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순국 420주년, 그 죽음의 진실과 교훈
방 성 석/이순신연구가
이순신, 죽음의 진실
이순신이 순국하신 1598년 11월 19일은 칼바람 몰아치는 양력 12월 16일이었다. 420년 전 그날 그곳은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남해 관음포 앞바다였다. 이순신은 전날 밤 자정 무렵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갑판에 올라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지난 7년 동안 조선의 강토를 짓밟고 죄 없는 백성들을 도륙한 저 일본군을 단 한 척도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此讎若除 死卽無憾).”
먼동이 트기 전 이순신은 혼전 중 도망칠 출구를 찾지 못해 좌충우돌하는 일본군을 관음포 내항으로 몰아넣었다. 최후 발악하던 일본군 선단 사이로 여명이 비칠 무렵 문득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니 보는 이들이 모두 이상히 여기었다. 오호 애재라! 그 순간 이순신이 적탄에 쓰러지니 마지막 하신 말씀이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삼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을 숨겨 장졸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 하셨다.
이순신의 죽음을 기록한 『선조실록』의 기사다. “이순신이 이번 노량 해상에서 밤새워 혈전하여 적의 괴수를 불에 태워 죽이고 전함 2백여 척을 포획하기까지 하여 의기를 동남지역에 크게 떨치자 적추는 혼비백산하여 밤에 도망쳤으니 국가를 회복시킨 공에 있어서 이 사람이 제일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탄환에 맞아 목숨을 잃게 되었지만 숨을 거두면서도 조용히 처치하였으니 옛날 명장의 풍도를 지녔다고 이를 만하였습니다.”
피격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사료는 『은봉전서』였다. “장대 속에서 지휘하는 이순신의 위치를 가늠한 일본군들의 집중사격으로 부하 장수 송희립이 먼저 총탄에 맞았다. 보고를 받고 놀란 이순신이 굽혔던 몸을 펴는 순간 가슴에 총탄을 맞았다. 이순신이 숨을 거두자 군관 송희립은 적탄이 이마를 스쳐 찰과상만 입었을 뿐 간단한 치료 후 장대에 올라갔다. 그리고 이순신의 갑옷을 벗겨 자신이 걸쳐 입고 전투를 독려했다.”
이순신, 전사의 의미
이순신에겐 분명한 사생관이 있었다. 예컨대 정유년(1597) 임금이 이순신을 투옥시켜 죽이라 하였다. 핵심 죄목은 종적불토 부국지죄(從賊不討 負國之罪)였다. 적을 치지 않고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며, 법에 있어 용서할 수 없으니 율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반간계에 속은 임금 선조의 명백한 오판이었지만 조정의 여론은 매우 엄중했다. 이때 주위에서 사태가 위중하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걱정하자 이순신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죽게 되면 죽는 것이다(死生有命 死當死矣)”하였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임금을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임금 선조도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하고 회한했다. “나는 그대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나니 이승 저승 맺힌 원한 얼마나 슬픈 손가, 벼슬주고 조상한들 이내 회포 다할 손가”
이순신은 전쟁 내내 한손엔 칼을 잡고 다른 한손엔 죽음을 잡고 싸웠다. 내가 죽어 나라를 구하는 것(我死救國),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死以報國), 앞에 나가 싸우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던(進死爲榮) 이순신이다. 노량해전이 마지막 전투임을 알았던 이순신이기에 더욱더 일본군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도록, 다시는 조선을 넘보지 못하도록 발본색원하겠다는 사명감뿐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토사구팽 당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총알받이가 되었다는 자살설은 이순신의 사생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다. 운동선수가 운동장에서 죽겠다는 표현은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뛰겠다는 삶(生)에 방점이 찍혀있는 것이다. 이순신의 순국의 의미를 밝혀주는 명나라 부총병 이방춘이 선조에게 한 말이다. “이순신은 충신입니다. 이러한 인물이 십여 명만 있다면 왜적에 대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이순신, 순국의 교훈
이순신이 위대했던 것은 백전백승 싸워서 이긴 일만이 아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정책을 개발하고 대안을 마련했던 것이다. 예컨대, 일본의 침략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평양성마저 무너지자 임금은 의주까지 피난했다. 국방의 붕괴였다. 이순신은 거북선 창제 등 혁신무기를 개발하며 필사즉생의 정신으로 나라를 지켰으니 창조국방이었다. 전란 중에 백성들이 굶어죽어 시체가 길가에 즐비하고 심지어 식인까지 서슴지 않으니 민생경제의 파탄이었다. 이순신은 둔전 경작으로 식량을 마련하고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 군량을 조달하니 경제자립이었다. 전투에 앞서서는 참모들에게 계교를 물어 전략을 세웠고, 정책이 표류하면 임금에게 직언하고 정적에게도 협력을 구했다. 명나라 지원군엔 강온 양면의 외교력으로 처벌권과 지휘권을 양보 받으니 소통과 협력의 안보외교였다. 고관들의 정실인사가 줄을 잇자 이순신은 “이러고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 할 수 있겠는가?” 한탄했다. 자신도 권문세가에 줄 대기를 거절했고 자식도 상피제를 준수하니 과거에 오르지 못했다. 원칙과 규정의 공정인사였다.
지금은 경제·안보·외교 등 동시 다발적 악재가 몰려오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의 국면이다. 충무공 이순신 순국 420주년을 맞아 고비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았던 지혜와 교훈을 새겨야 할 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