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5-2강>
저에게 상담을 요청하시는 내용 중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 교회 문제입니다. 사도들 서신의 대상이 되는 교회들의 각종 문제들, 왜 지상의 교회들이 이런 모습으로밖에 나타날 수가 없는가 하는 점에 의문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특히 젊은 분들이 본인이 기대했던 교회가 아니다보니 그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역사라는 무대를 통해서 나타나는 지상의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면서도 하나님의 원수 된 모습을 함께 보여주는 교회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아시겠지만 천주교의 역사를 통해서 개신교가 나타난 것이지 개신교가 처음부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프로테스탄트라는 신조어가 등장을 하는 겁니다.
물론 천주교도 개신교도 진리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좋은 교회를 위한 교회의 갱신과 개혁에 방점이 있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을 비롯한 모든 교회사는 예수가 누구시며 성령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교회에게 환기시키는 역사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교리들 역시 진리라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면서 그 역사를 초월하는 내용을 보여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시고부터 이천 년이라는 긴 시간을 통해서 역사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진리는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면서 그 역사를 부정하고 초월하는 내용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에는 반드시 과정으로 역사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처럼 계룡산에 가서 혼자 계시 받고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서 피로사신 교회라는 과정을 다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기도 합니다.
사도신경을 비롯한 모든 신앙고백서와 교리들은 그 자체가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렇지만 진리는 아니에요. 그 당시에 진리라고 여긴 것은 우리 인간 역사로서의 신앙의 한계를 이야기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사도신경이나 다른 교리들을 대신할 수 있는 것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없애는 것도 역사요 그대로 두는 것도 역사인데 둘 다 진리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성경만 진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역사에 속하기 때문에 그 또한 진리가 아닌 겁니다. 한마디로 역사화된 것을 진리로 붙들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역사와 전통을 진리로 가지길 원합니다. 그런 자들로 인해 진리가 가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을 잘 정리하고 있어야지 흔들리지를 않게 됩니다.)
진리는 인간 쪽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도리어 진리를 사유하려는 인간을 부정하고 해석합니다. 우리가 진리 앞에서 죄인 된 자로 폭로된다는 말이에요. 이것이 지금도 살아서 일하고 있는 진리의 능력입니다. 그렇게 진리의 사랑을 받은 자들만 거짓 것들에 속지 않게 됩니다. (살후2:10)
사람들은 묵시의 일을 스스로 담을 수 있다고 착각을 하는데요, 죄송하지만 하늘의 일을 담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에서 오셨던 예수님 외에는 다 불가능합니다. 하늘의 일을 알 수도 없고 담아낼 수도 없습니다. 죄로 오염된 인간의 한계입니다.
(요한복음 3장)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 당시에 가장 경건하고 하나님을 가장 많이 안다고 하는 유대인의 선생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냉정하게 하늘과 땅이라는 선을 그으십니다.
세상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하는 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가신 후에 그 결과물을 담고 오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께서는 반드시 예수님과 그의 하신 일만 증거 하십니다. 성도들은 그분에게서 믿음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분께서 주시기로 정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놋 뱀으로 들리신 분이 하늘로 가셔서 성령을 보내시면 성령께서 계시의 정신을 주신 사람, 곧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과 시간이라는 역사의 무대를 통해서 믿음의 눈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모든 세상과 사건들을 해석하게 되는데 그들을 가리켜서 교회, 해석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 외에는 누구도 예수를 아는 사람이 없고, 그들의 역사에 대한 해석과 선포에 의해서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로 증거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의 사건으로 발생하고 교회는 그 사건으로서의 교회로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세상의 시끄러운 일 더러운 것들, 즉 속진을 피해서 산속 깊이 들어간 것이 중세의 수도원 운동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속 깊이 들어가면 사람이 달라집니까?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면 마음은 편해질지 모르겠네요. 수도원에는 성무일과표라는 것이 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밭에 나가서 일하고 기도는 몇시간 하고 식사는 어떻게 하고 성경은 어떻게 읽고.. 성무일과표에 따라 하루를 살아갑니다. 자기를 그런 일과표에 가두고 불결한 생각조차 잠재우기 위해서 자기 등에 채찍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그곳에서 만든 것이 샴페인입니다. 몰래 술을 담가 먹다가 발효가 되서... 지금도 돔페리뇽 같은 고급 삼페인에 수도원 그림이 있지요. 그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 수도를 한거에요. 그런 수도사들과 스님이 다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자기를 다듬고 자기를 깨끗이 하고 더러운 먼지로부터 피해 하나님 앞에 당당해지려고 하는 것이죠. 이것이 선악과 따먹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자기 구원을 위해 종교생활을 하는 그런 자들은 교회가 아니란 말이에요.
이런 종교인들은 어찌해서든지 십자가를 앞세운 말씀의 사건을 원치 않고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 그들 가운데 계시의 영이 있는 성도가 있다면 그들 공동체 밖으로 쫓아내려고 합니다. 이것이 이천 년간 교회에서 일어난 말씀의 사건들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 큰 성 길 가의 두 증인입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 교회는 자신들이 모인 집단 그 자체에 의미를 가지고 교회라고 불리는 자신을 위해서 예수든 십자가든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닌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못 박히신 십자가라는 복음의 진리를 위해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이천 년 교회사는 교회냐 십자가냐의 싸움을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교회와 십자가는 원래 하나가 아닌가요? 그러나 교회사를 보면 인본과 신본의 싸움이 끊임없이 있었습니다.초대교회부터 있었던 영지주의 니골라당 그리고 페라기우스 알미니안주의 그런 것들이 다 교회냐 십자가냐, 인간중심인가 하나님의 약속중심인가,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냐 예수의 주되심을 위한 인간존재인가의 충돌입니다. 쉽게 말해 종교생활과 믿음의 차이입니다.
오늘날 교회 내부의 문제 대부분이 진리의 싸움이 아닌 교회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보니 어떻게 하든지 분란을 피하려고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고 분쟁은 교회에 덕이 되지 않고 어쩌고...하면서 무조건 덮으려고 합니다. 교회가 시끄러우면 교인들이 떠나는 것이 두려운 거지요. 성경이 말하는 덕의 의미도 모르면서 걸핏하면 덕을 내세웁니다 한마디로 진리엔 관심이 없고 교회하기만 정신이 팔려있는 거에요 누구를 위한 교회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십자가를 욕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 된 교회입니다. 지상의 어느 교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게 세상교회는 묵시에 완성되어 있는 그 거룩한 공회를 위해 잠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 가운데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건져내십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성도에게 있어서 교회는 무덤이 됩니다. 진리의 싸움 , 영적전투로 인해 죽어서 나오는 곳이란 뜻입니다. 어쩌면 모든 교인들이 자신의 원수가 되는 일이 발생하는 곳이 세상 교회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한 번씩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내가 참된 말을 함으로 원수가 되었느냐”라고 한 그런 현실입니다.
이렇게 세상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과의 경계(십자가, 언약의 피)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교회 스스로가 하고 있기 때문에 성도 한 사람이라도 있는 교회라면 비 진리, 다른 복음과의 싸움이 발생하게 되고 그런 사건들로 인해서 잠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으로 교회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역사라는 무대 위에 잠시 증거 된 복음의 진리는 다시 신학과 교리라는 사단의 작업에 의해서 금방 파묻히고 변개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이 치열하게 싸웠던 영적 전투를 통해서 잠시 나타났던 말씀으로서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생산한 신학에 의해 왜곡되고 다시 사람을 위한 복음으로 변질되어버린 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세상 교회이며, 그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거짓 선생들입니다. 한 마디로 인본의 신학에 의해 우상화되어버린 예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그런 교회에서 길 들여져 온 사람들은 악한 영과의 전투라는 것을 아예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거꾸로 그런 진리의 싸움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한 성화에나 관심이 있고 아름다운 교회 만들기에 관심이 있지 이 세상이 교회가 진리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임을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나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그런 따뜻하고 평화로운 주님 품 안에서 살다가 천국 갈 테니까 교회는 그런 나를 위해서 매뉴얼만 제시 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위대하고 자애로우신 우리 수령님 품 안에서 우리 인민들은 이렇게 행복합니다.. 하는 북한 인민들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과연 그러한가 하는 말씀 앞에서의 깨어있음과 진지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런 계시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내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복음은 무엇인가.. 를 늘 돌아 봐야 합니다. 세상에는 믿는 자라도 넘어뜨리려는 세상신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있는 성도 역시 나를 위한 예수, 나를 위한 구원으로 돌아가려는 본성이 있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를 침 삼킬 틈도 없이 책망하십니다. 교회를 다스리시는 성령께서 우리 일생을 말씀의 사건으로 채워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간섭과 다스리심이 없으면 주가 계심을 알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일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한 자입니다. 담아주시려고 해도 담을 그릇이 없어요. 우리에게 담으면 그릇 자체가 녹아버립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하늘의 존재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어둠의 세상이 하늘에서 오신 참빛을 알아보지 못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분이 하신 말씀을 깨닫는 인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땅의 것들을 통해서 설명을 해주셔야 겨우 이해를 하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겁입니다.
성령이 오신 오늘날도 성도는 세상 속에서 그분이 일으키시는 말씀의 사건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모퉁잇돌이신 예수 안에서 연결하여 현재시제로 지어져 가는 교회입니다. 모퉁잇돌이신 그분이 세상 속에서 겪으셨던 배신과 배척과 고난이 무엇인지 세상 속에서 세상과 구별된 교회로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이 가신 그 길 그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말은 믿음에는 왕도가 없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배신했던 그 자리, 밤새 수고했으나 빈그물만 건져 올리는 인생, 심지어 90세 요한이 끌려가서 중노동을 했던 밧모섬의 계시사건 그런일을 우리는 경험하고 싶지 않잖아요. 그러나 믿음에 의해 끌려가는 사건들을 믿음의 사람들은 불가불 살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을 가진 사람이면 다 피하고 싶은 불행한 이야기들이 히브리서 11장에 연이어 나옵니다. 광야에 떠돌아다니면서 동굴에 살고, 누더기 입고 배곯아가면서 톱으로 켜이고, 옥에 갇히고 하는 것들이 어떻게 자원해서 겪는 것이겠습니까 믿음은 그렇게 우리가 반드시 겪어야 할 모든 코스를 띠로 묶어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성도 자신이 말씀의 사건으로서 거룩한 교회니까요
이렇게 예수님이 다 이루신 아버지와의 약속 안에는 늘 기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홀로 담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 안에 내면화 되어있는 삶이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의 육은 자꾸 예수를 이용하려는 생각만 하고 어떻게 하든지 마음에 위로와 평화를 얻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분께 땡강을 부려서라도 필요한 것을 얻어내려 하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하나입니다. 예수를 알고 영생얻는 것입니다. 그분의 어떤 희생과 섬김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졌는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아담이 무엇을 겨냥한 형상인지를 제대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형상으로 새롭게 완성된 아담입니다. 그렇게 천국은 아들의 형상이 이루어진 자들로 완성된 천국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으로 계시하신 하나님, 이 땅에 피를 남기고 가신 그 하나님과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사이에는 충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사도들의 서신을 받은 교회들과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이 지금은 없습니다. 현재는 터키나 그리스 지역의 관광 상품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는 용도로 사용하시고 나면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묵시 안에 이미 완성되어있는 거룩한 교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내용과 본질과 그것이 어떤 하나님의 약속이며 희생과 섬김인지 알게 하시기 위해서 지상의 교회들이 아직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땅의 교회의 용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데 있지 인간을 위한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교회로,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의 품안에 그 생명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우주 만물과 역사를 지금도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 베푸신 것들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신부된 교회의 신랑이신 한분 예수 그분을 잘 배우고 돌아가면 되는 겁니다. 복음 설교자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 일찍 경험하고 교회를 섬기는 은사를 받아서 몸 된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도록 지체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장로, 감독, 교사(목사), 집사 등 교회의 모든 직분은 말씀으로 섬기는 직분이며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은사(기능)를 주시는 동안만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역할이며, 은사를 거두시면 쉬면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장로는 영원한 장로가 아니며 한 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가 아닙니다. 그런 건 해병대서나 하는 거지요.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서 그리 많은 일을 한 사람도 천국에서 특별한 상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과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안에 사신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이 말한 상급은 하나님 자신을 주신 것인데, 이 보다 더 큰 상급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도 차등 상급을 얘기하는 세상 교회는 그 하나님을 받은 적이 없기에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겁니다.
은사와 직분은 젖먹이에서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게 장성한 자들이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섬기는 기능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기능으로서의 은사입니다.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며 자기 능력으로 감당할 직분도 아닌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앞장서서 매도 맞고 욕도 먹고 주께서 붙이심의 전쟁 때문에 복음의 군사로 영적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직분자들입니다. 그들만 십자가의 승리에 참여 된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요즘 젊은 목사들 중에 장로 집사없는 교회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교회에 직분 때문에 문제가 많으니까 그런 직분없는 민주적 교회하겠다는 건데 그런 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직분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런 겁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피로사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에요 교회의 직분은 교인들이 투표해서 뽑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면 본의 아니게 교회를 섬기는 기능이 나오게 되어 있는 거에요 그런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장로 집사 교사는 성경에 기록된 직분입니다. 그들이 특별히 잘 나고 능력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런 역할을 하도록 성령의 은사를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목회서신에는 장로가 범죄를 하거나 실수를 하면 모든 사람들 앞에 불러내어 경계하고 엄히 꾸짖으라고 했습니다. 인권이 무시된 가혹할 정도로 교회가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각 개인의 인격이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예수라는 진리와 십자가의 은혜만 오롯이 나타나야 하고 하나님의 의로 복음의 능력만 발휘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지금도 은사로 기능하는 직분자들의 희생이 있는 전투의 현장입니다.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들과의 복음의 전투입니다.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입혀주시는 전투장비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 전쟁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영적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칼바르트의 말대로 이 세상은 그런 영적 이스라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위기를 감지하는 세상입니다 성도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의 위기란 말입니다. 그런 성도의 죽음이 세상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유일한 성도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여 세상 밖으로 쫓아내어버린 그때로부터 이미 심판 아래 가두어진 세상입니다.
그렇게 복음의 군사들이 말씀으로 훈련을 받고 양육이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서 장렬한 죽음을 맞게 되는 전장터로 세상이며 땅의 교회입니다.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그런 목적을 가진 교회입니다. 그들을 음부의 권세가 틈타지 못하고 해치지 못하는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는 한몸으로 머리이신 주께서 공급하신 것으로 부족함이나 탈락됨이 없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반드시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만 모자라도 우리 선진들을 포함한 그 교회가 온전치 못하다고 하는 거에요. 먼저 살다가 간 믿음의 선배들도 여러분을 보면서 응원을 하고 조금만 더 힘내라 하면서 천사들도 여러분을 지키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세상은 알지못하는 영적인 세계가 현실이 된 사람들이 세상과 분리된 교회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질이 다른 시간 속에 있는 사람들, 완료된 미래로부터 오는 시간을 사는 자들의 교회입니다.
에베소서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들로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함이라고 합니다. 지상의 교회는 온갖 교훈의 풍조와 간사한 유혹과 사람의 속임수가 횡행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거짓교사에게 속아서 참된 말씀을 전하는 사도를 원수로 여기게 되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의 복이 어디 있는지를 다시 돌아보면서 주께서 마지막 날까지 말씀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다스려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됩니다.
질문자들이 계셔서 지금까지는 교회론을 말씀드렸고 다시 본문 강해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강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은 새로운 성경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이성에 납득이 되고 해석되는 계시의 말씀이 아니에요. 성경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젠 도올 김용옥도 요한복음 강해서를 썼는데 제가 보기엔 웬만한 목사들보다 낫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에요. 예수 안믿어도 그정도 지식은 습득할 수 있단 말이지요 슈바이처를 보세요. 그 사람은 자유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사람 인데 죽을 때까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안믿었단 말에요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아프리카의 성자입니다. 하버드 박사학위 다 버리고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 섬기면서 평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그게 세상이 인정하고 칭찬하는 ‘선’인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게 과연 선일까요? 이땅에 흘리신 아들의 피를 부정하고 모욕하는 악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만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믿음 우리 힘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구약에서도 성령이 일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는 성신으로 표현 되어있는데, 그 때의 성신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 밖에서 역사하면서 계시적 사건으로 끌고 가는 우리 외부에 계신 성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후의 성령은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토록 함께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새롭게 창조해내시는 성령이십니다.그런 새창조의 능력이 나타나는 대상으로서 여러분이며 그런 성도들을 모이게도 하시고 흩으시기도 하시는 그렇게 교회를 돌보시고 다스리시는 일을 하시는 성령이에요
오늘날 복음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이다 보니 이를 이용해서 필요한 지식을 쌓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이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인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된다”에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으로의 습득이 아니라 그분과 한 몸 되는 앎(야다)을 뜻합니다. 부부 사이에서만 알 수 있는 한 몸 된 앎이에요. 그리고 믿는 일 역시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이 주체가 된 삶까지가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 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셨던 그 믿음입니다. 그 예수를 아는 일과 그 예수님의 믿음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의 서신에는 너희가 그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하고 확정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말씀을 공부하고 나누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지체들이 자기 안에 있는 예수(믿음의 증거)를 내어놓고, 자기가 체험하고 살아낸 그 복음을 내어놓고 서로 확인하는 시간이지 예수를 대상으로 학습을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를 아는 것’과 ‘예수에 대해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창세전부터 예수라는 씨를 가진, 다시 말하면 약속을 가진 자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 교회이름으로 모인자들이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순서가 거꾸로 되면 사도에게 꾸중을 듣는 갈라디아 교회나 고린도교회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게 교회 아닌자들과 약속 안에 있는 교회는 씨가 다르고 피라는 경계로 인해 서로 교제가 불가능한 다른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 목사들이 원하는 무조건 하나 되는 교회, 평화롭고 사랑이 많은 그런 교회는 종교인들의 동호회는 될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피로사신 교회는 아닙니다.
오늘 본문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나니” 라는 말씀의 뜻은 바울이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성도로 해산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십자가 안에서 그의 피에 의해 아들들로 새롭게 출생이 된 자들이 아니냐 그러니까 그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려고 니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들이밀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성령의 역사,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난 자들인데 어떻게 율법 행위로 돌아가는 일이 가능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거에요 그럼에도 이 구절을 오해해서 사도가 다시 그들을 거듭나게 해산하는 수고가 필요하다고 해석을 하면 안 됩니다. 이런 말씀을 악용해서 목사를 영적 아버지라고 사기를 치기도 하는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도 바울은 죄인 한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바울의 말은 내가 어떻게 지금 다시 너희를 해산하는 수고를 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는 반문입니다. 니들이 어떻게 다시 말씀의 초보로 돌아가서 내가 너희들을 해산하는 수고를 다시 해야 한단 말이냐 라는 질책인 거에요. 하나님의 교회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능력’은 성령의 능력을 말합니다. 니들끼리 아는 지식으로 천국을 넘보지 말라는 거지요
그런 고린도교회를 가리켜 매를 좀 맞아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복음을 많이 알고 말도 잘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란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을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예수를 안다는 말입니까 모른다는 말입니까? “단단한 음식을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니까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고 선악도 분별하지 못하는 자는 성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잘 가르치고 훈련해서 성도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창세전부터 예수라는 씨가 있는 자만 성도입니다. 그런 자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종교단체지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런 자들과 분명한 경계를 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