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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믿음의 인물탐방

삼손 이야기

작성자김요한목사|작성시간19.05.15|조회수196 목록 댓글 0


삼손 이야기

인물이나 사건을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천사)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삼손의 생애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삼손의 신분과 직분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삿13:5)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단 지파 사람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술과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면서 전한 말입니다. 삼손에 대하여 주신 말씀이므로 부모에게는 삼손을 양육하는 기준이 되고, 삼손 자신이 살아가는 기준이 되며, 우리에게는 삼손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외에는 삼손에게 달리 하신 말씀이 없으므로, ‘삼손이 과연 나실인으로 살았는가?’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블레셋과 싸우는가?’를 살펴보면 삼손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도 제대로 받은 수 있을 것입니다.

삼손이 자라면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감동하십니다. 이 즈음에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삼겠다는 삼손을 부모가 만류하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승낙하는데, 이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삿14:4)

이 부분이 난해하여서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지만, 앞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삼손은 나실인이란 신분(身分)에 합당하게 자신을 성결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하며, 사사로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직분(職分)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사역을 위하여 성령의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런 신분과 직분에 대한 의식이 없이, 자기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부득이 하나님께서 삼손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이끌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삼손 자신도 그 부모도 삼손에게 일어난 일들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인 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삼손은 이스라엘을 지배한다는 이유로 블레셋을 문제 삼거나 싸운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불레셋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삼손에게 임하시는 것도 삼손이 옳기 때문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임을 기억하여야할 것입니다.

사자와 꿀
삼손이 딤나로 가다가 어린 사자를 만났을 때에 염소를 찢듯이 사자를 찢어죽일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 성령이 임하여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성령이 임하시거나 감동되는 경우는 대개가 어떤 사역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후에 계속하여 삼손에게 성령이 임하시는데, 오늘의 성령 충만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삼손은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딤나로 가다가 사자의 시체에서 꿀을 발견하고 그 꿀을 먹고 부모에게도 드려 먹게 하지만 꿀의 출처는 숨깁니다. 삼손은 여자의 집에서 블레셋 사람 30명과 잔치를 벌이고 함께 지내면서 사자에게서 취한 꿀을 수수께끼로 겉옷 30벌 내기를 겁니다. 답을 알리 없는 블레셋 청년들이 여자를 협박하고, 여자는 삼손을 졸라 알아낸 답을 그들에게 알려줍니다. 내기에 진 삼손은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이고 빼앗은 옷을 그들에게 주고 화가 나서 신방을 포기하고 그냥 돌아옵니다.

아내로 인한 싸움
얼마 후 화가 풀린 삼손이 아내를 보러 가지만, 이미 남의 아내가 됐다는 장인의 말에 화가 나서 여우 꼬리에 홰를 묶고 불을 붙여 마침 수확기라 바싹 마른 블레셋 사람의 곡식을 불 지릅니다. 삼손의 짓임을 안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처와 장인을 화형 시키고, 이 소식을 들은 삼손은 다시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도륙하여 처가의 원수를 갚습니다.

여기서 주의하여야 하는 것은 삼손이 ‘무슨 일을 하였는가’보다 ‘왜 이 일을 하는가’ 그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지금 블레셋 사람의 밭을 태우는 것이 정당하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이전에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이고 옷을 빼앗은 일은 어쩔 수 없어서 그랬지만 내 허물이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삼손은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야 하는 사명을 받은 사사입니다. 그렇다면 블레셋은 싸움의 대상이요 죽여야 하는 적이지 잘잘못을 가려야 하는 친구 사이가 아닙니다. 삼손은 그들과 친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옷 30벌을 얻기 위해 죽인 것이 잘못되고 미안했지만, 지금은 내 아내를 가로챘기 때문에 너희 곡식을 불 질러도 정당하다는 말이며, 또 처가식구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들의 원수를 갚느라고 그들을 크게 도륙한 것 역시 정당하다는 말입니다. 삼손은 블레셋과 마지못해서 싸우거나 개인적인 이유로 싸우지, 하나님께 받은 사명 때문도, 이스라엘을 위해서도 아니란 사실을 똑똑히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삼손을 블레셋에게 넘겨주는 백성들
삼손은 블레셋을 크게 도륙하고 유다지파의 땅 에담 바위에 머물렀는데, 이 소식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몰려와서 진을 치고 삼손을 넘겨달라고 위협합니다. 유다사람 3.000명이 삼손을 찾아가서 ‘지금 우리가 블레셋의 지배 하에 있으면서 왜 일이 이지경이 되게 하였느냐’고 책망하자 ‘그들이 내게 한대로 나도 하였을 뿐’이라고 자기 입장을 밝힙니다. 결국 유다사람들은 삼손과 합의하에 그를 묶어 블레셋에 넘겨줍니다.

학자들은 유다사람들이 블레셋의 지배를 당연시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 삼손을 적의 손에 넘겨준 유다사람의 비겁함과 무기력함을 비난합니다. 또  삼손이 유다 지파가 아닌 단 지파 사람이기 때문에 블레셋에게  넘겨줬다고 합니다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유다사람들이 삼손을 잡으러 3.000명이나 몰려간 이유는 그가 천하장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도 삼손을 적에게 넘겨주려는 이유가 이만한 능력이 있으면서도 동족은 안중에도 없는 삼손의 ‘개인적인 싸움’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유다사람의 눈에는 삼손이 사사로 보이지 않고 여자나 탐하고 개인적인 쌈질이나 하고 다니는 건달쯤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큰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고통 받는 동족을 위해 싸우려하지 않는 삼손에 대한 배반감이 더욱 그를 배척하게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삼손 또한 유다사람들이 적도 아니지만 동지도 아니기에 해치지만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개인적인 것이고 너희 도움도 원치 않으니 관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삼손은 동족을 위해 싸울 의사도 없지만, 동족의 도움도 원치 않는 철저한 개인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귀 턱뼈와 엔학고레
삼손이 유다사람에 의해 결박당하여 블레셋에게 넘겨지는 순간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하자 결박한 줄을 간단히 끊고 마침 곁에 있는 나귀의 새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입니다. 그리고 극심한 갈증으로 여호와께 부르짖고, 여호와께서는 우묵한 곳을 터뜨려 물이 솟게 하셨고,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그곳을 엔학고레라고 부릅니다. 

삼손 혼자서 1.000명을 죽이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며, 언제 들어도 저절로 박수가 터져 나올 정도로 신이 납니다. 더구나 목말라 부르짖는다고 즉시 우묵한 곳을 터뜨려서 물을 마시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이 확실하게 밀어주시는 삼손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삼손이 1.000명의 적을 죽인 무기가 ‘나귀의 새 턱뼈’입니다. 나귀 턱뼈로 적을 물리쳤다고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하필이면 나귀 턱뼈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하면서 무용담을 늘어놓고, 그곳 이름을 라맛 레히(턱뼈의 산)라고 하는 삼손의 당당함 때문에, 칼도 아닌 나귀 턱뼈로 일천 명이나 죽인 삼손의 위대함에 탄복하게 되지, 나귀 턱뼈가 문제란 생각을 감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새(fresh) 턱뼈’라는 데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공동번역은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당나귀의 턱뼈’, 표준새번역은 ‘싱싱한 당나귀 턱뼈’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뼈가 죽은 지 얼마 안 되고 싱싱한 것이라면 무슨 뼈이겠습니까? 아직도 살점이 묻어있는 시체라는 말입니다. 

삼손은 나면서부터 나실인입니다. 삼손처럼 우리도, ‘나실인이니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라’는 사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머리만 깎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실인의 규례를 따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나실인이라는 삼손을 연구하면서 나실인의 규례를 찾아보지도 않고, 머리만 깎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안일하고 불성실한 태도로 성경을 보는 것은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민수기 6장 전부가 나실인의 규례에 대한 기록입니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나실인이란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기로 특별한 서원한 사람을 말하며, 첫째 철저한 금주(禁酒), 둘째 머리를 깎지 않고, 셋째 시체(부모형제 포함)를 멀리 하여야 하는 세 가지 금기(禁忌)를 지켜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34:16)는 이사야서의 말씀이 문맥상으로는 짐승들에 대한 이야기 중에 나옵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셨고, 특히 해석이 어려울 때에는 해석에 도움이 될만한 짝이 있다는 쪽으로 적용해온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연구한 신학자들이 짐승에 대한 말씀으로 결론짓고 다른 적용을 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짝을 찾아보지 않고 편협한 해석을 내놓은데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으면서, 짐승에 적용해야 하는 구절이기 때문에, 성경을 폭넓게 보려고 적용하는 것은 막는 신학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폭넓게 보아야 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을 지적해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성경이 주려는 유익을 놓치는 것이 문제입니까? 성경을 폭넓게 살펴보기 위해서 짐승의 짝을 찾는데서 벗어나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것입니까?”

삼손은 본인의 입으로도 자신을 나실인이라고 하지만 나실인으로서의 의식이 박약한 문제인물입니다. 하필이면 왜 시체입니까? 적의 칼을 빼앗을 수도 있을 텐데 시체를 무기로 사용했다는 것은 삼손이 나실인이로서의 의식이 전혀 없다는 증거입니다. 삼손이 부르짖는 사자를 죽인 것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시체 속에 있는 꿀을 취하여 먹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미친 짓입니다. 사자 시체는 나실인은 물론 일반인인 부모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 속에 있는 꿀을 먹어서 되겠습니까? 부모에게 숨기지만 않았더라도 먹지 않았을 것이고, 먹었더라도 이후에 정결의식을 행하였을 것인데 숨겼기 때문에 그 기회마저 빼앗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만 아니라 부모까지 부정하게 만든 패륜아인 것입니다.

삼손이 술을 먹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매일 잔치를 벌이고 기생집에서 지내며 여인의 무릎을 베고 누웠고, 흔들어 깨워도 모르는 이 모든 정황이 술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삼손이 가는 곳마다 술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그나마 머리를 깎지 않지만, 그 이유가 머리에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자신을 드리기로 서원하고 규례를 지키는 사람인데, 삼손이 비록 머리를 깎지 않았지만, 나실인으로서의 자세가 아닌 모습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잘못된 인물인지를 넉넉히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이 솟게 하여 삼손의 갈증을 풀어주시지만, 그렇다고 여기를 그가 정당하다는 증거로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교회가 커지거나, 은사가 나타나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일 수 있지만, 그 함께 하심이 그 목사나 은사자의 모든 삶을 인정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주장하는 무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불법을 행한 자‘라고 책망하셨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삼손의 힘자랑(삿16:1-3) 
삼손이 가사에 가서 기생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에, 삼손이 왔다는 정보를 입수한 블레셋 사람들이 매목하고 있다가 삼손이 잠이 든 새벽에 기습하려고 하지만, 삼손은 기생과 느긋하게 즐기다가, 한밤중에 성문을 빗장이 질러 있는 채로 기둥 째 뽑아 어깨에 메고 유다 땅 헤브론 까지 갑니다. 성문을 얻으면 성을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견고한 성문을 기둥까지 뽑아 메고 먼 길을 갔으니 그가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삼손은 그 엄청난 힘으로 기생 놀음이나 하고, 가사 성문을 기둥까지 뽑아 메고 헤브론까지 가는 힘자랑은 하였지만, 그 힘으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성문을 얻었으면 그 성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 사람들을 도륙했어야 하는 데도, 문짝만 메고 힘자랑만 하였으니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라는 직분을 의식이나 하는 사람입니까? 학자들은 삼손이 성문을 얻었으니, 결국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속국이 될 예표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성문을 열었으면 그 성을 점령해야지 문짝만 메고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블레셋 사람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삼손을 사사로 부른 것인데, 성문을 얻고서도, 이후에 블레셋을 지배할 예표나 하고 말아야 하겠습니까? 

삼손과 들릴라(삿16:4-22)
삼손은 다시 블레셋 여인 들릴라를 사랑하여 동거하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들릴라에게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달라고 청탁을 합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꾀지만 힘이 머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삼손이 쉽게 알려줄 리가 없습니다. 삼손은 반은 즐기는 심정으로 이렇게 저렇게 둘러대지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들릴라로 인하여 번뇌하여 죽을 지경에 이릅니다. 결국 삼손은 진정을 토하기에 이르고 삼손은 머리를 깎이고 눈이 뽑히고 가사에 끌려가서 놋줄에 묶여 나귀처럼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처지가 됩니다.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자는 삼손의 머리카락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혀보니 힘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과연 머리를 깎자 힘이 없어졌으니 머리카락에 힘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할 것이고 더구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라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힘은 머리카락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삼손이 힘을 쓸 때마다 성령이 감동하였고, 머리가 깎인 후에 힘을 쓰려고 하지만,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니라.’ 즉 하나님께서 삼손을 버리고 떠나셨기 때문에 힘이 없어진 것입니다. 삼손이 나실인의 규례 중 둘을 어겼지만 아직 머리를 깎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지 않으셨던 것이고, 마지막 규례마저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버리신 것입니다.

눈을 뽑힌 삼손
성경에는 눈이 멀거나, 눈이 뽑히거나, 눈을 뜬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눈이 멀거나 뜨거나 뽑히는 경우 거의 모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눈멂은 자식 사랑에 눈이 멀었음에 대한 책망이고(삼상3:2,13) 나귀가 보는 칼을 뽑아든 천사를 보지 못하는 발람은 자신의 패역함을 보지 못한데 대한 경고였으며(민22:23)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본 후 잠시 눈이 멀었던 사울도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는 무지에 대한 책망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야곱은 늙어 눈이 멀었으면서도 애굽의 총리대신인 요셉이 보지 못하는 영적 세계를 보는 안목이 있었으며(창48:19) 소경으로 태어나서 40세에 예수님을 만나 실로암에 가서 씻고 보게 된 걸인(乞人)은 육신의 눈을 뜬 것은 물론,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알아보는 영적 눈까지 뜨는 축복도 받았습니다.(요9:37)

성경에 눈이 뽑힌 사람은 삼손과 시드기야인데, 유다의 마지막 임금 시드기야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여러 차례 경고의 말씀을 전하지만 듣지 않고 도망가다가 사로잡혀 자식들이 눈앞에서 죽는 참혹한 광경을 마지막으로 보고 눈이 뽑힙니다. 볼 것을 보지 못함에 대한 책망입니다(대하36:11이하). 여기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차례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나실인으로서의 자기 신분을 자각하지 못하였고, 사사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여야 하는 직분을 잊었으며, 동족 여인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육감적인 블레셋 여인의 아름다움에 현혹된 눈과, 그 여인들의 간교함을 보지 못한데 대한 책망으로 눈이 뽑혔던 것입니다.

삼손은 눈이 뽑힌 후에 깎인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합니다. 머리가 자라는 것을 보고 힘이 다시 생긴다고 보는 눈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삼손의 눈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나실인이 규례를 어기면 머리를 밀고 정결의식을 행한 후에 다시 나실인으로 헌신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눈이 뽑히고 깎인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한다는 말은 삼손에게 나실인으로 살아갈, 또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살아갈 기회를 주셨다는 의미이며, 삼손은 심기일전 주어진 기회를 붙잡아야 했던 것입니다.

삼손의 최후
인간의 죽음은 엄숙하게 대해야 마땅합니다. 더구나 삼손이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적과 함께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 마음이 숙연해 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삼손이 들릴라로 인하여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매여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적과 함께 죽기로 결심한 삼손의 장렬한 최후를 높여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16:28)

그런데 삼손의 이 마지막 기도가 좀 이상합니다. ‘나’를 생각하고 ‘나’로 강하게 하고 ‘나’의 두 눈 뺀 원수를 갚게 하소서. 기도 중심에 내가 있습니다. 물론 삼손이 강해져야 블레셋을 칠 수 있습니다만, ‘나의 두 눈 뺀 원수’를 갚겠답니다. 오히려 ‘이 백성을 생각하옵소서! 나를 강하게 하셔서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행한 원수를 갚게 하옵소서!’하여야 하고, ‘나의 잘못된 과거를 용서하시고 마지막이나마 사사로써, 나의 부끄러움을 씻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죽게 하옵소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삼손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하게 개인으로 살다가 개인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염두에 없고 하나님도 능력을 주시는 분이지, 섬기고 순종하여야 하는 분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나실인으로 부르셔서 자원하는 심령으로 자신을 성결케 하여 고결한 신분으로 하나님 섬기기를 원하셨고, 블레셋과 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원하여서 그에게 사사의 직분을 맞기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결한 규례를 지키지 않았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블레셋과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소명과 사명은 외면한 채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삼손에 의해 하나님의 뜻은 좌절당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좌절될 수는 없는 일. 그 부모는 거역하는 아들을 어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거역하는 삼손의 일에 개입하셔서 그의 계획에 차질을 빚어 좌절케 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동족의 딸과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고 굳이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하지만, 그 아내와 다른 남자가 잤고, 수수께끼로 옷을 얻으려고 했지만 옷 30벌을 물어주어야 했고, 블레셋 사람과 친하고 싶었지만 묘하게 일이 꼬여 싸우게 되고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우연한 사건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삼손의 의도는 좌절되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다만 이 모든 역사(役事)를 삼손이 다 했으면서도 그가 의도한 일은 아니니,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를 하셨겠습니까?

사사로 20년을 지내었더라(삿15:20,16:31)
사사기에는 대 사사 여섯과 소 사사 여섯 명 등 열두 명이 등장하는데, 평가가 있는 인물과 없는 인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가가 있는 인물은 칭찬으로, 없는 경우는 책망으로 볼 수 있는데, 평가가 있는 경우 한결같이 ‘태평하였더라.’ ‘구원하였더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고, 없는 경우는 반드시 책망할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학자들이 이런 관점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의 이런 관점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연을 듣기 전에 판단부터 하는 것은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은사를 이기적이고 정욕적으로 사용한 잘못된 청지기입니다. 그래서 ‘사사로 20년을 지냈다’고 두 번을 기록하면서도 긍정적인 평가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잔치를 벌이고 술을 즐기며 여자를 끼고 누웠을 때는 만족하였는지 모르지만 행복하였다고는 못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늘 분하고 원통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다 이긴 수수께끼를 사랑하는 아내 때문에 졌고, 30벌의 겉옷이 생겨 횡재하는 건데 거꾸로 물어줘야 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다른 남자가 품고 잤으니 얼마나 울화가 치밀었겠습니까? 

그래서 블레셋 사람의 밭에 불을 질렀고, 또 처가식구들을 죽였기 때문에 원수를 갚느라 사람들을 많이 죽였고, 그 바람에 그렇게 친해보려고 애썼던 블레셋 사람과 원수가 되었고, 일이 꼬이는 바람에 원치 않던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사에서 기생집에 있을 때에도 밤중에 나오면서 성문을 뽑아 메고 오면서도 매복한 그들을 해치지 않았고, 들릴라가 힘의 근원을 캐물을 때도 블레셋의 음모인 줄 알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백성들과 싸울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둘러대면서도 그들과 싸우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나의 두 눈을 빼고 짐승처럼 연자 맷돌을 돌리게 하였으니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겠습니까? 그래서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탄원하면서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면서 죽었던 것입니다. 

삼손은 유다사람들이 자기를 블레셋사람에게 넘겨준 것은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습니다. 삼손은 무슨 까닭인지 잘 모르겠지만 블레셋을 늘 동경하여 가까이하고 싶어 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반면 자신이 이스라엘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평생 동안 동족 이스라엘에게 아무 관심도 미련도 없었고, 그래서 죽는 순간에도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외면하고 개인으로 죽었던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 앞에 나실인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사사로 살 수 있는, 소원(疏遠)하였던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왔지만, 그는 개인의 원수를 갚는 것으로 마지막 기회를 써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삼손이 마지막에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였으면서도, 삼손의 집안 식구들만 참석한 초라한 장례식이 되었던 것입니다.(삿16:31)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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