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산책(276)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1)
요한복음 8:10~11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라는 주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주 예수님은 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한계성을 알면서도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까? 과연 죄짓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까?
또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직 주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죄 중에 허덕이는 모든 인간을 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 주 예수님을 주(主)라 시인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신앙이란, 내 죄 때문에 죄 없으신 주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 예수님의 공로만 남고 우리는 그 주 예수님의 공로로 혜택을 입고 사는 자가 됩니다. 장차 도래할 천년왕국을 일컬어 아들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아들만 높임 받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러자면 아들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은 모두가 주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은 죄인이 지킬 수도 없는 말씀을 주셔서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고 주 예수님의 용서하심으로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를 짓는 것을 이렇게 비유를 합니다.
절지동물인 ‘거미’하고, 갑각류의 ‘영덕대게’하고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다리가 여러 개 달렸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미하고 영덕대게는 걷는 것이 완전 다릅니다. ‘거미는 앞으로’ 걷는데, ‘영덕대게는 옆으로’ 걷습니다. 영덕 대게는 옆으로 갑니다. 영덕대게는 앞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옆으로 기어가는 것이 본성입니다. 앞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습니다. 마치 주님의 말씀대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신분상으로는 의인인데 실제로는 죄인입니다. 그런 죄인에게 주 예수님이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에 주눅이 들어 잠시 숨 고르기를 하다가 다시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러면 주 예수님이 “다시 죄짓지 말란 말이야!”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숨죽이고 있다가 또다시 죄를 짓습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무한 반복을 거듭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영덕대게에게 아무리 앞으로 가라고 해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듯이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해도 돌아서고 나면 또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족속들입니다. 이런 줄을 뻔히 아시면서도 주 예수님이 “다시는 죄짓지 말라.”라는 것은 죄를 짓지 않게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죄 아래서 나올 수 없는 우리를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너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너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에서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잊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 예수님께서 다시는 범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시선(視線)을 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고정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모든 말씀은 ‘율법적 기능’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주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도 율법적 기능을 담고 있습니다. 율법적 기능을 담고 있다 함은 죄를 더욱 죄 되게 드러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너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더 드러내고자 함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죄를 드러나게 하는 이유는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룬 정죄함이 없는 세계의 놀라운 축복을 깨닫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즉 주 예수님의 피 뿌리심에 고마움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구제 불능의 죄인이 용서받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귀한 은혜인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충성을 끄집어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을 끄집어내는 것도 아닙니다.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죄 용서받았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 감사함이 때로는 헌신으로 봉사로 나타날 뿐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율법이 없어진 줄 압니다. 복음을 말하면서도 율법 폐기론자들이 있습니다. 율법은 주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주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는 줄 압니다.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주 예수님 밖에서 율법을 볼 때는 지켜서 의(義)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것을 흔히 인간의 행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이 특성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아라는 주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아라는 주체가 무엇을 해도 자기가 하는 것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러니 죄인의 삶에 바탕에는 항상 자기 의가 깔려 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