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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산책(269) 정죄함이 없는 세계(4)

작성자김요한목사1112|작성시간23.04.10|조회수54 목록 댓글 0

 

 

 

 

 

 

 

 

 

 

 

요한복음 산책(269)

 

정죄함이 없는 세계(4)

 

이렇게 되면 바리새인의 세계와 주 예수님의 세계가 다름을 보게 됩니다. 바리새인은 죽음의 영역 안에 있고, 주 예수님은 생명의 영역에 계신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어떻게 처리를 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이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법으로 대하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용서로 대합니다. 아까 아담 안은 죽음이고, 예수 안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죽이자고 하고, 주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용서하자고 할 것입니다. 생명은 생명을 토해내고, 죽음은 죽음을 토해냅니다.

 

법에는 죽음이 나타나고, 은혜에는 생명이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이 주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간음 중이었던 여인을 붙잡고 왔다고 했습니다. 무엇으로 시험하고 있습니까? 율법으로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자신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은 너무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어서 그럽니다.

 

자기들 딴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면 율법을 주신 분에게 율법을 가지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누가 줬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준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기막힐 일입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이 “그래 그럼 한번 해 봐라!”라고 하십니다. “너희들 마음대로 그래 율법 가지고 시험해 봐라!” 그러자 율법 조항을 들어가면서 여자를 정죄합니다. 율법 제 몇 조 몇 항에 의거해서 “이 여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라고 판결합니다. 율법이 뭡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준 것이니 최고의 법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 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주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예수 너도 우리처럼 율법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자신만만, 기세등등했던 것입니다.

 

“우리보다 더 나은 판단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자 주 예수님은 율법을 비켜 가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 버립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시면서 율법에 없는 것으로 처리하십니다. 이런 처리 방법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들 세계에는 없습니다.

 

율법에는 반드시 정죄함이 있습니다. “선이냐!”, “악이냐!”로 판단 받아야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니 주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않는다는 방식은 인간들 세상에는 없는 방식입니다. 아주 생소해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포착하지 못하도록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들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성령님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없는데, 이것을 묵시성이라고 합니다. 역사가 알아보지 못하는 세계를 일컬어 묵시라고 합니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포착되지 않는 비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묵시로 와 있지만 거듭난 성도에게는 묵시가 아니고 현실입니다. 마치 1층에서는 2층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2층에서는 1층을 훤히 보고 있어도 1층에서는 2층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2층은 결코 정죄함이 없는 동네입니다. 이것을 구원이야기로 하면 1층은 자기 힘으로 법을 지켜서 구원받고자 하고, 2층은 주 예수님이 용서하고 안고 들어갑니다. 2층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자 일체의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2층 시민이 되면 인간의 행위로 인하여 퇴출당하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2층으로 데리고 갈 때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데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이렇게 이해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낳으면 바로 호적에 올립니다. 이놈이 앞으로 하는 것을 보고 올리지 않습니다. 나중에 자식 노릇하는 것 보고 올리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낳자마자 “넌 내 것!”이라고 올립니다. 그러니 자식이 되는 것은 그 아이의 행위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잘 나도 자식이고, 못 나도 자식입니다. 그리고 호적에 한 번 올려 진 놈을 말 안 듣는다고 빼내진 않습니다. 두들겨 패는 한이 있더라도 빼내지는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그런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해서 천륜(天倫)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부모는 자식을 어떤 행위를 가지고 자식으로 인정하다가 안 하다가 하지 않습니다. 잘못해도 자식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은혜라고 합니다. 성도의 구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환경을 총동원해서 말하면서 성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미 2층의 묵시에 속한 사람은 구원문제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구원문제는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믿어지게 하려고 성령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이것이 믿어집니다. 요한일서 4: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십니다. 만약 두려워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 안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주 예수님 안을 말합니다. 그러니 주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 믿어집니다. 이해가 됩니까?

 

만약 자기 행위로 인하여 구원의 문제가 근심되고 염려가 된다면 그 사람은 주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묵시와 역사는 영역이 다릅니다. 그러니 역사의 안목으로는 묵시가 일하는 것을 가늠하지 못합니다. 이는 역사와 묵시는 일 처리를 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할렐렐루야~! 주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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