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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HG] 서포터 포럼

[스크랩] [[역사토론]]1637년 1월 7일 광교산전투

작성자전상용|작성시간05.08.27|조회수766 목록 댓글 0


 

1636년 12월.... 청 태종은 약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조정이 침공의 사실을

 

알았을때는 청군이 황해도를 주파하고 있을때 였다. 조선조정은 우왕좌왕하면서 효과적인 대응책

 

을 찾지 못했고 청군이 서울외각에 당도할 무렵에야 부랴부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조선조정이 남한산성에 웅거한 이후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점령지에서

 

노략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의왕군과 의병이 조직되어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하게 되고 그 중 전라 병사 김준룡 장군이 이끄는 군대도 있었다.

 

 

김준룡 장군의 군대는 13일만에 남한산성 근처인 용인 광교산까지 진격하였다. 김준룡 장군은 군진

 

을 사각대형으로 형성하게 하고 식량과 화약을 사각진형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정찰병을

 

보내 청군이 광교산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광교산 곳곳에 복병을 두었다. 1선에

 

포수,2선에 사수,3선에 살수를 배치시켰다. 때는 1637년 1월 5일 이었다.

 

 

김준룡 장군 휘하의 군세는 불과 3800명....그들 중 상당수는 정규군이 아닌 의병 이었다.

 

반면 청군은 김준룡이 지휘하는 전라도 근왕병 수의 열갑절이나 되었다.

 

수만명의 청나라군이 경기도 용인 광교산으로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 청군은 광교산에 쇄도 했다. 그들은 김준룡의 군진을 기습공격하려고 했다. 청군의

 

기습전술은 여태까지 조선 의왕군을 격퇴하는데 유용하게 적용된 전술 이었다. 청군은 단숨에

 

광교산 정상으로 몰려들었다. 그 순간.....

 

 

 

조선군의 화살과 총탄 세례가 퍼부어지고 매복했던 살수들이 몰려나와 청군을 닥치는대로 찌르고 베기

 

시작했다. 골짜기는 좁았고 청군은 수가 많고 밀집되어 있었다. 청군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는

 

포수와 사수들은 우왕좌왕하는 청군을 닥치는대로 쏴죽였다.

 

 

결국 청군은 큰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하지만 전투는 그날만으로 끝난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청군은 재정비하고 광교산을 다시 공격했다. 광교산 전투의 승패는 이날의 전투에서

 

조선군이 광교산을 사수하는데 달려 있었다.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청군은 동남부의 조선군 진형을 돌파하고 조선군의 중앙으로

 

밀려들었다.그들은 호준포를 쏴대며 조선군을 압박했다. 오후 2시경에 광양현감 최택의 군대가

 

무너졌다. 김준룡 장군은 '이때야 말로 충신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때'라고 말하며 부하들을

 

진두지휘 했다.

 

 

새벽에 시작된 전투는 저녁이 되서까지 지속되었다. 청군의 가공할만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진은 무너지지 않았다. 결국 청군은 광교산에서 철수 했다. 조선군의 대승리 였다.

 

 

이날 금가면을 쓰고 청군을 지휘했던 청 태종의 사위 백양고라는 조선군 포수의 저격을 받고

 

전사했다. 광교산 전투에서 청나라군은 장수 3명을 잃고 수천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1794년 영의정 체제공이 광교산에 비문을 세우니

 

비명이 '충양공 김준용 전승지 병자청란공제호남병 근왕지차 살청삼대장

 

(忠襄公 金俊龍 戰勝地 丙子淸亂公提湖南兵 謹王至此 殺淸三大將)' 이었다.

 

 

그리고 청군을 격파한 골짜기는 호항곡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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