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우리들의 이야기

K1,K2 소총 탄창을 개량해야..- 경기관총 - 분대지원화기의 최종승자는

작성자정신회|작성시간19.01.18|조회수1,193 목록 댓글 0





K1,  K2 소총 탄창을 개량해야..





세계 최강   한국 육군은 기본 소총에 유탄발사기


박격포  무반동총  무인기 를  적정하게 조합 작전운영


하므로 수총 탄창을  기동성 떨어지게


너무 키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됨 





기본 탄창에  필요에 따라서  대 중 소 


3가지 구분 하여  만들 필요가 있다












재작년엔가.. 북한군사행사에서 등장한 북한 특수부대들이 소총에 Helical 탄창을 장착하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고장이 잘나니 쓸데 없는 거라고 폄하만 할뿐 대응에 대해선 별로 말들이 없었죠..


남북한 분쟁이 일어나면 무슨 이지스함이나 F35가 떠서 어떻게 될 확률보다 북한의 특수부대나 소부대와 우리나라의 특수부대나 일반부대, 예비군이 충돌할 가능성이 높고, 이럴때,, 북한군들은 바로 100발 짜리 탄창을 달고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총알이 왔다 갔다 하는데, 언제 고장나나 기다리고 빨리 고장나기만 하늘에 빌어야 하나요?


작동이 된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고장이야 나겠지만, 그게 소부대 전투에 직접적 영향을 줄지 말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알수 있는 건, 북한군이 백발짜리 탄창으로 갈려대면,, 거기 맞붙은 우리군인은 20-30발짜리 탄창으로 대응하기가 굉장히 곤란해 진다는 겁니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해 봐야 하는 거지, 뭐 그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어? 라고 느긋하게 생각하다간 6.25꼴 나는 겁니다..



6.25때를 생각하면 사람들은 T-34 전차만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북한군의 따발총도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백발짜리 드럼탄창을 쓰는 소련산 PPSH-41 기관총은 사거리나 위력문제가 있었지만, 실전에선 상당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어찌되었건, 기존에 우리군이 사용하고 있는 20발, 30발 탄창보다는 용량이 큰 탄창을 공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제조하던지 아니면 수입을 하던지.. 


 



기존에 제품화 되어 있는

Magpul PMAG D-60 AR/M4





이거라도 수입하던지, 업그레이드해서 생산해서 소요를 제기하는 부대가 있으면 공급해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특수부대뿐 아니라 일반부대에서도 실전에선 필요성이 많을 수 있습니다..


또한, 탄창에 탄입을 할때 필요한 도구도 공급을 해줬으면..

탄창을 찾아보다 발견한 건데..



실전이나 전투시에 진짜 필요한 기구들을 찾고, 연구하고, 개발해서 일반부대에 쫙쫙 뿌려주면,

엄청난 예산을 사용하지 않아도 진짜 전투를 하게 될때 효율을 높이고 수많은 생명을 살리게 됩니다..


고장은 제작능력의 차이이기 때문에 내구성 있는 좋은 플라스틱과 금속을 사용하여 설계를 잘해서 정밀하게 가공하면 고장은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어찌 되었건, 북한군 탄창을 능가하는 탄창을 우리나라도 사용하는 방향으로 모두 고민 좀 했으면 싶습니다..




















--------------------------------------------------------------------







루이스 경기관총



현대적 경기관총 운용의 아버지

     


루이스 경기관총 <출처: Royal Armouries>

경기관총이라는 장르는 사실 상당히 일찍부터 나왔지만, 1차대전 이전까지의 경기관총들은 실용적이기 보다는 시행착오적인 측면이 강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성공적인, 어쩌면 경기관총의 기술적인 측면뿐 아니라 운용적인 측면에서도 바로미터를 제시했다고 할만한 총이 바로 루이스 경기관총이다.

개발의 역사

루이스 경기관총은 미 육군 대령 아이잭 뉴튼 루이스(Isaac Newton Lewis: 1858~1931)에 의해 1911년에 탄생했다. 사실 기술적인 작업은 루이스보다는 새뮤얼 맥린(Samuel N. Mclean)이 주로 담당했지만, 루이스는 자신이 설계한 공랭식 총열 등 일부를 적용했다는 이유, 그리고 자신이 전면에 부각되어야 미 육군에의 채택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유로 투자자와 맥린을 설득해 결국 새로운 기관총의 이름까지 자신의 이름을 붙이게 된다. (사실 맥린의 기본 설계는 148연발의 탄창을 가진, 수랭식의 매우 거추장스러운 기관총이었다- 그것을 보다 실용적인 경기관총으로 바꾼 것에 루이스의 공적이 크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루이스의 기초가 된 맥린 기관총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정작 이 새로운 총은 미 육군에 채택되는 데는 실패했다. 미 육군의 당시 병기국 총책임자이던 윌리엄 크로지어(Crozier)와 루이스 사이에 정치적-개인적 마찰이 심각했기 때문이지만 다른 기술적 문제들도 있었기 때문이다(1913년 당시 미 육군이 실시한 테스트에서는 실제로 M1909보다 고장과 파손이 잦았다). 게다가 1911년이면 신형 기관총인 M1909가 선정된 지 단 2년에 불과한 시점. 크로지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던 M1909와 경쟁할 총이 겨우 몇 년 만에 나온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트러블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루이스 기관총의 개발자인 아이잭 뉴튼 루이스 <출처: Public Domain>
결국 1913년에 루이스는 육군에서도 퇴역한 뒤 미국을 떠나 벨기에로 이주한다. 벨기에를 거점으로 유럽 시장에서는 미국보다는 나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루이스 자동화기” 사를 총기 및 기계 산업의 거점 중 하나이던 리에주(Liège)에 세우고 유럽 시장에 대한 본격적인 판촉에 들어갔다.
루이스 경기관총 <출처: ima-usa.com>
무슨 사업이든 사업 초기에는 당장의 대량생산보다는 시험적인 소량 생산이나 다른 협력업체의 ‘간보기’ 같은 소규모 활동이 전개되는 법. 루이스 기관총도 벨기에군에서 적은 양의 구매가 이뤄지고 영국의 BSA(Birmingham Small Arms company) 사와도 협력 관계를 타진하는 등 ‘기대는 되지만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인 활동을 시작했다.
전차에 장착된 루이스 기관총 <출처: Royal Armouries>
하지만 얼마 뒤인 1914년, ‘미지수’가 뜻하지 않은 ‘대박’으로 변해버렸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것이다. 곧 벨기에로 독일군이 몰려오자 소수의 루이스 기관총은 독일군을 상대로 불을 뿜었고, 이때 독일군은 이 총의 위력에 놀라 “벨기에의 방울뱀”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리고 마침 심각한 기관총 부족이 확실히 되던 영국에서는 BSA가 이 총의 생산권을 사들여 영국 내 생산을 시작했다.
루이스 기관총은 영국군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출처: Public Domain>

이 결정으로 루이스는 졸지에 떼돈을 벌었다. 영국군이 엄청난 양의 루이스를 구입해 배치하면서 막대한 양의 특허료를 루이스의 지갑에 부어 넣었기 때문이다. 당장 야전에서 육군 보병들에 의해 대량으로 운용되었는데, 이는 경기관총이 전술적인 장점 외에도 무겁고 비싼 데다 생산성이 높지 않은 빅커스 중(重)기관총의 생산량이 수요에 못 미치다 보니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다급하게 주문이 몰린 탓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1915년에는 1주일에 500정을 생산하던 것이 1916년 끝 무렵에는 1,000정을 생산할 정도로 생산 속도가 높아졌다.


특징


루이스 기관총은 가스 피스톤과 회전식 노리쇠를 조합한 가스압 작동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구조는 사실 프랑스의 Mle1909 경기관총(오치키스 경기관총)과 꽤 흡사한 것이지만, 노리쇠의 형태가 비교적 단순해지는 등 나름대로의 변화를 겪었다.

Lewis Gun 1916
사실 루이스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독특한 탄창, 두 번째가 총열을 둘러싼 냉각 시스템, 그리고  태엽 형태로 된 복좌용수철이다.
루이스 기관총용 47연발 탄창. <출처: Public Domain>
루이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총 위에 얹힌 쟁반 형태의 드럼 탄창이다. 기본형은 47연발이지만 두께가 두 배로 늘어난 97연발 탄창도 존재한다. 보통 우리가 아는 드럼 탄창은 탄창 안에 스프링이나 태엽이 들어있어 그 힘으로 탄이 송탄되는 것이지만, 루이스의 탄창은 다르다. 내부에 아무런 태엽이나 스프링이 없다. 탄창은 탄약띠가 급탄되듯 노리쇠의 움직임과 연동되는 기계적 작동으로 탄 한발 간격씩 회전하며, 탄약은 탄창 가운데에 있는 나선형 홈을 따라 필요한 위치로 이동한다. 이 때문에 실사격 동영상을 보면 탄창이 쏠 때마다 계속 회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프링이나 태엽이 없어 탄창에 탄을 채운 상태로 오래 방치해도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탄창의 구조가 비교적 복잡하고 비싼 축에 든다.
루이스 기관총용 97연발 탄창. 탄창 내부에는 스프링 등 탄력을 유지하는 부품이 들어있지 않으며 노리쇠의 왕복에 연동되어 회전하는 구조이다. <출처: Public Domain>
또 다른 특징은 총열을 둘러싼 냉각 장치다. 루이스는 원래 수랭식이던 맥린의 설계를 공랭식으로 개량해야 한다고 느끼면서 이 냉각 장치를 고안했는데, 총열 주변에는 열을 바깥으로 방출하는 알루미늄제 냉각 핀을 배치하고 그 바깥쪽을 금속제 원통형 커버로 감쌌다. 이 냉각 핀과 커버 디자인은 총구로부터 공기가 흘러 들어오면 원활하게 순환되도록 되어있었는데, 총구로부터의 공기 강제 공급은 발사 시에 총구로부터 분출되는 고압가스의 발생으로 생기는 압력 차이를 이용하게끔 되어있었다.
총열 및 관련 부속들. 맨 위가 총열 위에 덧씌워지는 알루미늄 방열판, 맨 아래가 총열뭉치 밖에 씌워지는 덮개이다. 이론적으로는 총구에서 분출되는 가스의 압력을 사용, 외부 공기가 방열판 쪽으로 흘러들어 순환하면서 높은 냉각 효과를 내지만 실제 효과는 그리 높지 않았다. <출처: Public Domain>
나름 독특한 아이디어였지만, 수랭식만큼의 효과는 역시 없었으며 항공기용으로 탑재된 총에는 제거된 채 운용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2차대전 중에는 지상에서 운용되는 총기 중에도 상당수가 이 시스템의 효율에 의문을 품은 끝에 제거된 경우가 많다. 실제로 1차 세계대전 중의 평가에서도 루이스는 공랭식이라고는 하지만 700~800발 정도를 거의 쉬지 않고 쏠 경우(물론 탄창 교환 정도는 있겠지만) 과열 상태에 빠져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고 1,000발 정도면 완전히 멈춰버려 30분은 식혀야 한다고 여겨졌다.
루이스 기관총의 단면도. 방아쇠 앞에 있는, 아래로 돌출된 둥근 부분이 태엽식 복좌 용수철이다. <출처: Public Domain>
또 다른 특징은 태엽 모양으로 만들어진 복좌용수철이다. 원래 맥린의 설계는 복좌용수철이 총열을 감싸는 큼직한 형태였으나 이를 루이스가 부피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시계태엽 모양으로 된 태엽형 복좌용수철을 리시버 아래에 설치했다. 사실 이것은 이것대로 용수철의 수명이나 제조 단가 등에 썩 좋은 영향은 못 미쳤지만, 대신 용수철 모듈을 따로 떼어 교체하기는 쉬운 점 등 나름 장점도 있었다. 반면 현대와 달리 부사수가 용수철의 장력을 주기적으로 체크해야 하는 등, 시계태엽처럼 생긴 만큼이나 섬세한 관리가 요구되었다.
The Lewis Gun


운용 개념 


1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경기관총의 운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교리나 노하우는 제대로 축적되지 않았다. 그러나 1차 대전, 특히 영국군에 의한 루이스 기관총 운용은 이런 교리나 노하우의 축적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루이스 기관총이야말로 최초의 “현대적인” 경기관총 중 하나라고 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루이스 기관총으로 사격훈련 중인 호주사단의 모습 <출처: Royal Armouries>
원래 영국군은 1차 세계대전을 중(重)기관총인 맥심, 그리고 맥심을 개량한 비커스로 시작했다. 1915년에는 대대 당 4정의 비커스 중기관총을 운용했지만, 1915년 10월부터 이 총들을 모두 여단 예하의 기관총 중대로 집결시키고 그 자리를 루이스로 메꿨다. 즉 초기의 루이스는 소대나 중대급도 아닌 대대급 기관총이었던 셈이다.
루이스 기관총은 1차대전이 가속되면서 소대급에 2정씩 배속되면서 급속히 보급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이 숫자는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1916년 중반에 이르면 대대 당 루이스 기관총의 숫자는 16정으로 늘면서 얼추 1개 소대 당 하나 꼴로 지급되기에 이르렀고, 1918년에 이르면 대대 당 루이스의 숫자는 36정으로 늘면서 소대 당 2정 씩 배속되고 대대본부에 4정이 대공 및 추가 화력지원 용도로 배속되는 시스템이 된다. 4개 분대로 구성된 당시의 영국군 소대에서는 2개 분대가 기관총 분대로, 나머지 2개 분대가 소총 분대로 구성되었으니 오늘날의 분대지원화기와 비교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소대 단위까지 기관총 화력이 확실히 보장된 것은 당시로서는 가장 선진적인 운용 개념 중 하나였다.
1912년 루이스 기관총 시제품이 미 육군의 항공기에 실려 공중에서 지상으로 사격 시험을 실시했다. 이것이 세계 최초로 공중 발사된 기관총이다. <출처: Public Domain>
1915년까지만 해도 영국군은 루이스와 비커스라는 두 가지 기관총의 운용 상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전쟁 초반에만 해도 기관총을 동등한 정규군과의 전면전에서 어떻게 쓰는 것이 올바른지에 대해 제대로 인식을 갖춘 지휘관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이는 당시 모든 나라들이 그랬다). 하지만 1916년에는 크고 무겁지만 사거리가 길고 지속사격 능력이 엄청난 수랭식의 비커스는 비교적 안전한 장소에서 집중 운용하고 최전선에서는 기동성이 높은 루이스를 사용하는 역할 분담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루이스의 운용도 이동하는 보병의 진격 엄호나 새로 점령한 진지의 초기 방어, 대공방어(무거운 비커스를 하늘로 들어 올려 조준하는 것보다는 루이스를 하늘을 향해 쏘는 편이 훨씬 신속하고 부담도 적었을 것이다) 등 현대적인 경기관총의 운용에 더욱 근접한 것으로 진화해갔다.
1차대전 중 사용된 루이스 기관총의 항공기용 선회 마운트 <출처: Public Domain>
루이스 기관총의 또 다른 중요한 용도가 앞서 언급한 대로 항공기용 기관총이었다. 사실 1912년에 루이스 기관총의 시제품이 미 육군 소속 항공기에 실려 지상으로 사격하는 시험이 벌어진 바 있었다. 이것이 세계 최초로 기관총이 항공 사격을 실시한 사례인데, 당시 미 육군에서는 이를 일종의 치기 어린 장난 취급을 하며 폄하했지만 불과 수년 뒤 하늘은 기관총을 단 비행기들로 뒤덮이게 된다.
1차대전 중의 영국군 항공기. 2정의 루이스 기관총이 달려있다. <출처: Public Domain>
루이스는 항공기에 기관총을 달겠다고 작정하자 가장 먼저 후보가 된 무기였다. 기존의 다른 기관총들에 비해 가볍고 부피가 작은 데다 드럼 탄창은 어느 각도에서도 안정적인 급탄이 가능하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사실 개전 초기에 영국이 구입한 루이스의 대부분은 항공기 장착용이었다. 이 기관총들은 각종 항공기들의 중요한 무장으로 1차 세계대전 내내 애용되었는데, 비록 전투기의 주 무장은 공랭식으로 개조된 비커스 기관총이 점차 대세로 굳어져갔지만 여전히 많은 루이스가 항공기의 방어용 기관총으로 대전 내내는 물론 1930년대까지 애용되었다.
미 해병대원의 루이스 실사격. 미 육군은 결국 루이스의 대량 사용을 못 했지만 해군과 해병대는 적잖은 양을 사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다만 원산지인 미국에서는 루이스가 끝끝내 육군의 주력 화기로 사용되지 못했다. 미국 내에서는 새비지 사에 의해 상당수의 루이스가 생산되었으나 그 대부분은 영국에 수출되었고 나머지는 해군과 해병대가 운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17년에 미군이 참전하자 루이스의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하는 미 육군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고, 결국 그 대안으로 M1918(BAR)을 채택했지만 이것 역시 충분한 양이 조달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실제로 1차 대전중 사용된 BAR은 극소수에 불과). 그래서 미 육군은 프랑스로부터 대량의 쇼샤 경기관총을 조달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유럽에 파병된 미 해병대 역시 현지 보급체계 통일을 명목으로 원래 쓰던 루이스를 미국에 남겨두고 쇼샤 기관총을 지급받아 써야 했다.
다양한 기관총들을 시연 중인 미 육군의 모습. 1차대전에서 정작 미군은 보급을 이유로 루이스 기관총을 대신하여 쇼사기관총을 사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좀 뜻밖이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루이스를 애용한 나라 중 하나가 독일이다. 독일군은 최소 1만 정의 루이스를 노획해 전투에 투입했는데, 루이스가 전쟁 중 영국에서 거의 15만 정이 생산되어 비커스 생산량의 두 배를 자랑하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만큼 독일 측이 루이스의 유용함을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일군 자체적으로는 전쟁 중 루이스 같은 ‘진정한’ 경기관총을 거의 생산해내지 못했고, 그 때문에 독일군은 경기관총이 전술적으로 필요한 곳에 노획한 루이스를 최대한 애용했을 뿐 아니라 상당수를 독일군 제식인 7.92mm 마우저탄에 맞게 개조해 사용했다.


2차 대전까지 사용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한동안 루이스는 영국군은 물론 영국군에서 방출된 총기를 구입한 다른 나라 군대들에서도 애용되는 기관총이었다. 스페인 내전 등 1~2차대전 사이에 벌어진 여러 분쟁이나 전쟁들에서도 활약했으며, 영국군이 루이스를 대체할 기관총을 선정한 것은 1930년대 후반에 브렌(BREN)을 고른 다음의 이야기였다.

2차대전 중의 영국 홈 가드(향토방위대). BAR과 루이스 등으로 무장했다. 1941년 초반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홈 가드 대원들은 소총이라도 받으면 다행이었으며 이런 홍보용 사진을 찍고 나면 지급된 자동화기는 상부에 반납해야 했다.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루이스는 다시금 전선에 투입되어야 했다. 주력 경기관총은 브렌으로 바뀌었지만, 1940년 초반까지도 이런저런 이유로 상당수의 루이스가 현역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게다가 1940년의 됭케르크 철수로 인해 그나마 있던 브렌 대부분을 유럽 대륙에 버리고 오게 되자 예비로 가지고 있던 것은 물론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루이스까지 대량으로 넘겨받아 본토 방어용으로 돌려야 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산되는 브렌들은 신속하게 군 현역부대들로 넘길 수 있었다.
2차대전 중 작전 중인 LRDG의 트럭. 방어용으로 루이스 기관총이 달려있다. <출처: Public Domain>
루이스는 영국군에서 본토 방어용으로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 해군은 다량의 루이스를 각종 함정의 최종 대공방어 및 근접방어용으로 사용했으며 상당수의 영국 상선도 루이스를 방어용으로 사용했다. 또 북아프리카에서 차량을 이용한 장거리 정찰 및 특수전을 수행한 LRDG(Lond Range Desert Group)도 자신들의 차량을 방어할 용도로 루이스 기관총을 사용했다. 재미있는 것은 독일군도 1940년의 혼란 속에 적잖은 수의 루이스를 노획해 자국군용으로 편입, 2선 급 임무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2차대전 중 순찰 중인 영국군의 어뢰정. 4정의 루이스가 거치되어 있다. <출처: Public Domain>
루이스를 사용한 또 다른 흥미로운 국가가 일본이다. 일본은 1932년에 해군용으로 루이스 경기관총을 ‘루’식 기관총이라는 이름으로 채택한 뒤 이를 항공기 방어용이나 해군 육전대의 전투용 등으로 운용했다. 일본은 자국 내의 요코스카 및 도요가와 해군 공창에서 이를 카피 생산했는데, 1944년까지도 생산이 이어졌다. 일본 해군은 사용 탄약을 자국군용에 맞춰 개조하지도 않고 아예 영국군용의 .303탄약을 그대로 쓰게 한 뒤 이 탄약을 자국 내에서 생산하게 해서 재설계 노력을 사실상 필요 없게 했는데, .303탄의 구경은 7.7mm이지만 탄피 형상 등이 전혀 달라 일본 육군의 7.7mm탄약과는 호환성이 전혀 없다.
일본도 루이스 기관총을 채용하여 운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비록 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노후화되면서 빠른 도태의 길을 걷기는 했지만, 전성기에는 거의 50개 가까운 나라들에서 사용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영국 기관총으로는 가장 많이 생산되기도 했다. 아마도 1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된 경기관총으로는 가장 많은 양이, 가장 성공적으로 운용된 사례일 듯하며, 2차 세계대전 뒤에도 6.25전쟁이나 말레이시아 분쟁, 1차 중동전, 알제리독립전쟁, 심지어 1970년대 북아일랜드 소요 사태까지 사용된 사례가 있다.
노획한 일본군의 루식 기관총의 모습 <출처: Public Domain>

또 이 총은 후대의 기관총 설계에도 나름대로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FG42가 이 총을 참고해 작동 구조를 만들었고, 그 FG42를 미국이 참고해 M60기관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파생형


영국군 버전

Mk.I: 가장 기본적인 버전. 1915년 채택.

루이스 Mk.I 기관총 <출처: Royal Armouries>
Mk.II: 항공기용으로 냉각용 방열핀을 제거한 버전. 개머리판도 삽자루 비슷한 손잡이로 대체되었다.
항공기용 루이스. 냉각핀을 없애고 개머리판을 손잡이로 대체했다. <출처: Public Domain>
Mk.II*: Mk.II의 발사속도를 높인 모델.
루이스 Mk.II 기관총 <출처: Public Domain>

Mk.III: 발사 속도를 더욱 높이고 총열 주변 형상을 개량.

(미군 기준)
M1917: 루이스 Mk.I을 새비지 사에서 미 육군용으로 .30-06탄에 맞춰 개조한 버전. 미 해군 및 해병대에서 주로 사용.

M1918: M1917을 영국의 Mk.II 사양에 맞춰 개조.




제원


- 무게 13kg
- 길이 1.28m
- 총열 길이 670mm
- 사용탄 .303/.30-06/7.92mm 마우저/7.62x54mm R/6.5x53mm R







-----------------------------------------------------------------------------------------------------------------








분대지원화기의 최종승자는



 




MG42 VS BAR,


분대지원화기의 최종승자는 누구인가?








 MG42 기관총과 BAR 자동소총은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소총분대와 미군 소총분대의 화력을

상징하는 화기였습니다. 이 2개의 무기를 직접적으로 기능을 비교한다고 하면, 비교적 손쉽게 승부가 날 것입니다. 




 MG42는 중대급에서 운용할 때는 삼각대를 활용해 중기관총처럼 사용할 수 있고, 분당 1200발의 사격속도를 자랑하는데다가 11.6kg에 불과한 무게에, 총열교환도 손쉬운데다가, 양각대로 신속하게 배치하고 이동하면서, 탄띠급탄 이외에도 드럼탄창으로 50발까지 사격가능한 그야말로 다목적 기관총이었습니다.



---M1918 Browning 자동소총---
 
 이에 반해 Browning Automatic Rifle, M1918 브라우닝 자동소총은 가볍다고는 하지만 8.8Kg의 무게에, 탄띠급탄은 불가능하고, 20발식 탄창급탄, 최대 분당 650발로, 말로는 공용화기라고는 하지만, 기관총이라고 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그야말로 자동소총이라는 명칭이 적합한 분대지원화기였습니다. 

 편제상 독일군 소총분대(10명, 후기 9명)나 미육군 소총분대(12명) 모두 단 1정의 분대지원화기로서 각각 MG42와 BAR을 보유했고, 분대의 주요 화력을 해당 화기에 의존했습니다. 당연히, 대전기간동안 편제상 미육군의 소총분대는 독일군 소총분대에 비해서 화력 면에서 열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미육군이 분대에서 운용가능한 적절한 경기관총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미육군이 보유한 30구경 M1919 브라우닝 기관총은 무게만 14KG에 양각대 사용에 적합하지 않은데다가, 삼각대까지 포함하면 20KG이 넘어가게 되죠.
 미육군 역시 이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고, M1919 기관총은 미군 기준으로 중(Heavy)기관총으로서 중대의 화기소대의 기관총반에서, M1917 수냉식 기관총은 대대 화기중대의 기관총반에서나 운용했습니다. 미육군의 기관총이 분대에 배치된다면 분대의 기동력을 크게 저해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외적으로 공수부대의 경우는 중대에 화기소대를 두지 않고 분대에 M1919기관총을 배치했습니다. 

 그렇다면 명확하게 승자가 결정난 것일까요? 소총분대의 화력을 제공하는 가장 적합한 지원화기는 GPMG(다목적기관총)이며, 대전 후에도 독일과 같은 GPMG의 화력에 의존하는 분대 교리가 모든 이들의 표상으로서 남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미육군은 한국전쟁 시기에도 그대로 BAR을 분대지원화기로 사용했습니다. BAR을 M14나 M16과 같은 자동소총과 M60 다목적기관총의 등장 이후에는 미육군에서 퇴역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육군이 M60 기관총을 분대지원화기로 채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미육군은 M14나 M16자동소총에 양각대를 채용해 소총수와 구분되는 자동소총수로 운용했고, M60 기관총은 소대의 화기분대에 배치되었습니다. 


 현대에도, 미육군의 소총분대에 자동소총수의 개념은 그대로 이어져, 5.56mm 탄을 사용하는 SAW(분대지원화기)가 그 위치를 차지했으며, 7.62mm 탄을 사용하는 GPMG형 기관총은 분대가 아닌 화기분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건 단지 미군의 잘못된 판단과 고집, 또는 MG42와 같이 적합한 GPMG를 개발하지 못한 무능에 의한 것일까요? 

 끝까지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는 GPMG의 분대지원화기 채용을 꺼리고 적절한 SAW인 FN Minimi가 M249란 이름으로 1984년에 미군에 도입될 때까지 버티는 동안, 독일연방군은 MG42의 후신인 MG3를 분대지원화기로 두는 분대를 유지했습니다. 실전을 거의 겪지 않은 독일연방군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비롯해 무수한 실전을 거친 미국보다도 실제로는 더 우수했던 것일까요?

 실제로는 단순히 화력이라는 하나의 요소에만 주목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근접전투를 수행하는 가장 핵심단위인 분대가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벌이며, 어떤 조직을 구성할지에 대한 문제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육군 분대편제와 Automatic Rifleman의 장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던 핵심개념인 사격과 기동(Fire and Maneuver)을 살펴봐야만 합니다.
 
 

Fire and Movement / Fire and Maneuver

 현대 미군은 보병의 임무란, 적을 사로잡거나 파괴하기 위해 "사격과 기동"을 통해 적과 교전하거나, 적의 강습을 화력과 근접전투, 반격을 통해 격퇴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격과 기동(Fire and Maneuver)은 기본적으로 사격과 이동(Fire and movement)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미군은 사격과 이동이란 가능한 모든 자원을 활용해 적을 제압하고, 무력화하거나 파괴하면서 전투부대를 관련된 적을 향해 전술적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며, 분대단위에서는 한 팀이 제압사격을 적에게 가하는 동안, 또다른 팀이 적을 향해서, 또는 우회하여 이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기동(Maneuver)와 이동(Movement)의 차이는, 전자에는 지휘관의 통제(Controll)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2명의 전우조가 사격과 이동을 할 수는 있지만, 기동이란 이렇게 이동하는 과정을 지휘관이 조율하고 통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격과 기동은 단순히 이해한다면 적에게 사격을 가해 압박과 피해를 가하는 동안 다른 인원이 적을 공격하기 유리한 위치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1918 August 미육군 소총소대의 훈련, 좌측의 반소대는 BAR팀으로 지원사격을 가하고 고 유탄수팀은 그 뒤에 위치해 있다. 우측에서 다른 반소대가 총검을 장착하고 전진하고 있다.---

 미육군은 1차대전 참전기간 과정에서 과거의 선형대형과 유격전 형태의 교전방식에서 BAR자동소총과 총류탄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사격과 기동 개념을 받아들이고 나름 발전시키기 시작합니다. 초기에는 소대단위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투경험을 통해 소대를 둘로 나눈 반소대(Half-Platoon)가 조직되어 각각의 반소대를 BAR자동소총과 유탄수, 소총수들로 구성해 각각의 반소대가 사격을 통한 지원이나 기동이 동시에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소대보다 작은 단위에서 사격과 기동을 도입하는 시도였고, 1차대전 이후 미육군은 소총소대를 구성하는 BAR자동소총과 유탄수, 소총수로 구성된 8명의 분대를 구성하게 되고 이것이 2차대전 당시의 미육군 분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격과 기동이 미육군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소총분대 역시, MG42를 중심으로 한 기관총팀이 분대장에 의해 통제되어 제압사격을 가하고 부분대장의 지휘하에 소총수들이 기동하여 적에게 공세를 취했습니다. 양자의 차이가 있다면, 독일군 소총분대의 핵심목표는 화력우세에 있었고, 가능한 빨리 적에게 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하고 분대의 잔여병력들이 기관총팀에 탄약을 공급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미군은 구성은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차이가 있었습니다.



---미육군 소총분대---
 2차대전 당시 미육군 소총분대는 과거의 8명의 분대가 병력손실을 입었을때 부대의 응집과 역량을 유지하는데 어렵다고 판단하고 규모를 12명으로 늘렸습니다. 12명의 분대는 분대장, 첨병2명, BAR사수와 부사수와 탄약수, 5명의 소총수 , 부분대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BAR사수는 화려지원만 한게 아니라 적진에 뛰어들어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BAR의 경우, 부사수와 탄약수가 편제상 존재하며, 교범상에서도 공용화기, 즉 부사수와 탄약수가 필요하다고 봤지만, 실제로는 팀이 아닌 개인으로서 운용하는게 가능했고, 부사수와 탄약수가 소총수로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2차세계대전 도중 BAR사수가 단독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엄청난 활약을 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또한 각 소총수들은 독일군 소총수가 볼트액션 소총으로 주로 무장한데 반해 M1반자동소총으로 무장해 소총수에게 일정 이상의 화력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소총분대가 MG42의 우월한 화력에 강하게 의존하며, 사격과 기동중 "사격"에 좀 더 무게가 실려있다면, 미군 소총분대는 좀 더 유연하게 사격과 기동을 병행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잠재력을 발휘하게 할 교리와 조직의 구성, 적절한 장비의 문제였습니다.



---Able / Baker / Charlie 개념---

 이론적으로 미육군의 12인 분대는 3개 팀으로 분리됩니다. 2명의 첨병이 ABLE팀을 구성해 선두에 서고, BAR 사수와 부사수, 탄약수와 저격수가 포함된 BAKER팀, 5명의 소총수로 구성된 CHARLIE팀으로 구성됩니다. 분대장은 ABLE팀과 함께 하면서 적의 위치를 파악하면, 신속하게 강습계획을 수립하며, 이에 따라서 BAKER팀에게 화력지원을 지시하고, CHARLIE팀에게 이동해 적에 대한 강습을 이끌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말이죠.

 현실적으로는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선두에 분대장이 첨병과 함께 이동하다가 적과 접촉하는 경우 사격에 의해 제압되어 CHARLIE팀에게 이동하는게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분대장이 12명의 소대 전체를 통제하는건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공격 과정에서 CHARLI팀이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 CHARLIE팀은 붕괴 직전이 되고, 강습의 성공가능성은 매우 낮아지기 마련이었습니다.

 가뜩이나 화력도 열세한 미육군 분대의 이런 문제는 극복불가능한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2차대전 당시, 바로 미국에서 어떻게 하면 적절한 해결책이 있는지 알고 한 것은 아니지만, BAR과 분대의 운용에 적합한 대안을 제시한 곳이 있었습니다. 



미해병대 분대의 사격조(Fire Team)

 2차대전 당시 미해병대는 미육군과는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해병대는 미육군과 달리 니카라과나 상하이에서의 "소규모 교전"에 개입되는 경우가 많았고, 화력의 기반으로서 자동소총의 중요성을 더 강하게 인지했습니다. 게다가 2차대전기간동안 해병대는 미육군과 달리 정글이나 섬에서 주로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해병의 보병소대는 7명의 소대본부와 1개 BAR분대(8명, BAR 2정운용)과 3개 소총분대(9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소총분대는 분대장과 BAR사수, 6명의 소총수와 1명의 유탄수로 구성되었습니다. 미육군 소대가 3정의 BAR을 운용하는데 비해 해병대는 소대당 5정의 BAR을 운용했습니다. 

 그러나 태평양의 정글과 섬에서의 교전과정에서 이러한 소대와 분대 구조는 최선책이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미해병 장교들은 해병 소총분대에 보다 드라마틱한 혁명을 도입하고자 했습니다. 먼저 BAR분대가 소대에서 제거되었고, 소총분대의 규모가 12명으로 증강되었습니다. 분대는 분대장과 부분대장, 6명의 소총수, 2명의 BAR사수와 2명의 부사수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분대는 동일한 구조를 가진 2개의 6명의 분대장조와 부분대장조로서 1정의 자동소총과 5정의 반자동소총으로 운용될 수 있었습니다.



---미해병대 분대 구조---

 미해병대는 여기서 다시 한발 더 나아가 공식적으로 해병사단의 편제를 개편하면서 해병대의 소총분대를 개편하기에 이릅니다. 1944년 3월 미해병대는 소총분대를 13명 규모로 늘이고, 분대장 밑에 총 3개의 4명단위의 사격조(Fire Team)을 구성하기에 이릅니다. 
 사격조는 조장, 1명의 BAR사수, 2명의 소총수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미해병대 1개 분대는 3정의 BAR을 장비했으며, 이를 통해 정글에서의 소규모 교전에 요구되는 대폭적인 화력의 증가가 가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대는 3개의 사격조로 분리되어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됨으로서 분대장의 정글지대의 험난한 지형에서 12명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미해병대의 분대개편과 사격조의 도입은 단순히 화력의 증가를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1918년 미군이 소총소대의 운용을 반소대로 분리해서 보다 작은 단위의 작전에서 사격과 기동이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분대를 사격조로 다시 쪼개고, 개별 사격조가 BAR을 장비함으로서 좀 더 작은 단위에서 사격과 기동이 가능한 화력을 확보하고, 사격조의 조장이라는 중간지휘자를 통해서 분대 내에서 보다 유연하게 사격과 기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독일이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권의 주요 군사강국들이 분대에 경기관총이나 GPMG를 배치하고 분대가 최소의 고정된 전투단위로서 임무를 수행할 때, 최초로 미해병대는 분대를 다시 사격조로 쪼개고 동일한 화력/조직구조를 가진 사격조가 사격과 기동을 보다 유연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육군 역시도 교전과정에서 중대의 예비 BAR을 분대에 추가 배치하곤 했지만, 미해병대와 같이 사격조 개념이 공식적으로 구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격조 개념은 "정글과 섬"이라는 태평양 전선의 환경에 국한하여 적합한 것이었을까요? 대체 어떤 의미에서 사격조 개념이 필요한 걸까요?



1946년 보병컨퍼런스와 미육군의 결정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1946년 미육군은 전쟁기간동안 획득한 전훈을 각 병과학교서 논의하도록 했습니다. 보병학교가 위치한 포트베닝에서 1946년 보병컨퍼런스가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보병분대의 교리와 조직에 대한 이슈가 논의되었습니다.
 그중 장비가 아닌 조직 및 교리와 관련된 위원회 B를 구성한 장교들은 대전기간동안 분대에서 소대로부터 사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위에서의 전투경험을 갖춘 베테랑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논의한 총 14개 이슈중 하나가 바로 "보병 소총분대의 조직은 만족스러운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였습니다.

 B위원회의 분대와 관련된 제안의 핵심은 분대의 규모를 12명에서 9명으로 감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위원회는 정상적인 상화에서 1명의 분대장은 야전에서 8명 이상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원회는 분대를 미육군의 교범상 정의에 따라 1명의 지휘관에 의해 통제되는 조직으로 정의하고, 이를 고려할 때, 보병분대를 동시에 1개의 임무. 화력을 투사하거나, 또는 기동을 하거나 단 하나만을 수행할 수 있는 형태로 계획했습니다.  두가지 모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분대장은 대체지휘관인 부분대장이 아니라, 별도의 하위지휘관(해병대의 사격조장 같은)이 있어야 했습니다.
 위원회는 보병 소총분대의 규모를 9명으로 감축시키는 동시에 경기관총을 분대에 배치해야 한다고 봤습니다만, 미육군은 9명으로 분대의 규모를 감축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여졌지만, BAR을 경기관총으로 대체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949년의 보병컨퍼런스에서, 위원회가 제시한 비전은 GPMG를 분대에 배치하는 독일군의 방향성에 가까운 부분이 존재했습니다. 유럽전선에서 소대나 중대단위의 전투경험을 가졌던 위원회의 3명의 장교들은 2차대전간 대부분의 분대장들이 분대단위에서 사격과 기동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전술적 역량과 훈련이 결여되어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미육군 분대는 9명으로 감축되었지만, 그렇다고 감축에 필요한 적절한 GPMG의 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정쩡한 상황에서 미육군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전쟁에 끌려가게 됩니다.

 태평양에서 해병대에 도입된 사격조 개념은 이 시점에서는 위원회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미해병대의 조직이 육군의 참조대상이 되는데는 1956년까지 7년에 이르는 시간과 한국전쟁이라는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한국전의 전훈과 사격조

 미육군은 9명의 소총분대로 개편한 상태에서 한국전에 돌입했습니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미육군의 소총분대에는 크게 2가지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하나는 소총분대에 추가로 BAR 1정이 추가된 것이었고, 이로 인해 구조적인 변화, 즉 분대에 사격조의 도입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전 과정에서 소총분대는 경기관총의 부재로 제대로된 화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미육군에는 적절한 경기관총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다수 보고된 것처럼 실전과정에서 분대에 추가적인 BAR이 배치되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BAR을 복잡한 지형에서 기동성 측면에서 기관총에 비해 유리한 부분이 있었고, 분대에 추가 BAR을 제공해 화력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BAR의 추가는 단순히 화력의 증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전에서는 2차 세계대전에 비해 보다 소규모 부대의 교전이 빈번했고,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에 참전했고, 육군의 전사연구자였던 S.L.A. Marshall 준장은 이런 부분에 주목해 3가지 중요한 사항을 관측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분대가 하나의 통합체로 작전하기 보다 독립된 팀으로 작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소총수가 BAR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격하기보다는 근접해서 사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셋째, BAR사수가 전술적인 위치변경을 할 때마다 전투강도가 현저히 약화되었다.
 S.L.A. Marshall 준장은 9명 분대를 2개의 4명 분대로 나누고 각각 BAR 1정을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1953년 소총분대는 1정의 BAR을 추가로 무장하게 됩니다.



---J.C. Fry, Battle Drill, Combat Forces Journal, April 1953의 분대 예시---

 한국전쟁에서 2보병사단의 지휘관이었던 J.C. Fry 소장은 2사단의 소총분대를 2개의 "Battle-drill"팀으로 구성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한 팀은 화력을 투사하고, 한 팀은 기동을 하도록 하는 개념이었습니다. 두팀 모두 상황에 따라서 사격팀이 될수도, 기동팀이 될수도 있었습니다. 1949년의 보병컨퍼런스의 위원회는 분대가 동시에 사격과 기동을 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지만, 미육군은 실전을 거치면서, 사격조 개념을 태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J.C. Fry, Battle Drill, Combat Forces Journal, April 1953의 분대 기동 예시---

전후에 J.C Fry 소장은 Combat Forces Journal에 게재한 글에서 각각 BAR을 장비한 2개의 팀이 하나의 분대를 이루어, 상황에 따라서 한 분대가 사격을, 한 분대가 기동하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Fry소장은 이 사격과 기동 팀의 도입은 적의 사격에 의해 제압되는 상황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Fry소장은 2차대전중에서도 77보병사단의 350보병연대 지휘관으로 복무중에 분대나 소대를 2개의 팀으로 임무형 편성을 했고, 주로 BAR를 장비한 사격팀이 화력을 투사하는 동안 기동팀이 기동하도록 했었습니다. 



---1956년  A Research Study of Infantry Rifle Squad TOE의 분대 제안---

 한국전쟁이 종료되면서, 전쟁중에 시도되었던 사격조 개념은 정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만, 1956년 미육군은 ASIRS(소총분대 편제표에 대한 연구)에 의해 제안된 분대편제를 정식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드디어 사격조 개념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현대에 이를 때까지 1개 분대에 2개의 사격팀과 팀리더를 두고, 분대장이 이를 통합 지휘하는 구조를 유지하게 됩니다. 
 이는 1956년 이래로 미육군이 분대단위에서 사격과 기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보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GPMG형 분대와 SAW형 분대의 비교

 다시 최초의 논의 BAR과 MG42를 통해서 봤을 때, 미육군은 사격조 개념을 받아들인 이후, 어떤 의미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BAR의 자동소총수 개념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M60 기관총의 개발 이후에도, GPMG를 분대 편제 내에 배치하지 않고, M14나 M16에 양각대를 배치하는 형태를 유지했습니다.

 이것은 다목적기관총(GPMG)와 분대지원화기(SAW)가 가지는 근본적인 차이에 기인합니다. 2차대전부터 한국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거치면서 심지어 베트남전에서도 분대에 경기관총을 배치하자는 주장들이 지속적으로 반려되었던 것은 미국이 적절한 GPMG를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개별로 무기의 역량을 비교하는게 아니라, 분대를 지원화는 화기, 그리고 분대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와 전술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우월한 화력이 항상 보다 우월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이동성(Mobility)입니다. 분대는 분대를 구성하는 가장 취약한 구성원에 따라 그 속도와 이동범위가 결정됩니다. MG42 기관총은 당연히 BAR보다 무겁습니다. 하지만 MG42과 BAR의 2.8Kg남짓한 차이나, SAW인 M249의 7.5kg과 GPMG인 M60의 10Kg과의 차이가 그정도 차이를 유발하느냐라고 반문한다면, 좀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Infanteriekarren If-8 _독일 보병소대 카트---

 MG42는 놀라운 발사속도로 인해서 빠르게 탄약을 소모하게 됩니다. 때문에 독일군은 소대마다 3대의 Infanteriekarren If.8을 탄약공급을 위해 보유해야 했습니다. 반면 미군의 경우, 대대 화기중대나 중대 화기소대에 탄약을 공급하기 위해서 M4A3 hand cart와 같은 수레를 운용했지만 소대에 이러한 장비를 별도로 편제하지는 않았습니다.
 상당한 양의 탄약을 도수로 옮겨야만 분대의 GPMG의 화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면, 양자의 무게 차이 이상의 이동의 저하가 발생하게 됩니다.



---부사수와 탄약수가 필수적인 MG42----

 두번째로 생각할 것은 GPMG가 추가적인 인원을 요구하는 공용화기라는 점입니다. 당시 미군은 M1919 기관총과 BAR자동소총 모두 Crew-served Weapon(2인 이상의 인원이 조를 구성하여 조작하는 공용화기)로 구분했습니다.
 하지만 전자에 대해서 미군은 교범상에서 이를 중기관총으로 정의하고, 일시적으로는 소총수와 같은 기동성을 유지할 수 있지만, 운용인원에게 피로를 유발해 뒤로 처지게 만든다고 봤고, BAR의 경우는 소총수와 유사하게 기동성을 갖출 뿐만 아니라, 실전에서는 공용화기로 부사수를 필요로 하기 보다는 단독으로도 운용이 가능했습니다.

 미육군은 1961년 OCRSP(Optimum Composition of the Rifle Squad and Platoon. 소총소대 및 소대의 최적구성)테스트의 진행을 지원했습니다. 여기서 미육군은 M14 소총과 M60기관총, M79유탄발사기의 보병부대로의 투입을 테스트했습니다.

 여기서 OCRSP는 GPMG를 분대에 배치하는 것이 분대의 전투력손실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평가했습니다. 경기관총이 분대에 배치된 상황에서 병력손실이, 특히 기관총 운용인원에게서 발생하면 분대장은 소총수를 기관총에 투입해 화력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병력손실이 증가할수록 빠르게 분대의 소총수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특히 사격조 개념을 적용할수록 문제는 심각해졌습니다. 사격조 개념을 위해서는 사격조마다 기관총을 배치해야 하고, 이 경우에는 분대인원을 늘리지 않는다면 소총수로 투입가능한 인원이 감소하게 됩니다. 반면에 BAR의 경우는 수많은 전훈에서 증명하듯이, 공용화기라고는 하지만 부사수의 보조나 탄약수에 덜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소총수처럼 근접전에서도 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분대에 GPMG를 2대나 배치하는건 지나치게 많은 탄약소모를 야기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그리고 그 이후의 미군이 방어적이라기 보다는 공세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미군이 소부대 전투에서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왔고, 그리고 지금도 견지하고 있는 사격과 기동이라는 관점에서 GPMG는 분대에 배치하기 적절한 대상이 아니라고 볼 만한 단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과적 승자 : BAR?

 분대의 지원화기로서 어떤 화기가 적합한가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기의 제원을 통해 그 화력과 중량, 신뢰성등에 주목하게 됩니다. 하지만 무기는 결국 인간이 다루는데다, 군대는 결국 조직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서 전투력을 발휘합니다. 장비는 그것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지 전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미육군의 소총분대에서의 BAR운용은 일정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만약 MG42와 같은 기관총이 있었다면, 미육군이 분대의 지원화기로서 기관총을 채택할 가능성 역시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BAR의 채용이 적절한 기관총의 부재가 원인이었다고 할지라도, BAR이라는 적절한 화기는 미해병대에서 사격조라는 현대 보병분대 운용에 있어서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현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미군의 주력 지원화기가 BAR이 아니라 경기관총이었다면, 미해병대는 겨우 4명의 사격조를 구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전에 가서야 등장한 미육군의 분대당 2정의 BAR과 사격조 개념이 2차대전 당시에 적용되었다면 MG42를 운용하는 독일군 분대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했을지는 What If지만 흥미로운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BAR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2차 대전 과정에서 중요한 활약을 했으며, 결국 분대지원화기의 주류가 SAW가 되고, 분대의 사격조 시스템이 널리 일반화되는 과정을 통해 분대지원화기의 조상뻘이 되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충분하진 않치만 "결과적 승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