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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선생의 미수 기언에 수록된 인물록

작성자장달수|작성시간13.01.08|조회수871 목록 댓글 1

미수 기언에 수록된 인물록

미수 선생의 문집 기언을 읽으면서 수록된 인물을 찾아 정리를 해보면 선생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용이 할까하여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는 글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여러 곳에 자 호 인명이 생략되어 있는 분들은 제가 천학하여 고증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후일 문집을 면밀하게 공부하면 보완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인동 장달수

 

수록 된 자료의 양이 많아 원문 일부와 목차만 올립니다.

 

=목차=

*수로왕(首露王) 미상∼199. 가락국(또는 金官伽倻)의 시조.

재위 42∼199. 수릉(首陵)이라고도 한다.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許黃玉) 미상∼188.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비.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하며, 김해김씨(金海金氏)·와 모든 허씨(許氏)의 시조모이다

*신숭겸(申崇謙)미상∼927년(태조 10). 고려 태조 때의 무장.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안향(安珦)1243년(고종 30)∼1306년(충렬왕 32). 고려시대의 명신(名臣)‧학자.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허백(許伯)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공암(孔巖 : 지금의 서울 양천구). 첨의중찬(僉議中贊) 공(珙)의 손자

*최영(崔瑩) 1316년(충숙왕 3)∼1388년(우왕 14). 고려 후기의 명장.

본관은 창원(昌原). 평장사(平章事)유청(惟淸)의 5세손,

*이색(李穡)1328년(충숙왕 15)∼1396년(태조 5). 고려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원천석(元天錫) 1330년(충숙왕 17)∼미상. 고려말과 조선초의 은사(隱士).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우현보(禹玄寶)1333년(충숙왕 복위 2)∼1400년(정종 2).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공(原功).

*서견(徐甄)생졸년 미상.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이천(利川).

*권근(權近) 1352(공민왕 1)∼1409(태종 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

*강회백(姜淮伯) 1357(공민왕 6)∼1402(태종 2). 고려 말ㆍ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

*강석덕(姜碩德) 1395(태조 4)∼1459(세조 5). 조선 전기의 문신. 강회백(姜淮伯)의 아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

*황희(黃喜) 1363(공민왕 12)∼1452(문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허기(許愭) 1365년(공민왕 14)~1431년(세종 13)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원덕(原德) 호는 매헌(梅軒) 매수(梅叟)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시(李褆). 1394(태조 3)∼1462(세조 8). 조선 전기의 왕자.

자는 후백(厚伯). 태종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제(霽)의 딸이다

*황보인(皇甫仁) 미상∼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 자는 사겸(四兼)·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

*권람(權覽) 1416(태종 16)∼1465(세조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김종직(金宗直) 1431(세종 13)∼1492(성종 23).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밀양 출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김시습(金時習)1435년(세종 17)∼1493년(성종 24).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허훈(許薰) 생졸년 미상 성종조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자방(子芳)

*이심원(李深源)1454년(단종 2)∼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연(伯淵), 호는 성광(醒狂)‧묵재(默齋)‧태평진일(太平眞逸).

*조지서(趙之瑞) 1454년(단종 2)∼1504년(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백부(伯符), 호는 지족(知足) 또는 충헌(忠軒).

*임평(林枰) 1462년(세조 8)∼1522년(중종 17). 조선 전기의 무신. 미수 선생 외 선조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균보(均甫)

*임진(林晉) 1526년(중종 21)∼1587년(선조 20). 조선 전기의 무신.미수 선생 외 선조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희선(希善)..

*임제(林悌)1549년(명종 4)∼1587년(선조 20). 조선 중기의 시인. 미수 선생 외조부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김천령(金千齡) 1469(예종 1)∼1503(연산군 9). 조선 전기의 문신. 미수 선생 선외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인로(仁老).

*김만균(金萬鈞) ?∼1549(명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미수 선생 선외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임(仲任).

*정희량(鄭希良)1469년(예종 1)∼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

*이정은(李貞恩) 생졸년 미상 전기의 종실(宗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중(正中), 호는 월호(月湖)ㆍ설창(雪窓)ㆍ남곡(嵐谷).

*박영(朴英) 1471(성종 2)∼1540(중종 35). 조선 중기의 무신. 선산 출신

본관은 밀양(密陽) .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권벌(權撥) 1478년(성종 9)∼1548년(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안동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훤정(萱亭)·송정(松亭).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1543(중종 38).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조광조(趙光祖) 1482년(성종 13)∼1519년(중종 14). 서울 출생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이원(李黿) 미상∼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낭옹(浪翁), 호는 재사당(再思堂).

*이별(李鼈) 연산군 때 인물

본관은 경주로, 자는 낭선(浪仙)이며, 호는 장륙당(藏六堂)

*정사룡(鄭士龍)1491년(성종 22)∼1570년(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

*송순(宋純) 1493(성종 24)∼1582(선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김수온(金粹溫) 생졸년 미상 미수 선생의 조부의 외조부

본관은 경주(慶州)

*허자(許滋) 1496(연산군 2)∼1551(명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남중(南仲), 호는 동애(東崖).

*이준경(李浚慶) 1499(연산군 5)∼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

*함천군(咸川君) 이억재(李億載) 1503년(연산군 9)∼1585년(선조 18). 조선 전기의 종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대년(大年).

*정렴(鄭𥖝) 1505년(연산군 11)∼1549년(명종 4). 조선시대 중종 때의 유의(儒醫).

본관은 온양(溫陽)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

*정사현(鄭思顯) 1509(중종 4)∼1564(명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미(伯微).

*이정(李楨)1512년(중종 7)∼1571년(선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성(東城). 자는 강이(剛而), 호는 구암(龜巖).

*박지화(朴枝華) 1513(중종 8)∼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수암(守庵).

*노수신(盧守愼) 1515(중종 10)∼1590(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

*권동보(權東輔) 1517(중종 12)∼1591(선조 24). 봉화 유곡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진경(震卿), 호는 청암(靑巖).

*임운(林芸) 1517(중종 12)∼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언성(彦成), 호는 첨모당(瞻慕堂)ㆍ노동(蘆洞).

*배신(裵紳) 1520(중종 15)∼1573(선조 6).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경여(景餘), 호는 낙천(洛川).

*허강(許橿) 1520(중종 15)∼1592(선조2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사아 (士牙), 호는 송호(松湖)·강호거사(江湖居士).

*노극신(盧克愼) 1524(중종 19)∼1598년(선조 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무회(無悔), 호는 후재(厚齋).

*조목(趙穆) 1524년(중종 19)∼1606년(선조39). 경상북도 예안 출신.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강극성(姜克誠 ) 1526(중종 21)∼1576(선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실(伯實), 호는 취죽(醉竹).

*박광옥(朴光玉) 1526(중종 21)∼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이양원(李陽元)1526(중종 21)∼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

*이지남(李至男) 1529(중종 24)∼1577(선조 10).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단례(端禮), 호는 영응선생(永膺先生).

*정개청(鄭介淸) 1529년(중종 24)∼1590년(선조 23). 나주 출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困齋).

*최영경(崔永慶) 1529년(중종 24)∼1590년(선조 23). 서울 출생.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

*정작(鄭碏)1533년(중종 28)∼1603년(선조 36).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경(君敬), 호는 고옥(古玉).

*정두(鄭斗) 생졸년 미상.

본관은 진양(晉陽), 호는 동산옹(東山翁). 진주 출신

*조종도(趙宗道) 1537(중종 32)∼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문신. 청송 출신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大笑軒).

*강서(姜緖) 1538년(중종 33)∼1589년(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원경(遠卿), 호는 난곡(蘭谷).

*이산해(李山海) 1539년(중종 34)∼1609년(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최립(崔岦) 1539년(중종 34)∼1612년(광해군 4).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동고(東皐).

*김우옹(金宇顒) 1540년(중종 35)∼1603년(선조 36). 성주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홍가신(洪可臣) 1541(중종 36)∼1615(광해군 7).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

*김현성(金玄成) 1542(중종 37)∼1621(광해군 13). 조선 중기의 선비 서화가.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여경(餘慶), 호는 남창(南窓).

*류성룡(柳成龍)1542년(중종 37)∼1607년(선조 40) 안동 하회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이경중(李敬中) 1542(중종 37)∼1604(선조 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직(公直), 호는 단애(丹崖).

*한준(韓準) 1542(중종 37)∼1601(선조 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 자는 공칙(公則), 호는 남강(南崗).

*한오필(韓五弼)

이조판서 한준(韓準)의 증손자이다.

*한오규(韓五奎) 자는 문서(文瑞) 이조판서 한준(韓準)의 증손자이다.

*남치리(南致利) 1543(중종 38)∼1580(선조 13). 조선 중기의 학자. 안동 출신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중(成仲)ㆍ의중(義仲). 호는 비지(賁趾).

*정구(鄭逑)1543년(중종 38)∼1620년(광해군 12). 성주 출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송선(宋瑄) 1544(중종 39)∼1629(인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중회(仲懷), 호는 목옹(木翁)ㆍ양지정(養志亭).

*정언옹(鄭彦㝘) 1545년(인종1)~1612년(광해군4)

자는 우용(宇容) 호는 총산(蔥山)

*조호익(曺好益) 1545(인종 1)∼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창원 출생.

*노대하(盧大河) 1546(명종 1)∼1610(광해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 자는 수오(受吾), 호는 이소당(履素堂).

*배흥립(裵興立) 1546(명종 1)∼1608(선조 4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백기(伯起).

*우복룡(禹伏龍) 1547(명종 2)∼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현길(見吉), 호는 구암(懼庵) 또는 동계(東溪).

*이원익(李元翼)1547년(명종 2)∼1634년(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선생의 처조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김창일(金昌一 ) 1548(명종 3)∼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형길(亨吉), 호는 사한(四寒).

*허욱(許頊) 1548(명종 3)∼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 자는 공신(公愼), 호는 부훤(負暄).

*곽기수(郭期壽) 1549(명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강진(康津).출신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미수(眉壽), 호는 한벽당(寒碧堂).

*윤형(尹泂) 1549(명종 4)∼1614(광해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이원(而遠), 호는 퇴촌(退村).

*홍적(洪迪) 1549(명종 4)∼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한양 거주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태고(太古)·준도(遵道), 호는 양재(養齋)·

*홍유부(洪有阜)1617년(광해군 9)~미상. 홍적(洪迪)의 손자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자후(子厚)이다.

*곽재우(郭再祐)1552년(명종 7)∼1617년(광해군 9). 경상도 의령 출신.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권협(權悏) 1553(명종 8)∼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

*권현(權晛) 1554(명종 9)~1594년(선조 2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가(晦可),

*이순신(李純信) 1554(명종 9)∼1611(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입부(立夫).

*장현광(張顯光) 1554년(명종 9)∼1637년(인조 15).  인동 출신. 필자의 선조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문위(文緯) 1554(명종 9)∼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거창(居昌) 출신.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순부(純夫), 호는 모계(茅溪).

*이덕연(李德演) 1555(명종 10)∼1636(인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윤백(潤伯), 호는 이수옹(二水翁).

*이항복(李恒福) 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서울 필운동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白沙).

*김용(金涌) 1557(명종 12)∼1620(광해군 12). 조선 중기의 문신. 안동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이영도(李詠道) 1559(명종 14)∼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안동 출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성여(聖與), 호는 동암(東巖).

*차운로(車雲輅) 1559년(명종 14)∼미상.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만리(萬理), 호는 창주(滄洲).

*기자헌(奇自獻) 1562년(명종 17)∼1624년(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행주(幸州). 초명은 기자정(奇自靖), 자는 사정(士靖), 호는 만전(晩全).

*이유징(李幼澄) 1562(명종 17)∼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징원(澄源).

*최동식(崔東式) 1562(명종 17)∼1614(광해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삭녕(朔寧) . 자는 정칙(正則). 호는 율정(栗亭).

*허량(許亮) 1563년(명종 18)~1589년(선조 22) 미수선생의 仲父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명언(明彦) 경룡(景龍)

*허적(許적) 1563(명종 18)∼1641(인조 19). 조선 중·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자하(子賀), 호는 수색(水色).

*권득경(權得慶) 1565(명종 20)∼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선길(善吉).

*이의수(李義壽) 1565년(명종 20)~1623년(인조 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의수(宜叟)

*이덕형(李德泂) 1566(명종 21)∼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竹泉).

*강주(姜籒) 1567(명종 22)∼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고(師古), 호는 채진자(采眞子)ㆍ죽창(竹窓).

*허교(許喬) 1567년(명종 22) ∼ 1632년(인조 10)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유악(維岳)·수옹(壽翁).

*이구징(李久澄) 1568(선조 1)∼1648(인조 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징원(澄源), 호는 백촌(栢村).

*이유청(李幼淸) 1568년(선조 1)~1624년(인조 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청원(淸源)

*이의전(李義傳)1568년(선조 1)∼1647년(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미수 선생 처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의중(宜仲).

*이중무(李重茂) 1568(선조 1)∼1629(인조 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회부(晦敷), 호는 남계(柟溪).

*허휘(許徽) 1568(선조 1)∼1652(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휘지(徽之), 호는 퇴암(退菴).

*박진영(朴震英) 1569년(선조 2)∼1641년(인조 19).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실재(實哉), 호는 광서(匡西)

*박오(朴旿) 평산부사 박진영(朴震英)의 아버지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희태(泰煕)

*이윤우(李潤雨)1569년(선조 2)∼1634년(인조 12). 성주 출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정온(鄭蘊) 1569년(선조 2)∼1641년(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정창시(鄭昌詩)

동계 정온의 아들

*허완(許完) 1569(선조 2)∼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자고(子固).

*양응심(梁應深) 1570년(선조 3)∼1632년(인조 1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南原).

*이명(李溟) 1570(선조 3)∼1648(인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 자는 자연(子淵), 호는 구촌(龜村).

*권진(權縉)1572년(선조 5)∼1624년(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운경(雲卿), 호는 수은(睡隱).

*백홍제(白弘悌) 1572(선조 5)∼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무장.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여순(汝順).

*최기벽(崔基鐴) 1573년(선조 6)∼1645년(인조 23). 원주 출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자근(子勤)

*한선일(韓善一) 1573년(선조 6)~1653년(효종 4)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극경(克敬)

*허쟁(許崝) 1573(선조 6)∼1663(현종 4).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탁보(卓甫).

*김수렴(金守廉) 1574(선조 7)∼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지혼(志渾), 호는 야당(野堂).

*배상룡(裵尙龍) 1574년(선조 7)∼1655년(효종 6). 성주 출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성준구(成俊耉) 1574(선조 7)∼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덕보(德甫), 호는 장곡(藏谷).

*이윤서(李胤緖) 1574(선조 7)∼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선승(善承).

*권신중(權信中) 1575년(선조 8)~1634년(인조 12)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집(君執)

*목대흠(睦大欽) 1575(선조 8)∼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 자는 탕경(湯卿), 호는 다산(茶山) 또는 죽오(竹塢).

*신삼익(慎三益) 1575년(선조 8)~1658년(효종 9)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사우(士友) 호는 사교재(四矯齋)

*유희량(柳希亮) 1575(선조 8)∼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용경(龍卿), 호는 제교(霽嶠)ㆍ봉음(峯陰).

*한여직(韓汝溭) 1575(선조 8)∼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안(仲安), 호는 십주(十洲).

*남이흥(南以興) 1576(선조 9)∼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

*박수근(朴守謹) 1576년(선조 9)~예천(醴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경정(景靜)

*박운(朴蕓) 박수근(朴守謹)의 아버지

*이성원(李性源) 1576(선조 9)∼1629(인조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복초(復初).

*이정호(李挺豪)1578년(선조 11)∼1639년(인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언(英彦), 호는 사심(師心). 만각(晩覺)

*송시범(宋時范) 1579(선조 12)∼1623(인조 1). 조선 중ㆍ후기의 무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희문(希文)

*이순형(李純馨) 1579년(선조 12)∼1648년(인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훈(季薰).

*황종해(黃宗海) 1579년(선조 12)∼1642년(인조 2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회덕(懷德). 자는 대진(大進). 호는 후천(朽淺)

*나위소(羅緯素) 1583(선조 16)∼1667(현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계빈(季彬).

*정세규(鄭世規) 1583(선조 16)∼1661(현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군칙(君則), 호는 동리(東里).

*정응원(鄭凝遠) 1583년(선조 16)~1615년(광해군 7)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완(士完) 호는 관수(觀水)

*허친(許𡩁) 1583년(선조 16)~1625년(인조 3)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종지(宗之)

*송석우(宋錫祐) 1584년(선조 17)

본관 진천(鎭川) 자 계신(季愼)

*이성구(李聖求) 1584(선조 17)∼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동사(東沙).

*강탁(姜逴)1585년(선조 18)∼1665년(현종 6).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달(汝達), 호는 광재(光齋).

*강학년(姜鶴年) 1585(선조 18)∼1647(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 자는 자구(子久), 호는 복천(復泉)ㆍ자운(紫雲).

*이지영(李之英) 1585년(선조 18)∼1639년(인조 17)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실(子實) 호는 수월당(水月堂)

*조임도(趙任道) 1585(선조 18)∼1664(현종 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덕용(德勇), 호는 간송당(澗松堂).

*김준룡(金俊龍) 1586(선조 19)∼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수부(秀夫).

*권근중(權謹中) 1586년(선조 19)~1650년(효종 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정(汝精)

*심대부(沈大孚) 1586(선조 19)∼1657(효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신숙(信叔), 호는 가은(嘉隱)ㆍ범재(泛齋).

*조경(趙絅) 1586년(선조 19)∼1669년(현종 10). 서울 출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峰).

*윤선도(尹善道) 1587년(선조 20)∼1671년(현종 12). 해남 출신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김영구(金永耇) 1588년(선조 21)~1654년(효종 5)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자수(子壽)

*이창원(李昌源) 1588년(선조 21)~1654년(효종 5)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길보(吉甫)

*정백창(鄭百昌) 1588(선조 21)∼1635(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여(德餘), 호는 현곡(玄谷)

*허후(許厚)1588년(선조 21)∼1661년(현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중경(重卿), 호는 관설(觀雪)‧돈계(遯溪)‧일휴(逸休).

*문계달(文繼達) 생졸년 미상. 조선 효종 때의 효자.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비승(丕承)

*정희성(鄭希聖) 1589년(선조 22)~1638년(인조 16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유립(有立).

*정동석(鄭東奭)

본관은 해주(海州) 아버지는 미수선생과 동문수학한 정희성(鄭希聖)이다

*구치용(具致用) 1590(선조 23)∼1666(현종 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기지(器之), 호는 우교당(于郊堂) 또는 고산(高山).

*이명웅(李命雄) 1590년(선조 23)∼1642년(인조 2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이(珽而), 호는 송사(松沙).

*이수약(李守約) 1590년(선조 23)∼1668년(현종 9).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이성(而省).

*정백형(鄭百亨) 1590(선조 23)∼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후(德後).

*강대수(姜大遂) 1591(선조 24)∼1658(효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대진(大進). 자는 면재(勉哉)ㆍ학안(學顔), 호는 한사(寒沙)ㆍ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 1592년(선조 25)∼1656년(효종 7). 조선 중기의 종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숙(敬叔), 호는 담은당(湛恩堂).

*김세렴(金世濂) 1593(선조 26)∼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하홍도(河弘度) 1593(선조 26)∼1666(현종 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 자는 중원(重遠), 호는 겸재(謙齋).

*배상호(裵尙虎)1594년(선조 27)∼1632년(인조 10). 조선 중기 유학자. 성주 출신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자는 계장(季章)이며, 호는 괴재(愧齋)

*권대임(權大任) 1595년(선조 28)∼1645년(인조 23). 조선 중기의 서예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홍보(弘輔).

*권을(權乙) 1595,년(선조28)

자는 차갑(次甲) 창원 출신 효자

*민광훈(閔光勳)1595년(선조 28)∼1659년(효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집(仲集)

*이경석(李景奭) 1595(선조 28)∼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

*조속(趙涑)1595년(선조 28)∼1668년(현종 9). 조선 후기의 서화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온(希溫)‧조경온(趙景溫), 호는 창강(滄江)

*홍우정(洪宇定)1595년(선조 28)∼1656년(효종 7). 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계곡(桂谷).

*홍극(洪克)

자는 극기(克己) 아버지는 홍우정(洪宇定)

*김남중(金南重) 1596(선조 29)∼1663(현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진(自珍), 호는 야당(野塘).

*이오(李澳) 1596년(선조 29)∼1665년(현종 6). 조선 중기의 종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첨(伯瞻).

*임담(林墰)1596년(선조 29)∼1652년(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재숙(載叔), 호는 청요(淸曜)‧청구(淸癯).

*장문익(蔣文益) 1596년(선조 26)~1652년(효종 3). 조선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아산(牙山). 자는 명보(明輔), 호는 조경당(釣耕堂).

*민응협(閔應協) 1597(선조 30)∼1663(현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인보(寅甫), 호는 명고(鳴皐)·창주(滄洲).

*이심(李襑) 1597년(선조 30)~1648년(인조26)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첨(子瞻),

*권위중(權偉中),1598년(선조 31)~1629년(인조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언(君彦)

*김시온(金是榲) 1598(선조 31)∼1669(현종 1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이승(以承), 호는 도연(陶淵)ㆍ표은(瓢隱).

*박길응(朴吉應) 1598년(선조 31)∼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일(德一), 호는 진정재(眞靜齋).

*심광수(沈光洙) 1598(선조 31)∼1662(현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희성(希聖), 호는 노연(魯淵).

*이후석(李後奭) 1598(선조 31)∼1666(현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보(君保).

*허박(許博)1598년(선조 31)∼1638년(인조 16).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약(汝約)

*이진무(李晉茂)) 미상 연천 출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경(茂卿) 호는 취우옹(醉愚翁)

*유명립(柳命立) 1600년(선조 33)∼1647년(인조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낙천(樂夫).

*이적(李嫡), 1600년(선조 33)~1627년(인조 5)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대유(大有),호는 호선(壺仙)

*김수홍(金壽弘) 1601(선조 34)∼1681(숙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이경항(李慶恒) 1601(선조 34)∼1643(인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사상(士常)ㆍ중구(仲久).

*임유후(任有後) 1601(선조 34)∼1673(현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효백(孝伯), 호는 만휴(萬休).

*허의(許懿) 1601년(선조 34)~1668년(현종 9) 미수 선생 동생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중휘(仲徽)

*이도장(李道長)1603년(선조 36)∼1644년(인조 22). 칠곡 출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태시(泰始), 호는 낙촌(洛村).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 1603(선조 36)∼1655(효종 6). 조선 중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고(子固).

*이행원(李行源) 1603(선조 36)∼1667(현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백초(百初).

*권시(權諰)1604년(선조 37)∼1672년(현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

*배시량(裵時亮) 1604(선조 37)∼1657(효종 8).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명(子明).

*인흥군(仁興君) 이영(瑛)1604(선조 37)∼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왕자.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영(瑛). 자는 가온(可韞), 호는 취은(醉隱)

*이완(李梡) 1604(선조 37)∼1649(인조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완(子完).

*홍호(黃㦿) 1604(선조 37)∼1656(효종7).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자유(子由), 호는 만랑(漫浪).

*엄정구(嚴鼎耉) 1605(선조 38)∼1670(현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 자는 중숙(重叔), 호는 창랑(滄浪).

*이만(李曼) 1605(선조 38)∼1664(현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이다. 자는 지만(志曼)

*정지호(鄭之虎) 1605(선조 38)∼1678(숙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피(子皮), 호는 무은(霧隱).

*정행백(鄭行百) 1632년(인조 10)~1711년(숙종 37)

본관 동래(東萊) 자 효원(孝源) 정지호(鄭之虎)의 아들

*홍우원(洪宇遠)1605년(선조 38)∼1687년(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군징(君徵), 호는 남파(南坡).

*곽성구(郭聖龜) 1606(선조 39)∼1668(현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문징(文徵).

*송준길(宋浚吉) 1606(선조 39)∼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이적(李積) 1606년(선조 39)~1633년(인조 11)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대축(大畜)

*권일(權佾) 1608년(선조 41) 서울 거주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만(子萬)

*임준(任濬) 1608년(선조 41)~ 1675년(숙종 1) 평산(平山) 출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백심(伯深)

*노경명(盧景命) 1609년(광해군 1)~1667년(현종 8)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정보(正甫)

*이경항(李景沆) 1609(광해군 1)∼1673(현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목행선(睦行善) 1609(광해군 1)∼1663(현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행지(行之), 호는 남간(南磵).

*이돈임(李惇臨) 1609년(광해군 1)

본관은 연안(延安) 자 여길(汝吉)

*홍언(洪琂) 1609년(광해군 1)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계윤(季閏)

*오정일(吳挺一) 1610(광해군 2)∼1670(현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 자는 두남(斗南), 호는 구사(龜沙).

*이유형(李惟馨) 1610년(,광해군 2)~1678년(숙종 4)

본관은 전주(全州) 자가 문원(聞遠)

*권적(權蹟) 1611년(광해군 3)~1652년(효종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유(聖由)

*정창기(鄭昌基) 1611년(광해군 3) 서울 거주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가(克家)

*한상오(韓相五) 1611년(광해군 3)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천수(天授)

*권대운(權大運)1612년(광해군 4)∼1699년(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시회(時會), 호는 석담(石潭).

*허서(許舒) 1612년(광해군 4)~1661년(현종 2) 미수선생의 동생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공숙(恭叔)

*백서우(白瑞羽) 1613년(광해군 5)~1667년(현종 8)

본관은 수성(隋城) 자는 운정(雲程)*

*권목(權穆) 1614년(광해군 6)∼1663년(현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여(泰如).

*오정위(吳挺緯) 1616(광해군 8)∼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군서(君瑞) 또는 서장(瑞章), 호는 동사(東沙).

*최후량(崔後亮) 1616(광해군 8)∼1693(숙종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한경(漢卿), 호는 정수재(靜修齋).

*윤휴(尹鑴)1617년(광해군 9)∼1680년(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갱(鍞),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

*이명익(李溟翼) 1617(광해군 9)∼1687(숙종 13). 안동 출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만리(萬里), 호는 반초당(反招堂).

*권수(權脩) 1618년(광해군 1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영숙(永叔)

*이관징(李觀徵) 1618(광해군 10)∼1695(숙종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국빈(國賓), 호는 근옹(芹翁)ㆍ근곡(芹谷)

*이상정(李象鼎) 1618년(광해군 10)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공섭(公燮)

*구훤(具翧) 1619년(광해군 11) 서울 출신 무관

본관 능성(綾城) 자 운거(雲擧)

*이진규(李震奎) 1619년(광해군 11)~1665년(현종 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휴(文休)

*한은(韓垽) 1619(광해군 11)∼1688(숙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징(仲澄), 호는 만은(漫隱).

*권대재(權大載) 1620(광해군 12)∼1689(숙종 1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거(仲車), 호는 소천(蘇川).

*남몽뢰(南夢賚)1620년(광해군 12)∼1681년(숙종 7). 의성 출신

본관은 영양(英陽)이고, 자는 중준(仲遵)이며, 호는 이계(伊溪)

*한오상(韓五相) 1620년(광해군 12)~1656년(효종 7)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세익(世翊)

*홍여하(洪汝河)1620년(광해군 12)∼1674년(현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조위봉(趙威鳳) 1621(광해군 13)∼1675(숙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문(鹿門).

*허정(許珽) 1621(광해군 13)∼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중옥(仲玉), 호는 송호(松湖).

*권상준(權尙準) 1622년(광해군 14) 서울 거주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평(叔平)

*유형원(柳馨遠)1622년(광해군 14)∼1673년(현종 14).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울 출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곽제화(郭薺華) 1625(인조 3)∼1675(숙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중망(仲望).

*조성(趙䃏) 1625년(인조 3)~1680년(숙종 6)

본관 평양(平壤) 자 숙옥(叔玉)

*경최(慶㝡) 1626(인조 4)∼1688(숙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낙선(樂善), 호는 신강(新江).

*여증제(呂曾齊) 1626년(인조 4)

본관 함양(咸陽) 자 여로(汝魯)

*김학배(金學培) 1628(인조 6)∼1673(현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안동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천휴(天休), 호는 금옹(錦翁).

*김하진(金夏振) 1628년(인조 6)~1664년(현종 5)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숙옥(叔玉)

*이지렴(李之濂)1628년(인조 6)∼1691년(숙종 1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양이(養而), 호는 치암(恥菴).

*박신규(朴信圭) 1631(인조 9)∼1687(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봉경(奉卿), 호는 죽촌(竹村).

*허순(許珣) 1633년(인조 11)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숙옥(叔玉)

*김덕원(金德遠)1634년(인조 12)∼1704년(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장(子長), 호는 휴곡(休谷).

*이익구(李益龜) 1634년(인조 12) 서울 거주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붕(百朋)

*윤이후(尹爾厚) 1636년(인조 14)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재경(載卿)

*이우(李俁)1637년(인조 15)∼1693년(숙종 19). 조선 중기의 종실출신 서화가.

본관은 전주(全州).자는 석경(碩卿), 호는 관란정(觀瀾亭).

*이상좌(李上佐) 조선 전기 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우(公祐), 호는 학포(學圃).

*강진휘(姜晉暉)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서(子舒), 호는 호계(壺溪)

*윤재(尹材)

본관은 남원(南原)

*남궁억(南宮億) 1639년(인조 17) 거주지 마전(麻田)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대년(大年)

*이봉징(李鳳徵) 1640(인조 18)∼1705(숙종 3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명서(鳴瑞), 호는 은봉(隱峰).

*노사제(盧思齊) 1642년(인조 20) 거주지 충주(忠州)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면숙(勉叔)

*이인징(李麟徵) 1643년(인조 21)∼1729년(영조 5).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옥서(玉瑞)이고, 호는 운강(雲崗)

*권성중(權聖中) 1644년(인조 22) 서울 거주

본관 안동(安東) 자는 자시(子時)

*이준(李浚) 1644년(인조 2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원(景遠)

*장만원(張萬元) 1645년(인조 23)~1689년(숙종 15) 경상도 인동 출신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구지(久之)

*한숙(韓塾) 1646년(인조 24) 서울 거주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수이(受而)

*권규(權珪) 1648(인조 26)∼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국서(國瑞)ㆍ덕장(德章), 호는 남록(南麓).

*이택(李澤) 1661년(현종 2)

본관 한산(韓山) 자 광중(光仲) 호 운곡(雲谷) 276명

 

이익(李瀷) 1681(숙종 7)∼1763(영조 39). 조선 후기의 실학자. 신도비 명 찬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

 

수로왕(首露王) 미상∼199. 가락국(또는 金官伽倻)의 시조.

재위 42∼199. 수릉(首陵)이라고도 한다.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탄생과 치적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전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직 나라가 없던 시절에 가락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3월 어느 날 하늘의 명을 받아 9간(九干 : 族長)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갔다. 그 곳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춤추고 노래하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로 싼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태양처럼 둥근 황금색 알이 6개 있었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남아가 차례로 태어났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라 하였다. 주민들은 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모셨고, 다른 남아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이때가 42년(후한 건무 18)이었다고 한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해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천신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왕녀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157년을 재위하다가 죽었는데, 아들이 그 뒤를 이어 거등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적 내용이어서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신화는 구조상으로 볼 때, 신성한 왕권의 내력을 풀이한 천강난생(天降卵生) 신화로서 한국 고대 국가 성립기에 흔히 보이는 건국 시조 신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황금빛 천강 등으로 상징되는 북방으로부터 이주해 온 유이민 집단이 낙동강 하구 유역의 토착 선주민들과 결합해 초기 국가를 형성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아울러 수로가 6개의 알 중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는 표현은 가락국(금관가야)을 중심으로 가야 제국을 통합하려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 신화에서 3월에 목욕재계하고 잡스러움을 떨쳐 버리는 발계(祓禊) 의식을 거행한 뒤, 구지봉과 같은 성스러운 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하고 춤과 노래로 의식을 베풀어 한 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며, 그 곳에서 집단의 수장(首長)을 선출하고, 이 때 뽑힌 수장은 하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는 것으로 여겼던, 국가체 형성 이전 단계의 소박한 사회 풍속과 정치 운영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수로왕이란, 곧 이러한 단계에서 김해 지역에 존재했음직한 수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수로왕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합병된 후에도 가야의 시조로서 계속 봉사(奉祀)되었다. 문무왕은 수로왕릉의 위전(位田)을 설치해 후손에게 능묘의 제례를 계속하게 했으며, 그것은 고려시대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에서는 금관가야의 시조를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해 서로 비교가 된다.

 

기언 제41권 원집

 

허씨 선묘 비문 석지(許氏先墓碑文石誌)

 

가락국군(駕洛國君) 수로왕(首露王) 납릉비음기(納陵碑陰記)

수로왕(首露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고(先古) 시대에 천지의 상서(祥瑞)로운 기운을 받고 화생(化生)하여 처음으로 생민(生民)의 조상(祖上)이 되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소호 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後裔)인데 동한 광무황제(東漢光武皇帝) 건무(建武) 18년(42)에 왕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호(號)를 임금이라 하였다.’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신명(神明)의 후예에 구간(九干)이 있었는데 그들이 함께 수로(首露)를 높여 왕으로 삼고 가락(駕洛)에 도읍하였다. 수로는 사관이 기록할 때에 왕의 이름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임금이 된 호(號)로 삼아 수로왕(首露王)이라 하였다.’ 한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158년 만에 훙(薨)하여 납릉(納陵)에 장사 지내니 혹은 수릉(首陵)이라고도 하는데, 그해는 한(漢) 나라 효헌황제(孝獻皇帝) 건안(建安) 4년(199)이다. 거등(居登)ㆍ마품(麻品)ㆍ거질미(居叱彌)ㆍ이시품(伊尸品)ㆍ좌지(坐知)ㆍ취희(吹希)ㆍ질지(銍知)ㆍ감지(鉗知)ㆍ구형(仇衡)까지 10대를 전승하여 491년을 지냈다.

구형(仇衡)이 무력(武力)을 낳고, 무력(武力)이 서현(舒玄)을 낳고, 서현이 유신(庾信)을 낳았는데, 유신의 비문에 그 조상의 나온 바를 말하였으나 옛 사적(史籍)의 기록이라서 자세하지가 않다. 다만 왕의 세대에는 백성들이 크게 감화되어 사방의 나라에서 찾아와 그를 본받았으며 순박하고 두터운 정치라고 호칭하였다.

옛 풍속에 나라 사람들이 추모하여 왕에게 제사를 올려 그 유덕(遺德)에 보답하였는데, 지금은 동짓날에 대사(大祀)를 올린다. 명(明) 나라 만력(萬曆) 8년(1580, 선조13)에 영남 관찰사(嶺南觀察使) 허엽(許曄)이 크게 왕묘(王墓)를 수리하였는데, 그 뒤로 13년 만에 나라에 왜적(倭賊)의 침략이 있어, 그해에 왕의 무덤을 파헤쳤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함께 봉분을 쌓았다. 그후 태창(泰昌)ㆍ천계(天啓)ㆍ숭정(崇禎) 연간을 지나 지금에 이르러 55년 만에 순찰사(巡察使) 허적(許積)이 묘역(墓域)을 증수하여 묘비를 세우고, 가락국군 수로왕묘라 하였다.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許黃玉) 미상∼188.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비.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하며, 김해김씨(金海金氏)와 모든 허씨(許氏)의 시조모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駕洛國記>에 따르면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부왕(父王)과 왕후가 꿈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공주는 많은 종자(從者)들을 데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신귀간(神鬼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이하여 왕후로 삼았다 한다. 왕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으며 188년에 죽으니 나이 157세였다고 한다.

구지봉(龜旨峰)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 바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의 고분이 허왕후의 능이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

그녀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것은 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이후에 윤색된 것으로 보이며, 본래의 시조설화에는 왕후가 먼 바다를 건너온 것으로 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설화는 남방아시아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시호는 보주태후(普州太后)이다.

 

기언 제41권 원집

 

허씨 선묘 비문 석지(許氏先墓碑文石誌)

 

가락국(駕洛國) 보주 허 태후(普州許太后) 묘비 음기(墓碑陰記)

태후(太后)의 성(姓)은 허씨(許氏)인데, 보첩(譜牒)에는 아유타국(阿隃陀國) 임금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관고사(金官古事)에 어떤 사람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임금의 딸이다.’ 하고, 또 ‘스스로 말하기를 서역(西域) 허국(許國) 임금의 딸이라 하였다.’ 한다. 허(許)를 어떤 이는 ‘허(許)ㆍ황(黃)의 나라는 방외(方外)의 동떨어진 나라로, 한 나라를 두고서 호칭(互稱)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아마 중국의 은(殷) 나라는 상(商)이요, 양(梁) 나라는 위(魏)인 것과 같은 것인가 보다. 먼 옛날의 일이라서 후세에 전해지는 말들이 똑같지가 않다. 지(誌)의 기록에, ‘선군(先君)이 명(命)하기를, 「동쪽 나라에 틀림없이 가락원군(駕洛元君)이 있어서 너를 얻어 짝을 삼을 것이라 하여 바다를 건너왔다.」 하매, 수로왕이 왕후로 삼고 호를 보주태후(普州太后)라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혹은 ‘황옥부인(皇玉夫人)’이라고도 한다. 이때는 동한(東漢)의 광무황제(光武皇帝) 건무(建武) 24년(48) 수로왕 7년에 해당된다.

그후로 후한 영제(後漢靈帝) 중평(中平) 6년(189) 3월에 태후가 훙(薨)하니, 수(壽)가 157세였다. 태후는 10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태후의 성을 받은 자가 두 사람으로 후세에 각각 그 봉(封) 받은 땅을 가지고 따로 씨족을 만들어, 공암(孔巖)과 하양(河陽)의 허씨(許氏)가 되었고, 또 그 나머지 사람들도 각각 그 고향으로 성을 나타낸 자들이 많으나 그 시초는 다 태후에 근본 하였다.

태후의 무덤은 왕릉(王陵)의 뒤 1리에 있다. 옛 풍속에 나라 사람들이 동짓날에 선왕(先王)께 대사(大祀)를 올리되 태후를 배식(配食)하여 지금까지도 제사를 올린다.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 25년(1592) 왜적의 침략이 있을 때 왜적이 수로왕의 무덤을 파헤쳤는데 아울러 태후의 무덤까지 팠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다시 왕묘와 태후묘의 봉분을 쌓았다. 상(上 인조(仁祖)를 가리킨다) 24년(1646)에 영남 관찰사(嶺南觀察使) 허적(許積)이 크게 묘(墓)를 수리하고 이어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부로(父老)들이 전하기를,

“만력(萬曆) 8년에, 관찰사(觀察使)였던 허공 엽(許公曄)이 일찍이 두 능을 수리한 일이 있었다.”

하는데, 지금까지 추계(追計)하면 67년 만에 수리한 셈이 된다.

[주]금관고사(金官古事) : 금관은,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金海)이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원년(514)에 가락국왕 구형(仇衡)이 항복하자, 그 나라를 금관군(金官郡)으로 만들었다. 고사는 금관군의 옛일을 전한 기사이다.

 

신숭겸(申崇謙) 미상∼927년(태조 10). 고려 태조 때의 무장.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본래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고려사》 열전에는 그를 광해주(光海州: 현재 春川)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신숭겸의 이름이 실려 있고,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되어 그의 묘도 여기에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 때 큰 공을 세웠으며, 이로 말미암아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고려 태조가 즉위한 뒤 7, 8년 동안은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긴장관계는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견훤(甄萱)이 신라에 대하여 공세를 펴게 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어, 마침내 큰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927년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현재 永川)를 습격한 뒤 신라 왕도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감행하게 되었다. 고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000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이때 신숭겸은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김락(金樂)과 같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로써 태조는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되었다.

 

기언 제16권 원집 중편

 

사(祠) 《설문(說文)》에, 사(祠)란 복을 갚는 것이라고 했다.

 

도산사기(道山祠記)

 

달성도호부 판관(達城都護府判官) 권후 대재(權侯大載)가 부임을 하자 곧바로 다스릴 계획을 세워 계령(戒令)과 규금(糾禁)을 바로잡고, 부로(父老)들을 불러 이 고장의 옛 풍속을 물어보다가 고려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시호)의 고사를 알게 되었다. 기구(耆耈)들이 전해 온 말에, 고려 풍속에 장절공의 죽음을 추모하여 매년 봄가을 좋은 날에 지묘사(智妙寺)에서 등불을 달고 제사한다 하고, 이어서 옛 싸움터를 가리키며 사실을 얘기하는데, 어린이들도 다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권후가 개연히 감탄하며,

“《예기(禮記)》 제법(祭法)에, ‘목숨 걸고 맡은 일에 충실한 자이면 제사 지내고, 큰 어려움을 막은 자이면 제사 지낸다.’라고 하였다. 덕선(德善)과 공렬(功烈)을 열거해 보아 영원히 제사 지내야 될 자라면 당대 이대(異代)를 구분하지 않았었던 만큼, 제사란 예의의 큰 부분이면서 교육의 표준이다.”

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부로들이 매우 기뻐하며 곧 도산(道山)에다 사당을 세웠는데 이곳은 바로 옛날 동수(桐藪)라 불리던 곳이며, 그 옆에 있는 폐허도 고려 사람들이 등불을 달던 옛날 절터라고 한다.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 신공 여철(申公汝哲)은 그의 후손으로 자금을 내어 공사를 도왔다. 사우가 준공되자 희생(犧牲)을 잡아 고사 지낸 다음 좋은 날을 받아 향사를 지내게 했는데, 부로가 다 모이고 변두(籩豆)가 질서 있고 의식에 손색이 없었다. 신을 섬기고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풍속을 순화하는 근본이면서 또한 예의의 큰 절차이니, 군자들은 이를 힘써야 한다.

권후는 내가 옛날 사적을 서술할 줄 안다고 여겨서 예사(禮祀)의 내력을 추술하되 충신의 공렬을 함께 나타내어 기록하도록 하니 또한 좋지 않은가. 고사를 남긴 지 1천 년, 철 따라 올리는 향사에 신에게는 흠향할 음식이 생기고 사람에게는 교육이 시행되게 되었다. 일은 중요하고 예의는 거룩하니, 내 몸이 비록 심히 늙기는 하였지만 어찌 사양만을 능사로 삼을 수야 있겠는가.

《고려사》를 상고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태조(太祖) 10년(927)에 견훤(甄萱)이 신라(新羅)를 무찌르고 그 길로 왕을 죽이고 자녀ㆍ보옥ㆍ관원ㆍ무기ㆍ의장을 전부 탈취해 갔다. 이때 고려 왕은 강주(康州)에 순시를 나갔다가 신라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 친히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대구(大邱)) 밑에 이르러 동수에서 견훤과 만나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견훤이 왕을 포위하여 상황이 다급해지니, 장군 신숭겸(申崇謙)ㆍ김낙(金樂)은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고 왕은 경기(輕騎)를 이끌고 도망갔다. 견훤은 승세를 타고 연이어 계자(雞子)ㆍ벽진(碧珍 성주(星州))에서 승리를 거두고 왕에게 글을 보내어 싸움의 승리를 자랑하는데, 맨 먼저 ‘좌상(左相) 김낙의 유해는 들판에 널려 있다.’라고 하였다. 신숭겸ㆍ김낙을 말할 것 같으면, 신숭겸은 배현경(裵玄慶)ㆍ홍유(洪濡)ㆍ복지겸(卜智謙)과 함께 본디 명신의 우두머리였고, 장군 김낙도 원보(元甫) 재충(在忠)과 함께 대량(大良 합천(陜川))을 쳐부수고 명장 30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이 일로 인해 백제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으니, 두 사람은 끝내 죽어서 뜻을 이룬 사람이다. 예(禮 시법(諡法)을 말함)에 이른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섬기다가 들판에서 죽어도 이를 사양하지 않는다.’는 사람이었다. 충성은 신하의 의리이다. 이름을 남기고 인(仁)을 이룩한 것이 백세의 사표(師表)라 이를 만하다. 묘정[廟]에 배향하여 철 따라 향사를 올리니, 제법에 이른바 ‘큰 어려움을 막는 데에 목숨 걸고 맡은 일에 충실한 보답’이라 하겠다. 그 열전(列傳)에는 아래와 같이 씌어 있다.

“견훤이 왕을 포위하여 한창 다급했을 때, 장군 신숭겸은 얼굴이 왕을 닮았으므로, 왕의 수레를 타고 장군 김낙과 함께 힘을 다하여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왕은 이 두 사람의 죽음이 왕을 위한 순절이라고 해서 두 사람의 아들을 불러다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았다. 또 숭겸에게는 특별히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후에 태사(太師)를 더 증직(贈職)하였다.”

 

안향(安珦) 1243년(고종 30)∼1306년(충렬왕 32). 고려시대의 명신(名臣)‧학자.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이를 피하여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밀직부사 안부(安孚)의 아들로 흥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하여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고,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고려는 충렬왕대에 와서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고려에 두었는데, 1289년 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의 원외랑(員外郞)을 제수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같은해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가지고 이듬해 돌아왔으며,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하였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해 12월에 지밀직사사,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하여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하여 그는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같은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는데,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리고 같은해 6월에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㦃)‧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곳에 세웠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기언 제8권 원집 상편

 

유림(儒林)

 

안 문성공(安文成公) 여표비(閭表碑)

 

순흥부(順興府)의 북쪽 백운동(白雲洞)에 문성사(文成祠)가 있는데, 지지(地誌)에 이른바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바로 이것이다. 또 읍터 남쪽에는 안씨의 옛날 집터가 있는데, 사당(祠堂)에서 7리쯤 떨어져 있고, 그 옆에 작은 연못이 있다. 그것을 벼루 씻던 연못이라 부르며, 고적으로 삼아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그곳을 알리며 공경한다.

고사에 전하기를, 문성공의 아버지 태사(太師) 부(孚)와 태사의 아버지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 자미(子美), 이 두 조상이 살던 터전이라 한다. 안씨의 번창은 실로 상호군이 덕(德)을 심은 데서 싹텄고, 그래서 후세에 그를 시조(始祖)로 삼았다. 지금은 이곳에 사단(祀壇)을 쌓고 제전(祭田)을 두어 매년 10월 초하룻날에 제사를 올리는데, 태사를 배향(配享)한다. 또 동으로 1리 떨어진 곳에 안씨사현정(安氏四賢井)이 있는데, 가정(嘉靖) 연간에, 태사 주세붕(周世鵬)이 돌을 세우고 사적을 새겼다. 보첩(譜牒)에 상고해 보면 삼한(三韓) 갑족(甲族)의 여러 성씨 가운데 크게 번창한 집안이 많다. 그러나 대현(大賢)의 집안에서 이름난 사람이 많은데, 유독 안씨 집안만이 전고(前古)에 특히 번창했다 한다. 문성공의 시대는 고려 고종(高宗)ㆍ원종(元宗)ㆍ충렬왕(忠烈王)ㆍ충선왕(忠宣王) 당시였다. 그 사적은 전적에 나타나 있고, 또 단주(湍州 장단(長湍))에 있는 대장명(大葬銘 묘비명과 신도비명을 말함)을 보면 알 수 있다.

상(上 효종(孝宗)) 5년(1654) 겨울에 안씨 자손들이 순흥 옛 마을에 여표비를 세웠다. 이것은 안씨 자손들만 서로 알려 주는 표식이 될 뿐 아니라 백대 후에 이 거리를 지나는 자라도 대현이 남긴 교훈을 잊지 않고 공경할 바를 알게 될 것이다. 이에 명(銘)한다.

여표비 세워지매 / 閭表之碣

상철을 흠향하는 자 / 碣欽上哲者

엄숙히 숭배하고 / 威如神如

사단이 닦아지매 / 祀壇之擧

시조를 앙모하는 자 / 擧推厥初者

경건히 제사하리 / 虔如禋如

 

허백(許伯)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공암(孔巖 : 지금의 서울 양천구). 첨의중찬(僉議中贊) 공(珙)의 손자이며, 충렬왕대에 호부산랑(戶部散郎)으로 찬성사(贊成事)에 증직된 관(冠)의 아들이다.

1317년(충숙왕 4) 병과로 급제, 1344년(충목왕 즉위년)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고, 이어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라 이제현(李齊賢)과 더불어 서연(書筵)에서 시독하였으며, 같은 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347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곡(李穀)과 더불어 진사를 취하고 김인관(金仁琯)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1349년(충정왕 1) 찬성사가 되고, 1356년(공민왕 5) 중서시랑동평장사(中書侍郎同平章事)가 되어 양천군(陽川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記言卷之四十一

 

許氏先墓碑文石誌

 

文正公墓碣陰記

 

我十世祖許文正公諱伯。本孔巖人。皇祖考文敬公諱珙。皇考版圖佐郞諱冠。事在麗史本傳。我文正公高麗肅王四年及第。旣以文學顯。惠王後五年春。以陽川君。判田民都監事。夏。王初寘書筵。公以同知密直。爲書筵侍讀。冬。拜密直司使。定王元年冬。拜贊成事。至恭愍王二年。復爲書筵侍讀。後十六年。改官制。公復以贊成事。拜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其冬。王作馬山之役。放逐三公大臣。時公與尹桓,柳濯。同竄。明年七月己亥卒。諡文正。子孫遠者今十二世三世。具在系牒。系牒曰。墳墓在開城西熊谷錢浦。與大匡閔抃墓同原。辰韓國大夫人鄭氏墓。在右岡。或曰。森樹里云。大匡。文正公之壻。而我恭定王妃元敬王后之祖也。錢浦甘露寺東數里。有三墓。而後二墓一階。前一墓又一階。父老傳說。許相國葬而已。皆無標石可識者。上之三年壬寅春。十一世孫白川郡守崙。於後墓前階下掘得斷碑。有大匡驪興君閔抃七字。其左傍。又有陽川縣夫人許六字。而折其三之一。階上石趺尙在。又得其折者。字雖缺。合之階上趺無差。然後乃知大匡墓後。而文正公墓前。縣夫人墓最後也。文正公墓至今二百八十六年。郡守崙治石碣未建而去。十三世孫平山都護府使珽。樹之墓前。時淸主康煕四年乙巳云。

 

최영(崔瑩) 1316년(충숙왕 3)∼1388년(우왕 14). 고려 후기의 명장.

본관은 창원(昌原). 평장사(平章事)유청(惟淸)의 5세손,

아버지는 사헌규정(司憲糾正)원직(元直)이다.

풍채가 괴걸하고 힘이 뛰어났다.

처음에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우달치〔于達赤 : 司門人〕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에 안우(安祐)·최원(崔源)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護軍)이 되었고, 1354년에 대호군이 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 40여 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갔다. 그 때 원나라의 승상(丞相) 탈탈(脫脫) 등을 좇아 중국 가오유〔高郵〕 등지에서 싸웠다. 1355년에는 회안로(淮安路)에서 적을 막았으며 팔리장(八里莊)에서 싸워 용맹을 떨친 뒤 돌아왔다.

이듬해부터 고려가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쓰게 되자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서북면병마사인당(印璫)과 함께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여 파사부(婆娑府 : 九連城) 등 3참을 쳐부수었다. 1357년동북면체복사를 거쳐 이듬해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楊廣全羅道倭寇體覆使)가 되어 배 400여 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을 이용해 격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하여 서경(西京)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와 함께 생양(生陽)·철화(鐵和)·서경·함종(咸從) 등지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듬해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를 거쳐 그 이듬해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었다.

1361년에 홍건적 10만 명이 다시 침입해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우·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개성을 수복하였다. 그 공으로 훈(勳) 1등에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이 되었고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이어 양광도진변사(楊廣道鎭邊使)를 겸하였다가 도순문사를 겸하였다.

1363년에는 김용(金鏞)이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던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을 평정시켰다. 그 공으로 훈 1등에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이 되었고, 이어 판밀직사사 평리(判密直司事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 : 충선왕의 셋째아들)을 왕으로 받들고 군사 1만 명으로 압록강을 건너 선주(宣州 : 평안북도 선천)에 웅거하였다. 이에 서북면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로서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수주(隨州 : 평안북도 정주)의 달천(獺川)에서 싸워 물리쳤다.

또, 연주(延州 : 평안북도 운산)에 침입한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를 장수를 보내 격퇴시켰다. 이듬해교동(喬桐)·강화(江華)에 왜구가 출몰하자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동강(東江)에 나가 지켰다.

이 때 신돈(辛旽)의 참소로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되었다가 귀양길에 올랐다. 1371년신돈이 처형되자 6년 만에 풀려나 다시 찬성사가 되었다. 1373년에는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로 있으면서 군호(軍戶)를 편적(編籍)하여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였다. 또,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들로부터 쌀을 거두어 군수(軍需)에 보충함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1374년경상·전라·양광도도순문사가 되었을 때, 육도도순찰사 시절에 6도를 혼란스럽게 하였다는 이유로 대사헌김속명(金續命) 등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도리어 김속명이 파면되고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의 호가 하사되었다.

그 해 명나라가 제주도의 말 2,000필을 요구하였는데, 제주도의 호목(胡牧)이 300필만 보내왔다. 이에 제주도를 치기로 하고,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가 되어 도병마사염흥방(廉興邦)과 함께 전함 314척과 군사 2만 5,600명을 지휘, 제주도를 평정하였다. 그리고 1375년(우왕 1)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1376년연산(連山)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한 왜구에게 원수(元帥)박인계(朴仁桂)가 패배하자,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 때 노구를 이끌고 출정하기를 자원하여 홍산(鴻山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으며,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77년에는 도통사가 되어 강화·통진(通津)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한편, 왕으로 하여금 교동·강화의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군자(軍資)에 충당하게 하였다.

이 무렵 왜구가 침입하여 개성을 위협하므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군사로서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1378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 : 지금의 豐德)에 침입하자, 이성계·양백연(楊伯淵) 등과 함께 적을 섬멸하고 그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80년에는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가 되어 동서강(東西江)에 나가 왜구를 막다가 병에 걸렸다. 이 때 왕은 공을 기록한 철권(鐵券)과 공을 치하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듬해 아버지에게는 순충아량염검보세익찬공신(純忠雅亮廉儉輔世翊贊功臣)·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판문하사(判門下事)·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상호군(上護軍)·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이 증직되고, 어머니 지씨(智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 그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이 되었다가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냈고, 1384년문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올랐다.

1388년 다시 문하시중이 되어 왕의 밀령(密令)으로 부패와 횡포가 심하던 염흥방·임견미(林堅味)와 그 일당을 숙청하였다. 그 해 그의 딸이 우왕의 비(寧妃)가 되었다. 이 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고 철령 이북과 이서·이동을 요동(遼東)에 예속시키려 하였다. 이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였다.

한편, 좌군도통사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 8,800여 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위화도회군을 단행하고 기세가 오른 이성계의 막강한 원정군을 막지 못하여 결국 도성을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는 고려 말기의 군벌(軍閥) 대립에서 고려왕조를 수호하려는 구파 군벌이 고려왕조를 부정하려는 신진 군벌에게 패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강직용맹하고 청렴했던 그는 이성계에게 잡혀 고향인 고봉현(高峯縣 : 지금의 경기도 고양)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충주로 옮겨졌다가 공료죄(攻遼罪 : 요동을 공격한 죄)로 개성에 압송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혔고, 그 해 12월에 참수(斬首)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개성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슬퍼하였으며, 온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다. 개풍군(開豐郡) 덕물산(德物山)에 있는 그의 무덤은 풀이 나지 않는다 하여 적분(赤墳)으로 불린다. 그 산 위에는 장군당(將軍堂)이 있어 무당들에게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언 제16권 원집 중편

 

사(祠) 《설문(說文)》에, 사(祠)란 복을 갚는 것이라고 했다.

 

삼봉사기(三峯祠記)

 

지(誌 《동국여지승람》을 말함)에 ‘홍주(洪州) 삼봉산(三峯山)에 최영(崔瑩)의 사당이 있다.’라고 씌어 있다. 고려 우왕(禑王) 14년(1388) 우리 태상왕(太上王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우왕이 폐위되고 그 길로 최영도 죽었다. 후에 그의 신이 가장 영험이 있어서 화복(禍福)과 경앙(慶殃)을 조정하였는데, 업신여겨 공경하지 않은 자는 그 자리에서 죽기도 한다. 이에 이 고장 사람들이 겁에 질려 엄숙히 제사하고 또 영신사(迎神祠)와 망신사(望神祠)를 세웠다.

《고려사》 열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최영은 사공(司空) 유청(惟淸)의 5세손이며, 모습이 헌칠하고 힘이 세어서 젊은 나이에 양광군(楊廣軍)에 열사(列士)로 편입되었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키자, 최영은 안우(安祐)ㆍ최원(崔源)과 함께 그를 쳐서 죽이고 호군(護軍)에 제배되었다. 3년(1354) 원(元) 나라 승상 탈탈(脫脫)을 따라 고우(高郵)를 토벌하는데 37번을 싸워 승리하였고, 또 회안(淮安)ㆍ화사(和泗) 사이에서 적을 방어할 적에도 격전을 벌여 목베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이듬해 귀국하여 서해의 왜구를 쳐서 크게 무찔렀다. 8년(1359)에 홍두(紅頭 홍건적)가 서경(西京 평양)을 함락하자, 최영은 서북변 병마사(西北邊兵馬使)가 되어, 적을 토벌한 공으로 서경 윤(西京尹)에 제배되었다. 11년(1362)에는 장병 20만을 모아 사유(似劉)ㆍ관 선생(關先生)을 쳐 죽였는데, 적의 전사자가 10여 만이었으며, 드디어 경성(京城)을 수복했다. 12년(1363)에 김용(金鏞)이 반란을 도모하여 군사를 이끌고 흥왕사(興王寺) 행궁(行宮)을 침범했는데, 최영은 재빨리 그를 쳐서 모두 죽여 문하찬성(門下贊成)에 제배되었다. 이를 시기한 신돈(辛旽)은 왕에게 참소하여 계림 윤(鷄林尹)으로 좌천시켰다가 얼마 후 삭탈관직하고 유배 보냈다. 20년(1371)에 왜구의 침입이 있자, 급히 불러다 육도 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를 제배하고 모든 장수의 출척(黜陟) 권한을 맡겨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임의로 처단하도록 하였다. 이듬해(1374) 양광전라경상제도 도통사(楊廣全羅慶尙諸道都統使)가 되어 3도 군사 2만 5천을 이끌고 제주에서 반란한 오랑캐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ㆍ고초독불화(古肖禿不花)ㆍ관음보(觀音甫) 등을 쳐서 평정했다. 우왕 2년(1376)에는 홍산(鴻山)에서 왜구를 쳐부수고 또 해풍(海豐)에서 격전을 벌여 크게 쳐부수었다. 이때 왜구들은 저희들끼리 ‘흰머리의 최만호를 잘 피하라.’고 경계했다 한다. 10년(1384)에 시중(侍中)에 제배되었는데, 병으로 사양하고 도통사 인수(印綬)를 올려 병권을 해임해 주기를 빌었으나 우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태상(太上)이 회군하자, 요동 정벌을 결정한 것으로 구실삼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국문한 다음 충주로 유배시켰다가 끝내는 참형에 처하였다.”

영은 절약 검소하고 직간(直諫)하기를 좋아했으며, 30년 간 군대를 이끌면서 성을 함락하고 진을 무찌를 때는 반드시 자신이 군졸보다 앞섰고, 싸움마다 이겨 져 본 적이 없었다. 형장에 나갔을 때는 탄식하며,

“내 일생에 나쁜 일은 하지 않았는데 죄 없이 죽으니 내가 죽으면 내 무덤에는 풀이 돋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수도 백성들은 시장 문을 닫았고 듣는 자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주검을 거리에 내다 버렸는데, 길손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갔다. 그의 무덤이 고양(高陽)에 있는데, ‘붉은 무덤[赤塚]’이라 부른다. 그 뒤 4년 만에 고려는 멸망하였다. 후에 시호를 무민(武愍)이라 했다.

 

이색(李穡) 1328년(충숙왕 15)∼1396년(태조 5). 고려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조부는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이며, 부친은 찬성사 이곡(李穀)이다. 외조부는 함창김씨(咸昌金氏) 김택(金澤이고, 처부는 권중달(權仲達)이다.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을 하며, 저서에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기언 제9권 원집 상편

 

도상(圖像)

 

목은 화상기(牧隱畫像記)

 

목은(牧隱) 이 문정공(李文靖公)의 화상이 호서(湖西) 한산군(韓山郡) 문헌서원(文獻書院)에 있는데, 찬(贊)은 권양촌(權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다. 찬 끝에 ‘영락(永樂) 갑오년(1414, 태종14) 9월 하한(下瀚)에 문인 권근(權近)이 짓다.’라고 쓰여 있다. 덕산현(德山縣) 이씨의 옛집에 또 문정공 영당(影堂)이 있는데, 그 영정에 씌어진 연월(年月)은 정덕(正德) 갑술년(1514, 중종9)으로 되어 있으니, 앞서 그린 화상의 연도가 어느 해였는지는 잘 모르나, 우리 태조가 선위 받던 이듬해에 공이 죽었고, 그해는 홍무(洪武) 26년(1393, 태조2) 계유이다. 그러니 양촌의 찬은 아마 수십 년 후였을 것이다. 영락 갑오년에서 정덕 갑술년까지는 124년이고, 홍무 계유년에서 숭정(崇禎)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는 300년쯤 된다.

화상은 본디 두 벌로, 한 벌은 치관(豸冠) 서대(犀帶)에 붉은 도포를 입었고 수염이 희끗희끗한데 지금 서원에 소장된 것이 바로 이것이며, 영당에 있는 것은 이것을 보고 그린 것이다. 또 한 벌은 전야(田野)의 옷차림이니, 슬픈 일이다. 나는 일찍이 그의 유리(流離)할 때의 감회시(感懷詩)를 외고 있었다.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농부나 촌늙은이와 다름없었으니, 그때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서원의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잃어버렸는데, 후에 어느 사신이 일본에 갔다가 찾아왔다. 일본의 한 늙은이가 사신에게 가져다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귀인의 화상이니 그의 자손에게 돌려주시오.’ 하였다 한다. 이상도 하다. 이것은 귀신이 한 일이지 사람으로서는 기대조차 못할 일이다. 옛날 그림이 긴 세월을 두고 떠돌아서 천이 낡고 찢어져 아래 부분 절반은 없어졌다.

효종(孝宗) 5년(1654) 겨울에 후손들이 화상을 서울로 모셔다 두 벌을 모사(摸寫)하여 한 벌은 태창동(太倉洞) 이 중추(李中樞 이현영(李顯英)) 옛집에 봉안(奉安)하고, 한 벌은 구본(舊本)과 함께 문헌사당에 도로 봉안하였다.

갑오년(1654, 효종5) 겨울 동짓날에 외후손 양천(陽川) 허목이 삼가 기록한다.

가운데 아우 의(懿)가 중림(重林)에 찰방(察訪)으로 있을 때 모사(摸寫)한 것이다.

사예(司藝) 이전(李䄠)이 이 일을 맡아 보았다.

 

원천석(元天錫) 1330년(충숙왕 17)∼미상. 고려말과 조선초의 은사(隱士).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고려말에 정용별장(精勇別將)을 지낸 원열(元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원윤적(元允迪)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어릴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이방원(李芳遠: 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바 있어 그가 즉위하자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주고 돌아가 아들 원형(元泂)을 기천(基川: 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하였는데, 후세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하였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곁에 있다.

그가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던 것을 그가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왕조를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하노라.”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오며,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그 문집에 실려 있는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전해오는데, 대표적인 시의 제목을 보면, 우리나라 2현(賢)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崔瑩)을 기리어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前冢宰六道都統使崔瑩)〉이라는 시와 우왕과 창왕을 중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한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이라는 시를 읊어, 만일 왕씨(王氏)의 혈통으로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던가고 힐문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으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기언 제18권 원집 중편

 

구묘문(丘墓文)

 

운곡 선생(耘谷先生) 묘명(墓銘)

 

선생은 원주인(原州人)으로, 성은 원씨(元氏), 휘는 천석(天錫), 자는 자정(子正)이다. 고려의 국자 진사(國子進士)로 고려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 은거하여 지절(志節)을 지키며 호를 운곡 선생이라고 하더니, 고려가 망하자 치악산(雉嶽山)에 들어가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

태종이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았는데, 태종은 그의 의리를 고상하게 여겨서 동쪽으로 유람할 때 그의 집에 행차하였더니 선생은 숨어 버리고 뵙지를 않았다. 태종은 시냇가 바위 위로 내려가서 그 집을 지키는 노파에게 후한 상을 하사하고 그 아들인 형(泂)에게 기천 감무(基川監務)를 제수하였으므로 후인들이 이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고 부르는데, 그 대는 치악산의 각림사(覺林寺) 옆에 있다. 지금 원주(原州) 치소(治所)에서 동으로 10리 떨어진 석경(石鏡) 마을에 운곡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그 앞에 또 하나의 분묘는 부인인 유인(孺人)의 묘소라고 한다.

처음, 선생에게는 장서(藏書) 6책이 있었으니, 이는 망국(亡國 고려)의 고사를 말한 것이었다. 자손들에게 망녕되이 펼쳐 보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나 그 책이 여러 대를 전하여 자손 중에 한 사람이 가만히 펼쳐 보고는 크게 두려워하면서,

“우리 집안이 멸족된다.”

하고 들어다가 불살랐으므로 그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남긴 시집이 있으니 이른바 《시사(詩史)》란 것이다. 나는 들으니 ‘군자는 숨어 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며 변함없이 도를 지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다. 백이(伯夷)의 말에,

“옛날 선비는 치세(治世)를 만나면 그 직임을 피하지 않았고, 난세를 만나면 구차하게 있으려고 아니하였다. 지금은 천하가 어두우니 그를 피하여 나의 행실이나 깨끗이 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으므로, 그 열전(列傳)에 칭송하기를,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디 조락(凋落)한다는 것을 알고, 온 천하가 혼탁한 뒤에야 청렴한 선비가 더욱 드러난다.”

하였고, 맹자도,

“백이(伯夷)는 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아니하고 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아니하며, 치세에는 나아가고 난세에는 물러나니 백이는 성인의 청(淸)한 자이다.”

고 하였으니, 선생은 아마도 백이와 같은 유라고 하겠다. 고을 사람이 선생을 위하여 사우(祠宇)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니, 그 사우는 원주(原州) 북쪽 30리 칠봉(七峯) 마을에 있다.

선생의 세계를 상고하면, 시조는 호장(戶長) 극부(克富)이다. 극부가 종유(宗儒)를 낳고, 종유가 창정(倉正) 보령(寶齡)을 낳고, 보령이 창정 시준(時俊)을 낳고, 시준이 정용별장(精勇別將) 열(悅)을 낳고, 열이 종부시 영(宗簿寺令) 윤적(允迪)을 낳았으며, 윤적은 천상(天常)ㆍ천석(天錫)ㆍ천우(天佑)를 낳았다. 천상은 진사(進士)를 지냈다. 혹은 ‘본조(本朝)에 벼슬하여 드러났다.’ 하나 참고할 데가 없다. 천우는 현령(縣令)을 지냈다. 부인인 유인(孺人) 원씨(元氏)는 종부시 영 광명(廣明)의 딸인데, 같은 원씨는 아니다. 원주에 두 원씨가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장남인 지(沚)는 직장동정(直長同正), 차남인 형(泂)은 기천 감무(基川監務)를 지냈다. 선생의 후손이 매우 번성한데 그중 기천 감무의 후예가 가장 많다. 다음과 같이 찬(贊)한다.

속세를 떠나서 암혈에 사는 선비 / 巖穴之士

나아가고 머무름 때가 있나니 / 趣舍有時

세상에는 나서지 않을지라도 / 縱不列於世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 能不降其志

그 몸을 욕되게 아니해서 / 不辱其身

후세에 교훈이 되게 한다면 / 敎立於後世

우직이제와 같을 것이리 / 則禹稷夷齊一也

아, 선생은 / 先生

백대의 스승이 될 만하도다 / 可爲百代之師者也

 

[주1]망국(亡國)의 고사 : 《해동악부(海東樂府)》에 의하면, 이 책은 고려 말기의 사적을 기록한 것인데, 사실 그대로 곧게 쓰고 기휘한 것이 없어서 내용이 지금의 《고려사》와는 대부분 같지 않다고 한다.

[주2]시사(詩史) : 운곡(耘谷) 시 가운데는 후세에서 잘 알 수 없는 당시의 사적이 직필(直筆)로 적혀 있는데, 가장 뚜렷한 것은 신우(辛禑)가 공민왕의 아들이란 것이다. 그 시의 제목은 ‘복문주상전하천우강화원자즉위유감(伏聞主上殿下遷于江華元子卽位有感)’이라는 것이며, 그 밖에도 최영(崔瑩)이 형 받은 일, 이색(李穡)이 귀양 간 일들이 적혀 있어서 시사라고 한다. 《燃藜室記述 卷1 太祖朝故事本末 高麗守節諸臣附》 《운곡행록(耘谷行錄)》 권3 및 《상촌고(象村稿)》 권52 청창연담 하(晴窓軟談下) 등에 실려 있다.

 

우현보(禹玄寶) 1333년(충숙왕 복위 2)∼1400년(정종 2).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공(原功).

적성군(赤城君) 우길생(禹吉生)의 아들이다.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집의‧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곧이어 제학으로 승진하였다.

그뒤 대사헌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오래 역임하면서 정사를 주관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에 봉하여졌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이를 막기 위한 우왕의 명령에 따라 좌시중에 임명되어 방어하려 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회군이 성공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인척인 관계로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390년(공양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나 이초(彛初;尹彛와 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외방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다시 철원으로 유배되고, 곧 풀려나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392년 이방원(李芳遠)일파에 의하여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시체를 거둬 장례를 치렀다. 이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하여 다시 탄핵을 받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광주(光州)에 다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고, 1398년(태조 7) 정도전(鄭道傳)일파가 제거된 뒤 복관되었다.

이듬해 단양백(丹陽伯)에 봉하여졌다.

1400년(정종 2)에 제2차 왕자의 난 때 문인 이래(李來)로부터 반란의 소식을 듣고 이를 이방원에게 알려준 공으로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에 봉해졌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손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부마로 왕의 재위시에는 탄핵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으며,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정몽주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기언 제20권 원집 중편

 

유사(遺事)

 

우 시중(禹侍中) 유사

 

우 시중(禹侍中)은 휘가 현보(玄寶), 자가 원공(元功)으로 단양군인(丹陽郡人)이다. 《고려사》 세가(世家)와 본전(本傳)을 상고하면,

“공민왕 때에 문학(文學)으로 춘추관 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다가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에 이르고, 우왕 2년(1376)에는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 동왕 12년(1386) 10월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조민수(曺敏修)ㆍ찬성사(贊成事) 장자온(張子溫)ㆍ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하륜(河崙)과 더불어 원(元) 나라에 갔는데, 명시(命諡)와 습봉(襲封)에 대해 사은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왕 14년(1388) 봄에 왕이 서해(西海)로 출행하면서, 공으로 하여금 왕성(王城)에 유수(留守)하여 오부(五部)의 병정을 출동하되, ‘왕이 계신 곳에 가서 크게 사냥한다.’고 성언(聲言)하게 하였으나, 실상은 요동(遼東)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해 5월에 이 태조(李太祖)가 회군(回軍)하였다. 우왕은 특별히 공에게 우시중(右侍中)을 제수하였으나 우왕이 폐위되자 시중에서 파직되었다.

창왕(昌王) 2년(1389)에 김저(金佇)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으니, 그는 곧 우왕을 여흥(驪興)에서 맞아다가 가만히 익양(益陽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 정몽주(鄭夢周))과 난리를 일으키려고 꾀한 것이었다. 간관[郞舍]이 합문(閤門)에 업드려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창왕은 듣지 않고 관직만을 면직할 뿐이었는데 얼마 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용되었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윤이(尹彝)ㆍ이초(李初)의 사건이 있었는데, 그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외방(外方)에서 멋대로 살도록 허용했는데 대성(臺省)이 ‘용서해서는 아니된다.’고 하여 철원(鐵原)에 부처(付處)시켰다가 얼마 후 불러서 복관(復官)하였더니, 익양(益陽)이 죽자 계림(鷄林)에 유배되었다.

그 이듬해 고려가 망하였다. 태조(太祖)가 공신(功臣)의 작호(爵號)를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상은 특별히 후사(厚賜)하여 고구(故舊)의 예로 대우하였고, 전리(田里)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특별히 단양백(丹陽伯)에 봉하였다. 이때 공이 작고하니 나이 68세였다. 영의정에 추서되고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하였다.”

고 했다. 그후 자손들이 매년 10월 초순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효후손(孝後孫) 모(某)는 감히 자성(粢盛)과 예재(醴齊)로써, 공손히 제사를 선조고(先祖考) 고려 문하시중 부군(高麗門下侍中府君)에게 올립니다. 서울 떠나 유랑하심은 흥멸(興滅)의 즈음이었습니다. 고심(苦心)한 그 지조, 몸바친 그 충성을 우리 후세 자손에게 끼쳐 주었습니다. 선조비(先祖妣) 죽산 박 부인(竹山朴夫人)을 배식(配食)하오니 흠향하옵소서.”

분묘는 고장단(古長湍)에서 동으로 20리 떨어진 금곡(金谷)에 있다.

 

서견(徐甄) 생졸년 미상.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이천(利川).

1391년(공양왕 3) 사헌장령(司憲掌令)이 되었으며, 다음해 다른 간관(諫官)들과 함께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윤소종(尹紹宗) 등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곧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고 이성계(李成桂)와 조준‧정도전이 실권을 장악하자 김진양(金震陽) 등과 더불어 유배되었다

 

기언 제58권 산고속집

 

절행(節行) 충신(忠臣)

 

고려 서 장령(徐掌令)의 묘석기(墓石記)

 

고려(高麗) 때 장령을 지낸 서견(徐甄)은 이천인(利川人)으로 고려 말엽에 국운이 위태함을 보고도 떠나지를 않았다. 공양왕(恭讓王) 4년에 장령이 되어 성헌(省憲) 김진양(金震陽)ㆍ이확(李擴), 그리고 여러 간관(諫官)들과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ㆍ남은(南誾)의 죄상을 밝혔는데, 익양군(益陽君 정몽주)이 죽임을 당하자 당인으로 지목되어 당시 법을 논하던 사람들과 함께 귀양을 갔다. 그해에 공양왕이 원주(原州)로 추방되어 고려가 망하자 금양(衿陽)에 살면서 북녘을 향하여 앉는 일이 없었으며, 종신토록 한양성(漢陽城)을 대하지 않았고 자연에 의탁하여 시를 읊으면서 혼자 슬퍼하였다. 법관들이 그가 혼란을 꾀하는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서 처벌해야 한다고 하자, 태종(太宗)은, ‘서견은 고려의 신하로서 고국을 잊지 않고 있으니 서견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같은 무리인데 어떻게 죄를 주겠는가?’ 하고 불문에 붙였다. 아, 나라가 망하고 왕씨(王氏)의 대통이 끊겼는데도 끝까지 마음을 변하지 않았으니 그 충성이 눈물겹다. 《고려사(高麗史)》 충절전(忠節傳)에서 찬(贊)하기를,

“고려가 망하자 정몽주(鄭夢周)ㆍ이색(李穡)ㆍ김진양(金震陽)ㆍ이종학(李種學)ㆍ길재(吉再)ㆍ서견(徐甄) 등 몇몇 군자들이 죽은 이도 있고 죽지 않은 이도 있으나 지조를 지킨 것은 같았다.”

라고 하였다. 금천(衿川) 번당(燔塘)에 서 장령(徐掌令)의 묘가 있는데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재상 윤근수(尹根壽)가 임금께 아뢰어 충신의 무덤으로 봉하였으며, 인조(仁祖) 9년에는 사당을 세워서 강 태사(姜太師 강감찬(姜邯贊))ㆍ이 상국(李相國 이원익(李元翼))을 함께 제사하고, 삼현사(三賢祠)라고 하였는데 삼현사기가 있다.

금상(今上) 8년 4월 상완(上浣) 경진.

묘 앞에 묘갈(墓碣)을 세운 이는 서견의 외가 후손인 감찰 김형중(金衡重)이다.

[주]금상(今上) 8년 : 연보(年譜)에는 숙종 7년인 신유년 조에 ‘고려 서 장령 묘기’를 지었다고 나온다.

 

권근(權近) 1352(공민왕 1)∼1409(태종 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 보(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고(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희(僖)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 :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화친함)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몰래 뜯어본 죄로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그 뒤 영해(寧海)·흥해(興海) 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청주 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뒤에 다시 익주(益州)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 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다. 그런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했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 :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속에 표현된 내용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함)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했다. 그리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했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 : 저술하여 정리함)하고,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해 유생 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여러 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해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했다.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 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으로 대표된다. ≪입학도설≫은 뒷 날 이황(李滉) 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 주자(鑄字)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經筵)에서 이를 진강(進講)하게까지 했다.

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斥佛文字)인 ≪불씨잡변 佛氏雜辨≫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 40권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기언 별집 제8권

 

서(序)

 

《양촌집(陽村集)》의 중간(重刊)에 대한 서

 

우리나라 문헌(文獻) 가운데 옛것은 당초부터 고람(考覽)할 데가 없지만, 은(殷) 나라가 망할 적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옴으로써 시ㆍ서ㆍ예ㆍ악의 가르침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경계를 바르게 하고 팔정(八政)을 시행하였으니, 그 교화로 밤에도 문을 닫지 않았고, 나그네가 마음 놓고 들에서 잤으며, 부인은 정숙하고 음란하지 않아서, 예의의 융성함이 이때보다 훌륭한 때가 없었다. 그후 위만(衛滿)이 거짓과 폭력으로 갑자기 강성해졌고,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도 강한 싸움으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진한(辰韓)의 풍속은 시집보내고 장가드는 데에 예가 있었고, 남녀가 분별이 있었으며, 길가는 자는 서로 길을 양보하였다. 예맥(濊貊)의 풍속도 염치와 효제를 숭상하였는데, 신라는 가장 순후하여 국학(國學)을 세우고 제사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설 홍유후(薛弘儒侯 홍유후는 설총(薛聰)의 시호)가 《구경훈의(九經訓義)》를 지었고, 최 학사(崔學士 최치원(崔致遠))는 문학으로써 천하에 알려졌다. 따라서 신라가 군자(君子)의 나라라 일컬어진 것은 까닭이 있다.

고려 때에는 백씨(白氏) 두 문학자가 있어서, 요순(堯舜)과 육경의 치도(治道)를 천술(闡述)하였다. 태사(太師) 최충(崔冲)은 구재(九齋)의 생도들을 가르쳐서 예속(禮俗)을 도타이 하였고, 정 문충공(鄭文忠公 문충은 정몽주(鄭夢周)의 시호)은 오부(五部)에 학관(學館)을 세워 경학(經學)을 강론하였다. 그리고 이 문정공(李文靖公 문정은 이색(李穡)의 시호)은 문충공을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이라 일컫는다.

본조에는 권 문충공(權文忠公 문충은 권근(權近)의 시호)이 또 경서와 예서를 고정(考定)하였으며, 《독서분정(讀書分程)》, 《입학도설(入學圖說)》, 《오경천설(五經淺說)》 등을 지어서 육경의 깊은 뜻을 밝혔다. 우리 태조와 태종이 나라를 창건하여 대통을 전하면서 오로지 경술로써 문명의 정치를 일으켰음도 실상 공의 힘이었다. 우리 동방은 불교를 높이 신봉하여 신라로부터 고려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1천여 년 동안이나 능히 이단을 배척하고 예교(禮敎)를 높여서 선왕의 도를 밝히고 한 세대의 치도를 정하였으니, 그 공이 크다. 그의 말이 그의 글에 실려 있고 또 사물에 느낀 것을 읊조린 작품도 모두 충후(忠厚)하고 측달(惻怛)한 심정에서 발한 것이었다. 문장도 본디 딴 도가 아니다. 하늘이 있으면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되고, 땅에 있으면 산하 백천(山河百川)이 되며, 물(物)에 있으면 주기(珠璣)ㆍ화실(華室)이 되고, 사람에 있으면 예악문장이 된다.

공의 문장은 경술을 근본하여 백가(百家)를 참고하였는데, 훌륭한 문채(文彩)가 우뚝하게 뛰어났다. 김 문간공(金文簡公 문간은 김종직(金宗直)의 시호)이 국초의 문학과 사도(師道)를 논하면서 권 문충공 한 사람만 추숭(推崇)했다 한다. 이때 길 주서(吉注書 길재(吉再)), 김 좨주(金祭酒)도 각각 오경(五經)을 전수(傳授)했는데,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당초 그의 유문(遺文)이 40권이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세상에 전해 오지 않은 지가 오래었다. 이번에 그의 10대손인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 권주(權儔)가 진주 목사(晉州牧使) 남몽뢰(南夢賚)와 함께 그 유문을 중간(重刊)하여 세상에 전하기로 의논했는데, 남씨는 그의 외손이다.

공은 공민왕(恭愍王) 원년에 출생하여 우리 태종 9년에 졸하였다. 공의 세대는 지금 3백 년이 지났다. 세상 변고가 이미 많았고 또 백 년 동안에는 난리도 많았다. 오랜 세월에 유문이 세상에 없어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데, 하물며 크게 전하는 일이겠는가. 또한 어진 자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알봉섭제격(閼逢攝提格) 삼복삭조(參伏朔朝 음력 3월 초하룻날 아침을 말함)에 공암(孔巖) 허목은 서한다.

 

[주1]백씨(白氏) 두 문학자 : 고려 때 유명한 문장가(文章家)였던 백문보(白文寶)와 백문절(白文節)을 가리킨다.

[주2]구재(九齋) : 고려 때 최충(崔冲)이 생도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치한 사숙(私塾) 이름인데, 그 사숙 안에 낙성재(樂聖齋)ㆍ대중재(大中齋)ㆍ성명재(誠明齋)ㆍ경업재(敬業齋)ㆍ호도재(浩道齋)ㆍ솔성재(率性齋)ㆍ진덕재(進德齋)ㆍ대화재(大和齋)ㆍ대빙재(待聘齋) 등 9개의 재를 만들고 9개의 학반(學班)을 두었기 때문에 구재라 한다.

[주3]알봉섭제격(閼逢攝提格) : 고갑자(古甲子)인 갑인을 말한다. 고갑자로 알봉은 갑이고 섭제격은 인이다. 여기서는 1674년(현종 15) 갑인년을 말한다.

 

강회백(姜淮伯) 1357(공민왕 6)∼1402(태종 2). 고려 말ㆍ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

할아버지는 중대광(重大匡) 군보(君寶)이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시(蓍)의 아들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 성균좨주가 되었으며, 밀직사의 제학ㆍ부사ㆍ첨서사사(簽書司事)를 역임하였다. 1385년에는 밀직부사로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로 부사 이방우(李芳雨)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창왕을 폐할 때 지밀직(知密直)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부고(府庫)를 봉한 공이 있어,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해에 조준(趙浚) 등과 함께 세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어린 것을 이유로 사퇴하였고,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상소하여 불교의 폐해를 논하고 한양천도를 중지하게 하였으며, 이어 교주ㆍ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이 때 정몽주(鄭夢周)의 사주를 받은 간관 김진양(金震陽) 등이 조준ㆍ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할 때 이에 동조, 대관을 거느리고 상소하였는데, 1392년 정몽주가 살해당하자 처음에는 형인 회계(淮季)가 공양왕의 사위였기 때문에 탄핵을 면하였으나, 곧 진양(晉陽)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398년(태조 7)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저서로는 『통정집』이 있다.

 

記言卷之四十五

 

外家墓文遺事

 

姜政堂遺事

 

政堂公姓姜氏。諱淮伯。字伯父。晉州人。陽村權近弟子。麗末鄭摠榜下及第。恭讓立。以成均祭酒。命爲太子師。時演福寺用圖讖。徙南京。公言不可。出爲交州,江陵道都黜陟使。後召拜政堂文學。與鄭夢周,廉廷秀等建議。革胡服。襲華制。六年。益陽死。公流晉州。太祖召前朝人望。公方居憂。起復爲鷄林尹。俄改東北面都巡問使。固辭。不許。尋卒。年四十六。公窮而不歉。達而不盈。喜怒不見。文章端麗。有通亭集。行于世。晉州斷俗寺。有古梅。流傳政堂梅云。 政堂公之手栽云。

 

강석덕(姜碩德) 1395(태조 4)∼1459(세조 5). 조선 전기의 문신. 강회백(姜淮伯)의 아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

아버지는 동북면도순문사 회백(淮伯)이며, 심온(沈溫)의 사위이고, 아들이 희맹(希孟)이다.

태종 초에 음사(蔭仕)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되었으며, 공조좌랑으로 재직중이던 1416년(태종 16)에 천추사(千秋使)가 가지고 간 무역품 중에서 공조가 납품한 은이 가짜로 판명됨에 따라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세종 초에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로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면서 인수부소윤(仁壽府少尹)에 승진되어 집의를 역임하였고, 일시 면직되었다가 1441년(세종 23) 우부승지로 복직되었다.

그 뒤 좌부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고, 1444년에 호조참판으로 승진, 이듬해에 대사헌, 1446년에는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어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국상에 참여하였다.

1447년 개성부유수로 출사했다가 1449년 중추원사로 입조하였고, 1450년(문종 1) 동지중추원사, 이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1455년(세조 1)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책록되면서 가자(加資)되었다.

일생 동안 학문에 힘쓰고 청렴강개하였으며,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명망이 높았다.

시호는 대민(戴敏)이다.

저서로는『완역재집』이 남아 있다.

 

記言卷之四十五

 

外家墓文遺事

 

姜戴敏公遺事

 

公諱碩德。字子明。政堂公之子也。生八年。政堂公歿。公天稟豪邁。不樂應擧。歎之曰。自有道義可樂。何用科目爲事。蔭補啓聖殿直。遷至內資少尹。世宗聞公行誼。累遷司憲執義同副承旨。時上方修五禮儀。命公知禮曹事。由左承旨。歷大司憲,吏戶刑曹參判,開京留守。至知敦寧。六十五卒。諡曰戴敏。典禮不愆曰戴。好古不怠曰敏。公少孤。事母至孝。及二子登第。請開榮親宴。公不許曰。榮非吾好。榮則必辱。守身以忿欲爲戒。謹於大節。不遺細行。文章高古。以淡泊爲宗。精於篆隷。奉敎書昭憲大妃石誌。嘗師事李文節公。自號曰玩易齋。有玩易齋集。輿覽塚墓誌。漣川縣西十七里姜碩德墓云。

(주) 이문절공: 이행(李行) 자는 주도(周道) 호는 기우(騎牛)

 

황희(黃喜) 1363(공민왕 12)∼1452(문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석부(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균비(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394년(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門下府右拾遺)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慶源敎授)로 편출되었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 해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경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에 발탁되었다.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 해됨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 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 재직중 송사(訟事)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면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行廊都監提調)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실행(失行)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상왕(上王 :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으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였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監牧)을 잘못해 국마(國馬)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太石鈞)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그리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하였다.

또한,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1455년(세조 1) 아들 수신(守身)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기언 제13권 원집 중편

 

동우(棟宇)

 

반구정기(伴鷗亭記) 반구정은 임진강 아래에 있다

 

반구정은, 먼 옛날 태평 재상 황 익성공(黃翼成公 황희(黃喜))의 정자이다. 상국이 죽은 지 2백 년이 채 못 되어 정자가 헐렸고, 그 터전이 쟁기 밑에 버려진 땅이 된 지도 1백 년이 된다. 이제 상국의 후손 황생(黃生)이 강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옛 이름 그대로 반구정이라 하였다. 이는 정자의 이름을 없애지 않으려 함이니 역시 훌륭한 일이다.

상국의 사업이나 공렬은 어리석은 사람도 다 왼다. 상국은 조정에 나아가 벼슬할 적에는 임금을 잘 보좌하여 정치 체제를 확립하고 모든 관료를 바로잡았으며, 훌륭하고 유능한 자를 직에 있게 하여 온 국가가 걱정이 없고 온 백성이 모든 업(業)에 만족하도록 하였다. 물러나 강호(江湖)에서 여생을 보낼 적에는 자연스럽게 구로(鷗鷺)와 같이 세상을 잊고 높은 벼슬을 뜬 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일로 그 탁월함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겠다. 야사(野史)에서 전하는 명인(名人)의 고사에, 상국은 평생 말과 웃음이 적어서 사람들은 그의 희로(喜怒)를 알 수 없었고, 일을 담당하여서는 대체에만 힘쓰고 자질구레한 것은 묻지 않았다 한다. 이것이 이른바 훌륭한 상국이고 이름이 백세에 남게 된 것이리라.

정자는 파주 부치에서 서쪽으로 15리 되는 임진(臨津) 가에 있는데,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모여든다. 강가의 잡초 우거진 벌판에는 모래밭으로 꽉 찼다. 또 9월이 오면 기러기가 찾아든다. 서쪽으로 바다 어귀까지 10리이다.

상(上) 6년 5월 16일에 미수는 쓴다.

 

[주]구로(鷗鷺)와 …… 잊고 : 갈매기처럼 인간 세상의 이해를 초월하여 자연을 즐기며 산다는 뜻이다. 《열자(列子)》 황제편(黃帝篇)에 “해상에 어떤 사람이 갈매기와 벗을 삼았다”에서 나온 말이다.

 

허기(許愭) 1365년(공민왕 14)~1431년(세종 13)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원덕(原德) 호는 매헌(梅軒) 매수(梅叟)

증조부는 동중서문하평장사 문정공 백(伯)이고 조부는 밀직사 지신사 경(絅)이며 아버지는 전리판서 금(錦)이다. 어머니 는 원주 원씨로 정당문학 원송수(元松壽)의 딸이다

1380년(우왕 6) 진사가 되고 1383년(우왕 9) 승보시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다.

태조 즉위 후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로 관직에서 물러나 풍양현에 은거하며 시가를 즐기며 소요했다.

 

記言卷之四十一

 

許氏先墓碑文石誌

 

判奉常寺事墓碣陰記

 

公諱愭。字原德。姓許氏。本陽川人。曾祖同中書門下平章事諡文正公諱伯。祖密直司知申事諱絅。父典理判書諱錦。母原州元氏。外祖政堂文學諱松壽。元至正十四年乙巳公生。大明洪武十三年庚申進士。後三年癸亥。陞補生員。我太祖世爲廣州牧使。以判奉常寺事。謝去豐壤。吟哦自娛。別號梅軒。或曰梅叟。有梅軒詩集。宣德六年辛亥二月十日。公六十七歿。夫人安東權氏。曾祖都僉議司事諡文正公諱溥。祖都僉議右政丞諡正獻公諱煦。父同知密直諱重貴。母德陽奇氏。德城大君諱轍之女。元至正皇后之兄也。夫人與公同年生。公旣歿之後月十八日。夫人歿。其年十月。合葬長湍鳳川上西向之山。以曾孫琮,琛。皆顯於我世祖,睿宗,成宗間。追爵三世。公爲吏曹判書。夫人爲貞夫人。二男襄陽都護府使扉,護軍樞。今子孫九世十世。三公列卿二十餘。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褆). 1394(태조 3)∼1462(세조 8). 조선 전기의 왕자.

자는 후백(厚伯). 태종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제(霽)의 딸이다

부인은 광주 김씨(光州金氏)로 한로(漢老)의 딸이다.

1404년(태종 4)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 범절이라든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이나 엄격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하는 등의 자유분방한 풍류 생활을 더 즐겼다.

이와 같은 품행은 부왕인 태종의 눈에도 걱정스럽게 비쳤으며, 엄격한 유학자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몇 차례 그에게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행을 닦도록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심한 벌을 주기도 했으나, 끝내 부왕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418년에 유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그의 동생이며, 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러한 파격적인 행동을 했으며, 세자의 지위를 잃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동생인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종과 매우 우애가 깊었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되었다. 하지만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러한 그의 특이한 생애는 후세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듯하며, 재미있는 일화도 적지 않다. 특히 시와 서에 능하였다.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아들 셋과 딸 넷을 두었다.

 

기언 제45권 원집

 

외가 묘문 유사(外家墓文遺事)

 

지덕사기(至德祠記)

 

양녕대군(讓寧大君)은 우리 태종(太宗)의 장자(長子)이다. 처음에는 그를 세워 세자(世子)로 삼았다. 야사(野史)에,

“영락(永樂) 5년(1407, 태종7)에 세자(世子) 이제(李禔)를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조회하게 하였는데 제(帝)가 대우하기를 특별히 두텁게 하고 이끌어 어좌(御座)에 오르게 하고는 손을 잡고 더불어 말하며 칭찬하기를 ‘어진 왕자로다.’ 하고 후하게 하사하였다 하며, 환국할 때에는 곡부(曲阜)에 들러 공자(孔子) 사당에 배알(拜謁)하였다.”

하였다. 아우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나면서부터 성덕(聖德)이 있어 백성이 충녕에게로 마음을 돌리니, 세자가 마음속으로 알아차리고 거짓 미친 체하여 도망가서 세자 자리를 양보하였다. 16년(1418, 태종18)에 삼공(三公)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워 세자로 삼기를 청하니, 이가 장헌왕(莊憲王)이다. 그리고 이제(李禔)를 광주(廣州)에 내쫓으니 당시에 태백(泰伯)과 우중(虞仲)에 비교하였다.

양녕(讓寧)은 사냥과 말달리기와 술 마시고 취하는 것을 좋아하여 스스로 미친 짓을 하였을 뿐 다른 일은 없었다. 장헌왕(莊憲王)이 즉위(卽位)하여 예(禮)로 높여 대접하기를 매우 잘하였으며, 하고자 하는 것이면 한결같이 뜻을 맞추어 주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고 양녕대군(讓寧大君)에 봉(封)하고 아들 이애(李)를 순원군(順原君)으로 삼았다. 대군은 천수(天壽)를 누리고 고종(考終)하였다.

상(숙종(肅宗)) 원년(1675)에 우의정 신(臣) 목(穆)이 상께 아뢰니, 상이 봉사자(奉祀者)와 자손(子孫) 중에 인망(仁望)이 있는 자를 물어 특별히 불러 벼슬을 제수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대군 사당을 남곽(南郭) 아래에 세우게 하였다. 다음해에 사당이 낙성(落成)되자 사당 이름을 ‘지덕사(至德祠)’라 하였다.

상 원년 8월 3일 임신에 외후손(外後孫)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허목은 기를 쓴다.

 

[주]지덕사(至德祠) : 태종의 원자(元子)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사당이다. 사당 이름을 지덕(至德)이라 한 것은, 양녕대군이 세자(世子)에 책봉(册封)되었다가, 아우인 충녕대군이 태어나면서 성덕(聖德)이 있음을 보고는 미친 척하고 주색에 빠져 들어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세자 자리에서 쫓겨남으로 하여 세자 자리가 자연적으로 충녕(忠寧)에게 내려가게 하였는데 양녕대군의 이와 같은 행실이 주(周) 나라 태백(泰伯)의 행실과 같다 하여 내린 명칭이다.

 

황보인(皇甫仁) 미상∼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 자는 사겸(四兼)·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

아버지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임(琳)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 좌정언이 되었고, 1420년 좌헌납이 되었다.

1422년에는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으로서 강원도경차관으로 파견되어 기근을 규찰한 뒤 귀환해 곧 장령이 되었다. 1425년 1월 한성소윤(漢城少尹) 재임중 경상도찰방으로 파견되었으며,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를 거쳐 1428년 집의가 되었다.

다음해에는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좌부대언을 거쳐 1430년에는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431년 강무행행(講武行幸)중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마(人馬)가 죽거나 다치자 이에 대한 문책으로 파면되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형조참의로 복직되었으며,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리고 1432년 형조좌참판·병조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10월부터 다음해 1월에는 사은사(謝恩使) 정효전(鄭孝全)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3년 판중추원사 하경복(河敬復), 형조판서 정흠지(鄭欽之), 예문관대제학 정초(鄭招) 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찬진(撰進)하였다. 이듬해 병조참판을 거쳐 1436년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1440년에는 평안·함길도도체찰사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 의정부좌참찬 겸 판병조사(議政府左參贊兼判兵曹事)가 되면서 국왕으로부터 대소행행(大小行幸)에 항상 호종하라고 할 정도로 아낌을 받았다.

1441년 함길도에 파견되어 종성을 수주(愁州) 강변으로 이치(移置)하면서 종성·회령·온성·경원·경흥 등지에 소보(小堡)를 설치해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후 빈번하게 평안도와 함길도를 출입하면서 김종서(金宗瑞)와 쌍벽이 되어 북변을 개척하고 방어하는 데 공헌하였다.

1445년 좌찬성으로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임하고, 1447년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1449년 양계축성(兩界築城)의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우의정의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아 그대로 우의정에 유임하면서 축성사를 관장하다가 그 해 좌의정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은사로 부사 김효성(金孝誠)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고 귀환했으며, 이듬 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總護使)가 되어 문종의 국상을 총령하였다.

다음해에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서 감춘추관사 김종서 등과 함께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鄭苯), 우찬성 이양(李穰),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과 함께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중 피살되었다.

오랫동안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지 못하다가, 1705년(숙종 31) 7월 한성부판윤 민진후(閔鎭厚)의 상소를 계기로 김종서와 함께 복관(復官)이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그 뒤 1719년 후손이 전조(銓曹 : 吏曹)에 서록(敍錄)됨으로써 부분적으로 신원되었다. 그러다가 1746년(영조 22) 복관되면서 완전히 신원되었다. 1758년에는 충정(忠定)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 : 端宗陵) 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었다. 그리고 1804년(순조 4) 집 앞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1807년에는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구룡포읍의 경남서원(慶南書院), 종성의 행영사(行營祠)에 제향되었다.

 

기언 제17권 원집 중편

 

구묘문(丘墓文)

 

노릉(魯陵 단종(端宗)) 때의 정승 황보공(皇甫公)의 묘문(墓文)

 

노릉 때 정승 황보공의 묘가 파주(坡州) 천참(泉站) 서쪽 발흥(勃興) 관도(官道)에 있다. 그 연대를 상고하니, 노릉 2년(1453, 즉위년까지 계산하여 2년이 됨)에 공이 이미 화를 당했는데, 묘소에 표지를 세운 것은 중종 14년(1519)이었으니, 67년 만이다. 화를 당하여 자손이 모두 죽어서 현재는 황보씨의 대가 끊어졌으며, 그를 거두어 장사 지내고 또 묘소에 표지를 세운 자도 모두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후세에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를 기록하여 파평고사(坡平古事)에 붙이는 바이다.

그 묘표(墓表)의 글을, ‘영천 황보공의 묘[永川皇甫公之墓]’라고 크게 새겼고, 또 작은 글씨로,

“공의 휘는 인(仁)이니, 노산조(魯山朝)의 수상이다. 경태 계유년(1453, 단종1) 정난(靖難) 때에 두 아들, 한 손자와 같이 화를 당하였다.[公諱仁魯山朝首相景泰癸酉靖難時幷二子一孫被禍]”

라고 22자를 새겼으며, 맨 끝에는 또,

“정덕 기묘년(1519, 중종14) 2월에 비를 세웠다.[正德己卯二月立石]”

고 새겼다.

금상(今上) 7년 병오(1666, 현종7) 4월 상현(上弦) 후 2일에 허목은 쓴다.

 

권람(權覽) 1416(태종 16)∼1465(세조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검교정승 희(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근(近), 아버지는 우찬성 제(踶), 어머니는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이준(李儁)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크고 기책(奇策)이 많았다. 책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 고적을 찾아다니면서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한명회와 서로 약속하기를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고 했다. 한명회와의 교우는 관포(管鮑)와 같았다.

35세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있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에 향시와 회시(會試)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고, 전시(殿試)에서 4등이 되었다. 그러나 장원인 김의정(金義精)의 출신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장원이 되었다. 그해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교리로서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 歷代兵要≫의 음주(音註)를 편찬하는데 동참했다. 이를 계기로 그와 가까워졌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권력은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 대신들의 손에 들어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대신들과 결탁해 세력을 키워갔다. 이에 불안을 느낀 수양대군이 동지를 규합하고 있을 때,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수양대군에게 접근해 집권을 모의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양정(楊汀)·홍달손(洪達孫)·유수(柳洙)·유하(柳河) 등 무사들을 규합해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김종서·황보 인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이어 승정원동부승지에 특진되었다. 1454년 2월에 우부승지, 8월에 좌부승지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6월에 이조참판에 발탁되고, 이어 9월에는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세조 2) 2월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3월에 역신(逆臣)들이 가졌던 연안·전주·충주·양주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해 7월에 집현전대제학·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1457년 8월에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승진되었다. 1458년 5월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하고, 그해 12월 의정부우찬성에 승진했다.

1459년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 5월 좌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463년 9월 ≪동국통감≫ 편찬의 감수책임을 맡았다.

시문집으로 ≪소한당집 所閑堂集≫이 있고, 할아버지가 지은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 應製詩註≫는 그의 역사의식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조 때 ≪동국통감≫의 편찬방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기언 제13권 원집 중편

 

동우(棟宇)

 

후조당기(後凋堂記)

 

후조당은, 세조 때 명신 권 익평공(權翼平公 권람(權擥))의 옛집이다. 당은 목멱산(木覔山) 북쪽 기슭 비서감(祕書監) 동쪽 바위 둔덕에 있다. 세조가 그 집에 거둥한 후 오늘날까지 그 서쪽 둔덕에 있는 돌샘을 ‘어정(御井)’이라 부른다. 그 위에 소한당(素閒堂)의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당(堂)은 3칸에 남쪽으로 온돌방이 있는데, 겨울에 따스한 볕이 들고 여름에 시원한 바람이 든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서 푸른 언덕에 석양이 비낄 때면 창가는 쓸쓸하기만 하다. 세운 지는 아주 오래되었는데, 상국이 살던 당시에서 오늘날까지 수백 년을 거쳐 6대째 사도공(司徒公 형조 판서 권반(權盼)을 가리킴)에 이르러 비로소 중건되었다. 마룻대를 고치거나 기둥을 갈거나 하지도 않았고 또 더 꾸미지도 않았으며, 기울고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때 묻은 곳이나 닦아서 집은 예나 다름이 없다. 집 남쪽 돌 아래에서 솟는 샘물이 매우 맑고 차갑다. 섬돌 밑은 모두 산돌에 펑퍼짐한 너럭바위이고 뜨락에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더욱 기이하다. 3월에는 산꽃이 만발하고 동산에 꽉 들어선 소나무는 겨울 추위가 닥쳐와도 이파리가 변하지 않는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松柏)이 맨 나중에 시듦을 알 수 있다.”

란 공자의 말을 일컬었는데, 이 말에 연유하여 ‘후조당’이라 하였으니, 자신을 경계하는 뜻이다. 지세가 높아 북록(北麓)을 바라보면 화산(華山)ㆍ백악산(白岳山)ㆍ인왕산(仁王山) 멧부리가 벌여섰고, 금원(禁苑)의 깊은 숲에 층층이 솟은 높은 궁궐들이 관청과 시가(市街)를 이루고 있어 정사를 내는 벼슬아치와 재산을 늘리는 장사치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니, 종횡으로 누빈 넓디넓은 길과 집이 다닥다닥한 장안 터전은 구계(久溪)ㆍ학동(鶴洞)과 함께 남산의 명승으로 불린다.

사도공의 손자인 사부(師傅) 적(蹟)이 뒤를 이어 당 앞에 돌을 깨고 연못을 팠는데, 이끼는 짙고 물은 맑아 바위 그림자가 환히 비친다. 사부는 아들 흠(歆)을 두었는데, 그는 곧고 올바름을 좋아하며 학식이 넓고 행실이 훌륭하다. 때문에 나는 권씨 집안에 인재가 있다고 여겼다. 그가 지난 세대의 고사 고적을 열거하여 나에게 ‘후조당 기문’을 청하기에 글을 지으니 3백여 글자로 사실을 기록했다.

우리 대행(大行) 15년(1674, 현종15) 10월 신축일이다.

 

김종직(金宗直) 1431(세종 13)∼1492(성종 23).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밀양 출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는 사예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홍신(弘信)의 딸이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계승하여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도학 정통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은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으며, 1462년승문원박사 겸 예문관봉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감찰이 되고, 이어서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쳤으며, 1476년(성종 7)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차(編次)하여 문장가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훗날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하여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그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조·성종 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절의와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하였으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까지 전해져 이들 또한 절의를 높이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非道)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종직도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과 관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여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되었다. 그는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켰다.

그의 도학이 조선시대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점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류록(遊頭流錄)』·『청구풍아(靑丘風雅)』·『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일선지(一善誌)』·『이준록(彝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어 그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記言別集卷之十四

 

雜著

 

佔畢齋金先生墓碣識 墓在密陽大洞里

 

崇禎中李侯惟達。來莅此府。嘗謁先生之墓。念禮物不完。無以稱大葬也。官出財託子孫。以爲作役之資。諸生受之。侯去後十四年。始就功。於是墓碣,石床,華表大備。仍識其年月役作始終。善乎。當侯之時。移建禮林祠。立神道碑。又作松溪閭表碑。侯之尙德右文如此。年月日。陽川許穆。謹誌。

 

허훈(許薰) 성종조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자방(子芳)

아버지는 양양도호부사 비(扉)이고 외조부는 판중추원사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 )이다. 부인 고성이씨는 직보문관(直寶文閣) 운로(云老)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장례원 사의(掌隸院司議0를 지내고 통훈대부로 합천군수를 지냈다.

후에 증손자 자(滋)가 귀하게 되어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記言卷之四十二

 

許氏先墓碑文 子孫碣附

 

陜川郡守墓碣陰記

 

公諱薰。字子芳。姓許氏。始祖諱宣文。事高麗太祖。拜孔巖村主。村主。古郡邑官名。村主生尙衣奉御玄。奉御生內史舍人元。舍人生禮部侍郞正。侍郞生太尉載。太尉生工部尙書純。尙書生直史館利涉。直史館生禮賓少卿京。少卿生禮部尙書遂。尙書生僉議中贊珙。中贊生版圖佐郞冠。佐郞生都僉議贊成伯。贊成生知申事絅。知申事生典理判書錦。判書生判奉常寺事愭。判奉常生襄陽都護。府使扉府使生公。自始祖至公爲十七世。太尉中贊佐郞,典理,判書事。在麗史本傳。公又李孝靖公貞幹之外孫也。初選博士弟子。遂通籍於朝官。止通訓大夫行陜川郡守,晉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五十七歿。令人固城李氏。高麗大學士嶠之五世孫。而直寶文閣云老之孫也。生二男二女。男郡守珉,庫令瑗。二壻郡守金德源,太學生員崔泗珉。生磧。以其女爲成宗諸王子完原君夫人。初授別提。以恩例追爵左贊成。瑗生磁。明宗世爲吏曹判書。說部曰。與宋純協心薦賢。忤用事者李芑。遠貶卒。贈領議政。追爵三世。公爲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令人爲貞敬夫人。墳墓。在楊州治松山李氏族葬未向之原。貞敬夫人墓。在前岡。戌向爲封。

 

김시습(金時習) 1435년(세종 17)∼1493년(성종 24).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5세에 이미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져 장래에 자못 크게 쓰겠노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한다.

그뒤 13세까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 성균관대사성 김반(金泮), 별동(別洞)의 윤상(尹祥) 등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한 각종 사서(史書)와 제자서(諸子書)를 배우고 익혔다.

15세에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죽고 부친은 병이 들어 계모를 맞아들였다. 이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한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송도(松都)를 기점으로 관서지방을 유랑하여, 당시에 지은 글을 모아 24세인 1458년(세조 4)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을 엮었는데, 그 후지(後識)에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倫綱)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고 적었다.

계속하여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금강산‧오대산 및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지은 글을 모아 1460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다. 이후는 주로 삼남지방을 유랑하여, 1463년에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녕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내불당에서 교정(校正)일을 맡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이 영의정이고, 김수온(金守溫)이 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을 저주하여 다시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그러나 그해 다시 효녕대군의 추천으로 원각사(圓覺寺)의 낙성회(落成會)에서 찬시(讚詩)를 바친 점 등으로 미루어 세조 개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노골적인 반감이나 불만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머물렀던 금오산실은 바로 용장사(茸長寺)이며, 그 집의 당호가 ‘매월당’이다.

이곳에서 31세 때부터 37세에 이르는 황금기를 보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집구시(集句詩)인 〈산거백영(山居百詠)〉도 이때(1468)에 지은 작품이다. 그동안 세조와 예종이 바뀌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481년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이때 그는 육경자사(六經子史)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있는 100여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소오산수(嘯傲山水)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버리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죽을 때 화장하지 말 것을 유언하여 절 옆에 시신을 안치해두었는데, 3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었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부도(浮圖)에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이미 노소(老少) 2상(二像)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매월당집》(신활자본)에 〈동봉자화진상(東峰自畵眞像)〉이 인쇄되어 전한다. 그밖에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기언 제11권 원집 중편

 

청사열전(淸士列傳)

 

김시습(金時習)

 

김시습은 본디 창해(滄海 강릉) 사람이다. 태어난 지 8개월에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5세에 《대학(大學)》ㆍ《중용(中庸)》을 환히 읽어 어른도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집현전(集賢殿)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를 보고 ‘뛰어난 인재이다.’ 하면서 이름을 시습, 자를 열경(悅卿)이라고 지어 주었다. 세종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 보고자 하였으나 임금의 신분상 그럴 수 없어서 승정원을 시켜 불러다 보고 그의 집에 많은 하사품을 내리면서,

“잘 키워라. 크게 쓰일 것이다.”

하였다. 이리하여 사방에서는 그를 ‘오세동자(五歲童子)’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문종 때에 와서는 시습이 점차 장성하여, 벌써 널리 통달하고 남달리 유능하여 명예가 더욱 높았다. 노릉(魯陵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시습은 책을 다 불사르고 집을 떠나 절로 도피하여 속세에 발길을 끊었다. 양주(楊州)의 수락산(水落山), 수춘(壽春 춘천)의 사탄향(史呑鄕), 동해가의 설악산(雪嶽山)ㆍ한계산(寒溪山), 월성(月城)의 금오산(金鰲山)이 모두 시습이 머물던 곳이다. 스스로 호를 췌세옹(贅世翁)이라 하였는데, 혹은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峯)이라고도 불렀다.

시습은 일찍이 높은 명예를 얻었다. 그런데 세상의 변고[世故 세조의 찬탈을 말함]를 만나 하루아침에 세상을 피해 속세에 발길을 끊고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숨어 살았고 이상하고 기괴한 짓을 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치세(治世)에 살면서 몸만 조촐히 하며 인륜을 어지럽힘은 수치스러운 행위이고, 난세(亂世)를 만나서 대중을 떠나 멀리 나섬은 훌륭한 일이라고 여겨서였던 것이다.

개연히 미련 없이 떠나 이름난 산택(山澤)을 찾아다녔으니, 마아갑(摩阿岬)을 유람하였고, 개성에 가서 국학(國學)을 관람하였고, 살수(薩水)에 가서는 칠옹중(七翁仲) 시를 읊었다. 평양에서 정전(井田)을 관람하고 보현봉(普賢峰)에 오르니 신기한 멧부리[神岳]가 8만 4천이고, 그 밖의 아득한 북녘 땅에는 이상한 풀도 많고 괴이한 짐승도 많았다. 강남(江南)ㆍ해양(海陽)에 이르러서 값지고 이상한 물산(物産)의 풍요함을 보고 ‘백제는 이 때문에 강성했었고 이 때문에 망했구나.’라고 말하였다. 지(志)에,

“이곳 풍속이 강하고 사나우면서 원수 갚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백제의 남은 기풍이 있어서이다.”

라고 하였다. 다시 동으로 발길을 돌려 풍악산(楓嶽山)ㆍ오대산(五臺山)에 올라 동해 끝까지 다 구경한 다음 월송정(越松亭)에 노닐며 울릉(鬱陵) 우산도(于山島)를 바라보았다.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서 속세로 돌아왔는데, 어떤 이가 벼슬을 하라고 권유하였으나 듣지 않고 발길 내키는 대로 떠돌면서 세상을 희평하며 유유자적하였다. 그의 편지에 보면,

“13세에 경사(經史)와 백가(百家)를 환히 통하였고, 활달한 기상에 비분강개한 큰 절개가 있었다. 19세에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법을 배웠는데, 지금은 잊어버렸다.”

하였다. 이어서 천지 만물의 조화를 서술하여 스스로의 울적한 회포를 풀었다. 또 어떤 이는,

“그는 욕심 없이 속세 밖을 노닐었고, 운명의 변화를 조정하는 술법에 능통하였다.”

한다. 자화상이 있는데, 그 찬에,

“네 모습 지극히 보잘것없고, 네 마음 너무나도 미련하니, 마땅히 너를 구렁텅이 속에 두련다.”

라고 하였다. 아내가 죽자, 다시 장가들지 않고 중의 차림으로 동해를 비롯 사방을 다니며 노닐었다.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마치니 59세였다. 주검을 불사르지 말라는 유언이 있어서 절 근처에 초빈하였다가 3년 후에 장사 지내려고 파 보았는데, 얼굴이 산 사람 같아 중들이 부처라 하였다. 화장을 한 다음 그곳에 부도(浮圖)를 세웠다. 저서(著書)로 《사방지(四方志)》 1600편과 산천 지리를 배경으로 쓴 작품 2백 편이 남아 있고, 이 밖에도 많은 시가 세상에 전해진다. 음애공(陰崖公 이자(李耔))이 그 글을 읽어 보고,

“불가에 몸을 담고 유교를 행한 이다.”

라고 평하였다.

 

[주1]칠옹중(七翁仲) : 칠불사(七佛寺) 앞에 있는 7개의 돌기둥을 말한다. 수(隋) 나라 군사가 살수를 건너려 할 때, 배가 없어서 강가에 늘어서 있었는데, 갑자기 7명의 중이 나타나서 물을 건넜다. 그것을 본 수군들은 물이 얕은 줄만 알고 건너다가 모두 빠져 죽어 강을 메웠다. 그래서 칠불사라 하고 7개의 돌기둥을 세워 놓았다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52》

[주2]정전(井田) : 9백 묘(畝)의 땅을 ‘정(井)’ 자 모양으로 백 묘씩 9등분하여 바깥의 8백 묘는 사전(私田)으로 여덟 농가에서 나누어 경작하고, 중앙의 1백 묘는 공전(公田)으로 공동 경작하여 나라에 바치도록 만들어진 농지를 말한다. 고대 은(殷) 나라 기자(箕子)가 평양에 와서 도읍을 정하고 정전을 구획하였다고 하는 설이 있다. 《燃藜室記述別集 卷11 政敎典故, 卷19 歷代典故》

 

기언 별집 제10권

 

발(跋)

 

동봉(東峯) 친필의 시첩(詩帖)에 대한 발

 

소재 상국(蘇齋相國 노수신(盧守愼))이 선비로 있을 때에 명산 대택을 구경하러 다니다가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이 친필로 쓴 시 17수를 얻어 대대로 전해 온 지가 5세(世) 180여 년이나 되었다. 그가 쓴 시권 서(詩卷序)에 ‘음애공(陰崖公 이자(李耔))은 글씨가 고아하고 담백하며 자획(字畫)이 고르다고 평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주봉(柱峯 조경(趙絅))의 서고에서 동봉이 유 양양(柳襄陽 유자한(柳自漢)이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지냈으므로 이름이다)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보았는데, 그 글씨의 고르고 적절함이 과연 그러했다. 지금 또 이 시를 보니, 어떤 것은 불사(佛寺)의 벽에서 얻은 것이고 어떤 것은 승축(僧軸)에서 나온 것인데, 대개 산중에서 나온 것이 많다. 글씨는 단 한 자도 방탕하게 된 것이 없어 한 자 한 자마다 심획(心畫)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비록 이상한 행동으로 중이 되어 세상을 등지고 지내기는 했으나, 문장과 글씨에서 그 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일찍이 그의 문장을 읽다가 그 마음을 애달프게 여겼는데, 아, 슬프다. 그 글씨도 또한 그렇구나.

계축년 8월에 태령 노인(台嶺老人)은 쓴다.

 

이심원(李深源) 1454년(단종 2)∼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연(伯淵), 호는 성광(醒狂)‧묵재(默齋)‧태평진일(太平眞逸).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증손으로, 평성군(枰城君) 이위(李徫)의 아들이며, 모친은 인천채씨(仁川蔡氏)로 부사 신보(申保)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1478년(성종 9) 주계부정(朱溪副正)에 제수되어 성종의 신임을 받았으나, 임사홍(任士洪)의 무고로 장단‧이천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487년 종친과시강경사(宗親科試講經史)에서 장원급제하여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제수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뒤 조광조(趙光祖)‧정광필(鄭光弼)을 비롯한 유림들의 계(啓)에 의하여 1517년(중종 12)에 신원(伸寃)되었으며, 또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이 세워지고, 흥록대부주계군(興祿大夫朱溪君)으로 증직되었다.

충경사(忠景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성광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기언 제58권 산고속집

 

절행(節行) 충신(忠臣)

 

주계군(朱溪君) 묘갈(墓碣)의 음기(陰記)

 

주계군은 휘(諱)가 심원(深源), 자(字)는 백연(伯淵), 별호(別號)는 성광(醒狂)인데, 우리 공정왕(恭定王 태종)의 둘째 왕자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증손(曾孫)으로 종실(宗室)의 공자(公子)가 된다.

성품이 단정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문학으로 이름이 났으며, 그 당시 선비들이 다투어가며 그를 사사하였다.

선공자(先公子) 평성군(枰城君) 이위현(李偉賢)은 우리 혜장왕(惠莊王 세조(世祖))께서 정직하고 글 잘하는 이라 하였다. 우리 강정왕(康靖王 성종(成宗))이 훙(薨)하고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자 광패하고 무도하여 충신과 선량한 사람을 살해하여 음탕과 학정을 일삼으니 국인들이 배반하였다. 공자가 여러 번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극언을 하였는데, 폐신(嬖臣) 임사홍(任士洪)이 참소하며 일을 꾸며서 대역죄(大逆罪)를 씌워 그 집을 멸족(滅族)할 때, 두 아들 이유녕(李幼寧)과 이유반(李幼槃)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이유녕은 재능과 학식으로 높이 등용되어 화를 당할 때에 이조 정랑으로 있었다. 작은 아들 이유정(李幼靖)과 이유녕의 아들 이돈복(李敦復)은 어렸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고 종이 되었는데, 그 사실은 역사에 실려 있다. 공자의 집안은 이미 멸족을 당하였으나 문집(文集) 7권이 명양정(鳴陽正) 이현손(李賢孫)에게 전하였는데, 그는 공자에게 수업을 한 제자다. 연산군이 폐위(廢位)되고 공희왕(恭僖王 중종의 시호)이 즉위하여 모든 죄수를 석방하고 공자에게는 흥록대부(興祿大夫) 정1품의 작록(爵祿)을 추증(追贈)하였다. 그의 집을 정표(旌表)하고 묘지기 열 집과 복전(復田) 5결(結)을 두어 영원토록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이돈복을 불러 벼슬을 주어 곡산 군수(谷山郡守)에 이르게 되었다.

옛날 은(殷) 나라가 망할 때에 미자(微子)는 떠나가고, 기자(箕子)는 거짓 미친 행동을 하여 종이 되었고, 비간(比干)은 간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공자(孔子)는 그것을 평하여, ‘은 나라에 3인(仁)이 있다.’ 하였는데, 세 사람의 행동이 같지는 않았으나 그 마음만은 지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가 인(仁)이라 칭한 것인데, 공자(公子)야말로 비간 같은 인이라고 할 만하다. 공자가 죽임을 당한 것이 지금 234년인데, 외손(外孫)에 연안 도호부사(延安都護府使) 권덕휘(權德徽)가 있어 그 묘에 비석을 세우고, ‘조선공자주계군지묘(朝鮮公子朱溪君之墓)’라 하였다.

금상 즉위 7년(1681) 가을 8월 초하루 신사.

 

[주]복전(復田) : 복(復)은 면제(免除)해 준다는 뜻으로 《한서(漢書)》 형법지에 “시험에 합격하면 호세(戶稅)를 복한다.[中試則復其戶]” 하였고 주(註)에, “복(復)은 부세(賦稅)를 면제하여 주는 것이다.” 하였는데 여기서 복전이라 함은 면세해 주는 밭을 말한다.

 

조지서(趙之瑞) 1454년(단종 2)∼1504년(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백부(伯符), 호는 지족(知足) 또는 충헌(忠軒).

부친은 사헌부감찰 조찬(趙瓚)이며, 모친은 생원 정참(鄭參)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서 1등으로 합격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권지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478∼1479년에는 통신사 이계동(李季仝)의 군관(軍官)이 되어 일본에 내왕하였다.

1479년 승문원저작으로 다시 문과중시에 1등으로 급제하고 형조좌랑에 발탁되었으며, 이해 건주위(建州衛) 정벌을 위하여 파견된 서정대장(西征大將) 어유소(魚有沼)의 종사관이 되어 서정에 참가하였으나, 어유소의 파병(罷兵)과 관련된 전명(傳命)을 잘못한 일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유배되었다.

그뒤 1481년 “문학에 뛰어난 인물이니 서용하라.”는 성종의 특지에 따라 서반직에 복직된 뒤 성종대를 통하여 교리‧형조정랑‧지평‧응교, 세자시강원필선‧보덕을 역임하였으며, 이와 함께 경연(經筵)의 시독관(侍讀官) 과시강관(侍講官)을 항상 겸대하였다.

이어 1495년(연산군 1) 창원부사로 파견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지리산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세자시에 그의 풍간(諷諫)함과 집요한 진강(進講)을 혐오하였던 연산군의 기휘(忌諱)로 이에 연루되어 참살되었다.

성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충효와 시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동문선》에 〈언심견투(彦深見投)〉라는 제목의 시 1수가 전한다.

1506년(중종 1) 관작이 회복되고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면서 신원(伸寃)되었다. 경상남도 진양의 신당서원(新塘書院)에 제향되었다.

 

기언 제26권 원집 하편

 

세변(世變)

 

조 시강(趙侍講) 유사(遺事) 후제(後題)

시강(侍講) 조지서(趙之瑞)가 연산군 때 직간으로 임금의 비위를 거슬러 극형을 받아 죽으니, 사림(士林)들이 지금까지 슬퍼한다. 아, 슬프도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낸 것은 우연이 아닌데, 끝내 그 몸에 앙화를 입혀서 선(善)을 행하려는 자의 경계가 되게 함은 무엇 때문일까. 전(傳)에 이르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더디 조락(凋落)한다는 것을 안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걸(夏桀)의 시대에는 매백(梅伯)이 있었고, 상주(商紂)의 시대에는 비간(比干)이 있어 심장(心臟)을 해부당하고도 후회하지 않았으므로 공자가 그를 ‘인(仁)하다’ 하였다. 비록 크게 혼란한 세상을 만났다 하더라도 군자는 의(義)를 곧게 지키고 사특하지 않으며 충성을 다하고 죽음을 사양하지 않아, 자신의 희생을 기욕(嗜欲)과 같이 여긴다. 그래서 의(義)가 밝고 행실이 더욱 나타나 그 곧은 도를 후세에 드러내서 백대(百代)를 격려하여 충신과 지사(志士)들을 권면하는 바 적지 않으니 하늘이 착한 사람을 낸 것은 우연이 아님이 본디 이와 같다.

또 그 부인이 열녀(烈女)의 행실을 이룬 일은 듣는 이가 목멜 정도로 슬퍼할 만한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드러내어 조 시강(趙侍講)의 유사(遺事) 뒤에 쓰는 바이다.

[주1]하걸(夏桀)의 …… 매백(梅伯) : 매백은 주(紂)의 제후로 주의 무도함을 간하다가 죽었다. 그 사실이 《한비자(韓非子)》 난언(難言),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 《초사(楚辭)》 천문(天問) 등에 자세히 보이는데, 여기에서 하걸(夏桀)의 시대라고 한 것은 아마 착오인 듯하다.

[주2]비간(比干)이 …… 해부당하고도 : 비간은 주왕(紂王)의 숙부인데, 주왕의 악정(惡政)을 간하니, 주왕이 성내며 “나는 성인의 심장(心臟)에는 일곱 구멍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고 그의 심장을 쪼개 보았다 한다. 《十九史略 殷紀》

 

중략

 

이원익(李元翼) 1547년(명종 2)∼1634년(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선생의 처조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치(袳)의 4세손으로, 이억재(李億載)의 아들이다. 키가 작아 키 작은 재상으로 널리 불렸다.

15세에 동학(東學: 4학 중의 하나)에 들어가 수학하여 1564년(명종 1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그 이듬해 승문원권지부정자로 활동하였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류성룡(柳成龍)이 일찍부터 그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자‧저작 겸봉상직장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그 이듬해 가을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병적(兵籍)을 정비하면서 실력을 발휘하였는데, 특히, 이이(李珥)에게 인정되어 여러 차례 중앙관으로 천거되었다.

1575년 가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온 뒤, 지평‧헌납‧장령‧수찬‧교리‧경연강독관‧응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사이가 좋지 않아 왕자사부 하락(河洛)으로부터 승정원이 탄핵을 받은 바 있었는데, 다른 승지들은 도승지 박근원과 영의정 박순의 불화문제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화를 면하려 하였으나, 그는 다른 승지와는 달리 동료를 희생시키고 자신만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상주하여 파면되어 5년간 야인으로 있었다.

그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었다. 그는 양곡 1만여석을 청하여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 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입번제도는 그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안주지방에는 뽕을 심어 누에 칠 줄을 몰랐는데, 그가 권장하여 백성들로부터 이공상(李公桑: 이원익에 의하여 계발된 蠶桑이라는 뜻)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뒤 임진왜란 전까지 형조참판‧대사헌‧호조와 예조판서‧이조판서 겸 도총관‧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하였고, 선조도 평양으로 파천하였으나 평양이 위태롭게 되자 영변으로 옮겼다.

이때 겨우 3,000여명으로 평양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총사령관 김명원(金命元)의 군통솔이 잘 안되고 군기가 문란함을 보고, 먼저 당하에 내려가 김명원을 원수(元帥)의 예로 대함으로써 군의 질서를 확립하였다.

평양이 실함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에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으며,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하였다.

1595년에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주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정응태(丁應泰)가 경략(經略) 양호(楊鎬)를 중상모략한 사건이 발생하여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보낼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를 인선하고 있었는데, 당시 영의정 유성룡에게 “내 비록 노쇠하였으나 아직도 갈 수는 있지만, 다만 학식이나 언변은 기대하지 말라.” 하고 자원하였다.

그러나 정응태의 방해로 소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조로부터 많은 위로와 칭찬을 받았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류성룡을 공격하여 정도(正道)를 지켜온 인물들이 모두 내몰림을 당하자 이를 상소하고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다.

그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9월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이때 정영국(鄭榮國)과 채겸길(蔡謙吉)이 홍여순(洪汝諄)‧임국로(任國老)를 두둔하면서 조정대신을 공격하였는데 그는 당파의 폐해로 여기고 이의 근절을 요구하였고, 또 선조가 세자에게 양위하려는 것을 극력 반대하고 영상직을 물러났다.

1600년에 다시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지방과 서북지방을 순무하고 돌아왔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 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그는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김육(金堉)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지방에 한하여 실시하여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에 대한 근신, 국가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하였고,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가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조(鄭造)‧윤인(尹宎) 등에 의하여 대비폐위론이 나오자, 그는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극렬한 어구로 상소문을 초하여, 홍천으로 유배되었으며 뒤에 여주로 이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므로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하여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하였으며, 서울로 환도하여 훈련도감제조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쇠하여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으며, 그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그의 집은 두어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하였다 한다.

인조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雇貢答主人歌)〉가 있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기언 제10권 원집 중편

 

인물(人物)

 

《이문충공유권(李文忠公遺卷)》 서(序)

 

상국(相國)의 명성과 공업이 온 세상에 드러나고 사방에 두루 미쳤는데, 그 마음을 찾아보면 바로 한결같음이다. 한결같기 때문에 밝으며, 밝기 때문에 신념을 갖게 되고 신념을 갖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로써 임금을 섬기니 임금이 신뢰하고 이로써 남을 다스리니 남들이 심복하였으며, 이로써 큰 어려움을 물리치고, 이로써 큰 어려움을 처리했다. 부귀(富貴)ㆍ화복(禍福)ㆍ궁액(窮阨)까지도 이 한마음으로 처한 때문에 상국의 덕은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비록 붕당(朋黨)으로 어수선하던 때였으나 친한 사람과 소원한 사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진 상국이라고 말하였다. 광해군이 무도(無道)하여 상국의 충성을 원수로 여겨 어떻게 하면 더욱 멀리 물리칠 수 있을까 하였지만, 그래도 ‘어진 상국’이라고 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이 상국을 대우함이 융숭하였다 하겠으나, 모비(母妃)를 유폐(幽閉)하는 일이 일어나고부터는 한마디 말이라도 자기의 비위를 거스른 자에 대해서는 모두 중상하였으며,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반드시 죽여야 할 자는 상국이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자 탄식하며,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의 봉호)이 정승에 복위되었다면 우리 일족은 반드시 살아남게 되었을 텐데.”

하였으니, 사람이 궁지에 이르면 반드시 어진 사람 우러르기를 마치 신명처럼 여기게 되는 법이다. 참으로 천하의 정의를 잡고 천하의 정의를 실천하며 대사(大事)에 임해 대의(大議)를 결정하는 지극한 정성이 남을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될 수가 없다.

이제 상국이 죽은 지 근 40년이 되어 당시 문하의 선비들은 거의 모두 늙어 죽었다. 목이 조용주(趙龍洲 조경(趙絅))와 늘 상국의 고사를 얘기하였는데, 용주가 이미 시장(諡狀)을 짓고 목이 유고를 편차하였다. 대체로 소(疏)와 차(箚) 4권에는 진퇴(進退)를 가지고 간쟁(諫爭)한 내용도 있고 죽음으로써 간쟁한 내용도 있다. 말을 구차히 맞추려 하지 않고 행동을 구차히 용납받으려 하지 않았으며, 오직 국가의 먼 훗날을 위해서 장구한 계획을 세웠을 뿐, 고식적인 방편으로 충(忠)을 삼지는 않았다. 일기 4권에도 선조 2년(1569)에서 인조 12년(1634)까지 66년 간 많은 국가의 일들과 군자ㆍ소인의 출처(出處)와 소장(消長)이 환히 나타나 있다. 이를 읽으면 어진 자는 권장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두려움을 갖게 되니, 백세의 교훈이 될 만하다. 일기에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 인물과 고사를 널리 논해서 대략 연차별로 엮은 것이 합쳐서 1권인데 ‘일기별록(日記別錄)’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유문(遺文) 1권, 연보 1권, 언행록 1권, 부록 2권이다.

 

기언 별집 제8권

 

서(序)

 

이 상국(李相國)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한 것을 축하하는 잔치 시권(詩卷)의 서 신축년

 

옛날 우리 인조(仁祖)가 큰 난(難)을 평정하자 선왕 때의 옛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공도 폐고(廢錮)에서 기용되어 정승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공은 77세였다. 나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치사(致仕)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공은 국가의 원로(元老)이다. 나라가 처음 진정되었는데 하루아침에 조정을 떠나면 사방 백성이 실망할 것이다.’ 하고, 예우가 넉넉지 않은가 염려하여 궤장을 하사하고 무동(舞童)과 악공(樂工)을 공의 집에 보내 잔치를 내리면서 기로원공(耆老元功)과 고관(高官)의 장(長)들을 이 잔치에 참여하도록 했는데, 매우 장한 일이었다.

서경(西坰 유근(柳根)) 유 상공(柳相公)이 맨 먼저 오언시를 지어서 그 일을 노래했고, 당시의 명공 경상(名公卿相)이 서로 화답하여 시권에 적힌 것이 무릇 수십 편이었다. 아, 이러했던 일이 지금 벌써 40년이 지났는데, 가끔 노인들이 미담(美談) 삼아 서로 전한다. 지금 달성 도호부사(達城都護府使) 이후 수강(李侯守綱)은 상국의 친손이다. 그가 상국의 일을 후세에 전하려 하여 그의 족질(族姪)인 옥산 태수(玉山太守) 이희년(李喜年)과 의논하고는 녹봉(祿俸)의 나머지를 털어 내어 공인(工人)을 모아 판(板)에 새겼는데 소(疏)ㆍ차(箚)ㆍ일기(日記)ㆍ연보(年譜)ㆍ잡저가 모두 10여 권이고, 궤장 하사 시의 잔치에 수창(酬唱)한 시 1권도 부록(附錄)하였다. 그리하여 국가 고사(國家古事)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읽고 감탄하기를 마지않았다. 인하여 느낀 바를 대략 서술해서 그 머리에 적었다.

년 월 일 옛 문생(門生) 중직대부(中直大夫) 삼척 도호부사(三陟都護府使) 허목(許穆)은 서한다.

 

기언 별집 제10권

 

발(跋)

 

이 상국(李相國) 연보(年譜)의 발

 

내가 오리(梧里) 이 상국의 유권(遺卷)을 보니, 그 끝에 과거한 절차와 벼슬한 차례를 대략 기록하여 연보로 만든 것이 또 1권인데, 내가 일기와 별록과 잡저와 소차(疏箚)의 글을 뽑아내고 거기에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참작하여, 각각 연차에 따라 기재했다. 큰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의 전말을 모두 기재하였으니, 그런 뒤에야 상국이 어렵고 험난한 것을 가리지 않고 나라에 몸을 바쳐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던 의리를 모두 볼 수 있다.

대개 88년 사이에 상국이 하신 일로 비추어 보면 시대의 편안하고 어지러움과 국사의 잘되고 못된 것이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명백하니, 후세를 위하여 크게 권장(勸奬)이 될 것이요, 또한 국가의 중흥한 고사(古事)를 말함에도 도움이 있을 것이다.

 

기언 별집 제10권

 

발(跋)

 

오리 상공(梧里相公) 필적(筆跡)의 발

 

오리 이 상국이 인조 원년에 다시 들어와서 중흥의 정승이 되었으니, 그때에 나이 이미 80세였다. 몸이 늙었으므로 물러가 쉬기를 청하니, 상(上)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월봉(月俸)을 그대로 지급하여 그 녹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또 그 사는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본도에 명하여 집을 지어 주게 하였다.

숭정(崇禎) 4, 5년 사이에 우리 선친(先親)께서 금천 현감(衿川縣監)으로 계실 때 보낸 하정첩(賀正帖 연하장(年賀狀)) 2장은 바로 이때 지은 것이다. 상국이 자손에게 물려준 서초첩(書草帖)에서도 또한 상국이 효(孝)와 인(仁)에 독실하여 그 밖에 복리(福利)는 생각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으니, 참으로 군자의 하는 일이다.

목이 84세에 쓴다.

 

완평(完平) 이 상국(李相國)에게 올리는 제문 을해년(1635, 인조13)

 

아, 세상에 드문 기질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고 이인(異人)은 세대마다 나오는 것이 아니니, 대개 뭇별의 정기와 산악(山嶽)의 맑은 기운이 천지의 조화에 감응(感應)할 때라야 뛰어난 인재가 천백 년 만에 한 번 나오는 것이다. 그것도 반드시 아주 잘 다스려지는 세상이나 아주 어지러운 즈음에 나오는데, 하늘이 그에게 일세의 책임을 맡겨 쓰여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상시 아무 일도 없을 때에는 상도(常道)를 지키고 따르므로 처음부터 뭇사람과 특별히 다르지 않으나, 세상의 변란을 만나 큰 책임을 맡긴 뒤에는 훌륭한 공적이 일세에 빛나서, 귀신과 사람이 사모하고 하늘과 땅이 감동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강물에 비유한다면, 마치 물이 도도히 흐를 적에는 기슭을 그다지 때리지 않다가, 물결이 부딪치는 나루와 물살이 거센 물가에 이르러서야 언덕을 뒤흔들고 물줄기가 공중으로 치솟으며, 물고기와 용이 용솟음치고 구름과 무지개가 어우러져, 비로소 물의 힘이 극도로 큼을 보게 되어 황홀하고 신비함을 추측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 상국은 순수하고 바른 기품(氣稟)과 굳세고 고결한 지조와 출중하게 호방한 재주와 영특하고 민첩한 식견을 갖추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열성(列星)의 정기와 산악의 맑은 기운이 천지의 조화에 감응하여, 뛰어난 재주가 천백 년 만에야 한 번 나온다.’는 경우입니다.

가난한 선비로 있어 쓰이지 않을 적에는 깨끗하게 자신을 지켜 행동을 가다듬을 뿐이었고, 국가가 무사하고 벼슬도 아직 귀하고 현달하기 전에는 공직에 나가 그 직무를 다할 뿐이어서, 진실로 예사로운 듯 일을 행하여 다른 사람들도 그다지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절의가 나타나고, 지위가 높아지자 덕업(德業)이 빛나서, 역사책에 뚜렷이 나타나고 이정(彛鼎)에 새겨졌습니다. 삼조(三朝 3대의 조정으로 즉 명종, 선조, 인조)를 내리 벼슬하여 장수와 정승 노릇을 하면서 일세의 안위(安危)를 한 몸에 맡았는데, 공업(功業)은 귀신과 같고 이름은 국경 밖까지 울려,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할 것 없이 나무하는 아이나 거리의 아낙네들까지도 모두 상국의 덕을 찬탄하였습니다.

백성에게 덕택과 은혜를 베풀되 봄철의 따뜻한 기운과 제때 내리는 비가 적셔 주는 것처럼 하여, 집집마다 가서 말하지 않아도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껏 복종하였고, 소인에게 형벌과 내침을 행하되 가을 서리처럼 엄하고 여름 태양처럼 무섭게 하여 온 나라 사람이 함께 분노하는 바를 밝히셨으며, 비록 귀양 보내어 죽이더라도 감히 원한을 품지 못하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며 그 인덕(仁德)을 우러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 사직(社稷)이 거의 무너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자, 사방으로 분주히 다니며 온 힘을 다해 수고하여 중흥(中興)의 업적을 도우니, 충의가 천하에 나타나고 공덕이 초목에까지 미치자, 국인(國人)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제사하여 은덕에 보답하였습니다.

광해주(光海主)가 무도하여 인륜이 끊어져 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하자, 간(諫)하며 떠나지 않으시고 내쫓겨도 원망하지 않으시며, 홀로 정성으로 감동시켜 제때 내리는 비가 마른 나무를 적셔 주듯 은택을 베풀었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사람은 이르지 않은 데가 없으나, 하늘은 거짓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왕업(王業)이 새로 난을 다스리어 사방이 불안해지자, 벼슬을 잃고 내쳐진 상황에서도 일어나 묘당(廟堂)에 앉아 말소리와 얼굴빛을 움직이지 않으시어 인심이 크게 구심점을 얻어 안정되었습니다.

큰 의혹을 결단하고 큰 어려움을 처리하는 데에 말과 기색이 조용하고 성의로 사람을 감동시키니, 붕당(朋黨)으로 반목하던 때였으나 아무리 고약하고 시기하는 자라도 감히 한마디도 뭐라 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는 공손하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며, 집 안에서 몰래 이러쿵저러쿵하는 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슬그머니 스스로를 가려 세상과 후세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조정의 사대부로부터 여염(閭閻)의 가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산(泰山)이나 북두(北斗)처럼 우러러서, 높고도 우뚝함이 진실로 범상한 무리들이 의논하고 헤아릴 바가 아니었습니다.

아, 윤기(倫紀)가 당신에 힘입어 떨어지지 않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이 당신을 의지하여 기울어지지 않았으며, 군자는 우러러 본받고 소인은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해지지 못하는 바가 있었는데, 이젠 끝났습니다.

백성들이 복이 없어서 하늘이 기로(耆老)를 빼앗은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혼탁함이 싫어서 자신만 깨끗이 하려고 돌아가신 것인지.

한번 가고 한번 오는 것이 자연의 조화에 따라 돌아가니, 정정당당한 뜻이 끝내 남김없이 사라진 것입니까.

하늘의 소명 훈호(昭明焄蒿)가 모여서 별이 되어 그 정기를 다시 회복한 것인지, 흩어져서 단 이슬, 제때 내리는 비가 되어 만물에 은택을 베푼 것인지.

아, 공적은 사직에 베풀고 덕택은 백성에게 미쳐서 환하게 사람의 이목에 남아 있는 것은 진실로 사방이 흠모하는 바다. 그런데 벼슬하고 물러나는 것을 때에 맞게 하고, 평탄할 때나 험할 때나 마음을 달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벼슬에 나아가면 절의를 다하여 자기 몸을 잊어버리고, 물러나면 전원생활에 만족하여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셨으니, 맑은 풍격(風格)이 풍속을 면려(勉勵)하여 백세(百世)의 스승이 될 만한 분이었는데, 이제는 다시 세상에 없게 되었습니다.

어리석고 비루한 내가 외람되이 인정을 받아 매우 많은 가르침과 아름다운 말씀이 귀에 남아 있으므로 감히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가슴에 새겨 잃어버리지 않아서 교육하신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동시에 또한 감히 평생 공경히 섬기던 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 슬픕니다.

 

기언 제16권 원집 중편

 

삼현사기(三賢祠記)

 

금천현(衿川縣) 한천(寒泉)에 삼현사가 있다. 삼현사는 고려 강 태사(姜太師 강감찬(姜邯贊)) 서 장령(徐掌令 서견(徐甄)) 및 우리 선조(宣祖)의 공신 완평(完平 이 원익(李元翼)) 이 상국(李相國)의 사당이다.

태사는 문종(文宗)ㆍ현종(顯宗)을 섬겼는데, 전례(典禮)를 상고하여 사직단(社稷壇)을 닦고 방구(方丘)ㆍ감단(坎壇)의 제도를 설정하였으며, 백관의 직제를 개편하였다. 거란의 침입이 있자, 군신이 모두 크게 두려워하여 속수무책으로 항복하려 했으나, 태사는 정색을 하고 예와 의로써 고수하였다. 의리가 밝으면 사람들이 기꺼이 심복하고 사람들이 기꺼이 심복할 때 국가는 더 강해지는 법이다. 마침내 거란을 이기자 왕은 탄복하며,

“예의를 지킴으로써 온 나라가 오랑캐로 되지 않았으니 이것은 충신의 공이오.”

하고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특진시켰다. 다시 여러 차례 승급하여 태사가 되고, 개국후(開國侯)에 봉해졌다. 치사(致仕)하여 죽으니 시호를 인헌(仁憲)이라 하였다. 사적이 《고려사》 본전에 실려 있다.

서 장령은 고려 말기를 당하여 위태함을 보고도 피하지 않다가, 익양(益陽 익양백(益陽伯) 정몽주(鄭夢周))이 죽고부터 벼슬길에서 물러나 서인(庶人)이 되었다. 고려가 멸망할 때 금천에 살면서 의리상 고국을 잊지 못하여 북쪽을 향해 앉지 않고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한양(漢陽) 성곽을 바라보지 않았다. 물(物)을 두고 시를 읊으며 혼자 슬퍼하였는데, 어떤 이는,

“견이 노래하며 반란을 도모하니 마땅히 처벌을 해야 합니다.”

라고 했으나, 태종(太宗)은,

“견은 ‘이제(夷齊)’의 유(類)이므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조 때에 와서 재상 윤근수(尹根壽)가 임금께 아뢰어 충신총(忠臣塚)에 봉하였다.

이 상국은 선조를 섬겼는데, 국가가 전란을 당했을 때 몸 바쳐 사직을 보존하였다. 평안도 도순찰사(平安道都巡察使)로 있을 때 그곳 백성들이 산 제사[生祭]로 공에 보답하였고, 남방(南方)에 개부(開府)했을 때는 남방 백성들이 신명처럼 신뢰했다. 광해군이 무도해서 사람의 윤기(倫紀)를 무너뜨려 없애자, 상국은,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그 피해를 받아야 한다.”

하면서 간하기는 하되 버리고 떠나지는 않았는데, 광해는 자신을 비방하였다고 해서 소외시켜 축출하였다. 그러나 상국의 말에 힘입어서 인심이 더욱 밝혀졌으니 이것이 천리이다. 인조 원년(1623)에 다시 중흥 정승이 되었다. 국가 안위를 담당하고 국가를 돌본 지 40년, 88세로 세상을 마쳤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상국은 세 임금을 보좌하면서 치체(治體)와 유술(儒術)을 존중하고, 절약과 검소를 좋아하였으며, 진퇴(進退)의 의에 밝아 사방 인심이 쏠리니 ‘선조ㆍ인조의 회복명신’이라고 일컬었다.

이상의 훌륭한 분들은 그 어짊이 백세의 제사를 받아 마땅하다. 하물며 사전(祀典)에 ‘법이 백성에게 베풀어졌거나 목숨 걸고 맡은 일에 충실했거나 노력으로써 나라를 편케 했으면 제사한다.’고 했음에랴.

오늘날 봉천(奉天)을 ‘강 태사 마을’이라고 부르고, 또 그가 날 때 상서로 운석이 떨어졌다 하는데 참말인지는 모르겠다. 이 읍에서 북으로 10리 밖, 번당(燔塘)에 서 장령의 묘가 있고 연성(蓮城) 접경 오리동(梧里洞)에 이 상국 집안의 묘지가 있다. 당초에 상국이 이 고장 부로들과 상의하여 이현사(二賢祠)를 세우려다가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다시 25년 후에 이 고장 사람들이 사우를 세워 상국도 함께 봉향하고 ‘삼현사’라 이름하였다. 사우를 세운 해는 금상(今上 효종(孝宗))이 즉위한 9년(1658) 무술이다. 이해 9월 상완(上浣)에 공암(孔巖) 허목은 쓴다.

 

기언 제38권 원집

 

동서 기언(東序記言)

 

오리(梧里) 이 상국(李相國) 유사(遺事)

 

오리(梧里) 이 상국은 휘가 원익(元翼)이요, 자는 공려(公勵)요, 오리는 별호이니, 우리 공정대왕(恭定大王)의 아들인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4세손이다. 익녕군은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을 낳았는데 수천군은 높은 절개로 알려져 있으며 그 사실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사우전(師友傳)》에 실려 있다. 수천군은 청기군(靑杞君) 이표(李彪)를 낳고, 청기군은 함천군(咸川君) 이억재(李億載)를 낳았다. 함천군은 문학을 좋아하였고 박학(博學)으로서 성품이 우아하고 오성(五聲)과 율려(律呂)의 변화가 능통하였는데, 그가 바로 공의 황고(皇考)이며, 조모인 동래군부인(東萊郡夫人) 정씨(鄭氏)는 감찰을 지낸 정치(鄭錙)의 딸이다.

공은 명 나라 효숙황제(孝肅皇帝 명 세종(明世宗)) 가정(嘉靖) 26년(1547) 우리나라 공헌왕(恭憲王 명종(明宗)) 2년 10월 24일에 한양 천달방(泉達坊)에서 태어났다. 가정 43년(1564) 우리나라 공헌왕 19년 공의 나이 18세에 국자 생원(國子生員)이 되고, 그후 5년 만인 효장황제(孝莊皇帝 명 목종(明穆宗)) 융경(隆慶) 3년(1569) 우리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 2년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혀서 정자를 거쳐 박사에 이르렀다.

성품이 간정(簡正)하고 남과 왕래하며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아 항상 홀로 거처하여 공사(公事)가 아니면 외출하지 않았으므로, 공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나, 유공 성룡(柳公成龍)만이 공의 어짊을 알고 마음으로 존경하였다.

만력(萬曆) 원년(1573, 선조6) 성균관 전적에 전직되어, 질정관(質正官)으로 성절사(聖節使) 권덕여(權德輿)를 따라 경사(京師)에 갔는데, 청렴결백하고 사정(私情)이 없으며 일에 임하기를 신중히 하니 일행이 모두들 공을 존경하였다.

명년에 예조 좌랑을 거쳐, 뽑혀서 황해도 도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병적(兵籍)을 만들고 있었는데, 각도에서 모두 도사가 그 일을 관장케 하였다. 공이 사무를 간편케 해서 문서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니 3년 만에 일이 끝났는데, 죄진 자가 요행히 면하거나 죄 없는 자가 죄를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신명(神明)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들어와 사간원 정언이 되니, 조정에서 마땅한 사람을 얻었다고 하였다.

무인년(1578, 선조11)에 옥당(玉堂)에 들어가고, 임오년(1582, 선조15)에 응교를 거쳐 동부승지가 되고, 계미년(1583, 선조16)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도승지 박근원(朴謹元)이 박순(朴淳)과 이이(李珥)를 극력 공격하니, 하락(河洛)이라는 자가 상소하여 정원이 옹폐(擁蔽)한다고 논하였다. 하락은 이보다 앞서 이미 상소하여 위 두 사람을 편들었지만 상달(上達)되지 못하였으므로, 하락이 다시 상소하여 정원의 계사(啓事)에 대하여 말하였다. 상이 매우 노하여 박근원과 그의 동료 집필자들을 죄주려고 정원에 집필한 자를 묻자 성락(成洛)이 두려워하여 감히 사실을 말하지 못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계사는 애당초 한 사람의 말이 아니니, 죄를 한 사람에게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하고 끝내 대답하지 않으니, 상이 모두를 출척(黜斥)하고 박근원은 강계(江界)에 귀양 보냈다.

공은 파직되고 5년 동안 등용되지 않다가 정해년(1587, 선조20)에 비로소 안주(安州)의 명(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임명된 것을 이름)이 있었다. 안주는 본래 관방(關防)의 큰 고을로서 거의 조폐(凋弊)하였고 거기다 또 크게 흉년이 들었으므로, 사람을 신중히 뽑아서 맡긴 것이다. 선조(選曹)에서 적임자로는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계를 올렸으므로 상이 다시 등용하여 보냈다. 공이 안주에 이르자 곡식 만여 석을 보내 주기를 청하여 그들을 진휼(賑恤)하고 또 많이 파종하니 크게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생업을 즐겨 산에 도적이 없었다. 방수(防守)를 4교대에서 6교대로 하여 백성들을 너그럽게 다스리니 안찰사(按察使) 윤두수(尹斗壽)가 그 일을 보고하여 정하여 병제(兵制)로 삼았다. 안주에 전에는 뽕나무가 없었는데 공이 백성들에게 뽕나무를 심기를 권하여 누에로 실을 뽑아 크게 이롭게 되니, 이로 인하여 ‘이공의 뽕나무[李公桑]’라 불렀다. 상이 공이 오래 고생한 것을 생각하여 불러들여 형조 참판을 삼았다.

신묘년(1591, 선조24) 대사헌이 되어 기축원옥(己丑寃獄)을 다스려서 좌상 정철(鄭澈)을 강계(江界)에 안치하였다. 임진란에 이조판서 겸 평안도도순찰사(吏曹判書兼平安道都巡察使)로서 선행(先行)하여 상이 마침내 서쪽으로 행행(幸行)하였고, 5월에 거가가 평양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적이 이미 평양에 육박하자, 거가는 영변(寧邊)으로 향하고 공은 여러 장병 도합 3천 명과 함께 남아서 평양을 지켰다. 이때 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가 계속 패배하여 공로가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신을 낮춰 일반 장수들과 동등하게 행동하여 통령(統領)이 없었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호령이 전일(專一)하지 않으면 군사는 반드시 패하게 되며, 원수는 국가의 중임(重任)이니 체통이 꺾여서는 안 되오. 먼저 스스로 경솔하게 행동함으로써 패배를 취하게 되는 것이오.”

하고 공이 먼저 몸을 낮춰 원수를 받드니, 원수도 마음으로 그렇게 여겨 이로부터 군중에 통령이 있게 되었다.

적이 날로 강가에서 시위하니 관군이 감히 출전하지 못하였으므로 공이 별장(別將) 고언백(高彦伯)ㆍ문신언(文愼言)과 함께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밤을 타서 강을 건너 적의 진지를 쳐부수고 많은 적을 죽이고 군마 80필을 약탈하니, 적이 크게 놀라 육박전을 벌였는데 살상한 수가 서로 반반씩이었다. 다음날 적병이 마침내 강을 건너 성 아래에 육박하니 모든 군사가 흩어져 달아났다. 공이 정주(定州)에 이르러 군사를 모집하니 흩어졌던 군사들이 비로소 모여들었다.

상이 공을 명하여 정헌(正憲)으로 승진시키고 계속해서 관찰사를 삼고 겸하여 순찰사의 직무를 행하게 하였다. 공이 군사가 없는 것을 염려하여 계(啓)를 올리고 의주와 삭주 사이를 순행하며 군사를 모집하여 1천여 명을 얻었는데, 조정에서 이미 군사를 출발시켜 수비케 하자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상을 뵙고 명령을 받고는 정주(定州)로 돌아왔다. 이때 7로(路)를 모두 지키지 못하고 오직 패강(浿江) 서쪽만이 무사하였다. 공은 백성을 진무하고 군사를 훈련 양성하는 것이 근본을 굳게 하는 방책이라 여겼다. 당시에 세자가 성천(成川)에 감군국사(監軍國事)로 있으면서 수령을 임명함에 조정과 어긋나서 서로 불화(不和)한 관계에 있었는데, 공이 분조(分朝)에 장계를 올려, 사체상 옳지 못함을 말하고 또 분조(分曹)에 힘써 말했으나 모두 채납되지 않았다.

그해 7월에 순안(順安)으로 환군하였다. 이때 중국 군사가 우리 군사와 합세하여 평양을 공격하니 적이 불리하였다. 우리 군사가 평양을 포위하였는데, 이빈(李薲)ㆍ이일(李鎰)ㆍ박명현(朴名賢)ㆍ고충경(高忠卿)ㆍ장이덕(張以德)ㆍ김응서(金應瑞)ㆍ이사명(李思命)ㆍ최침(崔琛)ㆍ이록(李祿)ㆍ김몽연(金夢淵)ㆍ김해룡(金海龍)ㆍ정기남(鄭箕南)ㆍ임중량(林仲樑)ㆍ이응해(李應獬)ㆍ이수(李璲) 등의 제장이 병영을 치고 둔병한 것이 겨우 수만 명이었다. 8월에 적과 세 번 싸웠는데 모두 불리하였다. 명년 정월에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정병 4만을 이끌고 우리 군사와 합세하여 적을 쳐서 대파하고 마침내 평양을 수복하였다. 2월에 거가가 영유(永柔)에 도착했는데 공이 오랫동안 전장에서 고생했다 하여, 특별히 숭정(崇政)에 가자(加資)하였다. 이때 경성(京城)에 있는 적이 서북에 있는 적과 합하여 수만 명이었는데, 제독이 마음으로 업신여겨 경병(輕兵)으로 접전하였다가 고양(高陽)에서 패하고 드디어 군사를 거두고 출전하지 않고 적과 강화(講和)를 약속하니, 적이 군사를 철수하여 남쪽으로 가서 그대로 해변에 주둔하고 있었다. 10월에 거가는 서울로 돌아가고 공은 서쪽에 있으면서 군사를 훈련하였는데 군사가 1만 명쯤 되었다.

을미년(1595, 선조28) 상이 교서를 내려 표창해서 숭록(崇祿)으로 승진시켰다. 6월에 우상(右相)에 임명하는 명이 있었고 경상ㆍ전라ㆍ충청ㆍ강원ㆍ함경ㆍ평안 등 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임하고 이어서 출순(出巡)케 하였다. 상이 공의 노고를 염려하여 경성에 개부(開府)케 하니 공이 사양하기를,

“신이 조정에 있으면서 사방을 전제한다는 것은 사체상 불가합니다.”

하였다. 8월에 남방을 순찰하여 성주(星州)에 개부하였다. 전란에 피폐한 뒤라서 모든 일이 붕괴되어 호령이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절진(節鎭) 중 교만하여 명령을 어기는 자는 모두 군문(軍門)에서 곤장으로 다스렸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과 관동 관찰사 송언신(宋言愼)이 명령을 어기고 오지 않으므로, 모두 계를 올려 파직시키니 군문이 숙연하였다. 적이 군사를 동원하여 재침한다고 소문을 내니, 내외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대령(大嶺 대관령) 이남은 지세가 험조한 곳이 많고 적세는 강성한 데다 우리 군사는 적고 약하므로 대대적으로 모든 산성(山城)을 수리하여 보수(保守)할 계책을 세우고, 강의 좌우가 매우 멀어 일이 제때에 미치지 못하는 수가 많으므로 감사(監司)를 좌우로 나누었다.

정유년(1597, 선조30) 적이 다시 군사를 증강하여 우리를 쳐들어오면서 우리를 속여서, 우리의 수군(水軍)을 부산 앞바다에 도열(堵列)케 하여 허실을 살피려 하였는데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듣지 않자, 용사자(用事者)가 이순신이 일을 그르친다 하여 이순신은 죄를 받고 물러났다. 공이 계를 올리기를,

“이 사람이 죄를 받는다면 큰일이 잘못됩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 일에 관해서 공에게 묻자, 다시 극력 의견을 말하였는데 미처 상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원균(元均)이 와서 대신하니, 상의 본 의도는 아니었다. 원균은 과연 패주하여 적에게 피살되었다. 그 후에 상이 다시 이순신을 등용하자 부서진 나머지를 가지고 몸소 부지런히 사졸을 무순(撫循)하니, 군사들의 사기가 다시 진작되었다. 공이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일을 계획할 때,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군사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푸니 군사들이 뛸 듯이 좋아하며 분전(奮戰)할 것을 생각하였다. 이순신이 말하기를,

“장사들로 하여금 죽음을 잊도록 한 것은 상국의 힘이다.”

하고, 이어 탄식하기를,

“내가 장수가 되어 외방에 있으면서 당로자(當路者)들이 참소하고 의심할 때 상국이 전적으로 나의 계책을 써서 이제 수군(水軍)이 약간 완비됐다. 이는 나의 힘이 아니요, 상국의 힘이다.”

하였다. 드디어 남해 앞바다에서 싸워 적을 대파하고, 이순신은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당시에, 성을 수리하는 공사가 미처 다 끝나지 않았는데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다투어 성(城)은 불편하다고 하니, 사람들이 흩어져 가려고 하였다. 급기야 적이 승리한 여세를 몰아 쳐올라 올 때에 성벽이 견고하여 최고의 요해(要害)였는데, 우절도사(右節度使) 김응서(金應瑞)가 짐짓 야전(野戰)한다 하고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모든 성이 크게 무너졌다.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던 장수도 또한 밤에 성을 헐고 달아났으며, 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과 전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는 그곳에서 죽었고,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만이 굳게 지켜 화왕산성(火旺山城)이 홀로 온전하였다.

이때 황제가 다시 남북의 관병 10여 만을 동원하여 왜를 정벌하였는데, 공이 군중에 있으면서 병이 심하므로 상이 소환하여 음죽(陰竹)에 이르렀을 때 적이 연이어 남원(南原)ㆍ전주(全州)를 함락하자 경성에 계엄을 내리고 또 공에게 명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얼마 후 소환되어 서울에 이르렀다. 경리 양호가 직산(稷山)에서 적을 쳐서 울산에 이르러 오랫동안 포위하였으나 불리하므로 군사를 돌렸다.

무술년(1598, 선조31) 경리 양호가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의 탄핵을 받아 만세덕(萬世德)이 와서 대신하였다. 상이 공을 파견하여 경리를 위해 무고함을 변호하였는데, 정응태가 또 우리가 왜를 섬겨서 임진년에 왜를 이끌어 요동을 침범하려다가 도리어 그들의 침입을 받게 된 것이라고 무고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하루를 변무(辨誣)하지 않으면 천하에 악명을 하루 동안 뒤집어쓰는 것이다.”

하고, 날마다 육과(六科)의 급사중(給事中)과 도찰원(都察院)의 십삼도어사(十三都御史)에게 호소하니 도어사(都御史)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응태는 간사한 소인이다.”

하였다. 또 통정사(通政司)에 주문을 올리고 머리를 조아려 피가 흘렀으며 각로(閣老)를 장안문(長安門) 밖에서 문안하고 상주해 주기를 청하니 각로가 읍을 하며,

“통정사에 말하라.”

하므로, 통정사에 상주하니,

“배신(陪臣)은 상주할 수 없다.”

하였다. 이는 대개 정응태의 무리가 저지해서 그리된 것이다. 또 명하여 떠날 것을 재촉하므로 부득이 돌아왔다. 정언 이이첨(李爾瞻)이 영상 유성룡(柳成龍)을 공격하여 조정이 요란하니, 조정에 있는 인사 중 공평한 의론을 가진 자는 배척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기해년(1599, 선조32) 2월에 공이 복명하니 상이 위로하기를,

“혈성(血誠)으로 변무(辨誣)하느라 수고가 많았소.”

하였다. 공이 사례하고 상소하기를,

“유성룡은 청렴 개결하고 정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으며 나라를 걱정하고 사가(私家)를 걱정하지 않으니 그 마음이 슬픕니다. 이 사람이 배척되면 그와 친하다 하여 배척되는 자도 있을 것이고, 의론을 달리한다 하여 배척되는 자도 있게 되어 사류(士類)가 순식간에 모두 배척될 것이니 국가의 복이 아닌 듯싶습니다.”

하고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이때 적은 이미 바다를 건넜고, 우리의 모든 대병(大兵)은 다 경성에 집중돼 있는 데다, 또 군사를 남겨 뒤에 대처하자는 의론이 있어 사태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자 상이 매우 급히 독촉하였으므로, 공이 부득이 나아가 일을 보다가 다시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열세 번이나 정고(呈告)하고 차자를 네 번이나 올렸지만 상이 허락하지 않다가, 4월에 가서야 허락하고, 판중추로 개임(改任)하였다.

9월에 이항복이 좌상으로 체직되고 공이 영상에 복직되었다. 정영국(鄭榮國)과 채겸길(蔡謙吉)이라는 자가 계속 상소하여 홍여순(洪汝諄)과 임국로(任國老)를 편들며 있는 힘을 다해 조정을 공격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공의(公議)가 사라지고 붕당이 풍조를 이루면, 국사는 날로 그릇되고 횡의(橫議)가 방자하게 행해져서 조정의 치욕됨이 극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더욱 불쾌하게 여기므로, 공이 등대(登對)를 청하여,

“인군이 말을 들으실 때, 귀에 거슬리고 거슬리지 않는 것으로써 희로를 삼지 않으신다면, 아마도 참소하는 말에 동요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붕당의 폐해가 상고에도 있기는 했지만 오늘날과 같이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고, 이어서 홍여순과 임국로의 행동이 대체로 무상(無狀)함을 말하고,

“상께서 신의 말을 채납하지 않으시면 이 무리들이 끝내 국가의 우환이 될 날이 머지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인심은 이미 흩어지고 적의 정세는 예측하기 어려운 데다, 국내의 변란도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증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러한 시기에는 비록 군자가 조정에 가득하더라도 도움이 되지 못할까 두려우니 우선 늦춰 두고, 국사로 급무를 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쟁론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급한 일입니다. 수습하고 보철(補綴)하는 일을 어질고 능력 있는 자에게 맡기고자 하시면서, 도리어 이러한 무리에게 국사를 맡긴다면 백성이 비록 흩어지지 않고 적이 비록 침입해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오래전부터 세자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에 기분 나쁜 것을 인하여 여러 번 전위(傳位)하겠다는 말을 하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상께서 춘추가 아직 한창이신데, 어째서 이런 말씀을 내십니까? 신은 이로부터 모든 일이 해체(解體)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좋지 않게 여기면서 그만두었다. 이에 공에 대한 공격이 거세게 일어나 공이 동호(東湖)로 나가니 얼마 후 영상에서 체직되었다. 상이 국가에 어려움이 많다 하여 공과 이덕형(李德馨)으로 하여금 비국(備局)에서 주획(籌畫)하게 하였으나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경자년(1600, 선조33) 4월에 정탁(鄭琢)이 좌상에서 체직되고 공이 좌상이 되니,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기를,

“모(某)가 사론(邪論)을 주장하여 이르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사람을 논박할 때에 사실로써 하지 않으면, 나만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남들도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좌상은 어진 재상이다. 이 사람을 두고 어떤 사람을 쓰겠는가?”

하였다. 공이 계속 사퇴하기를 마지않으니 상이 말하기를,

“이제 공을 기다려 정치를 하려 한다.”

하였으나, 공이 끝내 나아가지 않고 금양(衿陽 시흥(始興))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6월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훙(薨)하였다. 공이 입궐하여 국상(國喪)에 참석하였다. 8월에 공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양호(兩湖 충청ㆍ전라도)ㆍ영남ㆍ관동의 병마를 모두 공에게 예속시켰다. 9월에 영남의 주군(州郡)을 순찰하여 군사를 조련하고 백성을 모집하여 창원(昌原)ㆍ울산ㆍ동래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다. 겨울에 신병이 위독하여 소환되었는데 표신(標信)으로 부험(符驗 밤에 성문을 통과할 적에 갖고 다니는 표)을 보내고 유의(襦衣)를 하사하여 도중에서의 추위에 대비하게 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34) 노토(老土)가 번호(藩胡)를 공격해서 살해하였는데, 우리 변장(邊將)도 북변을 몰락시키고 군사를 증원하여 오랑캐에 대비할 것을 청하였다. 8월에 다시 공을 함경ㆍ평안ㆍ황해 등의 도체찰사로 삼아 관서(關西)에 개부(開府)하여 병마를 다스리게 하니, 공이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다만 서울에 남아 주획(籌畫)하여 3도를 통솔 독려하라.”

하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이같이 하는 것은 도움이 못 됩니다.”

하고, 즉시 북관(北關)에 나아가 열병하고 영흥(永興)에 이르러 애수(隘水)를 거쳐 성천(成川)에 이르렀을 때, 홀자온(忽刺溫)이 우리 북변을 도모한다는 보고가 있어 남북의 관병을 소집하여 북변을 구할 계책으로 병마를 순열(巡閱)하고 황주(黃州)에 이르렀다.

임인년(1602, 선조35) 황태자를 책립하고 반사 조사(頒赦詔使)가 오는데 서로(西路)에 일이 많으므로 소환되었다. 2월에 동호(東湖)에 있었는데 신병이 악화되었으므로 상이 시의(侍醫)를 보내어 진료케 하고 복관(卜官)을 불러 공의 목숨에 대한 길흉을 물었으며, 강변에 바람이 심한 것을 염려하여 어실(御室)의 전렴(氈簾)을 거두어 하사하였다. 다시 차자를 올려 도체찰사를 사퇴하였다. 큰 돌이 저절로 일어서고 어떤 것은 저절로 움직이기도 하였으며 동북쪽 바닷물이 붉어졌다.

갑진년(1604, 선조37) 초하루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상이 공경들에게 각기 하고 싶은 말을 하라 하였으므로,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더욱 대도(大度)를 넓히시어 허물 듣기를 좋아하고 궁금(宮禁)을 엄히 하고 귀근(貴近)을 눌러 화평의 복을 맞이하시며, 나라의 기강을 진작시키고 백성을 편케 하여 붕해(崩解 토붕와해의 준말로 일시에 붕괴됨을 이름)하는 화를 그치게 하시면 외국의 침입도 막을 수 있고 천재(天災)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임해군(臨海君)의 종이 밤에 재신(宰臣)을 찔러 죽였는데, 범인을 잡지 못하여 포도청에서 조사하다가 대장 변양걸(邊良傑)이 죄를 얻자, 영상 이덕형이 포도대장은 죄가 없다고 말하니 상이 크게 노했으므로, 공이 이에 언급한 것이다. 이때 선무 공신(宣武功臣)의 차서를 의정(議定)하는데 공이 봉호(封號)를 받을 대상에 해당되었으나, 상소하여 공로가 없다고 사양하고 상을 호종한 반열에 남기를 청하니, 상이 더욱 어질게 여겨,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의 호를 내리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하였다.

무신년(1608, 선조41) 정인홍(鄭仁弘)이 영상 유영경(柳永慶)의 죄상을 상소하니, 상이 대로하여 정인홍을 영원(寧遠)에 귀양 보냈다. 상이 승하하자 유영경이 영상에서 파직되고 공이 다시 영상이 되었다. 일찍이 상의 병환이 크게 위독하실 때 세자에게 이르기를,

“여러 신하 중에서 모(某)만이 대사(大事)를 맡길 만한데 내가 잘 쓰지 못했다. 예로 잘 대접해서 성의를 보이면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우선 공을 기용한 것이다. 삼사(三司)가 임해군의 일을 적발하여 장차 죄수를 국문하려 할 때, 공이 계를 올리기를,

“삼사에서 이른바, ‘창검의 무기를 가지고 임해군의 상차(喪次)에 들어갔다.’고 한 것은 그날 문을 지키는 군졸들이 아는 자가 없고 단사(單辭)로 발문(發問)하더라도 모두 핵실(覈實)할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하고는 신병을 칭탁하였다. 계를 올리는 기회에 죄 없는 자들을 너그러이 풀어 줄 것과 임해군을 용서하라는 뜻을 강력히 말하였다. 3월에 전지(傳旨)에 따라 또 차자를 올리기를,

“상이 계위(繼位)한 초기에 어진 이를 구하는 교서를 내리시니, 정치의 요체를 얻었다 하겠습니다. 벼슬하는 자는 염치와 세리(勢利)로 경중을 삼는데, 염치를 중히 여기는 자는 행위가 시세와 맞지 않는 점이 있으면 구차하게 합하기를 구하지 않고, 세리를 중하게 여기는 자는 온갖 방법으로 벼슬을 구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인군이 벼슬을 구하는 무리와 함께 나라를 다스린다면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하의 뜻을 통한 후에야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하였으니, 정치를 하는 데는 언로(言路)를 개방하는 것보다 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요 말을 선택하기가 어려우니,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려서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아첨하는 말은 부드럽게 들려 받아들이기가 쉬워서 끝내 아첨하는 무리가 조정에 가득하여 국사가 날로 그릇되어 가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귀에 순한 것과 귀에 거슬리는 것을 잘 살펴서 취사(取捨)할 수 있다면, 거의 제대로 될 것입니다. 조정은 정로(正路)요 궁금(宮禁)은 사경(私逕)이온데 정로는 쉽게 보이고 사경은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옛 선대의 성왕(聖王)이 자신을 반성하고 하늘에 빌 때, 먼저 여알(女謁)이 더러운 단서를 열어서 뇌물이 풍습을 이루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비록 미천하고 그 일은 비록 미세하나 사람을 놀라게 하고 인망(人望)을 잃게 하는 점은 크오니 전하는 궁금을 숙청(肅淸)하여 청명(淸明)한 정치를 밝히소서. 금일에 섬길 바는 자전(慈殿 인목대비(仁穆大妃))에 있고 자전이 의지하는 바도 전하뿐이오니 지성으로 받들기를 시종 간단없이 하시고, 전하를 우러러 의지하고 있는 외로운 여러 왕자들에 대해서도 마땅히 무휼(撫恤)하여 은애(恩愛)를 돈독히 하소서.”

하였다. 광해군이 모든 달관(達官)에게 명하여 각기 그 직무를 가지고 영상에게 나아가 폐단을 혁파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 의론케 하니 이에서 기전선혜법(畿甸宣惠法)이 비롯되었다.

황제가 광녕 무진(廣寧撫鎭)에 명하여, 조선이 사장입소(舍長立少)했으니 임해군은 무엇 때문에 폐위했으며 광해군은 어째서 세웠는지에 대해 조사관을 파견하여 득실(得失)을 조사하게 하고, 또 조선을 중국의 군현(郡縣)으로 삼으려는 의론이 있어서 지주(知州) 만애민(萬愛民), 도사(都司) 엄일괴(嚴一魁)가 파견되어 왔다. 정인홍이, 임해군을 참수하여 조사관에게 보이자고 하므로 공이 그 사이를 잘 주선하여 조사관이 무진(撫鎭)에 보고하여 갖추 천자에게 주달하니, 책봉을 허락하여 융경(隆慶) 원년의 고사와 같이 하였다.

정인홍의 제자에 정승훈(鄭承勳)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상소하여 극력 전은의(全恩議)를 공격하였으므로 공이 드디어 신병을 칭탁하고 사퇴하니, 광해군이 말하기를,

“대신이 중한 후에야 조정이 존엄해지고 국체(國體)가 엄해지는 법인데, 전은의를 가지고 역적을 옹호한다고 지목하여 대신이 이로 인해 병으로 핑계하여 스스로 체면을 손상시키니 조정이 따라서 존엄해지지 못한다.”

하였다. 공이 그래도 더욱 힘써 사퇴하니 광해가 더욱 후하게 대하고 장차 몸소 문병을 가려 하였는데, 저지하는 자가 있어서 결국 가지 못하고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1) 8월에 정고(呈告)하기 스물세 번 만에 영상에서 체직할 것을 허락하고, 쌀과 콩 20섬, 술 10병, 어육(魚肉)과 과일을 하사하고 며칠 후에 또 후사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진사(陳謝)하고 이어서 태의(太醫)가 병을 치료하는 것을 사양하였다.

신해년(1611, 광해군3) 8월에 공이 다시 영상이 되었다. 광해의 행동이 더욱 무도하므로 공이 염려하여 스스로 종척(宗戚)의 구신(舊臣)으로서 차라리 간하다 죄를 얻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경연(經筵)에 모시고 주서(周書) 다방(多方)의,

“오직 성탕(成湯)이 사방 나라의 선택을 받아 하(夏) 나라를 대신해서 백성의 주인이 되었다.”

고 한 것의 주에,

“백성들이 탕 임금을 택하여 돌아온 것이다.”

한 것을 강하자, 광해가,

“백성이 반란을 일으켜 임금을 스스로 택하는 것은 어떠한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백성의 입장으로 말한다면, 백성이 용사(龍蛇)처럼 흉포해지느냐 적자(赤子)처럼 온순해지느냐는 오직 학대하느냐 보호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한번 인심이 흩어져서 천명이 떠나면 백성들이 서로 이끌고 현군(賢君)에게로 돌아가는데 그사이에 인력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성탕으로 말하면, 성인이 문왕(文王)은 지덕(至德)이라 일컬었고, 탕왕은 참덕(慙德)이 있다 하였으니 그 가운데에 미묘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신하는 백성과 함께 비록 모두 왕의 신하라고는 하지만 분수는 다름이 있으니, 어찌 폐백을 바쳐 신하가 되고서 등을 돌려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어서 덕을 밝힐 것과 형벌을 삼갈 것에 대하여 논하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임금이 그 권위를 잃으면, 상과 벌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아 사람들이 마음으로 업신여겨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으므로 어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등용되지 못하고 사사로이 가까운 사람만 조정에 가득하여 연줄을 따라 세력을 업고 벼슬을 얻게 되는데, 이는 모두 상이 신하들을 접견하는 날은 극히 적고 조석으로 접하는 것은 모두 궁첩(宮妾)뿐이기 때문입니다. 내외가 왕래하여 조정의 정치를 간섭하고 좌도(左道)를 높이고 믿어서 요망한 것이 조정을 어지럽히게 됩니다. 더구나 여알(女謁)이 성행하는 것은 은 나라 탕왕의 육책(六責)의 하나이고, 전(傳)에도 ‘집안이 다스려진 후에 나라가 다스려진다.’ 하였습니다. 궁금(宮禁)은 전하의 집안이니 궁금이 이러하고야 어떻게 외조(外朝)의 본보기가 되겠습니까.

사치는 악의 큰 것이고 검소는 덕의 극치입니다. 임금은 비록 태평하고 은성(殷盛)한 시대를 만나더라도 사치하여 스스로 방자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법인데, 더구나 지금과 같은 시기이겠습니까. 전란 이후로 조종(祖宗)의 헌장(憲章)이 극도로 피폐하였습니다. 당초에는 훌륭한 법이라도 간리(姦吏)가 인연하여 폐단이 생겨 극도에 달하면 백성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니, 이제 산적한 폐단을 굳게 지키고 개혁하지 않는다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수가 없습니다. 백성을 보호하는 데는 비용을 절약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비용을 절약하지 않으면 재물을 낭비하게 되고 재물을 낭비하면 백성을 해치게 되는데, 근래에 허례(虛禮)와 낭비를 살펴보면 모두 상이 행하신 것입니다. 호조에 저축이 없으면 백사(百司)가 모두 비게 되어 비록 날마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더라도 계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임금의 자리는 지존한 것이나, 그 창름(倉廩)과 백관의 성대함과 예의와 문물의 아름다움은 한 가지도 백옥(白屋)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백성들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임금이 물건을 보고 백성의 괴로움을 생각한다면, 백성을 보기를 마치 다칠 듯이, 어린이를 보호하듯이 하는 마음이 절로 생길 것입니다. 근래에 일의 득실을 말하는 자는 속속 외직(外職)에 임명되니 요즈음 언로(言路)가 끊어진 것은 오직 이 때문입니다.”

하니, 광해가 대답이 없으므로 공이 인하여 신병을 칭탁하였다.

이때 창덕궁(昌德宮)이 낙성되어 광해가 법궁(法宮 정전(正殿))에 나아가 군신의 조하를 받았으나, ‘신궁(新宮)은 상에게 불리하다.’는 요언(妖言)이 돌았으므로 행궁(行宮)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정언 정온(鄭蘊)이 극력 간쟁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척출될 형편이었으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전일에 말한 자가 미처 돌아오기도 전에 지금 말한 자가 다시 간다면, 비록 당장에 큰 환란이 닥친다 하더라도 보고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정온을 끝내 척출하여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삼고 드디어 행궁에 돌아와 거처하면서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명명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4) 황해도에서 변고를 보고하였으므로 공이 즉시 나아가 일을 처리하고 죄수를 국문할 때 병이 악화되었으므로 명하여 귀가하게 하였는데, 사직을 청하자 허락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 영창(永昌)의 옥사가 일어나서 영창을 강화에 유폐시키고 비밀리에 부사(府使) 정항(鄭沆)을 시켜 죽이게 하였다. 영상 이덕형(李德馨)이 차자를 올려 어려서 무지(無知)하니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고, 전 필선(弼善)인 정온도 상소하여 극언(極言)하니, 모두 대역죄(大逆罪)로 논하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그 마음이 용서해 줄 만함을 말하고, 관대히 다스려 줄 것을 청하였다. 이덕형은 근심하고 번민하다가 죽었고, 정온은 정의(旌義)에 안치하였다.

박응서(朴應犀)라는 자가 역모를 꾸미다 자수하였는데 공로를 포상하게 되었으므로, 공이 의논드리기를,

“선대에 길운절(吉云節)이라는 자가 제주에서 역모를 하다가 탄로 나자 주관(州官)에게 자수하였는데, 명하여 그 자신만을 목 베게 하였습니다. 응서는 운절과 같은 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였다. 광해가 듣지 아니하고 국문하기를 날로 엄하게 하며 사관(史官)을 보내 원임(原任)으로 하여금 옥사를 다스리게 하였으나, 공은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대궐에서 저주한 사건으로 해서 팔도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을묘년(1615, 광해군7) 봄에 공이 차자를 올려,

“저주의 변고는 일이 자전(慈殿 인목대비를 가리킴)에 관계되니 사방에 포고하는 것은 사체상 옳지 않습니다. 또 떠도는 말에 ‘대비가 장차 위호(位號)를 보존치 못할 것이다.’ 하니, 모친이 비록 자애롭지 못하더라도 자식은 불효해서는 안 되며, 모자(母子)는 명위(名位)가 지극히 중하고 윤기(倫紀)가 지극히 큰 것인 데다, 신은 나라의 후은을 입었으므로 부득이 말씀드립니다.”

하니, 광해가 대로하여 역적을 두둔한다 하매, 삼사(三司)가 죄주기를 청하면서, 남이공(南以恭) 또한 시론(時論)에 깊이 미움을 받은 지 오래였으므로 아울러 논죄하도록 종용하였다. 태학사 홍무적(洪茂績)ㆍ정택뢰(鄭澤雷)ㆍ김효성(金孝誠) 등이 상소하여,

“모(某)는 충직해서 그런 것이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였다가 모두 죄를 얻었고, 공은 홍천(洪川)에 부처(付處)되었다. 이때 동방이 크게 가물었는데 공이 이르자 관동 지방에 크게 비가 내리니, 이를 일러 ‘상공우(相公雨)’라 하였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우상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모(某)는 내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되니 마땅히 국문해야 합니다.”

하였으므로, 공은 홍천(洪川)에 유배되고, 판서 신흠(申欽)은 춘천에 유배되고, 참판 한준겸(韓浚謙)은 출척되어 서호(西湖)에 머물러 있었는데, 항간에 유배된 세 사람들이 강을 따라 돌아다니며 모의(謀議)한다 하여 국문하려는 의론이 있으므로, 공이 드디어 문을 닫아걸고 비록 친척이나 친구라도 만나지 않았다. 정 양양 엽(鄭襄陽曄 양양은 양양 부사임을 나타냄)이 공에게 들러서 사립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가면서 농담하기를,

“무엇 때문에 이렇게 겁을 냅니까? 스스로 반성해서 정당하면 저들이 나를 어쩌겠습니까?”

하였다.

기미년(1619, 광해군11) 찬적(竄謫)된 자들을 풀어 줄 것을 상소하여 80여 인을 열계(列啓)했는데, 그중에 혹은 원찬(遠竄)에서 중도부처(中途付處)로 바뀌고, 혹은 중도부처에서 방환(放還)된 자가 20여 인이었다. 공은 방환되어 고향에 돌아오자 여상(驪上 여주)에 살면서 강가에 나가 고기를 낚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스스로 소일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상이 반정(反正)하자, 공이 다시 영상이 되어 입경하여 사례하니, 도민(都民)의 부로(父老)들이 공을 바라보면서 서로 경하하기를,

“이 상공이 오셨다.”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광해가 폐위되고 죄인들도 모두 복형(伏刑)하자, 그들을 돕고 추종하던 자들을 공이 모두 가벼운 형벌로 다스리기를 청하여, 신광업(辛光業) 등은 을묘년에 공을 사형으로 논죄하였는데도 모두 사형을 면하는 속에 끼이니, 공을 모르는 자들은 공이 혐의를 피하려 한다 하였으나 동요되지 않았다. 사형된 사람의 재산을 공신 등이 이미 모두 몰입(沒入)하자, 공이 옳지 못하다 하여,

“박승종(朴承宗)ㆍ유희분(柳希奮) 같은 사람의 재산을 속공(屬公)하는 것은 옳지만 적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대비가 광해를 꼭 죽이려 하니 공신 등이 모두들 말하기를,

“죽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광해는 스스로 천명을 끊었으니 그를 폐위시키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나, 그를 죽이는 데에 이른다면, 노신은 이미 임금으로 섬겼으니 마땅히 이제 조정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상이,

“마땅히 목숨을 보전케 하리라.”

하였다. 어떤 사람이 정철(鄭澈)의 관작을 복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공에게 묻자 공이 답하기를,

“철을 어떤 이는 군자라 하고 어떤 이는 소인이라 하나, 이제 죄를 지었던 자들이 모두 용서받았으니 철도 풀어 줄 만합니다.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철이 실로 주동한 것으로 억울하게 많은 사람이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슬프게 여깁니다. 신이 일찍이 대사헌으로서 이 사람을 논죄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둘 다 풀어 주라.”

하였다. 이로 해서 기축옥사에 관련되었던 자들이 모두 그 벼슬에 복직되었다.

중고 이후로 삼공(三公)이 정부에 앉아서 국정을 처리하지 않은 지가 오래였는데, 중흥에 이르러 공신 등이 모두 말하기를,

“다시 도당(都堂)의 전례대로 시행해야 한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안 되오. 중고에 이 일을 폐지한 것은 이유가 있어서이니, 나라의 대권(大權)을 신하들이 다시 천단(擅斷)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이때 상이 바야흐로 공신들에게 의지하여 정치를 맡겨서 심기원(沈器遠)ㆍ김자점(金自點) 등이 비로소 용사(用事)하였다.

국가가 광해의 무도한 정치의 폐단을 이어받은 뒤라, 상이 낭비를 헤아려 줄여서 국가의 경비를 절약할 것을 명하였으므로 공이 이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거족(巨族)들이 대부분 싫어하여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상이 영남 지방의 은자(隱者) 장현광(張顯光)을 불러서 이르자, 공이 가서 만나보고 국사(國事)를 물으니, 다른 말은 없고 다만,

“현재 국가의 큰 우환은 서로 의심하는 데 있습니다.”

하니, 공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가을에 노쇠하였다 하여 사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무악(舞樂)으로써 공의 사저(私邸)에 연희를 내렸는데, 도당(都堂)이 서로 회연(會宴)하고 기로(耆老)가 회연하여 모두 상에게 연회에 나오기를 청하니 매우 성대한 일이었다. 《궤장연수창시(几杖宴酬唱詩)》 1권이 있다.

갑자년(1624, 인조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변고를 보고한 자가 있었는데, 사대부 중 실지(失志)한 자가 많이 연루되었다. 이괄의 반서(叛書)가 보고됨에 미쳐, 공신 등이 크게 두려워하여 몰래 내변(內變)이 있을 것이라 하여 상의 마음을 움직여서 고(故) 정승 기자헌(奇自獻) 등 37인을 죽였으나, 의론이 공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상이 마침내 공주(公州)로 행행하였다. 그후 공이 상에게 아뢰어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 주고 모두 관작을 복직시켰다. 이괄이 패사(敗死)하여 거가가 서울로 돌아왔다. 겨울에 상소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떠날 것을 청하여 마지않았다.

을축년(1625, 인조3) 상소를 다섯 번 올리자, 영상을 체직하여 영중추(領中樞)로 삼았다. 또 연거푸 치사를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다가 가을에 다시 영상을 삼고 견여(肩輿)를 하사하여 입조(入朝)하게 하였는데, 차자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상이 소견(召見)할 적에, 늙어서 기거하기 불편하다 하여 숙배(肅拜)하지 말게 하였는데 인대(引對)하여 말한 바가 모두 사퇴하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교지(敎旨)에 응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조정은 사방의 본보기이니 조정이 불화하면 정치의 도(道)가 나올 곳이 없습니다. 전국 시대의 모신(謀臣) 중에, ‘여러 신하가 화(和)하면 그 나라는 정벌할 수 없다.’고 한 자가 있습니다. 대개 화하면 하나로 뭉치게 되고 하나로 뭉치게 되면 강해져서 적국이 감히 도모할 수 없는 것인데, 이제 백성들은 각기 견해를 달리하고 관리들은 각기 의론을 달리해서 의심하고 거리감을 두어 모든 일이 흩어져서 수습할 길이 없으니, 이러하고서 다스려지기를 바란들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제, 국가가 중흥하여 천명이 정하여졌으니 조정에 가득한 사대부가 누군들 전하를 위하여 한번 죽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마는, 흉도가 거듭 소란을 피우던가 사원(私怨)으로 해서 난을 초래할지도 알 수 없으며, 혹은 사대부들을 무인(誣引 죄 없는 자를 죄가 있다고 끌어들임)하여 조정을 어지럽혀 국세를 꺾어 놓고 천천히 틈을 탈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름을 대 가며 말을 퍼뜨려서 사람의 귀를 어지럽히므로 사람마다 위태롭게 여겨 보전할 길이 없어 낭패하고 궁축(窮蹙)해서 몸 둘 곳이 없게 되었으니, 자못 성대(盛代)의 기상이 아닙니다.”

하였다.

한림 목성선(睦性善)과 정자(正字) 유석(柳碩) 등이 상소하여 인성군(仁城君)을 관대히 용서해 줄 것을 말하였는데, 김상헌(金尙憲)이,

“성선 등이 스스로 여러 역적들이 추대한 왕자에게 아부하는 것이다.”

하였으므로, 상이 대신들에게 물으니 공이 계하기를,

“신은 왕실과 지친(至親) 관계이므로 전부터 매번 전은(全恩)으로써 말하니, 사람들이 모두 노신을 지목했습니다. 인성군은 조정에서 이미 함께 의론해서 외방에 안치(安置)한 것이니 상께서는 시종 보전하셔서 애당초 내부에 두고 외부에 두는 것으로써 경중을 삼지 마소서.”

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4) 봄에 계운궁(啓運宮)의 상(喪)이 있었다. 공이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재최부장기복(齊衰不杖朞服)으로 정하여 계하게 하였는데, 상이 삼년상을 단행하니 공이 쟁론하기를 마지않았으나 상이 듣지 않고 모든 상례에 한결같이 후비의 예를 썼다. 공이 드디어 궐문 밖에 나아가 연이어 차자를 올리기를,

“본생가(本生家)의 사친(私親)을 종통(宗統)과 같게 하면 전례가 어지러워지고 종통이 존엄하지 못하여 참의(僣擬)의 화가 끝내 난망(亂亡)에까지 이르게 되어 억만년 종사(宗社)의 우환이 전하에게 있게 될 것이니, 노신이 금일 이를 말하지 않았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이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이 수상(首相)으로서 대사(大事)를 당하여 일의 가부를 정하는 바가 없으니, 어찌 이 같은 재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사직을 청하는 것이 어찌 신의 본심이겠습니까? 부득이해서입니다.”

하고, 즉시 금양(衿陽)으로 돌아갔다. 상이 교서를 내렸는데 허물을 뉘우치는 뜻이 있으므로 공이 즉시 들어와 대죄(待罪)하니, 상이 말하기를,

“경이 과인을 버리지 않으면 나의 마음이 기쁠 뿐 아니라 실로 창생의 복이니, 끝까지 힘써 보좌하라.”

하고, 해사(該司)에 명하여 궐하의 민가를 수리하여 거처하게 하니, 공이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였다.

장례가 끝나자, 대원군(大院君)을 추존하여 정목장효 대왕(靖穆章孝大王)이라 하고 계운(啓運)은 인헌왕후(仁獻王后)라 하고 왕후의 원소(園所)를 장릉(章陵)이라 하니 공이 교외에 나아가 상소하기를,

“신이 직사(職事)를 버리고 전후로 소차(疏箚)를 올려 정고(呈告)하기 30여 회에 거만하고 버릇없이 행동하여 관방(官方)을 무너뜨려 신하의 예가 없으니, 신은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물러나 교외에 부복하여 삼가 엄명을 기다리나이다.”

하고, 계속 물러나기를 청해 마지않았다. 상이 이에 허락하고서 교서를 내려,

“비록 직사(職事)로써 강권할 수는 없으나, 도하(都下)에 소환하여 사대부들의 본보기를 삼고자 겸손한 말로써 청했는데, 끝내 따라 주지 않으니 내 심히 부끄럽도다.”

하였다. 정원이 돈유(敦諭)하니 공이 부득이 사저에 돌아와 대죄하자, 영중추(領中樞)에 임명하고 이어 해사에 명하여 전에 사관(舍館)하던 집을 다시 수리하여 이주하게 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5) 정월에 금(金) 나라가 대거 침입하여, 관서 절도사 남이흥(南以興)이 싸우다 패사하였다. 평양ㆍ황주(黃州)를 모두 지키지 못하고, 달리 군사를 믿을 만한 곳이 없으므로 상은 강도(江都 강화도)로 출행(出幸)하고 공은 도체찰사가 되어 세자를 좆아 견성(甄城 전주의 옛 이름)에 이르러 백성을 위문하며 번비(煩費)를 줄이고, 군사의 행렬에 규율이 있고 호령이 엄숙하니 젊은 층의 기공(奇功)을 바라는 자들이 대부분 좋아하지 않았다.

이때 우상 신흠(申欽)도 수행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우상을 설득해서 무군사(撫軍司)를 세워 아문(衙門)을 나누기를 권하였으나 공으로 해서 실행되지 않자, 날로 말을 꾸며 비방하고 혹은 투서하여 변이 있을 기미를 보이므로, 여러 빈좌(賓佐)들이 군사를 거두어 후군이 되어 스스로 구별지으려 하니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상이 충자(冲子)를 나에게 부탁하셨으니, 일행이 나를 몰아 떠나게 하려 하나 나는 듣지 않겠다.”

하니, 말하는 자들이 그만두었다. 조정에서 오랑캐와 강화를 맺은 것을 듣고 곧 세자를 받들어 행재소로 가니 참소하는 말이 그쳤다. 여름에 거가가 서울로 돌아오니 공이 상소하여,

“상하가 막혀 통하지 않아 언로가 끊어졌으니, 바라건대 자신의 마음을 비워 남에게 물으며, 스스로를 넓히고자 남을 좁히지 마소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이같이 병들고서 능히 나라를 다스린 자는 없습니다.”

하였다.

가을에 향리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상이 선온(宣醞)으로써 전송하였다. 다음달에 신병으로 사양하고 이어 치사(致仕)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고 승지를 시켜 교서를 써서 돈유(敦諭)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천한 신의 수명이 이미 다하였는데, 길에서 메고 끌고 해서 세 번이나 수문(脩門)에 들어간다면 어찌 조정 사대부의 수치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상이 해사에게 흰 이불과 흰 요를 내려서 검소한 덕을 표창케 하고,

“평생의 검소를 공경할 만하다.”

하였다. 공이 퇴로했다 하여 녹을 받지 않으니, 상이 기내(畿內)에 명하여 월봉(月俸)을 내리고 세시(歲時)마다 쌀과 고기를 내리게 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9) 여름에 변방에 급한 보고가 있자 공이 입경하니 상이 인견하고 후사(厚賜)하였다. 두어 달 머물러 있다가 향리에 돌아와 차자를 올리기를,

“현재의 정세가, 적병이 비록 물러갔으나 조만간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니, 바라건대 분발하여 힘써 무익한 일을 중지하고 병사(兵事)에 전념하여 적의 내침에 대비하소서. 강도(江都)로 보장(保障)을 삼고 남한산성으로 보거(輔車)를 삼아 수리하고 저축하여 마땅한 장수를 얻어 맡기고, 삼남(三南)을 수습하고 양서(兩西)를 존휼(存恤)해서, 군민으로 하여금 윗사람과 친하게 하여 기세가 이어져 통틀어 한집안이 되게 한다면, 외적의 침입은 염려할 게 못됩니다. 이러한 것은 신하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전하가 정신을 하나로 집중해서 감응(感應)이 두루 미친 뒤에야 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될 수 없고 식량이 없으면 백성이 없게 되므로 백성의 노력을 아끼고 백성의 식량을 여유 있게 하는 것이 제왕의 급무이온데, 근래에 오로지 원망을 감당하는 것을 현명하다 하고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겨서, 국가의 권징(勸懲)이 이와 같으니 전하가 비록 백성을 보호하고자 한들 은택이 아래로 끝까지 미치지 못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문하게 하고, 복명하자 그 거처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모옥(茅屋)이 낡아서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지경입니다.”

하므로, 상이 말하기를,

“재상 40년에 몇 칸 모옥이 있을 뿐이란 말인가?”

하고, 본도(本道 경기도를 이름)에 정당(政堂)을 짓게 하여 하사하니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다시 상소하기를,

“신이 비록 치사하더라도 나라에 위난(危難)이 있으면 마땅히 죽음으로써 전하께 보답하겠습니다.”

하였다.

임신년(1632, 인조10) 인목왕후(仁穆王后)가 훙(薨)하였다. 공이 즉시 들어와 성복(成服)하고 돌아왔다. 공이 금양(衿陽)에 은퇴한 지 8년 만에 졸(卒)하니 향년 88세 되는 숭정 7년(1634, 인조12) 정월 29일이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공을 위하여 3일간 조회를 파하고 부의(賻儀)를 후하게 하였다. 세자는 공의 건덕방(建德坊)의 옛집에 와서 조문하였고 백관이 회곡(會哭)하였으며 도민(都民)의 부로(父老)들도 파시(罷市)하고 회곡하였다. 3월 모일에 예로써 가족묘에 장사하였는데 유사(有司)가 지공해서 장사를 마쳤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실없는 명예로 해서 묘도(墓道)를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을 나는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하고, 자제를 시켜 평생의 일을 차례로 서술하여 창석(蒼石) 이준(李埈)에게 부탁하여 묘비를 짓게 하였다. 일사(逸事)를 기록한 글이 있는데, 공이 자술(自述)한 것이라 한다.

공은 청렴하여 곤궁을 견디어 내며 자신을 닦아, 임금을 섬김에 숨기는 바가 없었고 진퇴에 의(義)가 있어 명상(名相)이 되었다. 선조 대에 염근(廉謹)한 이를 뽑는데 공과 정승 유성룡이 당세에 가장 중하게 되었다. 공이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평생 이익을 보면 치욕이 되지나 않을까 생각했고 일에 임할 때는 어렵다고 해서 사양하지 않았으며, 행동에는 구차하게 용납받으려 하지 않아, 그 허물을 줄이려고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거울로 물건을 비춰 보는 것과 같아서 능히 기미(幾微)를 알 수 있는 것이니, 따르고 따르지 않는 것을 반드시 결정하는 것은 일에 밝은 것이다. 용기는 밝은 데서 생기고 밝으면 미혹되지 않고 미혹되지 않으면 동요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것이 공이 일생 동안 깊이 깨달아 힘을 얻은 것이다.

공이 벗한 사람으로 두 사람이 있으니, 승지 강서(姜緖)와 인의(引儀) 조충남(趙忠男)이다. 강 승지는 선조를 섬겨 직간(直諫)을 좋아하였는데 미친 체하여 스스로 감추어 나타내지 않았고, 조 인의는 중풍과 벙어리짓을 하며 세상에 숨은 자로서 남들과 말을 끊고 때때로 눈살을 찌푸리거나 웃음으로 사람들에게 가부(可否)를 나타낼 뿐이니, 아는 자가 없었다. 붕당이 처음 일어났을 때, 그가 눈살을 찌푸렸던 자는 모두 패하였고 그가 웃어 준 자는 모두 영명(令名)으로 마쳤다. 강 승지 또한 사람을 잘 알아보고 성패와 화복에 대하여 잘 말해서 틀리지 않았다. 일찍이 공에게 말하기를,

“후일에 수고재상(壽考宰相)이 되어, 난세를 만나 눈물을 뿌리면서 담당해 나갈 것이오.”

하였는데, 공이 선조의 지우(知遇)를 받아 다난한 시기에 중책을 맡아 심력을 다하여 사방으로 분주히 돌아다녔고, 10년 후에 광해의 무도한 정치를 만나 간쟁하다 축출되고, 또 10년 후에 인조(仁祖)를 섬김에 미쳐 다난한 시기가 처음으로 안정되자 치사하고 겨우 8년 만에 작고했으니, 공이 재상으로 지낸 40년에 그의 말이 하나하나 다 들어맞았다. 공이 인물을 논할 때마다,

“강 승지가 제일이요, 정자 조중립(趙中立), 사인 조정립(趙正立), 판서 오억령(吳億齡), 참판 김우옹(金宇顒), 참판 정온(鄭蘊), 지평 임숙영(任叔英), 상공 유성룡은 내가 존경하여 섬기는 분들로 임금을 섬김에 능히 충성을 다하고 그 자신을 잊은 것이 고인(古人) 같으며, 상공 이항복은 탁 트여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아서 능히 마음에 생각하는 것으로써 부귀를 잊었으니, 또한 위인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죽었을 때, 대신이 한 왕자를 위하여 죽을 수는 없다 하더니, 대비가 폐위됨에 미쳐 극언(極言)으로 힘써 간하다가 쓸쓸히 북녘에서 죽었으니, 훌륭하다, 능히 자기의 말을 실천한 사람이라 하겠다.”

하였다. 공은 율려(律呂)에 능통하여 항상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즐겼는데, 늙어서 사직을 청하고부터는 다시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항상 홀로 탄식하기를,

“내가 늙어 죽게 되었는데, 이제 인사(人事)가 극히 어지러우니 천도(天道)가 장차 변하여 대란이 닥치겠구나.”

하더니, 공이 죽은 지 3년 되는 해에 남한(南漢)의 일이 있었다.

계해년(1623, 인조1)부터는 일기가 없다. 소차집(疏箚集)이 있는데 공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이 처음 정인홍과 함께 장령이 되었을 때, 정인홍이 세상에 중명(重名)이 있어 상 또한 마음을 기울여 그를 쓰자, 공이 염려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길인(吉人)이 아니다.”

하더니, 광해 때에 미쳐 그의 권위가 날로 성해지자 전적으로 심각한 방법으로 한 세상을 억제하니, 사람마다 두려워 곁눈질을 하며 말하기를,

“상공이 예견한 그대로이다.”

하였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내가 그의 행동을 볼 때, 인정에 가깝지 않기 때문에 의심했던 것이지 선견이 아니다.”

하였다. 상공 이항복이 공과 함께 정승이 되어 대사를 논하고 중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반드시 공에게 묻고 말하기를,

“앞일을 내다보는 것은 내가 공만 못하다.”

하였다. 공이 작고한 후에, 상공 이홍주(李弘胄)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중흥 초에 공이 다시 조정에 들어와 정승이 되었을 때, 언젠가 나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나는 이제 늙었소. 동리(同里)의 여러분 중에 오 이조(吳吏曹 이조 판서로 있던 오윤겸(吳允謙)을 이름)가 마땅히 나를 이어서 정승이 될 것이고 그후 공이 또 정승이 되어 국가가 위태하고 민생이 미란(糜爛)할 것이나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오.’ 하더니, 이제 상국이 이미 작고하고 오 상국 후에 내가 과연 정승이 되어 상을 남한산성으로 수행했으면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요행이다. 지금도 상국의 그 말이 귀에 쟁쟁하니 어쩌면 선견지명이 이렇게도 신묘한가.”

하였다. 서경(西京)에 상국의 생사당(生祠堂)이 있는데, 최립(崔岦)이 생사영향사(生祠迎享詞)를 지었다. 서경의 안주(安州)와 영남의 성주(星州)에 모두 공덕비가 있다. 효종(孝宗) 원년(1650)에 문충(文忠)의 시호를 내리고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식(配食)하였다.

장남 이의전(李義傳)은 일찍이 지방의 군수가 되었는데 청렴과 검소를 좋아하였고 치행(治行)이 제일이었으므로 상이 표리(表裏)를 내려 포상하였다. 후에 세습하여 완선군(完善君)에 봉해졌으며 또 늙어서는 자헌(資憲)에 승진되었다. 차녀는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된 이정직(李廷稷)에게 시집가서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고, 측실(側室) 소생으로는 이효전(李孝傳)ㆍ이제전(李悌傳)의 2남이 있다. 딸은 일곱인데, 명행(名行)으로 알려진 자가 셋이다. 하나는 그 남편이 불행히 형벌을 받아 죽자, 주야로 3년을 곡하다가 죽었고, 하나는 총명하고 지성(至性)이 있어 계해년(1623)부터는 일기가 없는데 능히 12년간의 일을 암송하여 전하며 ‘속일기’라 하였다.

또 하나는 강도(江都)가 패했을 때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스스로,

“나는 완평 이 상국의 딸이다. 의리상 욕되지 않게 자살하여 스스로 나타내겠다.”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니, 크게 놀라고 그의 행실을 어질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큰언니가 처음 그의 동생이 포로되어 적중에서 죽었다는 것을 듣고 곡하지 않다가 까닭을 물어본 후에야 슬피 흐느껴 울면서,

“훌륭하다, 그 죽음이여. 죽었어도 그 이름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하였다.

 

중략

 

장현광(張顯光) 1554년(명종 9)∼1637년(인조 15). 인동 출신. 필자의 15대조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팽석(彭錫)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부터 진사 장순(張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18세 때인 1571년(선조 4)에「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대학자로서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576년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 해에 유명한 「평설(平說)」을 지었다. 1595년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다시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가 바로 풀려났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서애 류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류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 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어서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 만에 돌아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08년「주역도설(周易圖說)」을 지었고, 1621년(광해군 13)「경위설(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했고, 이어서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후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謝恩)했고, 이어서 사헌부대사헌·부호군,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공조판서, 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여헌집』·『성리설(性理說)』·『역학도설(易學圖說)』·『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이 있다.

1655년(효종 6)의정부좌찬성, 1657년(효종 8)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선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입암서원(立巖書院)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기언 별집 제12권

 

제문(祭文)

 

장여헌(張旅軒)에게 드리는 제문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11년 무인년(1638, 인조16) 을미일을 초하루로 하는 2월 17일 신해에 양천(陽川) 허목(許穆)은 삼가 향을 사르고 술을 따르며 여헌 장 선생(張先生)의 영연(靈筵)에 곡합니다.

아, 사람의 태어남이 천지의 기(氣)가 엉겨서 길러 낸 것이 아님이 없으나, 기의 청탁(淸濁)과 순수하고 박잡함이 같지 않음에 따라 현불초(賢不肖)가 결정되고 시대의 치란(治亂)과 도(道)의 비태(否泰 《주역(周易)》의 괘명(卦名)으로 비괘는 막힌 운수, 태괘는 태평한 운수)가 결정됩니다.

국가가 태평한 지 1백 년이 되어 화기(和氣)가 성종(成宗)ㆍ중종(中宗)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 무렵에 크게 일어나서, 많은 현인들이 배출되어 서로 더불어 사도(斯道)를 강명(講明)하여, 성인(聖人)의 가르침이 바다 밖 외진 곳에 있는 우리나라에 환하게 빛났는데, 기자(箕子) 이래로 천년만년을 지나 다시 이때에 성대해진 것입니다.

아, 말세 이래로 화란이 잇달아서, 백성과 사물이 서로 편안히 즐겁게 살던 것이 또 이치에 어그러지고 형적이 아주 없어지니, 사람의 도리가 이에 이르러 극히 어지러워졌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성인이 이를 이어받았다 하더라도 그 위태롭고 무너져 가는 것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니 전일의 태평스러운 화기는 삭연(索然)히 다 없어지고, 군자의 도(道)도 다 사그라지고 없어져 버렸습니다.

아, 때가 사람에게 매인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때에 매인 것인지요.

선생은 치세(治世)에 순수한 기운을 타고 영남(嶺南)에서 우뚝이 태어나 성대히 대유(大儒)가 되셨는데, 당신이 배우신 바를 한 시대에 행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거두어 간직하여, 당신 자신에게 도를 행하여 즐기는 것이 나았던 것입니다.

태평한 세대(선조(宣祖) 때를 말함)에 빙소(聘召 나라에서 현자를 예로써 부르는 것)에 응한 적이 있으나 곧 떠나 버렸으니, 그 즐거워하는 바는 진실로 고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 위태롭고 불운한 때를 당하여 은덕을 사방에 베풀지 못하고, 요순(堯舜) 같은 임금과 요순 시대의 백성을 만들려는 뜻이 끝내 몸으로써 도를 따라 죽게[殉身] 하였으니, 하늘의 뜻입니까.

도가 나타나면 나가 벼슬하고 도가 어두우면 물러나 숨으며, 도가 발전하면 흥하고 도가 소멸하면 망하는 것이니, 선생에게는 본디 천지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높은 덕과 심후(深厚)한 학문과 간약(簡約)한 말씀은 본디 천학(淺學)한 후생이 의논하고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가 벼슬할 만하면 나가고 물러나 숨을 만하면 숨으며,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전원에서 만족하며, 작록(爵祿)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비록 천사 만종(千駟萬鍾 4천 마리 말과 1만 종의 녹이란 뜻으로 부귀함을 말함)을 준다 해도 그 절개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 도는 다름이 아니라,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고 만물이 함께 자라게 하는 것으로 요순(堯舜)이 그 도를 얻어 임금이 되고,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이 그 도를 얻어 신하가 되고, 공자(孔子)가 그 도를 얻어 시중(時中)이 되고, 백이(伯夷), 이일(夷逸), 유하혜(柳下惠)가 그 도를 얻어 일민(逸民)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과 현인이 살아서는 한 시대의 백성의 소망을 짊어지고, 죽어서는 백세토록 스승으로 삼아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아, 오도(吾道)가 궁액(窮厄)에 처했는데, 또 기로(耆老 덕이 있는 연로한 사람)를 잃었습니다.

인심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어두워지고 세도(世道)는 이로 말미암아 더욱 어지러워져서 거의 다시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되었으니, 하늘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끝내 무식하고 어리석게 하고 말 뿐입니까. 아, 슬픕니다.

 

祭張旅軒文

崇禎十有一年歲次戊寅二月朔乙未十七日辛亥。陽川許穆。謹燒香酹酒。而哭于旅軒張先生靈筵。嗚呼。人物之生。莫非天地之所鍾育。而氣有淸濁粹駁之不同。而賢不肖繫焉。時之治亂。道之否泰繫焉。國家治平。百年和氣。大發於成中仁明之間。群賢輩出。相與講明斯道。而聖人之敎。燦然休明於海隅絶域。蓋自箕子以來。歷千萬年而復盛於此矣。嗚呼。叔季以降。禍亂相尋。民物之所以相安而樂生者。又乖悖泯絶。而人之道至此可謂極亂矣。雖聖人承之。其顚危敗壞之不可扶持。則伊昔治平之和氣。索然消喪已盡。於是君子道消。又從而殄亡矣。嗚呼。時蓋繫乎人耶。抑人繫乎時耶。先生以治世之粹氣。挺生於南服。蔚然爲大儒。而旣不得行吾所學於一時。則寧卷而懷之。道足以行吾身而樂之。雖嘗應聘於昭代。又席不暖而去。則其樂固不改矣。嗚呼。當危亂否極之際。德惠不能施於四方。而使堯舜君民之志。竟殉身而歿。則天耶。蓋道見則見。道隱則隱。道長則興。道消則亡。於先生固無憾於天地矣。其嵩高之德。深厚之學。簡約之言。固非後生淺學所能窺議測度者也。其可以出則出。可以隱則隱。視富貴如浮雲。囂囂於畎畝之間。爵祿不入於心。雖千駟萬鍾。不以易其介。其道無他。此天之所以覆。地之所以載。萬物之所以竝育。堯舜得之以爲君。伊傅得之以爲臣。孔子得之以時中。伯夷夷逸柳下惠得之以逸者也。此聖人賢人之所以生而負一世蒼生之望。沒而可師於百世而不疑者也。嗚呼。吾道方窮。又失耆老。人心由此而益昏。世道由此而益亂。而殆無復可爲。則天之將使斯人。竟貿貿泯泯而已耶。嗚呼哀哉。

 

[祭張旅軒文 代從兄作] 종형 관설 선생을 대신해 지은 제문

 

嗚呼。厚於三十時。遊嶺表。因得謁於先生。覩君子之儀。聞君子之論。知君子之德。至今餘數十年。自慙不敏懵陋猶初。而其慕德欽風。又曷嘗一念忘于懷也。其間世變無窮。人事艱難。竄逐窮隅。每自恨山川阻遠。莫遂願學之心。頃年數書開誨。益令人向德無窮。及玆忝叨遺化之地。不自念蹤跡之愧恥。徒私自幸賢者所過。餘敎在今。足使後人觀感而知勸。路出關洛。又近君子之鄕。唯思一晉門下。親承提誨。庶副夙昔之願。豈意中途。遽承凶訃。幽明永隔。此生無復考疑而問德。迷道窮年。竟倀倀而終也。微言圮絶。吾道已矣。通天之學。貫古之識。深厚之德。旣不得復有於此世。則天之方喪斯文。終不憖遺耆老耶。抑吾道旣否。先生與天地俱閉耶。此路幽昧。又失依歸。旣爲斯世而悲。爲斯民而悲而又自爲悲。悲愈無窮也。嗚呼慟矣。

 

기언 별집 제16권

 

구묘문(丘墓文)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

 

선생은 휘는 현광(顯光)이고, 자는 덕회(德晦)고, 별호는 여헌이며, 성은 장씨(張氏)이다. 고려의 상장군(上將軍) 김용(金用 인동 장씨(仁同張氏))의 시조. 본성은 장(張))이 처음으로 옥산(玉山)에 본적(本籍)을 두었다.

12세(世)에 와서 부윤(府尹)인 장안세(張安世)가 있었으며, 부윤은 좌윤(左尹) 장중양(張仲陽)을 낳았고, 좌윤은 장령(掌令) 장수(張脩)를 낳았다. 장수는 곧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는데, 선생에게는 6세조(世祖)가 되는 분이다. 증조는 증(贈) 좌승지(左承旨) 장준(張俊)이며, 조부는 증(贈) 이조 참판 장계증(張繼曾)이고, 부친은 증(贈) 이조 판서 장열(張烈)이다. 모친은 증(贈) 정부인(貞夫人)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 참봉(齊陵參奉) 이팽석(李彭錫)의 따님이다.

선생은 명 나라 숙황제(肅皇帝 세종(世宗)) 가정(嘉靖) 33년(1554, 명종9) 정월 계해일에 출생하였는데, 선생이 8세 때에 그 부친이 돌아갔다. 17, 8세에 학문이 이미 통달하고 경술(經術)에 몰두하여 《우주요괄십도(宇宙要括十圖)》를 지었고, 23세에 재주와 학식으로 천거되었다.

허잠(許潛 호는 한천(寒泉), 자는 경량(景亮), 시호는 충정(忠貞))이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정 선생을 만나서 남중(南中)에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를 묻자, 정 선생이 말하기를,

“공자 문하에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안자(顔子) 한 사람뿐입니다. 어찌 쉽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장현광이란 사람이 배움을 구하고 도에 뜻을 두니, 후일에 우리의 스승이 될 사람입니다.”

하였다. 28세에 모친이 별세하였는데 상제수록(喪制手錄)한 것이 있다. 유 문충공(柳文忠公 문충은 유성룡(柳成龍)의 시호, 호는 서애(西厓), 자는 이현(而見))이 여러 번 상에게 추천한 일이 있었는데, 서로 상면하게 되자 아들 유진(柳袗)을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만력(萬曆) 22년(1594, 선조27) 봄에 예빈 참봉(禮賓參奉)에 임명되었고, 가을에 또 제릉 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해(1595, 선조28) 특별히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었다. 문인 정사진(鄭四震)이 출처(出處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집에 있는 것)에 관한 의의를 물으니, 선생이 답하기를,

“배워서 학식이 넉넉하면 벼슬하고 예우로 대우하면 벼슬하고, 가세(家勢)가 구차하고 부모가 연로하면 벼슬하는 것이다. 벼슬하지 않는 것에도 두 가지 수치가 있다. 제 몸만을 깨끗이하고자 하여 대륜(大倫)을 어지럽히는 것이 한 가지 수치요, 짐짓 그 명성을 위하여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것이 두 번째의 수치이다.”

하였다. 현령이 되자 부로(父老)들과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모임을 약조하고, 각자 백성의 고통과 부실한 것들을 말하게 하여 폐단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효제(孝弟)를 도탑게 하고 염치(廉恥)를 권장하고 덕행을 높이고 패속(敗俗)을 일소하였으니, 모두 풍속을 좋은 방향으로 옮기는 큰 모범이었다. 2년 만에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고 돌아오니, 임의로 관직을 버렸다 하여 법으로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경연관(經筵官)이 상에게 아뢰어 곧 석방되었다. 그해 여름에 영양(永陽 영천의 옛 이름)의 입암(立嵒)의 천석(泉石)을 유람하였다.

만력 29년(1601, 선조34)에 상이 경서(經書)의 교정을 명하였는데, 선생이 부름을 받았다. 현과 도에 명하여 말을 공급하도록 하였고, 연이어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공조 좌랑에 제수되어 《주역(周易)》의 교정에 참여하였고, 형조 좌랑에 옮겨졌으나 사양하고 돌아왔다. 만력 31년(1603, 선조36)에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또 의성 현령(義城縣令)에 제수되었는데 몇 달이 못 되어 읍에 변이 생기자 스스로 죄상을 탄핵하고 돌아왔다. 만력 36년(1608, 광해군 즉위년) 광해(光海)가 새로 왕위에 오르자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제수되고, 만력 38년(1610, 광해군2)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력 43년(1615, 광해군7) 관의(冠儀)를 편수하였다. 만력 48년(1620, 광해군12)에 정 선생(한강(寒岡)을 말함)이 별세하자 선생이 여러 제자(弟子)와 상례(喪禮)를 강론하였다. 가을에 현황제(顯皇帝 명 신종(明神宗))가 승하하자 선생이 항곡(巷哭 거리에서 곡함)하고 말하기를,

“우리나라 백성이 임진년(1592, 선조25)과 계사년(1593, 선조26)의 난리를 만나면서도 부자가 각각 도리를 다하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가 황제의 힘에 의한 것이다.”

하였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3년(1623, 인조 원년) 인조대왕이 큰 난을 극복하고 제일 먼저 초야에 숨은 선비를 찾았는데, 선생이 지평(持平)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늙었다는 것으로 사직하자 특별히 성균관 사업(司業)을 제수하였다.

국조(國朝)에 처음에는 이런 직제가 없었는데 상이 즉위하자 특별히 징사(徵士)를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다시 지평으로 제수되었으나 중도(中道)에서 병이 나서 사직하였다. 다음해(1624, 인조2) 봄에 승급되어 장령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상이 남으로 파천했다가, 이괄이 죽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이 행재소(行在所)까지 이르지 못하고 어가(御駕)를 뒤좇아 도하(都下)에 이르니, 또 제수하는 명이 있었다. 상이 불러들여 정치하는 법을 물으니, 선생이 아뢰기를,

“이것은 전하께서 오직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하니, 상이 좋은 말이라 칭찬하고 예물을 후히 하사하였다. 곧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선생은 소(疏)를 올려 사양하고 이어서 ‘공검(恭儉), 절용(節用), 돈덕(敦德), 생형(省刑)할 것’을 아뢰고 조정에 나아가 사례하니, 상이 또 불러들여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부합하기 어려움을 말하였다. 선생이 이에 아뢰기를,

“예부터 변화시키지 못할 인심은 없으며, 돌이키지 못할 세도는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성군(聖君)과 현상(賢相)이 서로 더불어 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다시 이르기를,

“중외(中外)의 인심이 원망이 많은데 어떻게 대처해야겠는가?”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온 나라 백성이 지난날의 잔인하고 횡포한 정치(광해군의 정치를 말함)로 곤경에 빠져서 그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소생되지 못하고 있는 차에, 도성에서는 새로 큰 난을 겪었으므로 소란하며 안정되지 못하고 서로 의심만 품고 있습니다. 상께서 이들을 가엾게 여겨 지극히 슬퍼하시는 전교를 내리시고 이들의 어려움을 성심으로 도우려는 뜻을 보이신다면 인심은 안정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을 모시고 있는 사람 중에서,

“모반을 꾀하는 자가 있다.”

말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백성들로 하여금 큰 법도 안에서 은연중에 감화되게 한다면 모반을 꾀하는 자는 절로 안정될 것입니다. 도성(都城)은 사방(四方)의 중심이 되는 곳이니, 성 백성이 안정되면 사방이 안정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높이 여겨 후하게 하사하였으며, 특히 공조 참의에 제수하고 이르기를,

“이것이 작은 관직이라 하여 사양치 말라. 마땅히 크게 등용하리라.”

하였다. 후일에 특명으로 주강(晝講)에 입시하였고 강이 파하자, 세자가 뵙기를 청하고 빈례(賓禮 예의를 갖추어 손님으로 예우함)로 대우하였다. 물러 나와서 상소로 돌아갈 것을 아뢰고 즉시 떠나니, 상이 잇달아 명을 내려 뒤쫓게 하였으나 선생은 이미 떠난 뒤였으므로 기성(圻省 경기도 감영(監營))에 명하여 말을 공급하여 호송토록 하였다. 이 뒤로 이조 참의, 동부승지 등을 연이어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천계(天啓) 6년(1626, 인조4)에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계운궁(啓運宮 원종비(元宗妃)의 궁호(宮號))의 상을 만났는데 마침 소명(召命)이 있었으므로 조정에 들어가 사례하고 상소로 사직하였으나, 도리어 대사헌에 옮겨 제수되었다. 잇달아 상소하여 간곡히 사직하고자 하니, 세 번 고(告)한 뒤에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졸곡(卒哭 초상 뒤 3개월 만의 강일(剛日)에 지내는 제사)을 마치고 떠날 무렵 상소하여 건극(建極)의 근본을 아뢰고, 또 이어서 아뢰기를,

“뜻이 낮으면 도(道)도 낮은 것이요, 도가 낮으면 사업(事業)이 낮으며, 사업이 낮으면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고,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이웃 나라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요, 천지(天地)ㆍ귀신(鬼神)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날 상이 불러 보니, 또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관해서 수백 언을 올렸다. 말을 마치고 나오니, 상이 전송하면서 이르기를,

“세자를 가르치라.”

하자, 선생이 세자에게 고하기를,

“세자께서는 옛사람이 학문에 뜻을 두던 나이가 되셨습니다. 학문하는 데는 뜻을 세우는 것을 우선으로 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다음해(1627, 인조5)에 오랑캐가 침략하자 영남 호소사(嶺南號召使)의 명을 받았다. 뒤에 오랑캐가 물러가자 상소하여 정치의 폐단에 대해 진술하고, 이어서 ‘사리 편사(私利偏邪)’에 관한 경계문을 지어 바쳤다. 8년(1628, 인조6)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환란을 잊지 않으며 기울어지는 것을 잊지 않으신 뒤에야 군도(君道)를 다할 수 있으며, 조정의 신하는 자신을 잊고 집을 잊고 사사로움을 잊은 뒤에야 신도(臣道)를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덕행이 많은 원로(元老)로 늘 그대와 함께 조정에 있고 싶은데 되지 않으니, 어찌 과인이 우둔하고 정성이 부족한 탓이 아니리요? 경을 모든 사람의 본보기로 삼아 세자를 교육하려는 것이요, 정무를 맡기려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10년(1630, 인조8)에 또 대사헌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이 장묘(章廟 원종(元宗))를 추존(追尊)하자는 논의를 하자, 선생은 추존함이 예(禮)가 아님을 상소하기를,

“손자로서 조부를 계승하는 것은 끊긴 것을 이어 주는 상도(常道)입니다.”

하였다. 12년(1632, 인조10)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5월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상(喪)을 당하자 상소하기를,

“양음(亮陰 천자(天子)가 부모상을 당해 복(服)을 입는 것) 중에는 지극한 덕을 충만히 기르고 큰 근본을 세워서 기천영명(祈天永命)하는 근본을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다음해(1633, 인조11) 7월에 인정전(仁政殿)에 벼락이 치자 선생이 상진(上震)ㆍ하진(下震) 16괘(卦)를 올려 스스로 반성하고 수양할 계훈(戒訓)을 진술하였다. 14년(1634, 인조12)에 특별히 자헌대부로 승급되고, 곧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 대고 사양하였다. 당시에 장묘(章廟)를 부묘(祔廟)하는 일로 쟁론(爭論)한 사람들이 모두 죄를 입자, 선생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낳아 주신 부모에게 효성을 드리는 성의(誠意)는 이미 극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예에 지나침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부묘하는 것은 예로부터 근거할 만한 예(禮)가 없는 것이니, 이러한 처사는 효도하려다가 효를 상하게 하고 인(仁)하려다가 인을 해치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다음해(1635, 인조13)에 우참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년(1636, 인조14)에 지중추부사에 임명하고 상의 부르심이 있었는데 예의가 지극하였다. 선생이 중로에 병으로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약물을 하사하였다. 선생이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조정에서 불화가 일어나는 폐단(弊端) 수백 언을 아뢰기를,

“우주간에 도리(道理)는 하나뿐입니다. 선악이 각각 한 유(類)가 되고 사정(邪正)이 각각 한 유가 되며, 시비(是非)가 각각 한 유가 되는 것이니, 선악ㆍ사정ㆍ시비가 병립(並立)ㆍ병작(並作)ㆍ병행(並行)하면서 이 도리와 이치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건극(建極)을 다하지 못하여 모든 신하들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해 12월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변이 일어났다. 선생은 행조(行朝)가 막히고 명이 시행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주군(州郡)의 부로에게 알려 각각 거병(擧兵)하여 임금을 뵙게 하였으며, 또한 재력을 내어서 군량을 도왔다. 17년(1637, 인조15) 2월에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음을 듣고, 선생은 선인(先人)의 묘소를 하직하고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가 살았다. 입암은 동해(東海)에 위치하고 있는데 입암의 이름을 입탁암(立卓嵒)이라 개명하였으니, 자신의 소신을 붙여 이름한 것이다.

7월에 문인에게 심의(深衣)를 짓도록 명하고 9월 임신일에 선생이 만욱재(晩勖齋)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84세였다. 그 전날 저녁에 뇌우(雷雨)가 크게 몰아쳐서 산이 무너지고 시내가 범람하였다. 상이 부고(訃告)를 듣고 조회와 민간의 저자를 이틀간 파하도록 하였으며, 본도(本道)에서 상사를 돕게 하였다. 을미일에 발인(發引)하여 고향에 돌아올 때 상여를 따르는 선비가 5백여 인이 넘었으며, 상이 특히 사제(賜祭)하였다. 그해 12월 계유일에 금오산(金烏山) 아래 오산동(吳山洞 지금의 오태) 동향(東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전(前) 부인인 정씨(鄭氏)는 증(贈) 참찬(參贊) 정괄(鄭适)의 따님으로 일찍 별세하였으며, 따님이 한 분 있는데, 사위는 참봉(參奉) 박진경(朴晉慶)이다. 후취한 부인 송씨(宋氏)는 충순위(忠順衛) 송정(宋淨)의 따님인데 선생이 작고하기 8년 전에 별세하였다. 아들이 없어 종제(從弟)인 장현도(張顯道)의 아들 장응일(張應一)을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관직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사위 박진경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박기(朴愭)ㆍ박황(朴愰)ㆍ박협(朴悏)ㆍ박증(朴憕)ㆍ박서(朴㥠) 등이며, 박황은 현감이다. 딸이 셋인데 사위는 임경윤(任景尹)ㆍ이현(李垷)ㆍ조하영(曺夏英)이며 이현은 교관(敎官)이다.

장응일이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영(張銢)ㆍ장건(張鍵)ㆍ장옥(張鈺)이며, 장영은 별좌(別坐)요, 장건은 문과에 급제 지평(持平)이고. 장옥은 현감이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임고(臨皐)ㆍ천곡(川谷)ㆍ금오(金烏)에서 모두 제사하였다. 부지암(不知嵒)ㆍ입암(立嵒)ㆍ원당(元堂)에 모두 사당이 있다.

효종 6년(1655)에 경연관 오준(吳竣 호는 죽남(竹南), 자는 여완(汝完))이 상에게 아뢰어 좌찬성에 추작(追爵)되었다. 8년 뒤에 경연관 오정위(吳挺緯 자는 군서(軍瑞), 호는 동사(東沙))가 다시 상에게 아뢰어 영의정을 추증하고, 태상(太常)에 명하여 문강(文康)이라 시호(諡號)하였으니, ‘도덕(道德)이 높고 박문(博聞)하여 문(文)이요, 연원(淵源)에 두루 통달하여 강(康)이라.’ 한다.

선생은 깊은 학문과 혼후(渾厚)한 학덕이 쌓여 깊고 넓고 컸으나, 간직하고 숨기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학문이 넓고 덕이 닦여서 가까이는 마음씀과 인륜의 법도, 멀리는 만사 만물의 당연한 이치로부터 미루어 나가 상천(上天)의 무성무취(無聲無臭)의 극(極)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다. 화(和)한 것으로 덕을 이루고 인(仁)으로 물(物)을 이롭게 하였으니, 사물을 이롭게 하는 데는 ‘외로운 사람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하고 말하기를,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고 구휼(救恤)하는 것이 천지의 대덕(大德)이요, 내 마음의 전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천지간의 일은 인사(人事)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이 없다.”

하고, 경계하기를,

“허(虛)는 만실(萬實)의 부고(府庫)요, 정(靜)은 만화(萬化)의 기틀이며, 정(貞)은 만사(萬事)의 기둥이며, 겸(謙)은 만익(萬益)의 병(柄 손잡이)이요, 검소함은 만복(萬福)의 후함[厚]이다.”

하였다.

인조 때에 선생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이르자, 상국(相國) 이 문충공(李文忠公 오리 이원익)이 선생에게 시정(時政)의 급선무를 물으니, 선생은 별다른 대답 없이 다만,

“한마디로 오늘날 나라의 큰 근심거리는 남을 의심하는 데 있습니다.”

하니, 상국이 물러 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어질도다. 시국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다.”

하였다. 당시 공신 등이 갑자기 대권(大權)을 얻게 되자 마음속으로 두렵고 미워하여 꺼리는 사람은 모두 없애니, 사대부들이 몸을 도사리고 눈치만을 살피게 되어 인심이 크게 혼란스러웠다. 선생이 임금을 면대하여 말씀 올린 것도 이런 뜻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생은 저술한 것이 매우 많지만 한집안 사람이나 자제(子弟)라도 이를 알지 못한다. 《역학도설(易學圖說)》, 《도서발휘(圖書發輝)》, 《역괘총설(易卦摠說)》, 《경위설(經緯說)》, 《만학요회(晩學要會)》, 《우주설(宇宙說)》 같은 저서는 선생이 별세한 후에 곧 출간되었다. 또 《우주요괄록(宇宙要括錄)》, 《의사질(疑俟質)》, 《모계문집(耄戒文集)》 등의 저서가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넓고 통달한 학문과 / 博達之學

남을 이롭게 하는 어진 마음 / 利物之仁

깊고 두터운 덕이네 / 深厚之德

그윽히 통하고 / 邃而通

화하며 돈독하고 / 和而敦

근엄하며 조심성 있도다 / 儼而翼

아 / 嗚呼

권도가 되며 / 可以權

실행이 되며 / 可以動

모범이 될 수 있도다 / 可以式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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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장달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1.10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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