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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찬송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갈라디아서 21-1강)

작성자위드|작성시간25.11.21|조회수122 목록 댓글 0

 

본문 : 갈라디아서 6:11-18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일수록 복음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복음은 원래 이 땅에 없던 것입니다. 또 우리 본성상 거슬리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에게는 복음이 낯설게 느껴져야 정상입니다. 그런 종교 생활, 즉 잘못된 열심 때문에 이 땅의 교회들이 이천년 동안 예수님을 핍박해왔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예수님이 이땅의 대형교회에 오시면 문 앞에서부터 쫓겨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아마 경천동지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재밌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게도 하나님을 잘 알고 잘 섬긴다고 했던 바울이 막상 하나님을 만나자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셨죠. 이단 중의 괴수로 여겼던 예수가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에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뒤집히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자들이 어찌 이스라엘이나 바울뿐이겠습니까?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일부러 바울이 주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을 해 둔 것입니다. 바울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들의 속성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에요. 쉽게 말하면 내가 믿고 싶은 예수만 믿는 겁니다. 주께서 그냥 내어버려 두시면 그렇게 되는데, 이것이 종교생활이에요. 교회를 다니지 않고 절에 다니는 사람들도 자기가 믿고 싶은 신을 믿는 것은 같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지식 없이, 주님과의 관계없이 종교적 열심만 가지고 달려간 결과가 바로 바울 같은 하나님의 원수 됨입니다.

 

꼭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태생부터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원수(죄인)예요. 이런 자인식에서부터 복음이 시작됩니다. 만일 나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분은 아직도 예수도 하나님도 모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된 것 한 가지를 그의 모든 서신에서 빠지지 않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갈라디아서에도 동일한 구절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복음의 자유, 복음 안에 있는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인데, 여기에서의 자유라 함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율법의 몸인 나로부터의 자유, 율법의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그의 서신에는 자주 율법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근 1년간 율법에 관하여 공부했기 때문에 여러분도 이제는 율법을 잘 아실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 이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바울 서신 전체를 아우르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또 그의 일생에서 결코 양보하지 않는 한 가지가 바로 그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으로의 구원입니다.

 

(에베소서 2장)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복음은 원래 이 세상에 없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진노의 대상) 나는 위에서 왔으며 라고 하시면서 선을 분명하게 그으셨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관점입니다.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육체로 자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행위를 자랑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의 못 박히신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죠.

 

바울은 이렇게 갈라디아서 1장에서부터 시작하여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편지 말미에서 확인도장을 확실하게 찍습니다.

 

그럼 우리가 지난 1년간 공부한 갈라디아서를 1장부터 간단히 요약을 하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장에서는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여기에서 눈이 띄는 것이 ‘악한 세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악한 세대로 규정하십니다.

 

인류역사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그들이 해 입은 무화과나뭇잎 치마를 벗기시고 양의 가죽 치마를 입히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신 후에 그들을 적당히 타이르시고 거기에서 그냥 살게 하셔도 될 텐데, 그들을 굳이 에덴에서 쫓아내셨고, 그때부터 인류역사가 시작되고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악한 세대로 규정하십니다.

 

또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시면서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렇게 보호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가인의 후손들은 애굽 앗수르, 바벨론 로마로 이어지는 세상 정신입니다.

 

여기에서 두 라인이 생깁니다. 하나는 아벨 대신 주신 셋의 라인, 또 하나는 하나님이 표까지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 가인의 후손들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에녹성을 쌓았고 기계문명과 예술 문화 과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오늘날 과학 문명을 발전시킨 사람들이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그리고 아무 잘못 없이 제사 한 번 드리고 형한테 맞아죽은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의 후손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사람들’이라고 기록됩니다. 그러니까 가인의 라인에서는 엄청난 문명과 문화가 발전했지만, 셋의 라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밖에는 없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힘을 믿고 자기 머리를 믿고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사는 사람들을 가인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자들이 셋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세상의 딸들이 결혼했다는 이유로, 네피림과 용사들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인간들이 육체가 되었다는 이유로 전 세계를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하나님의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들이 은혜로 사는 사람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는 노아의 식구 중에서 또 갈라내심을 하십니다. 함과 셈과 야벳을 가르셨습니다. 함은 아버지가 술 먹고 벌거벗은 채 누워있는 것을 보고 비웃었고 셈은 아버지의 하체를 가리어줬습니다. 그를 통해 가리어주심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거에요.

 

이와 같이 지금도 세상은 이런 갈라내심의 작업 안에 있습니다. 은혜의 절대성과 필연성 안에 있는 자, 즉 심령이 가난한 자(프토코스= 절대 가난)와 하나님을 열심히 학습하고 훈련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하는 자, 법을 주시면 얼마든지 지켜드리겠다는 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 줄기에 있습니다. 물론 은혜와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만 여기에 인간의 가능성 율법행위를 끼워넣은 거죠. 성경은 이것을 술이라 표현합니다. 성경에서의 술은 여러 가지가 혼합되고 발효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옷을 짤 때도 한 가지 실로만 짜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섞는 것, 발효된 것을 죄로 여기십니다. 계시록에 보면 음녀의 혼합된 술이 나오는데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입니다. 은혜의 십자가와 함께 각종 율법 행위, 인간이 규정한 윤리 도덕 지키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혼합된 술입니다. 세상 술에 취했다는 의미가 이것입니다. 세상 정신, 우리가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나를 위하여' 라는 우상성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치마를 입혀서 쫓아내신 사건, 또 그 아들들의 살인 사건은 오실 그리스도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성을 미리 보이신 겁니다. 하나님 살해 의지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별 것 아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의 선악과를 먹음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해야 하는 독성이 표출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한 우리 가운데서 몇몇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거룩하고 흠 없는 아들들을 만드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창세전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창세전 하나님 자신의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따먹은 아담은 반드시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그의 피로(그리스도의 형상) 완성되어야 하는 아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롬5장의 오실자의 표상이란 말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했다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세상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해서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역사의 용도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펼쳐지는 무대로서만 존재하는 세상이며 역사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시험관입니다. 자기 사람들을 배양하는 시험관이에요. 다시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겠다는 아들들이 만들어지는 무대입니다. 은혜의 절대성을 배워가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돌보시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반대로 내어버려 두심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겁니다. 마귀가 도와주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했던 그 마귀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Boys, be ambitious, 하면 된다, 꿈은 이루어진다 고지론 긍정의 힘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말, 즉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인생에 개입했다는 말을 한 단어로 줄이면 ‘환난’입니다. 목사가 이런 이야기 정직하게 하면 교회가 문을 닫게 되겠지요.

 

(고린도후서 1장)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이게 성도(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이것이 자기 성도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이거 한 마디로 살맛 안 나는 인생이지요. 사람이 자기를 의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살맛나지 않은 일인 줄을 아세요? 하는 것마다 되는 게 없는 것을 바울은 세상의 찌끼같이 되고 미말에 끌려가는 자같이 되었다, 그래서 세상과 천사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약하고 비천한 바울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예수를 믿고 싶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환난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생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모두 고생을 합니다. 생로병사... 불교에서는 이것을 고해라고도 하지요. 얼마나 폭풍이 이는 거센 바다인지 고해라고 하고, 그 고해의 바다를 건너가면 낙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이것과 성경이 이야기하는 환난은 무엇이 다릅니까? 기독인들은 건너가는 방법을 찾는 이들이 아니라 이미 건너간 사람입니다. 이미 건너가서 옮겨진 사람들, 히브리인들입니다. 홍해를 건넌 사람들이에요. 그럼 왜 이 세상을 사는가 하면 그 건너감이 어떤 은혜인지를 인생 속에서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로 세상을 별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체휼하는 것입니다 그게 본문 14절이에요 고린도 후서에도 나오지요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항상 짊어짐은 ..”

 

바울이 1장에서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여 자기 몸을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에게 확인시켜주면서 그 은혜로 그들을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 사람을 따르고 다른 복음을 따르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이렇게 꾸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1:1)

 

그럼 사도만 그렇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말은 탁월한 목사나 훌륭한 장로나 좋은 설교자를 만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인을 자꾸 여러분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올바른 선택을 해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선택이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있기도 전인 창세전 약속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선택이었다면 그 결과는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존재가 있기도 전인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이 구원의 확신인 것입니다. 그 십사만 사천에서 인간들의 열심으로 하나도 더할 수 없고 뺄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에 자기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면서 그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들에게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의 처음과 끝에 그렇게 은혜와 평강을 전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 됨은 오직 은혜와 평강(화목)으로 묶여있는 것입니다 (엡4:3)

 

이렇게 인사를 한 바울이 바로 이어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그러니까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겁니다. 이런 자신감이 성도에게는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그렇게 속히 떠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답은 간단해요. 다른 복음이 더 좋아서 그런 겁니다. 다른 복음이 우리 입맛에 맞고 우리 체질에 맞아서 그래요. 거짓교사들, 악한 영의 무리들이 그런 우리를 우리보다도 더 잘 알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할 것으로 먹이를 던져준 겁니다. 그러자 덥석 물었던 거지요. 거짓교사들은 그렇게 다는 복음을 던지면서 동시에 복음 전하는 사도를 공격합니다. 그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공격하게 되면 바울이 전한 복음도 가짜로 여겨지게 되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서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도됨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의 인정을 받아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날도 여러분이 성도가 된 것은 누군가에게서 배워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꾸 여기저기 말씀 좋다는 곳 찾아다니지 마세요. 말씀이 날마다 여러분을 찾아오고 여러분 안에 있는데 왜 사람을 좇아가느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우리 손을 떠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한 구원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원하지도 부르지도 않았는데 때가 차매 진리의 말씀이 찾아와서 이 어둠의 세상에 빛이 비취고 새 창조가 시작됩니다. 이 새 창조의 역사가 아니면 아무리 훌륭한 설교자가 이야기를 해도 성경 말씀이 진리로 들리지를 않습니다. 들을 귀가 없기 때문이죠.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힌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사야서의 기록에 보면 말씀을 전할 때에 눈 가리고 귀 막고 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이사야가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이스라엘에 알아들을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누가 알아듣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열어주시고 눈을 열어주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만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당시 예수님 주변에 병자들이 많았던 겁니다. 봉사들, 귀머거리들, 벙어리들, 앉은뱅이,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38년 된 병자... 이 모두가 우리의 모습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모두가 성치 못한 자, 죄와 허물로 죽은 자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병들고 온전하지 못한 자를 부정하다, 죽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자들은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정녕 죽으리라는 말의 의미는 그냥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죽고 또 죽으리라입니다.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죽고, 죽고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아담들은 죽음 안에서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 죽음의 무리 가운데 하나님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만 일방적으로 살려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가인과 아벨의 라인, 즉 길이 두 갈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우리가 선택한 길이 아닙니다. 아담이 선택한 죽음의 길, 영원한 사망의 길로 모든 인류는 계속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선악과를 먹고 흙으로 돌아가는 몸이기 때문에 땅을 지향하는 몸입니다.굴지성이라고 하지요. 창세기에서 뱀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때에 땅을 배로 기고(땅과 밀착되었다는 뜻), 흙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흙 먹는 뱀 봤습니까? 우리가 뱀의 먹이가 된 흙이에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과 붙어있고 죽은 채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신 뱀과 연합된 거예요.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강제로 생명의 길로 옮겨놓으신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그 일에 협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육체의 성질을 그대로 발휘하면서 저항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강제로 나누어지면서 우리의 죽음을 그 죽음으로 바꾸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의이며 지혜이며 전능하심입니다.

 

제가 이런 비유를 자주 하는데 에프킬라를 뿌렸더니 바퀴벌레들이 모두 죽어 널브러져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죽어있는 몇 마리를 일으켜 세운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살려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생명뿐 아니라 죽음도 몰라요. 죽어보질 않아서 죽음도 모릅니다. 죽음을 모른다는 것은 생명도 모른다는 겁니다. 생명이 찾아왔을 때 생명과의 조우, 그러니까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내 목숨이 생명이 아니었구나 예수가 생명이었구나 그 언약의 피가 생명이라는 것을 그때에야 아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계시하신 그 피로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생명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목숨 걸고 섬기고자 했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후에 예루살렘을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지나면서 주님과의 사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교회에서 여러 가지를 배웠지만, 여러분에게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게 하신 것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면 누구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대상으로 공부도 하고 섬기기도 하고 바치기도 하는 그런 것은 얼마든지 내 열심히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는 관계성은 우리가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그 관계를 (믿음)만들어주셔야 우리의 눈과 귀가 열려서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우리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죽을 죄인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종교생활을 해왔으니까요. 그런데 참 생명의 말씀을 만나고 나면, 즉 복음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면 우리 안에 옛사람이 무너져 내리고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일이 생깁니다. 새창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서부터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는 거에요. 이것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생명에 대해 두 이레 강아지만큼 눈이 열리게 됩니다.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씨가 들어있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그 씨가 발아하고 잎이 나고 자라나기를 시작하는데 이것을 생명현상이라고 합니다. 생명에 대해서 인식하게 되고 생명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자기 사랑밖에 몰랐는데 그때부터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갈구하게 되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고난이고 환난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환난입니다. 꼭 돈이 없고 자식이 속 썩이고 사업이 안 되고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것만이 환난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자체가 환난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 수 없다는 것보다 더한 고난은 없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열심히 살고 그 결과도 내 손에 쥐게 되는 것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성취감, 자존감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해도 나를 위해서 살 수 없는 ‘나’라는 것이 폭로되기 때문에 살맛 없는 세상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주어진 자가 십자가로 말미암은 세상에 대해 못 박힘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던 바울이 육적 자아가 하나하나 해체되고 부서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계시로 사도의 본분으로서 증언을 선포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복음을 선포한 결과로 바울의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말년에 쓴 편지에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다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보냈던 편지들이 이천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서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런 것입니다.

 

2장으로 넘어가면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아무도 없음을 다시 한 번 천명합니다. 그래서 율법행위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큰 소리로 엄하게 꾸짖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산다는 말이 로마서에도 나옵니다.

 

(로마서 7장)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바울이 율법을 몰랐던 사람입니까? 알아도 너무 잘 알았던 사람이에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던 그가 지금은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오해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알고 철저하게 지킨다고 할 때가 사실은 자신이 죽었을 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진의를 바로 알고 나니 죄는 살아나고 자신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살았다고 날뛰면서 율법을 지키려고 설쳤는데 율법을 제대로 알고 나서는 자신이 율법 하나도 지킬 수 없는 죽은 자임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용도입니다. 율법의 기능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은 아직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살면 어떻게 됩니까? 나의 가능성으로 율법을 지키겠다고 펄펄 날 뛰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금지하신 생명나무에 손을 뻗치는 거에요 그런데 성도는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만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율법을 다 이루신 분입니다. 의문의 증서(율법)를 십자가로 찢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지만 굳이 예수의 십자가가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담 안에서 죽은 채 태어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그러니까 하나님적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모든 일을 다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일에 협조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죽은 자요 티끌인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이미 창세전에, 영원 전에 섰던 십자가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만이 실행하실 수 있는 십자가예요. 그래서 티끌이요 없음인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을 함께 하는 한 가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자기 약속을 다 이루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홀로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셨다는 선언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천사도 놀랐다고 합니다. 세상 어느 종교에도 신이 죽는 종교는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기도 전에 있었던 그 약속이 역사 속에서 마침내 실현된 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적인 생명이 나누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요 지혜요 전능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뭘 하여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아는 것과 찬송하는 것밖에 할 게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만 우리에게 생명이 나누어지는지를 아는 것 그리고 그 일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게 하신 이유는 우리에게는 구원받을만한 자격과 능력이 전혀 없음을 알게 하심이며 모든 것은 성자 예수로 말미암고 또 그의 주되심을 위한 것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일평생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바울처럼 마지막 관제로 부어질 그 날까지...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관제로 부어지기 전에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참 은혜를 아는 것이며 성화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었으면 그 긍휼하심이 아니면 내 속에는 어떤 의도 선도 없으며 오직 그분께서 자기 의와 거룩을 나에게 입혀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은혜의 필연성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나의 영광을 너희에게도 나누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도 참여시키시겠다는 거에요 그렇게 우리의 찬송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의미는 자기 약속에만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실현된 인생, 그 약속이 작동된 인생들은 반드시 구원의 기쁨 이전에 “나는 구원을 받을 자가 못 됩니다, 주여 이 죄인을 떠나소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라는 고백을 먼저 하게 됩니다. 이것을 의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이런 작은 심판들이 계속 발생됩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날마다 죽은 것입니다. 이런 작은 심판을 겪어낸 자들은 마침내 자신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 사망아 문 열어라 나 이제부터 진짜 살러 간다, 주님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아버지 집으로 간다는 당당한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심판들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한 종교인들은 어느날 갑자기 닥쳐온 죽음 앞에서는 당황하게 되고 두려워 떨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2장 21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 지금 너희들의 모든 행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욕하고 헛되게 하는 것이다, 라고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으로 넘어가서 갈라디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재차 지적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1-2)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도 우리는 일주일 넘게 공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우리가 세상이 알고 있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일하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해도 몇달이 걸릴 거에요. 그만큼 예수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는 비밀이며 신비입니다. 제가 설교 때마다 십자가만 높이고 자랑한다고 하니까 어떤 분들은 “성경에는 부활도 있고 천국도 있고 축복도 있는데 왜 십자가만 얘기하느냐” 고 하는데요 그 사람은 아직 십자가 안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부활도 천국도 다 십자가 안에 있다는 사실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거에요. 그 십자가 안에서 그분의 죽음으로 새생명이 잉태되는 그 새창조에 대해 전혀 무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설득이 안됩니다. 그냥 사시라고 할 밖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만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떻게 거짓교사들의 미혹을 받을 수 있느냐,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합니다. 여기에 ‘성령’과 ‘믿음’과 ‘십자가’가 등장을 합니다. 한마디로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십자가라는 영원한 현실을 모른다는 것은 인생으로끝나버릴 인생이란 것입니다. 저주입니다. 반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자는 누가 와서 너희를 꾀어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기 때문에 율법의 탐심까지 십자가에 못 박힌 자입니다. 너희는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완료형)... 그런데 어떻게 다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욕심을 부린다는 것은 내가 생명나무에 손을 뻗쳐서 열매를 따먹고자 하는 탐심을 말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이 탐심을 죄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탐심입니다. 탐심은 단순히 남의 물건을 탐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미 십자가로 완료된 현실을 살고있는 너희들이 어떻게 그런 탐심을 가질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들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완성되었음을 가르쳐주셨는데 어떻게 다시 육체로 마치려고 하느냐는 꾸짖음입니다.

 

그러면서 비유로 아브라함과 모세의 이야기를 합니다. 율법과 믿음에 관하여 다시 논리적인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은 의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의미는 그가 믿음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믿음을 가르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으로부터 430년 후에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에 있음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하나도 지킬 수 없는 자들로 폭로되면서이기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의롭다 함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범법함을 인해서입니다. 어느 누구도 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범법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온 세상을 율법 아래에 가두기 위함입니다. 어느 인간도 죄인 아닌 인간이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입니다. 바울처럼 율법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하고 율법의 진의를 깨달아서 외부의 누군가가 나를 건져주지 않으면 안 됨을 알게 해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으로 죄 아래에 가두신 이유를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가두어두심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의 구원입니다. 믿음의 때가 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때가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믿음, 은혜, 사랑, 용서, 소망, 인자, 긍휼 등의 단어를 하나고 축약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믿음이라는말은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은혜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의도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66권 전체가 이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예수를 배우기 위해서 이 땅에서 죄인으로 삽니다. 죄인은 뭘 해도 죄만 나옵니다.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때로 선한 일이 나온다고 해도 우리는 그 의미를 나에게 두게 되기 때문에 그것까지도 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음입니다. 갈라디아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 나옵니다. 왜 구원을 옷 입음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본질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장로교에서는 성화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화론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열심히 더해져서 우리가 점점 거룩해져 가고 거룩의 정도에 따라서 하늘의 상급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마의 신학입니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바울은 지옥 갔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에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했단 말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은 마귀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긍휼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성화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무릎을 꿇고 바짝 엎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건(유세베이아)입니다. 완전한 항복이에요. 왕이신 당신이 살리시면 살고 죽이시면 죽는다는 고백 피조물의 처음자리 회복입니다.

 

갈라디아 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통해서 두 언약을 설명합니다. 여종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였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은 그 시내산입니다. 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지만, 산 아래에서는 우상을 만든 일 때문에 삼천 명이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율법의 등장은 이렇게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와는 반대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자 하루에 삼천 명이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이에요. 옛 언약은 우리를 죽이는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우리를 살리는 언약입니다. 거듭남이죠. 거듭남(아노뗀)은 위로부터 남을 뜻합니다. 그래서 위에 계신 새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따라 출생되어진 자들을 아들이라고 합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성도는 교육과 훈련에 의해서가 아니라 ‘출생’되어진 자들입니다. 제자 훈련 아무리 해도 거듭나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그 가능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교회에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가톨릭입니다. 가톨릭은 성당에 소속되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가 그들을 똑같이 따라하면서 교회가 마치 교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온갖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태어난 겁니다. 위에 있는 자유자 어머니로부터 ‘출생’되어진 겁니다.

 

율법은 아들들을 위해서 잠시 몽학선생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육체를 따라난 자, 약속 밖에 있는 자, 율법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자들이 성령으로 난 자들을 핍박하듯이 오늘날도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 교회로부터 반드시 이단 소리를 들어야하고, 세상 교회로부터 쫓겨남을 당해서 큰 성 바벨론성 길 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두 증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은혜와 긍휼로만 이루어짐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지상의 교회와 역사와 모든 사건들이 성도들을 위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갈라디아서 5장으로 넘어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신 결과물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의문의 증서를 도말하시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십자가지신 주님과 하나 됨입니다 그런데도 너희들이 다시 할례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게 되는데, 율법은 항상 완전하게 지켜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하나도 지킬 수 없는 우리에게 다시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요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그러니까 백 개 중에 아흔아홉 개를 지키다가 죽기 전에 거짓말 하나 하면 말짱 도루묵이 됩니다. 율법은 항상 지켜야 하고 완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분이 십자가로 다 지키신 것을 두고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겁니다. 율법은 율법(말씀)으로 오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저주를 온 몸으로 다 받아내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도말됩니다. 이것 외에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낼 수 있는 존재조차 되지 못합니다.

 

인류역사상 죽음은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진짜 생명이 있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저주였어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하나였던 그분이 성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경천동지할 저주였습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저주를 받으심을 통해서 성도에게는 더 이상 율법의 정죄가 없어졌습니다. 이 보다 더 기쁜 일은 없는 겁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펄쩍 펄쩍 뛰면서 소리 지를 일이에요 “나 이제 해방되었다” 라고 그렇게 주께서 율법의 저주를 어떻게 십자가로 모두 도말하셨는지를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로 하여금 살아내게 하십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닌 복입니다. 우리는 그럴 때만 우리에게 나타나는 생명에 대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에 자기부인의 고난이 발생하고 주 예수 안에 있는 평안과 행복도 함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십자가로 율법을 완성하셨는데 이것을 성경은 이웃(형제)사랑이라고 합니다. 이웃(형제)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잖아요. 이 사랑을 행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이것을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잘 보여주셨습니다.

 

똑똑한 율법사가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율법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가서 행하라고 하셨고, 율법사는 그럼 사랑할 이웃이 누군지를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자란다, 네가 율법적인 사랑을 하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거반 죽어있다는 증거다” 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선한 이웃으로 오신,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오신 예수를 알게 되는 것. 그분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며 그들만 이웃을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복음을 저해서 이웃을 살리는 것이 그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하신 일을 통째로 담아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것을 나누는 것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다 이루심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면 우리 속에는 전에 없던 소망이 생깁니다. 이 세상에 없는 소망입니다. 내가 있을 곳은 이 땅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면서 우리의 눈이 본향을 향해 들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삭, 야곱의 삼 대가 텐트(장막)를 치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멋진 집을 짓고 살 수 있었고. 소 떼와 양 떼와 종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더 나은 본향, 하나님이 지으신 성을 바라보는 소망이그들로 세상에선 나그네 이방인으로 살게 한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이 십자가로 다 이루심을 담은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 별세의 소망이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길 빕니다.

 

그렇게 하늘 소망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환난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못하도록 담으로 막고 가시로 막는 세상과 분리시키는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우리는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이 세상에 갇히지 않도록 이 세상으로부터 끊어내시는 세상에 대해 못 박으시는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에야 비로소 아브라함처럼 천성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예비하신 한 성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진짜 노마드(유목민)입니다. 지상에서부터 하늘로 사라져 버리는 탈출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은 하나입니다.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서 하늘의 소망을 알게 된 사람만이 믿음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히11:1) 그리고 또 이 믿음에 의해서 사랑이 나누어집니다. 그러나 바울 당시나 오늘날이나 그 복음을 육체의 기회로 삼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여러분들도 보셨죠? 복음의 지식으로 자기를 증명하고 자랑 하는 사람들... 그렇게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떤 행위에도 의가 없고 선이 없음을 선포하는 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다 이루심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할 것이 무언가 하면 우리는 그 복음을 알기 전부터도 막 살 자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막 사는 것이 복음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김성수 목사가 가신 다음에 김목사와 다른 결론을 가지고 그의 설교 흉내만 내면서 그것이 복음의 자유인 양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교회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사건으로 자기 성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니까요

 

우리는 막 살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자유는 그리스도의 종 된 자유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우리에게는 독립적인 주체성이 없습니다. 죄의 권세 아래에 있거나 은혜 아래에 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나의 자원으로 나를 위해서 살 수밖에 없는 그 상태를 성경은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죄인들의 비참한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런 죄인들이 나에게 주가 계심을 알고 그 주께 나의 전 존재를 의존하게 되는 것을 성경은 자유라고 하고 주님과한 멍에를 맨 동행이라고 합니다.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질 필요가 없고 내가 살 길을 내가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 주님과 한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 동행은 예수님이 이세상을 사셨던 운명에도 연합됨입니다. 그래서 불가불 우리는 원치 않는 길로 띠 띠워져 데려감을 당하는 것이지요.찬송가 가사처럼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우리는 이런 찬송을 평생 부르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도 은혜요 마지막도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인간도 막 살 자유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주가 계신다는 말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해서 살게 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고후5장). 나의 주체성이나 능력을 발휘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반드시 그런 인생을 살도록 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무슨 막살기가 나오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하게 된 성도의 처음자리의 회복은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막 사는 것이 복음이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주가 계시지를 않습니다. 주가 계시지 않으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사는 겁니다. 막 살다가 막 가는 거지요.

 

그래서 더 이상 선악으로 자기를 판단하지 않게 된 성도는 자기를 성찰하지 않고 자기를 다듬지 않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봅니다. 저에게는 의도 없고 믿음도 없습니다, 저에게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당신으로만 온전케 될 수 있는 당신의 것 입니다를 평생 배워가게 됩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어서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고 합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선악과의 독서으로 하나님처럼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온전한 의존을 하지 못하잖아요. 이것이 우리가 평생 가지고 가게 되는 죄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날마다 죽여가십니다. 옛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새 사람은 날로 새롭게 됩니다. 이런 자들만 자기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서는 선한 것이 없기에 나를 믿지 않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더 이상 세상도 나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6장에서 육체를 위해서 심는 것과 성령에 의해서 성령의 뜻대로 심는 것을 비교해줍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갈라디아 교회가 신령한 것을 알기를 원하고 에피뚜미아(탐심, 율법행위)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약속대로 예수와 함께 못 박으신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영단번의 제사에 그의 피로 흠이 없는 제물로 아버지께 같이 드려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너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 위해서 나쁜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 뜻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와 공로를 마음에 계속 되새기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1년 동안 갈라디아서를 준비하면서 제게도 많은 유익이 있었습니다. 밤잠을 설칠 때도 있었고, 바울과 시공간을 뛰어넘는 대화를 했고,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주신 복음의 언어들을 다시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진리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 자신 안에서 사망이 역사하는 지난 1년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했던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는 그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분 안에 다나토스의 사망이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가시는 과정이니까요.

 

이런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저와 여러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심령에 오롯이 그 은혜와 진리로 새겨지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10분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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