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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

[스크랩] 마지막 때의 영적각성 (벧전 4:7-11)

작성자벳남재승묵스..|작성시간10.03.18|조회수17 목록 댓글 0

마지막 때의 영적각성 (벧전 4:7-11)

 

 

이 시간에 “마지막 때의 영적각성”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마지막 때의 세상은 사느냐 죽느냐 치열한 영적전쟁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는 믿음 지키기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 옵니다. 주님께서 내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육신으로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멸망의 구렁으로 끌고가려는 상상할 수 없는 큰 시험의 때입니다. 우리가 이런 가운데서도 믿음 잃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 서려면 성경이 교훈하는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지막 때 영적으로 각성할 것은 무엇일까요?


1.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왜 정신을 차리라고 했을까요? 그리고 왜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만큼 정신 차릴 수 없는 세상이 되고 그렇지 않고는 시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평안하다 안전하다 말하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참으로 무서운 일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눅17:26에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17:26-30)

 

그만큼 타락한 시대가 옵니다. 그런데 지금 노아시대만큼 아니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나 음행죄는 많았습니다. 그런데 노아시대란 음란이 보편화되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시대를 말합니다. 지금 유흥산업이 얼마나 발달되어 있는지 거기 종사하는 사람들이 셀수 없이 많습니다. 온갖 음란물들은 인터넷은 물론 텔레비전 같은 각종 매체를 통해 안방까지 여과없이 다가옵니다. 경건한 자녀로 양육하기 어려운 때입니다. 성도가 믿음 지키기 어렵습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이 시험을 이기는 길은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또 하나의 예로 지금 중동의 이슬람교의 확산을 들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기도가 아니고는 이길 수 없습니다. 이들이 국민의 5% 10%만 되면 국가를 절단내버리는 무서운 집단입니다. 그 아름다운 문화도 절단내버립니다. 여성을 학대하고 종교적 이유로 어떤 일을 해도 정당화하는 아주 미개한 문화로 바꾸어 버립니다. 세계 곳곳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소수의 이슬람인들 때문에 기독교국가인 미국도 기독교혐오국가로 바뀔 정도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이슬람교가 자기 신의 이름을 알라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으니 정신 차려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언론의 타락도 큰 몫을 합니다. 포퓰리즘이라고 하죠? 인기에 영합하여 진실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공영방송조차도 공영방송을 떠나 개인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요즘 어떤 종교인 한 사람 죽으니까 방송이나 언론들이 매일 같이 그 방송만하지요? 올림픽 방송인지 월드컵 방송인지 착각할 정도로 실시간 방송합니다. 기독교인을 위해서 그렇게 한 번이라고 해 준 적이 있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웃과 인류를 위해 재산과 목숨까지도 바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은데 무소유 그게 뭐가 대단합니까? 그게 그렇게 대단하다면 그 사회에서는 그게 그렇게 희귀한가 봅니다. 

 

사회봉사도 우리 기독교의 몇 분의 1도 안 되는 ㅂ교가 왜 그렇게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이런 모든 것이 방송과 언론이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온갖 비리가 쌓이고 쌓여도 다 감추고 오직 미화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흐름에 편승해 신자들까지도 그들을 선호하고 있으니 정신 차려야 합니다. 벌써 인터넷 세대들이 미혹 당해 교회 유입이 줄고 있으며 더 나쁜 풍문으로 세상에 가득해질 때 여러분은 끝까지 남으시겠습니까?


말세가 다가올수록 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나도 알지 못하고 당하는 일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교인들은 졸며 자고 경종을 울리는 선각자들은 괜히 떠든다고 핍박을 당합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 말에 현혹된 교인들이 더 나서서 핍박합니다. 교회는 다 썩었다. 목사는 다 썩었다. 목사는 다 도둑이다. 요즘 교회가 어떤 교회인데 목사가 도둑질하고도 목회를 계속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기독교는 한국 선교 초기부터 매월 혹은 분기별 제직회가 전통인데 이 투명한 교회가 왜 핍박을 당합니까?


그런데 세상 언론이 하도 떠들어 대니까 교인들마저 그런 줄 압니다. 그래서 개혁하자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모두 썩었다면서 모두 자기는 개혁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누군가의 연출에 뭔가 크게 속고 있습니다.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상식선에서 말씀드립니다. 내가 안 썩었으면 남도 안 썩었고 내가 덜 썩었으면 남도 덜 썩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교회가 큰 문제 없으면 다른 교회도 큰 문제 없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세요. 소수의 잘못을 전부로 매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막도 모르고 춤추지 마세요. 말세에는 근신하여 깨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하고 엎드려 기도하는 자만이 자신도 교회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2.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번 부산에서 일어난 여중생 살인사건의 범인 김길태 뉴스로 떠들석합니다. 길태의 생활기록표를 보면 중 1학년까지는 아주 활달하고 우수한 아이로 기록되고 있지만 2학년 때부터 점점 문제 아이로 변하여 전과 18범이 되도록 나쁜 짓만 했다고 합니다. 자기의 정체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의 길태라는 이름은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길태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길렀으니 감사하지만 그렇게 잔인하고 절망적인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 평생 부르도록 해놓고 어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에게 더 아름다운 이름과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자라게 자라게 했다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때에는 사랑 없어 피차 물고 먹다가 멸망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왜 사랑해야 합니까? 마24:10-12에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빠져 서로 반목하고 싸우게 됩니다. 교회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믿음의 식구들 끼리도 직분자들 간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고 믿음 지켜야 승리하지 교회 떠나고 주님 떠나면 끝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일수록 사랑의 눈을 가지세요. 어설프게 배워 율법의 눈을 가지면 안 됩니다. 기도가 먼저지 비판이 먼저가 아닙니다. 사랑 없이 비판하면 그 비판은 또 다른 비판을 낳습니다. 상처는 상처를 낳고 그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재생산시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으라고 강조합니다. 사랑이 세상을 사는 지혜입니다. 어떤 일에도 누구와도 서운한 관계 만들지 마세요. 원수 만들지 마세요.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사는 최고의 영적전략입니다.


3. 지혜롭게 하는 것입니다.


9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예루살렘 교회에 원망이 있었습니다. 제자가 더 많아져 헬라 파 과부들이 구제 대상에서 빠지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많아지고 일군은 적고 각국에 흩어진 사람들이 모여온 관계로 헬라 파 사람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집사들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말세의 교훈으로 원망을 이야기할까요? 말세에는 사람들 마음을 너느럽게 쓰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박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일에도 감정을 가집니다. 조금만 서운해도 가룟 유다가 되려 합니다. 이런 사람 하나만 생겨도 상상치 못할 고통입니다. 그래서 히12:15에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원망부터 합니다. 나서서 봉사해야 할 사람들이 봉사는 커녕 대접의 유무로 불평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같은 교인인데 누구는 일만 하고 섬기면서 평가 받아야 하고 누구는 앉아서 대접만 받아야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 참 불공평합니다. 세상이 점점 사치스러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뭐든 자동으로 되어 있길 바랄 뿐 스스로 봉사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할 일인 줄 모르고 불평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은 이유가 원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약5:9에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했습니다. 세상이 각박한 걸 어떡합니까? 먼저 지각이 깨어있는 사람이 조심하는 수밖에는요. 이 흉악한 말세에 가룟 유다가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원망 받지 않도록 최선의 지혜를 다 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4.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10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왜 말세에 받은 은사를 강조할까요? 세상이 민주화되다 보니까 좋은 점도 있지만 너무나도 월권 침해가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떠들어대는지 누가 이 나라의 대통령인지 모를 세상이 되었습니다. 선생하기도 어렵고 의사도 판사도 기관장하기도 어렵습니다. 통반장하기도 어렵고 사장하기도 어렵습니다. 주인 놔두고 노조가 사장 뽑는 세상이 어디있습니까? 조그마한 것도 봐주려 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소송을 걸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몽둥이 들고 달려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하기도 어렵고 장로하기도 어렵고 성도하기도 어렵습니다. 부흥사하기도 어렵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해도 불러놓고 사과시키고 이 사람 저 사람이 나서서 혼내려고 하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확실한 것은 참 어려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모두 어른밖에는 없습니다. 천사의 직분하라 세워 주었건만 수호하는 천사는 보이지 않고 심판자만 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현상입니다. 철저히 제 위치로 가지 않으면 나도 너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5.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 날이 가까울수록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라 했습니다. 내 힘으로 했다고도 말고 내 것으로 했다고도 말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으려고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천국의 상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사람들이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는 신앙으로 하려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일하면 할수록 그것 때문에 시험이 오고 섭섭함이 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갈라 개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 생각 버리지 못하기에 동일한 일이 되풀이 되다가 그 인생 그렇게 끝나고 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한 죄는 큰 죄입니다.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다가 충에 먹혀 죽었습니다. 느브삿네살 왕은 영광을 자기가 받다가 짐승의 마음이 들어와 7년을 야수처럼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내가 받으면 하나님도 외면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다 보니 너무나 우울하고 너무나 많은 숙제를 안겨다 준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보아도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습니다. 주님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오십니다. 겉으로는 평안하지만 영적으로는 상상치 못할 환난과 시험의 날입니다. 신앙을 지킬 수 없습니다. 속습니다. 흉악합니다. 절망입니다. 타락합니다. 배도합니다. 치우칩니다. 졸며 잡니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일군들도 낙심합니다. 미워합니다. 원망합니다. 영광 돌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바로 믿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두렵습니다. 우리 모두 나와 내 가족이 살기 위해서라도 정신 차려 깨어 기도와 믿음과 지혜와 사랑과 겸손으로 신앙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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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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