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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산책(274) 정죄함이 없는 세계(9)

작성자김요한목사1112|작성시간23.04.10|조회수53 목록 댓글 0

 

 

 

 

 

 

요한복음 산책(274)

 

정죄함이 없는 세계(9)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우리를 심판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은 안에 있는 것을 토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속에 악독이 가득하면 악독이 술술 나오고 속에 긍휼이 있으면 긍휼이 술술 나옵니다. 물론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간섭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또 흉내 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마귀는 흉내내고 모방하는 데는 천재입니다. 긍휼이 술술 나옵니다. 그러니 이것도 알아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모방하는 사람들은 자선하듯이 베풉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내가 대신 감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흉내낼 수가 없습니다.

 

긍휼을 행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은 상대와 나를 하나로 볼 때 나타납니다. 상대방을 타자로 보면 긍휼이 안 나옵니다. 그것은 적선하는 것입니다. 긍휼과 적선은 다릅니다. 긍휼은 내게 하는 것이고, 적선은 타자에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해 보세요, 진심으로 용서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못하면 “용서해 주세요!”라고 해도 그렇게 간절함이 없습니다. 해 주면 고맙고 안 해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식 용서 해 달라는 것하고 남의 자식 용서해 달라는 것은 간절함의 정도가 다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간절함은 긍휼은 내 몸일 때만 흘러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니 범죄한 사람이 나라고 생각할 때 비로서 마음속에서부터 긍휼이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타자를 통해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범죄한 사람을 보면 자기 모습으로 보여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통해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알았어야 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여인은 타자였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여인과 하나로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주 예수님에게서는 긍휼이 나왔고 바리새인들에게서는 정죄가 나온 것입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 속에서 자기의 죄를 발견했을 것 같으면 그 여인을 정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는 쏙 빠지고 여인만 남긴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자가 간음을 행하였다면 남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율법에 의하면 여자만 돌에 맞는 게 아니고 남자도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간음죄를 가지고 고소하는데 여자와 함께 간음한 남자는 없습니다.

 

주 예수님이 “이 여자와 간음한 자가 바로 너희들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더는 정죄하지 못하고 다 도망을 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우리가 간음한 여인을 진심으로 용서 할 수가 있으려면 그 여인과 내가 하나 일 때만 가능합니다. 나도 간음한 자라고 해야 합니다.

 

그럴때 그 여인을 용서할 수가 있는데 우리는 “난 간음 안 했어요!”라고 합니다. “난 도적질 하지 않았어요!”, “난 주일성수하고 예배 잘 드렸어요!”, “난 헌금 잘하고 충성봉사 잘 했어요!” 자기 행함을 의로 삼아서 의인인체 합니다. “난 저 인간들과 달라요!”라고 하면서 상대와 나를 타자로 둡니다.

 

전부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처럼 아버지 명을 어기지 않고 살았다고 당당합니다. 그러니 탕자를 용서한 아버지가 이해가 안 됩니다. 죄를 범한 동생을 용서한 아버지가 밉습니다. “왜, 법대로 동생을 대하지 않느냐?”라고 따집니다. 형은 동생을 타자로 보았지만, 아버지는 탕자를 한 몸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하였고 맏아들은 정죄한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도 이를 말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난 사람과 타인입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자기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돈을 들여서 돌보아 살려 준 것입니다.

 

여기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법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말하고, 사마리아인은 주 예수님을 말합니다. 우리가 강도 만나서 죽어가고 있는데 주 예수님이 살려 준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것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난 배경에는 우리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 예수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자랑할 것이 없고 주님만을 자랑하게 됩니다. 이처럼 용서받고 사랑받은 사람은 용서와 사랑을 토해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눈에 한 교회 안에 있는 성도가 타자로 보이게 되면 항상 그 사람과 나를 비교합니다. 비교해서 이러쿵저러쿵 정죄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나를 하나로 생각해서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교인들이 타자로 보이면 나는 뼈 빠지게 교회를 위해서 돈을 갖다 바치고 봉사하고 충성했는데 저 인간들은 빤질거리고 있다고 투덜거립니다. 흔히 교회에 충성한 사람들이 이런 함정에 잘 빠집니다.

 

타인과 자기를 별개로 구분해서 판단합니다. 어떤 일이든 “주님이 은혜로 하게 하셨구나!”라고 생각하면 감사할 터 인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사가 아니고 수고한 것이기에 비교합니다. 하지만 감사는 비교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남과 비교가 되면 그것은 내가 한 수고입니다.

 

하지만 비교가 되지 않고 기쁘면 주님께서 행하게 하신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내 수고로 일하면 난 항상 손해 본 것 같고 저놈은 항상 덕을 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일을 안 하는 놈들을 보면 미운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헌금 안하고 봉사 안하는 놈들을 보면 욕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 인간은 입으로만 예수 믿고 있다고 투덜거립니다. 괜히 미워하게 됩니다. “오죽했으면 못할까?”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고 살기 어려웠으면 헌금을 못할까?”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고 모두가 자기 기준에 맞추어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우리는 상대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가 행하는 모든 배후에는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인가 행하면 “주님께서 하게 하셨구나!” 생각하고 생색낼 이유가 없습니다. 안 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은혜를 안 주니 못했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평이 안 생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도 풍성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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