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라는 이름만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있는 이름입니다.
오늘 날의 목회자들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를 전한다면 자신들이 이 땅에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왔는지를 잘 알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권세를 상징하는 헤롯 왕 까지도 그를 흠모했고 그리고 완악하고 고집불통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까지도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다. 그도 사람인데 사람들의 칭찬과 자신의 명성을 왜 싫어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단호히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주님께로 보냈습니다. 오늘 날 목사들의 모습이 이러해야 합니다. 목사는 세례 요한처럼 예수를 전하는 사명을 잘 마치고 조용히 사라지는 역활을 맡은 것이지 자기의 이름을 내고 자기의 영광을 챙기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는 역활을 맡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즈음 목사라는 이름의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이 복음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보여 신자들을 그 복음에 맞아 죽게 만드는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신자들의 위에 군림해서 마치 신자들과는 자신이 무언가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를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들은 마치 깨끗하고 정결한 듯이 행동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처럼 더 깨끗해지기를 바라고 그렇게 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성경은 복음에 맞아 죽으라고 하지 너희들의 노력으로 깨끗해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꾸 신자들에게 너희들의 힘으로 살아라 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그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신자들이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불가능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자각하기 보다는 나는 이만큼 노력해서 깨끗해져 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하시는 그런 신자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에 가려 예수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들의 건물에 가려 예수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에 가려 예수믿는 신자들이 보이지 않고 목사들을 믿는 신자들만 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그리고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자들을 선지자 곧 오늘 날 목사라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하나님께 사명을 받지 않은 자들을 목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기 뜻과 자기 이름을 내는 가짜 목사들로 인해 기독교가 오해되고 왜곡되어지고 변질 되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의 안내자와 지도자에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내자와 지도자를 통해 주님께로 가야 하는 것이지 목사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으시면 안 됩니다. 많은 분들이 목사를 통해 하나님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지으면 자신들의 신앙까지 총체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 목사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목사는 신자들을 하나님께로 안내하는 안내자요 잠정적인 지도자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목사들도 성도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면 안 됩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하나님에게로 이끄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르치던 성도가 하나님을 더 잘 배우고 더 깊은 신앙의 성숙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언제든지 더 나은 곳으로 보내 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성도인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하늘의 비밀을 알고 주님을 좇게 된 사람들은 그보다 더 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3:1~2절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시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갸라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 짧은 구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당시 세상의 권세를 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세계 역사를 이끌어 가던 세계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들이 왜 여기에 다 등장하고 있을까요? 세상의 역사가들 눈에는 전혀 띄지 않았던 약대 털옷을 입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세례 요한의 때를 가리키는 데 자리 매김 용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이었을지 몰라도 성경에서는 세례 요한이 주인공인 것입니다. 그 가치를 아시겠습니까?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증인들은 이 세상의 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세상의 힘을 초개처럼 버리고 주님을 좇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눈에는 성도들이 주인공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삶을 사셔야지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어 사는 삶을 사시면 안 됩니다.
그 삶은 예수만을 바라보며 복음에 맞아 죽는 세상에서는 고난으로 안식되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예수 이름을 부르지만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주인공인 삶 속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삶입니다. 그들을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은 절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에 맞아 죽고 삶 속에서 고난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는 거반 죽는 모습일 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살려 내시며 주는 고귀하고 거룩한 이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이 됩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확인하고 그 은혜 앞에 감읍하여 주님을 더 많이 알고 싶어 말씀을 보려 하고 주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닌 주님을 추구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안내자와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께로 한발 한 발 다가가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경주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를 완성시키실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실망할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그 은혜의 십자가 뒤로 숨으십시오. 그래서 내게는 예수가 필요하다 로 가십시오. 우리의 실존을 보고 실망하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은혜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했을 때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누가 더 남자답고 인간적입니까?
당연히 유다입니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받은 돈까지 다 돌려주고 당당하게 자신의 죄에 책임을 지고 목매달아 죽습니다. 그러나 그 유다는 그 후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악인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뻔뻔한 베드로는 자기의 불가능함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 뒤로 숨었습니다. 그리고는 뻔뻔스럽게 주님께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 뒤로 숨은 베드로는 그 은혜에 의해 자라나서 예수님의 수제자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직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의 삶을 바꾸고 그 은혜가 우리를 성숙시켜 주실 것입니다. 오직 그 은혜만을 의지하여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시오. 목사라는 이름도 선교사라는 이름도 장로 집사 권사라는 이름도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기 위한 그저 도구에 불과한 이름입니다.
그런 도구에 불과한 이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성도라는 이름만이 가치가 있습니다. 그 이름을 가지십시오 그 이름은 자신이 죽어야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질 수 있는 거룩한 이름이며 천국으로 들어가는 생명 책에 녹명된 이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저 불가능하고 무력한 한 줌의 죽은 흙입니다. 마른 뼈들이고 손가락 하나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병자들입니다.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시지 않으면 그저 먼지 티끌일 뿐입니다. 그 사실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지옥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훌륭한 흙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땅지 감옥 옥 땅의 감옥 지옥인 것입니다. 그 지옥에서 벗어나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십시오.
할렐루야 ~! 주님께 영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