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가르는 홍차전쟁>
<1866년 티 레이스 중의 바다 위 아리엘호와 태핑호> 1926년, 잭 스펄링, 유화,
1866년 9월 6일 런던의 템즈강 하구, 역사상 가장 흥분되고 땀을 쥐게 하는 레이스의 마지막을 향해 네 척의 배는 혼신의 힘을 다해 항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리엘호의 선원들은 맹렬하게 자신들을 추격하는 태핑호를 따돌리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 청나라의 푸저우 항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이 레이스에 참가한 배는 2년 전 건조된 아리엘 호, 레이스 3년 전 진수되었던 태핑호 그리고 서모필레 호와 블랙아델 호였다. 배들의 위치는 신문을 통해 시시각각 런던시민들에게 알려졌고 거의 비슷한 속도로 레이스를 펼치는 티 클리퍼(Tea Clipper)들의 속도경쟁을 두고 도박사들의 내기가 속출했다. 당일 아침, 마침내 항구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배는 아리엘 호였다. 아리엘호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환호와 박수가 끝나기도 전인 10분후 이번에는 태핑호가 항구에 입항했고 수 시간 후 세리카 호가 들어왔다.
<1860년대 티 레이스의 출발지였던 중국의 푸저우 항>
레이스가 시작되기 3개월전인 1866년 5월 28일 저녁 5시, 중국의 푸저우 항구에는 선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4일 동안 천 이백 개가 넘는 상자로 포장된 찻잎 화물 560톤을 갑판아래 적재를 완료한 아리엘호의 선장 존 케이는 닻을 올리고 런던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그는 선원들에게 “아리엘호의 우아한 대칭미, 튼튼한 선체와 원자재, 돛의 비율등으로 인해 가벼운 바람은 아리엘호를 전진 시킬 것이고 나는 아리엘호가 시대적 발전속에 살아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아리엘호는 26,000 평방피트 이상의 돛을 가진 당대 가장 빠른 선박으로 증기선보다 더 빠른 16노트의 속도로 항해할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흥미진진했던 이 레이스는 중국산 차 무역을 둘러싼 드라마틱한 사연이 담겨있었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1600년에 설립되어 장장 2세기 동안 중국차 수입의 독점권을 행사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한편 영국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촉발된 1840년의 아편전쟁도 차 무역으로 촉발된 전쟁이었다. 당시 영국은 차 수입대금으로 자국의 은을 청에 지불하게 되어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골머리를 앓던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되는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며 차의 대금으로 지불했던 은을 도로 회수하며 재정위기를 탈출했다. 결국 중국인들의 몸을 아편중독으로 망가트리면서 영국인들의 건강을 지켜줄 중국차를 교환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이에 분노한 청나라는 아편무역을 금지시켰고 영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일명‘아편전쟁’을 시작했다. 결국 이 전쟁에서 영국은 승리를 거두며 1842년 8월, 강화조약인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때 영국은 홍콩을 획득하고 다섯 개의 무역항을 개방시키며 중국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강화했다. 그러나 1844년 미국과 프랑스 역시 영국과 동일한 조건의 통상조약을 청나라와 체결했기에 영국의 독점적 무역은 2년 밖에 지속되지 못했고, 이후 홍차무역은 유럽과 미국의 자유경쟁체제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동인도회사가 독점적 특권을 행사하던 시기 중국에서 차를 싣고 런던으로 향하는 운반선의 속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운반선은 대부분 대포가 장착된 배로 선체가 커서 둔하고 무거웠다. 그러나 자유무역체제가 이뤄지면서 찻잎의 신선도가 가격책정의 바로미터가 되었고 차 운반선의 속도경쟁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목표했던 기간보다 빠른 시간에 화물이 도착하면 선장과 선원들에게 포상금까지 주어졌다.
<보스톤항구를 출발하는 클리퍼> 1851년, 피츠 휴레인
1845년부터 1875년 사이에 미국과 영국에서는 약 100개의 클리퍼선이 만들어지며 치열한 무역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때 미국에서 개발된 신형 운반선은 따라올 영국배가 없었을 만큼 속도가 뛰어났다.1850년 12월 미국의 티 클리퍼 오리엔탈호는 95일이라는 기록적인 시간에 홍콩과 런던을 항해했고 당시 오리엔탈호에 실린 중국산 차는 영국배에 실린 차에 비해 배 이상 되는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이에 영국역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영국은 유선형 선체에 1,600평방미터의 높은 돛대를 세운 쾌속선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명‘티 클리퍼(Tea Clipper)’였다. 이후 영국은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배들을 건조하기 시작했고 이 무렵부터 매년 햇차가 출하되는 시기에 맞춰 차를 나르는‘티클리퍼’들의 레이스가 시작된 것이다. 한편 가장 먼저 런던에 도착한 배는 경매소에서 찻잎 무게에 따라 일정금액의 상금이 지급되고 시민들은 내기경쟁을 하는 일종의 축제로 자리 잡았는데 작품 속 티 레이스인‘1866년의 티 레이스’가 역사상 가장 박진감 넘치는 레이스였는데 이 해를 마지막으로 티레이스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869년 증기선만이 통과가 가능한‘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증기선이 출현하며 범선의 레이스는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차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차는 인류가 마시는 음료중 물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마시는 음료이다. 약 오천년 전인 기원전 2,700년 경 중국에서 찻잎을 씹은 후 독성이 해독되었다는 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전해진다. 이후 중국에서는 차의 다양한 효능이 발견되고 새로운 차의 개발이 이뤄지게 되었다. 그러다 중세 이후 동서 교역이 활발해지며 유럽에 중국의 차가 전해졌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차의 대부분은 홍차를 의미하는데 1598년 동인도회사에 의해 네덜란드에 수입된 홍차는 당시 동서 교역의 효자노릇을 했던 도자기, 비단과 함께 즉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 반향은 네덜란드에만 국한되지 않고 바로 영국으로 전해진다. 1650년 옥스퍼드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생기며 홍차가 소개되었다. 당시 커피하우스는 단돈 1페니만 지불하면 대학 못지않은 지식과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장소라 하여 일명 '1페니 대학'으로 불리웠고 영국 전역에 3천여개의 커피하우스가 난립할 정도였다. 이에 더해 당시 영국을 병들게 했던 과도한 음주문화를 차단하고자 영국왕실에서는 술을 대신하여 건강에 좋은 홍차를 마실 것을 권장하며 홍차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도 영국이 세계 최대의 홍차 수요국이 되는 것에 일조했다.
< 1773년 보스톤 항구에서의 차를 내던지는 사람들> 나타니엘 쿠리어, 1846년
한편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서도 네덜란드계 이주민들에 의해서 차가 소개되기 시작하며 홍차의 수요를 증가시켰다. 1690년, 런던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한 저명인사는 보스턴 시내에‘런던 커피, 차, 코코아’가게를 개업하며 홍차를 미국에 소개했고 이후 홍차는 아시아, 유럽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장악했다. 이렇게 차 수요가 확장되자 영국은 식민지 미국에 수입되는 차에 세금을 부과하며 식민지 미국을 압박했고 이것에 반발하여 1773년 12월 동인도회사의 배 세척이 보스톤항에 차를 싣고 입항하자 50여명의 주민들이 원주민으로 변장 후 배에 올라 1만 5천 파운드의 차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저 유명한‘보스톤 차 사건’이 촉발된 것이다. 이 사건은 훗날 미국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전쟁이후 미국에서 홍차는 영국의 압정과 상징물이 되어 미국인들은 홍차 대신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한국해양 연구원 9월호에 개제할 정기칼럼입니다.
윤 운 중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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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초록생각 작성시간 14.08.03 교장쌤 말씀대로 프린트해서 보관해서 두고두고 봐도 좋겠네요.
미술과 역사를 한번에!ㅎ
좋은 글과 그림 감사합니다~^^ -
작성자오드리 작성시간 14.08.04 헉 출국앞두시고 언제 이렇게 부지런히 글을 올려주셧나요? 윤샘 한달 후에 뵙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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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freebird 작성시간 14.08.04 아...보스턴 차 사건..역사적인 사건 이름만 알고 그 배경은 잘 모르는 재미없는 세계사시간을 보냈었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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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태은 작성시간 14.08.06 잼난 역사와 그림을 보게되어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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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엄마맘아이맘 작성시간 15.02.23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