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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보학

이완용(李完用)의 생과 죽음

작성자조성명|작성시간09.05.07|조회수3,005 목록 댓글 0

   이완용(李完用)의 생과 죽음


조선말기(朝鮮末期)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이 당시 제조(提調)로 있을때 밑에서 사복시(司僕寺)로 일했던 이호준이 있었고 이호준의 사위가 조성하요, 조성하는 조대비의 조카이다. 조선 제24대 헌종 임금의 생모인 신정왕후 풍양 조씨이다.

조대비의 지명으로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 개똥이가 고종이 되었고 이 공로로 이호준은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호준은 자식이 없어 우봉 이씨(牛峯 李氏) 문중에서 양자들인 아들이 이완용이다.

이완용의 출생지는 경기도성남시분당구백현동에서 명문가로 소문난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종황제로부터 이완용은 남다른 총애를 받아왔다.

이후 1882년 10월에 실시된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로 합격하자 이완용은 입신 출세는 예약된 셈이나 다름없다.

고종임금이 직접 이완용에게 합격 축하와 등용을 시켰다.

고종의 둘째 아들인 세자가 훗날에 조선왕조 마지막 27대 순종임금이 될 세자 시강원(世子 侍講院)에서 이완용은 태사(太師)의 선생이란 이름까지 올랐다.

1882년 11월 2일 새로 급제한 이완용에게 고종이 악공학교까지 보내 축하 연주를 하라고 해 이완용은 축복을 받았다.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관직에 진출한지 3년만에 정3품에 올랐다.

순종과는 스승이자 사제에 인연을 맺었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이완용은 1886년 또한번 변할 기회를 맞이한다. 그것은 마포구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있는 헐버트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정부 요청으로 서울에 온 헐버트는 육영공원에 근무한 미국인 교사다.

육영공원은 국제 업무를 담당 할 신진관료들을 양성하기 위해 고종이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인데 여기서 만난 헐버트의 첫 제자가 이완용이다.

육영공원 학생은 좌원과 우원으로 구분했다.

좌원에서는 관료 출신들이 우원에서는 양반가의 자제들이 공부를 했다.

좌원 학생 명단에 들어있는 이완용 이름 여기에는 젊은날의 꿈이 담겨져 있다.

육영공원 다닌지 불과 1년 뒤 이완용에게 꿈을 떨칠 기회가 찾아왔다.

고종이 대미 외교 전담할 외교팀을 부리면서 이완용을 발탁(拔擢)한 것이다.

대미교육에 가는 길은 고종이 취할 길로는 너무 컸다. 주미 공사 건의(建議)를 지낸 이하영의 기록에 따르면 “미국은 조선과 거리가 멀어 침입할 우려가 적고 황금의 나라로 알려진 부국인데 이 덕을 볼 것이며“라고 하였다.

이완용은 총리대신 서리를 맡았던 막강한 권력자의 영웅이자 대한제국때 최고가는 부동산 및 재벌가로 변신했다. 이완용은 일제로부터 침략에 위협을 느끼자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황태자를 아관파천(俄館播遷) 시킨 후 1년이 지나자 대세가 일본에 기우렀으니 일본요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에 이름을 내세워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을사조약이 체결 됐다고 분노한 백성들이 이완용의 집으로 몰려왔다.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벌하라는 소리가 빗발치자 이완용은 억울하다며 고종에게 상서를 올려 반박한다.

“시국에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잠시 맏기는 것입니다. 외교권은 나라의 힘을 키워서 되찾어오면 되는 것입니다“.

을사조약체결당시 이완용은 외교권을 나라의 힘을 키워 되찾어오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과 5년 뒤에 이완용은 나라의 통치권을 완전히 일본에 넘겨주는 한일 합방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1926년 2월 16일 이완용이 사망하자 당시 일본국장(日本國葬)으로 일본인 고위급 포위 행렬속에 장사를 치렀다.

나시모토 왕족이 풍수지리에 의해 천하대명당 자리를 잡아 매장하게 되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선인봉(산) 묘자리다.

53년이 지난 후 1979년 그의 친가 후손들이 파묘하여 유골을 화장해서 낭산천(朗山川)에 뿌려 흘려보냈다. 이완용의 묘자리는 다른 사람의 무덤이 되어버렸고 주변은 화강암 채석장이다. 그당시 낭산면장 김용식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화장까지 일은 끝이 났다.


이완용의 다섯가지 더 큰 죄를 말한다면

1, 을사조약조인(乙巳條約調印)을 체결해 나라의 외교권을 넘기고 일본통감부를 설치케 한 죄.

2, 고종황제를 협박 공포에 빠지게 하고 강제로 물러나게 만든 죄.

3, 정미 7조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강제로 해산 시킨 죄.

4, 무엇보다도 더욱 큰죄는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을 추진한 죄.

5, 그리고 이완용은 끝까지 반성하지 않은 죄.


대한제국 때 을사조약 찬동자 5명의 매국로, 오적 명단.

1, 총리대신 이완용(總理大臣 李完用) - 우봉 이씨(牛峯 李氏)

2, 외부대신 박제순(外部大臣 朴齊純) - 반남 박씨(潘南 朴氏)

3, 내부대신 이지용(內部大臣 李址鎔) - 전주 이씨(全州 李氏)

4, 군부대신 이근택(軍部大臣 李根澤) - 전주 이씨(全州 李氏)

5, 농상공부대신 권중현(農商工部大臣 權重顯) - 안동 권씨(安東 權氏)


이완용의 행적을 추적 하던중 해방과 함께 사라진 매국시비(賣國詩碑)가 발견 되었다.

문제의 시비는 덕수궁 함녕전 뒤뜰에 있으며 사행시(四行詩)를 쓴 비석인데 각 구절 말미에는 이름이 적혀있다.


 시비(詩碑)에는 이런 글이 써 있었다.

1, 단비가 내리면 여러 사람 적시고,(이토, 통감)

2, 함녕전 위에 이슬빛 새로우니,(모리, 궁내대신)

3, 일본과 조선이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소네, 부통감)

4, 일본과 조선이 한집을 이루니 천하가 봄이로다.(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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