수업, 주입식 수업과 암기할 것만 요약된 학습지 위주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절대적 독서량이 모두가 부족하지요. 이러니 일정한 독서량이 필요한 전공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지요.

예를 들어, 미국의 로스쿨 대학원생은 일주일중 최소 4일, 하루 4시간씩, 시간당 10-20페이지를 읽어야만 합니다. 주당 160-320페이지 분량을 예습하고, 수업에서 발표할 준비를 해야하지요. 반면 우리나라 대학원생, 대학생의 주당 전공서적 학습량은 비교가 안될 정도입니다. 중고교 시절 정말 대학학습에 필요한 능력은 하나도 익히지 못한 셈이지요. 수업중 발표내용은 책읽기에 그치고, 책 내용을 100%암기한 것을 그대로 외우면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오인될 정도이구요. 그러니 미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아이큐가 사회에서의 성공과 과학적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음에도 아직까지도 똑똑한 아이는 아이큐가 높은 아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풍토가 생기는 것이구요.

여섯째, 우리나라의 언어시험은 도대체 어디서 만들어진걸까요? 과학적 근거는 있는 건가요? 일본이 미국의 문학시험을 언어시험으로 도입한 것을 그대로 베낀 것에 불과하지요. 학습능력을 묻는 시험이 아니라 문학전공자를 위한 시험을 일반적인 학생들이 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문학을 자유롭게 읽고 감동을 느끼게 하는 학습이 아니라 시험문항을 맞추기 위한, 고득점을 하기위해 문학의 이해도 학원선생님의 생각에 따라 외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긴 일본이 서양문법을 일본어에 도입하고, 이걸 유길준 선생 등이 국문법에 받아들인 이후 발전이 크지 않으니 얘기 다 한 것이지요. 일본문학이나 과거의 서양어 문법은 전통이고, 현대의 발전된 서양어 문법은 번역체라며 배격하니 이상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나라의 언어시험, 국어시험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요? 모든 사회과학이 어디에서 들어왔는지 아신다면 답을 아실 수 있습니다. 바로 일본입니다. 일본어문학 시험을 그대로 도입한 것이 바로 국어시험입니다. 독해지문이 소설과 같은 문학이지요. 그렇다면 일본어문학시험은 어디에서 도입한 것일까요? 미국의 고등학생들이 대학교의 학점을 미리 인정받는 시험중 영문학시험(AP Literature)이 있습니다. 문항의 구성을 보시면 일본어, 국어로 번역만 하면 정확히 유형이 일치하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럼 국어 문법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고전문학을 배워보신 분이시라면 아실 것입니다. 직유법, 은유법, 도대체 이런 용어를 어느 고전책에서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직유(a simile), 은유(a metaphor)에서부터 주어, 목적어, 명사, 대명사 등등 모두 일본을 거쳐 서양의 문학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게다가 일본어 문법은 20세기 초반의 서양의 문법 즉, 엄격한 구조주의 문법인데 서구는 노엄 촘스키 교수의 변형생성문법 이론 등으로 발전을 하였지요.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일본어 문법의 한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서구의 과거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지요. 학문이 과학적 방법에 따라 연구되지 않으니 그런것이지요.

특히 언어순화론자 등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영향인지 일본에서 수입한 국문법을 철통같이 신봉하고 고전에 등장하지 않은 표현은 번역체, 서양어의 침입등으로 배척하기까지 하지요. 우리의 것을 고수한다면 전통이라고 하겠으나, 도무지 과거에 수입한 일본의 것을 고수하는 것이 어떻게 전통인지 알수가 없지요.

일곱째, 대학에 들어오면 대학에서 배우는 공부내용, 학습방법에 대해 배워야 하는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요. 레포트 쓰는 방법, 표절하지 않는 방법, 토론이나 발표하는 방법을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학생들이 어떻게 알수가 있을까요? 교양과목이란 원래 학습능력의 기본을 가르치는 것인데 우리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을 가르치지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서 교양과목을 보자구요. 미국은 대학생이 교양필수로 배우는 것이 바로 비판적 글읽기, 글쓰기, 말하기입니다. 대학교재를 구성하는 설명문을 비판적으로 읽기 즉, 논리구조를 분석해서, 비판적 글쓰기 즉, 주제문과 근거, 논리적 일관성을 갖춘 장절의 레포트 쓰기를 배웁니다. 레포트를 써 내야 하니 인용방법, 논리적 글쓰기 등 기초적인 것을 가르치지요. 비판적 말하기 즉, 토론식 수업방법의 기초를 가르칩니다. 그야말로 전공과정에서 필요한 교양을 필수로 배우게 되지요. 이렇게 배운 논리학은 미국의 로스쿨 입학시험에 심화되어 출제가 됩니다. 미국의 법원은 법률에 규정되지 않은 사항은 이성규칙(Rule of Reason) 측 논리규칙에 의해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대학은 70년대 초반 학번까지는 일본식 어려운 용어로 논리학을 교양필수로 배우긴 했습니다. 언제가부터 법대에서조차도 논리학은 가르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법학전문대학원을 들어가기 위해선 논리학이 일부 출제되는(물론 우리나라의 다른 모든 시험처럼 국문학시험문항이 더 많습니다) 시험을 쳐야 합니다. 정규 교과과정에서 가르치는 곳은 없는데, 논리학 시험은 쳐야하니 사교육이 번성할 수 밖에 없지요.

우리나라의 대학과정중 교양과목은 전공과목의 학습방법과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시험준비과정과 시험, 그리고 시험 후 실제 수업과정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이 구성되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학생들에게 레포트 쓰는 방법, 논문쓰는 방법은 가르치지도 않은체 전공수업에서는 왜 이렇게 학생들이 레포트를 못쓰느냐고 야단을 치지요. 정작 논문작성법은 졸업논문을 쓰는 학기에 가르치지요. 짜임새가 전혀 없지요. 그러니 학생들이 배워본 적이 없으니 표절을 마음대로 하고, 표절이 넘쳐나니 학생들에게 표절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는 변명이 되구요.

이런 학생들이 학자나 정치인, 공직자가 되고나서는 모두가 표절을 하니 그 정도야 뭐 어떻나 하는 변명이 되구요. 참고로 미국은 표절을 하면 바로 퇴학이고, 유학생도 1회 경고후엔 퇴학이 되지요. 변호사를 양성하는 로스쿨에서 표절을 하면 평생 변호사시험은 칠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학생이 아니라 검사, 판사가 윤리규칙위반이 아니라 범죄를 저질러도 변호사를 할 수 있으니 기본적으로 윤리의식이란게 자리를 잡을 수가 없는 구조이지요.

여덟째, 다시 정리해서, 삶과 대학이후의 학습에 필요한 것을 배우고 묻는 교육제도, 시험제도를 가진 외국과 과학적 연계성이 없는 우리의 그것을 비교해볼까요?

우리나라의 교육은 도대체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외래의 것을 외형만 보고 배운 다음에 그 이유도 모른체 아이들에게 강요를 합니다. 그 이상한 제도아래에서 소위 사회적 성공을 하기 위한 희생이라는 식으로 학원식, 요령식, 주입식, 암기식 학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희생이 끝나면 배움은 대학생활이나 사회생활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지요. 초중등 교육과 고등교육은 그냥 추상적인 표현으로만 연계가 있을 뿐, 실제로는 학교마다 전부 새롭게 공부하는 셈이지요. 그러니 초중등과정에서 공부하는 것, 고등교육과정에서 공부하는 것, 특히 대학과 대학원에서의 학습능력이나 성취도가 다른 것을 흔히 볼수가 있지요. 학습내용이나 방법이 다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이건 대표적으로 수학언어능력시험의 문항분석을 보면 알수가 있어요. 즉, "어느 어느 문항은 창의력, 사고력 등등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추상적인 분석만 되어 있어요. 사실은 그냥 일본어 언어능력시험 등에서 베낀 것 뿐이지요. 정작 일본도 서양의 문학시험유형을 그대로 베낀 것 뿐이구요. 우리나라 공무원시험(PSAT)과 그 모델시험인 삼성입사시험도 전부 일본의 유사시험을 베낀 것이지요. 일본은 당연히 미국의 유사시험을 엉터리로 왜곡해서 베낀 것이지요. 번역과정에서 핵심은 잃어버린 채 외형만 따와서 시행을 하고, 그러니 매년 시험난이도가 틀릴 수 밖에 없지요. 학생들은 이유도 모른체 그냥 학원강사들이 문제의 외형만 보고 만든 요령을 익히는 수밖에 없구요. 사회생활에는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것을 공부하면서, 그냥 인생을 잘살기 위해 희생한다는 방식으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구요.

반면 미국은 시험문항의 유형마다 도대체 왜 묻는지, 어떤 구체적인 능력을 묻기위해 만든 것인지를 알수가 있지요. 그러니 일정기간 시험의 난이도를 유지할 수 있구요. 예를 들어, 독서의 속도는 분당 몇단어(지문의 단어수로 측정), 문장이나 단어를 같은 의미를 가진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의 능력(동의어, 같은 의미의 문장만들기 능력으로 측정) 등과 같이 분석이 되지요. 참고로 동의어, 반의어 묻기는 논리학에서는 충분조건과 역충분조건과 같습니다. 좀더 논리적 판단능력이 필요한 로스쿨 입학시험의 경우에는 추리 즉, 필요조건이나 논리오류, 모순 등등을 평가하구요.

우리나라의 교육은 모든 과목이 서로 분리되어 있고, 도무지 왜 배우는지 모르겠다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바라보는 과목간 연계성은 과학적이기 까지 합니다. 예를 들어, 수학의 명제, 충분조건, 필요조건 등등은 영어, 언어로 가면 주제문장, 교수의 질문에 책을 읽고 같은 문장을 자기만의 언어로 말하기(paraphrase)나 가정법, 조건문은 충분조건, 가정법 과거(조건문)는 필요조건, 로스쿨에서 배우는 법조문, 계약조항은 충분조건, 입법과정은 있을 수 있는 상황의 펼침이므로 필요조건이나 추론(assumption)으로 연결되지요. 미술의 색감은 색 고유의 주파수, 음악의 음감은 음의 주파수가 가진 고유의 감정, 체육활동은 뇌근육의 발달, 독서활동은 눈의 이동을 단련시켜 독서속도를 높여줘 학습의욕을 높여 주지요. 예를 들어, 음악전공자처럼 음악을 잘하면, 외국어 듣기공부를 쉽게 할수 있지요. 언어 특히 외국어의 고유 주파수, 리듬 등을 쉽게 익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다중지능, 다중학습이 지름길인셈이지요. 통섭이라고 번역하긴 하지만 사실 한 학문의 한계를 극복하고 창의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지요. 예를 들어, 기둥을 오르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둥을 오르는 도마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요. 로봇에 꼬리를 달면 더 오르기 싶다는 것이구요. 이유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모든 사람이 모든 능력을 가질수는 없는 것지요. 자기가 부족한 부분을 보통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나 도움이 필요할 뿐이지요. 음악이 도움된다고 누구나 피아노를 연주가가 되기위해 배울필요는 없고, 체육이 도움된다고 누구나 박찬호처럼 야구를 잘 하도록 배울 필요는 없지요. 마찬가지로 예체능을 하기위해서 누구나 소설가처럼 문학을 잘 이해할 필요는 없구요. 예를 들어 미국의 음대를 가기위해서는 고교과정에서 영문학, 영어조차 배우지 않아요. 작곡 등 정말 필요한 공부를 할때, 즉 음대에서 전공과목을 배우기 전에 음대의 교양과정에서 기초 영어를 배우면 되니까요. 우리나라는 대학에서 배우거나, 삶에 필요하지도 않는 것을 배우기위해, 그것도 오로지 시험의 난이도로 변별력을 키우기위해, 국어, 영어, 수학과목의 학습시간이 지나치게 많지요.

우리나라는 도무지 대학이나 일상 생활에서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소위 변별력이란 명목하에 배우게 하지요. 미국의 시험은 독서의 양을 묻는 방법으로, 독해지문의 길이로 변별력을 가립니다. 반면 우리의 시험제도는 어려운 문제로, 문제 자체의 어려움으로 변별력을 가리지요. 따라서 도무지 평균적인 고등학생의 수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도 출제되고, 그러니 전체 학생이 배워야 할 내용도 많아지지요. 그러나 도무지 평생을 살면서 도움이 안되는 내용까지 배워야 하구요.

근로시간도 OECD 최고지만, 학생들 수업시간도 최고수준이지요. 우리나라의 수업시간이 이미 일본이 가장 많았던 때부터 더 많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소위 여유(유도리) 교육을 한다고 수업시수를 줄이다가 다시 늘리고 있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해서, 다시 우리나라의 수업시수를 늘여야 한다는 교육관료들이나 학자들이 있는 정도지요. 절대적인 교육시간, 즉 교육에 필요한 과학적 학습시간이너 현재의 상태를 돠야하지요. 그런데 단지 외국이 어떠한 경향을 보이느냐만이 베끼기 대상이 되는 비과학적 태도인셈이지요. 비슷한 오류가 다른 정책분야에도 있지요. 예를 들어, OECD 평균 조세부담율에 한참 못미치는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가장 작은 정부규모(공무원 1인당 국민수)를 가진 우리나라가 현재의 우리 현실이나 통계는 무시합니다. 단지 외국에서 작은 정부, 조세감면 경향성을 가진 정책을 펼친다고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비과학적 주장이 득세를 하니 알만하죠.

아홉째, 구체적으로 필요이상으로 중요성이 부각되면서도 가장 문제가 많은 곳이 영어교육분야이지요. 과학적인 학습방법은 무시되고, 오로지 일본에서 베낀 공교육내용이 다수이구요. 사교육인 학원은 강사의 개인적 비법이나 과거의 교육기법인 반복요법, 주입식 기법으로 학습흥미도를 낮출뿐이지요. 수치에만 신경쓰는 교육을 하니 일반인들은 쉽게 지루해지고, 학원강의는 커닝(cheating)을 해서 법으로 보호되는 문제를 유출시키는 방법으로 점수만 높여주지요. 수십년 영어를 배워도 기본 능력은 그대로이고, 말한마디 제대로 못하게 되지요.

우리나라 교육중에서 제일 한심한 분야가 바로 영어교육입니다. 수많은 학자들과 학원 선생님들이 수많은 방법과 기괴망측한 비법이 횡행하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영어를 못하는 수준이거든요. 아랍권을 제외하면 가장 꼴찌인 일본에서 영어학습법을 배워오니 말을 다 한 것이지요. 1억 인구중 백만 여명만이 외국어를 배우는 일본에서 영어학습법을 도입하는 우리나라 교육부 관료들, 정말 말이 안나오지요. 영어권에서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체계적으로 구성해온 영어학습법이 존재하지만, 이를 강력히 거부하고 우리만의 비법으로 해야한다고 하면서 오로지 토익점수에만 매달리는 것이 문제지요.

교육방법의 도입에 있어서 발생하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 태도가 제일 큰 문제입니다. 더구나 그 비법이란 것도 결국 1960년대의 미국의 교육심리학인 행동주의 요법일뿐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행동을 반복해서 학습내용을 익히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영어듣기를 하기위해 수없이 반복해서 듣는 방법입니다. 왜 실패하냐구요? 작심삼일이지요. 인간은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 학습을 그만두기 때문이지요.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들으니 학습능률이 떨어지는 것이지요. 행동주의 심리학이 실패한 이유이지요. 우리나라 학생의 학습흥미도가 최하권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지요.

물론 개중에는 행동주의기법으로 성공한, 토익점수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도 있겠습니다. 엄청난 인내력이 있는 것이지요. 물론 토익점수에서 만점을 받아도 외국인과 대화를 진지하게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시험끝나면 모든 흥미를 잃어버리는 행동주의 기법의 단점때문이지요. 평생학습을 해야하는데 점수만 얻고나면 더이상 독서를 하지 않거든요. 한국어로도 대화할 거리가 없는데 당연히 영어로는 더 못하는 것이지요. 대화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 상대방이 하고 싶어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거든요. 독서량이 적다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도 별로 없는데, 어떻게 상대방이 하고 싶어하는 얘기에 대한 정보가 있겠어요.

열째, 단기적인 학업성취도에 실적으로 맞추기보다, 학습흥미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장기적인 학업성취도 높이기가 필요합니다.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 창의성 교과를 만들거나 배울 필요가 있는게 아닙니다. 다양한 독서와 문화경험을 키우는 방법, 즉 기초능력과 기초체력을 키워야 건강해지는 것이지, 특정 근육만 키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일본이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 여유(유도리)교육을 하다가 포기한 이유는 바로 핀란드, 우리나라가 1, 2위를 다투는 학업성취도 시험성적을 단기간이라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초중등교육, 고등교육 대학생들의 학업성취도 성적이 아닙니다. 사회생활과 대학원이후의 연구성과가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생까지 학업성취도가 1, 2위였던 우리나라가 왜 자연과학분야의 노벨상, 수학의 필즈상 수상자는 없는 것일까요? 심지어 미국내 이공계대학 교수중 10%에 육박하는 우리나라 유학생 출신 교수들이 있음에도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학업성취도 1, 2위에만 관료들 실적을 맞추니, 정작 대학원 이후의 연구성취도에 영향을 미치는 학습흥미도는 늘 꼴찌일수밖에 없지요. 행복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심지어 자살까지 합니다. 그런데 어느 어느대에 합격한 학생이 많다고 플랭카드를 달면, 자살학생수가 많거나 폭력학생이 많아도 승진을 하는 구조이니 말 다했지요.

과학은 없어지고, 오로지 수치, 업적, 실적만 남는 것이지요.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태도는 없고, 오로지 권위주위에만 매달립니다. 실패를 거듭해도 바뀌지가 않습니다. 오로지 전통이나 관행에만 매달립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그것이 전통이 아니고, 오로지 이유를 알지 못한채 일본것만 베낀 것에 불과하단 것입니다. 그것도 백년도 넘은 서구의 과거에 불과하단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있는데 따라가지도 못하면서 과거에 했던대로 반복만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바꾸면 단기적인 부작용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학업성취도가 낮아지나, 학습흥미도가 높아지기를 기다린 후에야 다시 정상적으로 학업성취도가 올라가는 것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교육제도의 개혁에 있어서도 각자의 비법만이 존재할 뿐, 현재 존재하는 외국의 모든 제도에 대한 과학적 검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것만 최고라는 식이지요. 아이큐 테스트에 한번 물들인 탓에 심지어 수치화해서는 안되는 다중지능이론까지도 수치화하고 상업적 벌이에 이용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 장관을 하다 심지어 보수측 교육감후보로까지 나온 사람이 한 행동입니다.

심리학에 있어서 문화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서양의 연구수치와 일치시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모든 심리질문문구를 한국화한다며 왜곡시키지요. 반면 미국에서는 중국에서 미국으로 유학온 중국인 유학생과 미국에서만 산 친구들을 비교연구까지 하는데 말이지요. 과학적 방법보다는 권위주의적인 접근만 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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