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산책(18) 메시야가 하는 일
요한복음 1:35~42절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성경 66권은 한 권의 책입니다. 이 성경을 한 권의 책이라고 한 것은 한 주제를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 권 성경이 증거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성경은 자신을 가리켜서 한 말이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중심사상은 주 예수님 자신에 관해서 증거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과 구약 모든 성경으로 예수님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경을 가지고 자기들 뜻을 주장하기 위해서 인용하다 보니 이 시대 성경 말씀은 본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하여 부적처럼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주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서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습니다. 교회에서는 모두가 주 예수님의 십자가만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누가 성경을 가지고 다른 소리를 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살피며 교회를 지키십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이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센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의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는 놀이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할 수 없는 분위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가정의 행복과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 친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 예수님의 피가 서려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나그네들이 무덤입니다.
이 세상은 성도들의 나라가 아니고 하늘에 있습니다. 성도는 육신의 꿈을 십자가와 못 박으시고 구원받음에 감사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교회가 위기를 맞았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사람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가 증거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신앙의 위기는 열심과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예수의 피가 무덤덤하게 느껴지는 것이 위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덤덤해지는 것이 위기입니다. 이렇게 위를 맞게 되는 성도에게서 구원의 감격도 기쁨도 즐거움도 모두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 아직 결혼도 못 시켰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노후 준비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재테크는 어디다 해야 할까?” 이런 생각들로 어느새 마음속에 세상을 살아갈 염려가 먹구름같이 휩싸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여! 내게서 성신을 거두지 마시고,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은 주옵소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옵소서!”라고 탄원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은 성령께서 주십니다. 구원의 즐거움은 내가 죄인이고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깨달아질 때 나타납니다.
성령은 날마다 성도를 하나님 말씀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용서받았음을 알도록 일하십니다. 그래서 성경 어디를 봐도 그 중심 내용은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여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곳에는 반드시 인간의 죄 문제도 함께 이야기됩니다.
왜냐면,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인간의 죄 문제는 언제나 때려야 땔 수 없는 한 셋트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펴도 주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와야 하고, 레위기를 펴도, 잠언을 펴도, 시편을 펴도, 전도서를 펴도, 역대기를 펴도,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펴도 주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곧 죄로부터 구원받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이는 주 예수님의 이름 속에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초지일관(初志一貫) 오직 하나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설교도 역시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깨닫는 부분이 제한적이고 한계성을 가져서 미진하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설교는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는 이런 일을 하였다”라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서 계시하시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과 동시에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 인간들은 각각의 지식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서 그러다 보니 각각의 하나님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각각의 하나님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는 이렇다!”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하나님만 참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가짜 하나님이라고 가드 라인을 치신 것입니다.
물론 인간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너는 앞으로 이런 인간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을 하신 다음,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 속에 아브라함이 살아야 할 앞길이 정해져 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에 알맞은 삶을 살도록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너는 이제 다른 인간으로 출생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출생했기에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부모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함으로 세상은 아브라함 쪽과, 다른 쪽으로 나누이게 되었습니다. 인간 세상은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서 세상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 동네에서 형님 동생 하면서 한 식솔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너는 내 것!”이라고 선택하자 다른 사람들은 졸지에 마귀 것으로 분류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속한 사람은 참 하나님을 섬기는 부류가 되어 복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거짓 하나님을 섬기는 부류가 되어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은 “네 자손이 하늘에 별과 같을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삭처럼 하나님의 약속으로 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삭처럼 “없는 데서 있게 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을 이삭을 통하여서 알려 주셨습니다. 이삭은 원래 없었는데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차 주 예수님께서 이렇게 태어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원래 주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가 찾아와서 하나님의 약속을 마리아 속에 심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없던 주 예수님을 하나님이 마리아 속에 심어 놓으신 그 약속 때문에 낳은 것입니다. 앞으로 주 예수님도 성도들도 이런 방식으로 생겨날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제 주 예수님에 의하여 찜 당하면 그날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상을 둘로 나누는 일부터 단행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시면서 없는 데서 있게 하시듯이 각 사람을 선택하여 불러내시어 철저하게 ‘너희’와 ‘저희’로 갈라서 상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여러 가지 천국 비유를 하시면서 천국은 이 땅에 비밀로 와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밀로 와 있다는 것은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 턱이 없는 제자들이 주 예수님에게 모든 사람이 다 알아먹도록 이야기해주면 안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주 예수님은 천국에 비밀은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지만, 저희에게는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11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너희’는 누구를 말합니까? 주 예수님의 선택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을 말하고, ‘저희’는, 제자들이 이외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파견하실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오로지 자기 백성만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라는 이름을 주셔서 보낸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심판하는 분입니다.
‘너희’와 ‘저희’를 갈라내시는 분입니다. 세례요한이 주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제자 중 두 사람이 주 예수님에게 갔는데 그중에 한사람이 안드레였는데,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주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자기 형인 시몬에게 주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합니다. ‘메시아’란 말은 ‘그리스도’란 말인데 이는 ‘기름 발리운 자’란 뜻입니다. 기름을 발리웠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자란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기름은 거룩을 상징하고 구별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의 고기와 기름을 철저히 분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기는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고, 그 남은 것들은 제사장들의 분깃으로 먹게 했습니다. 그러나 기름은 하나님의 분깃이기에 사람이 먹지 말고 모두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기름을 기쁘게 흠향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을 입은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가 기름을 발라서 구별케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기름 발리우게 하셔서 구별을 시켰습니다.
백성 중에서 기름발리움을 입게 되면 그때로부터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하도록 선택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여 일반 백성들과 다른 삶을 살도록 요구받게 되었습니다. 일단 기름 발리움을 입게 되면 자기 삶은 없어집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철저히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기름 발린 자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간주하여 백성들로부터 지켜주셨는데,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셔서 일반 백성들로부터 치외법권(治外法權)에 두셨습니다.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장차 오실 기름 발리운 자 곧 메시아가 하실 일들을 표상적으로 하였습니다.
이들이 하는 일 속에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할 일을 담아 놓은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로서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메신저 일을 하시는 자입니다. 그리고 왕은, 백성들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제도가 쭉 내려오다가 다윗 때까지 와서는 다윗이라는 왕에게 통합됩니다. 다윗은 선지자이면서 제사장이면서 왕으로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성령에 감동을 입어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은 다만 장차 오실 메시아를 계시하는 인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고 즐거워하면서 그를 기다리는 소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주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데 하늘에서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주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던 기름 발리운 자 곧 메시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