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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정의 직언직설

혁신학교에 대한 단상

작성자나비하늘|작성시간13.10.22|조회수79 목록 댓글 4

  혁신학교로 막 첫걸음을 뗀 K중학교의 공개수업을 참관할 기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교사의 일방적 강의수업이 아닌 학생들이 참여하고 협력하는 수업이었습니다. 수업은 좋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업시간 내내 마음의 문을 닫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보이는 공개수업은 얼마든지 그럴 듯하게 꾸며낼 수 있는 것이니까요. 오늘의 공개수업이 좋았다고 앞으로의 수업도 좋은 수업이란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마음을 열지 않고 계속 의심의 눈초리로 수업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수업 후 평가회의에서 그런 제 마음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가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저는 놀랐습니다. 회의가 교장실이나 회의실이 아니라 공개수업이 있던 바로 그 교실에서 열렸기 때문입니다. 수업을 참관한 교사들이 학생들 의자에 죽 앉았습니다. 뭔가 다르다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런 모습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의식적으로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교장도 똑같이 학생 의자에 앉았습니다. 교사들 속에 섞여서요. 이 또한 저를 좀 놀라게 했습니다. 보통의 경우 학교에서는 앉은 자리만 보고도 누가 교장인지 알아보게 마련입니다. 상석이란 게 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는 자리만 보면 교장은 교사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교사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드디어 교장이 말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교장은 자신이 관찰했던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학생의 수업내용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교장이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하는 순간 그야말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 교장이 진짜로 교사들과 똑같이 실제적인 교육활동을 하네?’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뭐 그런 것을 가지고 놀라느냐고요.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의 K중학교 풍경과 같은 것은 제가 교사가 된 후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혁신학교는 진보교육감의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혁신학교는 열정 있는 교장과 교사들의 의지에 힘입어 입시 위주의 획일적 교육을 탈피하고 공교육의 정상화와 다양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혁신학교의 앞날을 어둡게 보아온 사람입니다. 지속과 확산이 매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사 개개인의 열정과 헌신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교육은 오래 지속되고 널리 확산되기 어렵다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혁신학교는 교사 개개인에게 상당히 많은 열정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혁신학교가 처한 상황은 일반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학교의 분업·조직체계가 다른 일반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반학교와 마찬가지로 교사들은 교육활동과 교무행정업무를 함께 해야 합니다. 학교의 조직체계는 여전히 교무행정업무를 토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약간의 개혁조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육활동을 중심으로 조직체계를 완전히 개혁한 혁신학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별 학교의 역량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혁신학교의 내신제도 또한 일반학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완전히 똑같습니다. 혁신학교 또한 다른 학교들처럼 ‘학년별평가’에 의한 줄 세우기를 해야 합니다. 초등 혁신학교에 비해 중·고등 혁신학교에서 혁신학교의 교육정신을 구현하기가 훨씬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혁신학교 교사들은 일반학교 교사들과 거의 비슷한 조건에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다른 일반학교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네모난 바퀴가 달린 수레를 끌고 있는 것입니다. 네모난 바퀴가 잘 굴러갈 수는 없습니다. 네모난 바퀴를 굴리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투여해야 합니다. 고작 몇 미터를 움직이기 위해서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합니다.

 

  지금 혁신학교 교사들은 네모난 바퀴가 달린 수레를 끌고 있지만, 그래도 일반학교에 비해 더 먼 거리를 움직인 혁신학교가 많습니다. 물론 혁신학교라고 다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천차만별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상당수 혁신학교가 네모난 바퀴가 달린 수레를 끌고 제법 먼 길을 전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헌신과 열정을 바쳤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아직 네모난 수레바퀴를 둥근 수레바퀴로 교체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비용을 대는 것에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혁신학교 교사들은 그 작은 교육적 성과를 내기 위해서 많은 헌신과 열정을 바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교장임용제도로는 혁신학교의 교육철학을 이해하고 실천할 만한 교장을 충분히 배출할 수 없습니다. 물론 K중학교의 교장은 권위를 내려놓고 교사들과 함께 실제적인 교육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대한민국 교장의 아주 예외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교장이 마음을 바꿔먹는 순간 제가 감동했던 그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혁신학교 교사들은 그런 우려를 적잖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 K중학교 교장도 상황이 변하면 마음을 바꿔먹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저는 혁신학교의 미래를 어둡게 보아왔습니다. 혁신학교에 자원해서 고생을 사서 하는 교사들을 바라보는 저의 태도에는 약간의 냉소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K중학교의 수업참관 이후 저는 혁신학교 교사들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대한민국의 학교 교육을 바꾸려고 학교현장에서 저토록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저는 비관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다니…… 제가 좀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제 마음속에서 냉소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제게는 혁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싶다는 욕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혁신학교가 성공하기 위해선 지금까지 여기서 이 책에서 언급한 정책들이 성공을 거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모든 학교가 혁신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는 것이겠지요.

...........

  앞의 글은 작년에 출간한  졸저 <교육대통령을 위한 직언직설>(창비)에 실린 글입니다.

  혁신학교 토크쇼를 보고 문득 이 글이 생각나서 여기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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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leastory | 작성시간 13.10.22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바퀴를 둥글게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할지 구체적으로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 작성자오드리 | 작성시간 13.10.22 아...선생님...저도 카페활동하면서 혁신학교 알게 된 거 정말 아쉬웠습니다^^ 혁신학교가 현재로서는 가장 대안인거 같아요.
  • 작성자튼튼이 | 작성시간 13.10.22 네모난 바퀴를 힘겹게 끌고 계실 선생님들 ... 뒤에서 응원합니다.
  • 작성자오드리 | 작성시간 13.10.22 아 회원님들이 나비하늘님이 누군가 궁금해 하시네요. 울 카페의 자문위원겸 운영위원이신 '이기정'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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