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기 전투
드디어 독일의 진격을 막아내다
혹한기 전투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
혹한기 전투 때 화기 작동여부
냉/열 시험 통관된 화기만 쓰도록 해야 !!!
극한지에서는 가스연료 전기차 가 최고로
기동성이 뛰어 나고 수소차도 기동력이 좋음
논란을 부른 히틀러의 대응
완벽한 기습이었습니다. 비록 전선이 멈춰있었지만 중부집단군의 지휘관들은 소련이 반격으로 나올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충격이 컸습니다.
지금까지 공세만 하던 입장이라 방어 준비가 부족한 독일군의 진지를 넘어 엄청난 소련군이 쇄도해 들어왔습니다.
당시 소련군은 전차와 항공기 수에서 열세였지만 혹한 속에서 문제없이 작동되었기에 가동 능력이 앞섰습니다.
더불어 병사들도 두터운 방한복과 설상복을 껴입고 있었습니다.

[ 소련의 장비들은 혹한의 날씨에도 무리 없이 작동했습니다 ]
반면 독일군의 소총과 대포는 얼어붙어 작동이 되지 않았고
전차도 불을 피워 엔진을 녹이고 시동을 거는데 30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동계 피복을 지급받지 못해 그대로 혹한에 그대로 노출된 병사들도
곤혹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총탄과 식량 그리고 기름을 운반하는 열차는 눈보라에 막혀 100여 킬로미터 후방에 있었고 수송기도 날아오를 수 없었습니다.
독일은 전투를 치르지 않더라도 서서히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습니다.

[ 독일군 무기는 혹한 속에서 작동이 멈추었습니다 ]
보크는 보급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보급품이 있는 후방까지 후퇴해서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의 동시에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도 유리한 위치까지 후퇴하겠다고 OKH에 보고했습니다. 모스크바 점령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던 히틀러는 순식간 바뀐 일선으로부터의 보고에 경악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진격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독일이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 독일군은 제대로 된 방한 장비가 부족해 비전투 손실이 엄청났습니다 ]
12월 8일, 히틀러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는 총통 명령 제39호를 하달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현지를 사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군부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후퇴가 패주로 연결되지 않을까 우려했습니다. 특히 서둘러 후퇴를 하면 필연적으로 많은 중장비를 유기해야 하는데, 이는 독일에게 상당히 치명적이라 보았습니다. 병사의 목숨보다 전쟁 장비를 귀중하게 여겼을 만큼 히틀러도 스탈린 못지않게 잔인했습니다.

[ 히틀러는 현지 사수를 엄명했습니다 ]
소련의 맹공이 한창 이어지던 12월 중순을 넘어서자 기온이 영하 30도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동상에 걸린 13만여 명의 독일군이 전선에서 이탈했습니다. 결국 도망가거나 아니면 항복하는 것 외에 지치고 추위에 얼어붙어 있던 독일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Walther von Brauchitsch)는 일선의 심각한 상황을 총통에게 보고하고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후퇴를 건의했습니다.
장진호 전투 때와 같은 혹한기 전투

[ 혹한에 노출된 최전선의 독일 병사들이 버틸 수 있는 여력은 없었습니다 ]
하지만 히틀러는 "100킬로미터를 후퇴하면 그곳은 따듯하단 말인가?"라며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히틀러는 작전상 불가피한 후퇴를 패배와 동일 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12월 15일, 그나마 히틀러와 말이 통했던 OKW(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부장 요들(Alfred Jodl)이 제한적인 철수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했지만 단지 북부집단군이 볼호프(Volkhov) 강까지 물러나는 것을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 히틀러는 전선의 이런 현실을 인정하여 들지 않았습니다 ]
그 외 중부집단군을 비롯한 여타 부대들은 여전히 현지를 사수해야 했습니다. 12월 15일, 소련군이 클린과 칼리닌 일대의 독일군을 제거하며 100~200킬로미터 밖으로 밀어내었고 모스크바는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결국 가만히 앉아 몰살을 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구데리안을 비롯한 일부 지휘관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고 소신껏 부대를 후퇴시켰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 물리적으로 현지 사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 12월 5일 소련군 공세 직전의 전선 상황
독일군이 모스크바에 가장 많이 다가간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
독일 제2기갑군이 툴라 외곽에 형성된 포위망을 풀고 오렐 방향으로 후퇴하자 소련 서부전선군이 칼루가에서 므첸스크(Mtsensk) 사이의 간격으로 신속히 파고들어갔습니다.
동시에 모스크바 북부를 담당하던 칼리니전선군이 독일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의 경계를 가르고 스몰렌스크 방향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로 인해 르체프(Rzhev) 일대에 위치한 30여 만의 독일 제9군과 제4기갑군이 포위망에 갇힐 위기에 빠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