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작성자조선미|작성시간18.11.08|조회수28 목록 댓글 0

사물,

살펴보기/ 조사하기/



https://www.youtube.com/watch?v=IBf9pXOmpFw&feature=youtu.be


연필.


김기택/


연필 / 김기택



떨어진 연필이 굴러간다

뱀처럼 벌레처럼

제 기럭지를 구부렸다 펴면서 가지는 못하고

옆으로 굴러서만 간다


굴러가는 둥근 면에서

수많은 짧은 다리들이 나오고 있다


연필 속에서 광물성 내장 터지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여과시켜서

나무는 가볍고 맑은 소리를 낸다

뾰족했던 연필심도 덩달아 뭉툭해진다


도망가는 연필을 잡자마자

다리는 연필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손가락이 연필을 꽉 쥘 때

흰종이 밑으로 지층이 깊어질 때

짧고 힘찬 진동이 연필 속에서 버둥거린다


연필 지나간 자리에

걷다가 머뭇거리다 멈추다

종이가 패이도록 달린 발자국이 남는다



『시인동네 12월호』, 김기택 외, 시인동네, 2016, 64~65쪽


연필 한 자루 / 허수경

그렸다
꿈꾸던 돌의 얼굴을 그렸다
하수구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서 있던 백양목
부서진 벽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깨
붉게 울면서 태양과 결별하던 자두를 그렸다
칼에 목을 내밀며 검은 중심을 숲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멸종해가던 거대 짐승의 목
먹다 남은 생선 머리 뼈 꼬리 마침내 차가운 눈
열대림이 눈을 감으며 아무도 모르는 부족의 노래를 듣는 거
태양이 들판에 정주하던 안개를 밀어내던 거
천천히 몸을 낮추며 쓰러지는 너를 바라보던 오래된 노래
눈물 머금은 비닐 봉지도 그 봉지의 아들들이 
화염병의 신음으로 만든 반지를 끼는 거
어둠에 매장당하는 나무를 보는거
사랑을 배반하던 순간, 섬뜩섬뜩 위장으로 들어가던 찬물
늦여름의 만남, 그 상처의 얼굴을 닮아가면서 익는 오렌지를
그렸다
마침내 필통도 그를 매장할 때쯤
이 세계 전체가 관이 되는 연필이었다, 우리는
점점 짧아지면서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했으나
영영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단독자, 연필 한 자루였다
헤어질 사람들이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물에서
영원한 목욕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한 자루였다
당신이여,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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