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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270) 어떤 눈을 가지셨습니까? (4)

작성자김요한목사1112|작성시간24.03.02|조회수106 목록 댓글 0

 

요한복음 강해(270)

어떤 눈을 가지셨습니까? (4)

 

이런 설교를 들으면 인간의 행함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유대인처럼 율법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갈라디아 지역에 이런 신앙이 득세해서 사도 바울이 분통이 터져서 외칩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 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합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에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열심과 충성을 섞는 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단호하게 말한 것입니다. , 천하고 약한 초등학문으로 다시 돌아가 사람의 종이 되고자 하느냐?”라고 질타를 합니다. 이 시대에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성화주의는 천하고 약한 초등학문입니다.

 

율법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목사들 밑에서 교인들이 목사의 꼬붕이 되어서 꼭두각시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제사장 자리에 앉아서 자기가 무슨 중보자라도 되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자신의 말이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되는 것처럼 교인들에게 순종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이들의 말에 꼼짝없이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은 힘에 지시를 받기에 육은 힘에 따라서 우열이 있고 차별이 생깁니다. 성화를 많이 한 목사는 높고 성화가 덜된 교인은 낮습니다. 목사는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이 직업인데 어떻게 교인들이 목사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교인들은 세상에서 돈 벌다가 주일이면 교회에 근근이 오는 데 목사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니 율법 신앙인 성화주의 안에서는 교인은 목사의 영원한 하수가 될 뿐입니다. 성화주의 안에서는 성화는 힘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 십자가 안은 인간의 의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힘이 없습니다.

 

힘이 없으니 우열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너도나도 죄인일 뿐인데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너도나도 예수 피로 구원받았는데 무슨 우열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는 잘난 놈 못난 놈이 없습니다. 예수의 피로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예수의 피로 용서받은 자들만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성경을 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해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십자가 안에는 하나의 해석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입니다. 예수의 피로 해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도 안에 계신 성령님이 한 성령님이십니다.

 

성도는 한 성령을 마신 자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주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이 십자가 영이십니다.

 

그러니 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만을 전합니다. 성령은 모든 성경을 주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에서 해석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하나 같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만 합니다.

 

사도행전 2: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는 성령님주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라고 보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목소리로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오늘 본문에 적용해 봅시다.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으로 주 예수님과 가룟 유다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가 향유로 주 예수님의 발을 씻긴 내용은 4 복음서 모두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6: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향유를 부은 사건은 복음서마다 조금 다르게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서마다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향유 사건은 4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마태복음 26:6~13절과, 마가복음 14:3~9절과, 누가복음 7:36~5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다릅니다.

 

조금씩 다르게 기술된 것은 사건의 본질이 아니므로 누가 부었느냐가 중요치 않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의미가 중요합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자구(字句)에 매달리다 보면 본질을 놓치기 쉽습니다. 큰 틀에서 지금 이 사건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핵심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어 하나하나에 매달려서 해석하고자 하면 전체의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니 향유 사건도 누가 했느냐! 같은 사건이냐! 아니냐! 를 따지지 말고, 도대체 이 사건이 주 예수님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행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서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행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마태, 마가, 요한복음은 주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말하면서 비슷한데, 누가복음에서는 탕감받은 죄 사함의 문제로 풀이를 합니다.

 

심정적으로는 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한 가지 사건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강해하면서 깨닫는 것은 영과 육에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 자신은 빛이라 하고 세상은 어둠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둠은 빛이 하는 일을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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