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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산책(280)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5)

작성자김요한목사1112|작성시간23.04.22|조회수68 목록 댓글 0

 

 

 

 

 

 

 

요한복음 산책(280)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5)

 

그래서 오순절 약속의 성령님이 강림하니 백성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왜, 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율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고발하신 것입니까? 이는 아브라함 언약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좀 전에 아브라함 언약 백성은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고 한다면 그들에게 특권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로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죄인이 용서를 받고 천국에 가야 할 말이 없어집니다.

 

주 예수님이 몰고 온 정죄함이 없는 나라가 현재 천국입니다. 주 예수님의 세계는 율법으로 정죄하지 못하는 세계입니다. 주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행함으로 가지고 죄다 아니다 정죄당하지 않습니다.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심판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잘못했다고 천국에서 쫓아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주 예수님 안에 들어온 성도에게는 율법이 무슨 일을 하는 것입니까? 주 예수님 밖에서 율법은 인간의 행함에서는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주 예수님 안에서 율법은 어떤 활동을 하는 것입니까?

 

아까 율법은 죄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주 예수님 안에 들어온 성도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義人)입니다. 그런데 “왜, 율법이 필요 하느냐?”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정죄함이 없는 세계인 예수 안에 들어왔는데 무슨 율법이 필요하냐?”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죄가 없는 세계에는 율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죄를 고발하려고,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더는 율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는 죄를 해결한 자만 들어 온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주 예수님처럼 죄와 상관이 없는 부활의 몸으로 사니 율법이 더는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부활의 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의 몸으로 삽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어도 육신은 아담의 몸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아담의 몸으로 산다는 것은 죄가 주장한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몸은 죄 아래 팔린 몸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어도 아담의 속성 그대로 나옵니다.

 

아까 죄는 자아를 몰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아담의 몸으로 사는 사람은 주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자아 중심으로 살고자 합니다. 자기 몸 편한 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몸을 위해서 구원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구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필연적으로 내 몸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아담의 속성과 그리스도의 몸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새 사람이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 충돌 속에서 나타난 것이 로마서 7장의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는 로마서 7장의 사도 바울의 고백은 성령을 받고 난 후의 고백입니다. 즉 주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 토해내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무엇을 근거로 토해내고 있냐면, 율법입니다. 주 예수님이 율법의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는 율법은 결코 없어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 죄를 고발하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는 어떤 것이 죄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지 않고 자기 몸으로 사는 것이 죄입니다. 흔히들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죄라고 지적을 합니다.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너 왜, 주 예수님의 몸으로 네 마음대로 사느냐!”라고 책망을 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어도 아담의 몸으로 살고 있기에 율법은 여전히 아담의 몸으로 토해지는 죄를 고발해줘야 합니다. 이것은 잘라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어도 몸은 주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합니다. 몸의 특성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너 왜, 주님의 몸으로 부르심을 입어 놓고 너를 위해 사느냐!”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왜, 네 몸뚱어리를 주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살지 않고 네가 좋아하는 대로 사느냐!”라고 지적하십니다. “널 그렇게 살라고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줄 아느냐!”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그 책망을 받고 회개하게 됩니다. “아!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었지!”라고 돌이킵니다.

 

물론 돌이켜도 또다시 영덕대게처럼 또 본성대로 살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항상 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으로 남게 됩니다. 구원을 받았음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로 사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주심이 더욱 감사하도록 합니다. 이런 인간이 주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용서받고 사는 구나를 알고 감사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어던지는 날까지 율법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벗고 천국에 가면 율법은 소용없어집니다.

 

왜냐하면, 거긴 아담의 몸이 아니라 주 예수님과 같이 부활한 새로운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담의 몸으로 살아가는 날 동안은 율법은 항상 살아서 우리 죄를 고발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드러나게 하려고 고발합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무조건 감사하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들의 서신서들이 전부가 새로운 율법적 기능을 합니다. 모든 서신서는 성도에게 준 것이지 불신자들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말씀이 요구하는 것과 지금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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