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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은혜의 일 (서울 모임 2강)

작성자위드|작성시간26.06.10|조회수135 목록 댓글 0

 

본문 : 고린도후서 8:16-24

 

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17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18 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19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21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22 또 그들과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는 그가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확인하였거니와 이제 그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23 디도를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24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

 

 

2강의 제목을 ‘은혜의 일’이라고 정했는데요, 19절에 보면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고 디도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셨다고 하죠.

 

그럼,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구원을 받는 데 있어서 내가 예수 믿고 내가 구원받으면 되지 오늘 본문과 같은 그런 간절함을 함께 받은 디도가 나오고 은혜의 일로 동행하는 동역자가 있어야 하는가? 23절에도 보면 나의 동역자 우리 형제 교회의 사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하죠.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 무엇으로? 연보로. 그것이 은혜의 일이라고 합니다.

 

요즘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뭔가 하면 자기 구원을 위한 성경 공부나 교회 일에는 열심인데, 주님이 누구시고, 그분이 지금도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지, 또 그분의 피로 사신 교회에 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어요. 워낙 세상 교회가 개판이다 보니 교회에 관한 관심 자체가 없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구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예수를 믿고 내가 구원을 받는 그런 단독 구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그 사람은 어쩌면 그 교회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엡 1장)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

 

그리스도의 충만으로서의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 교회란 말입니다. 이 충만을 모르면 교회가 아닐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이 충만에서 한 사람만 빠져도 하나님 스스로 충만치 않기로 하셨다는데, 우리는 이 충만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요. 나 자신 구원에만 관심이 있죠. 자기 구원에만 집착하다 보니 지난 시간에 공부했던 균등케 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고르게 해서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몰라요.

 

(고전 12장)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 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이게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교회예요.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세상 교회들이 말하는 그런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자는 거예요. 평생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침례교, 감리교회 다녔는데, 지상의 그 가시적 교회들이 가리키는 진짜 교회,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의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하나님은 지금 사도가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그 ‘한 몸’을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몸의 구성원인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이 되지 않기로 하셨다고 해요. 이게 아까 읽은 에베소서 1장 23절입니다. 그런 만큼 하나님은 그 한 몸을 사랑하십니다.

 

(히 10장)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시편을 인용한 말씀인데요,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다’는 말씀이 70인역 원문에는 ‘당신께서 내 귀를 뚫으셨습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희년이 되어도 부리던 종이 나가지 않고 주인과 계속 같이 살겠다고 하면 그 종의 귀를 기둥에 대고 뚫습니다. 그리고 그 종을 주인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요. 이게 바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그 몸이 못 박히시므로, 우리가 함께 뚫림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함께 드려진 것을 보여줍니다. 그게 한 몸이에요. 그 십자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는 너와 내가 있을 수 없고 네 것 내 것이 있을 수 없어요. 우리가 다 주님의 소유 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한 몸이에요. 우리에게 주가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고린도전서에서 읽은 것처럼 더 귀하거나 더 못한 지체가 없어요. 물론 우리는 아직 육신으로 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다툼과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됨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은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과 속성으로 하나 됨이에요. 그 외의 다른 성질의 것은 교회에 들어오면 안 돼요.

 

우리가 에베소서를 흔히 교회론적 서신이라고 하는데,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이 한 몸으로서의 교회의 하나 됨을 계속 강조합니다.

 

(엡 2장)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거란 말이에요. 주님께서 십자가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엡 4장)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 하나 됨이에요. 주께서 자기 몸을 드려서 하나 되게 하신 이 한 몸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평생을 교회에 다니고 충성 봉사해 봤자 도로아미타불이란 말이지요. 우리 속담처럼 절 모르고 시주한 겁니다. 교회가 뭔지도 모르고 교회 다니고, 뭔지를 모르면서 그냥 섬깁니다. 대부분 종교인이 그 한 몸을 모른다는 건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한 몸이라면 머리이신 주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모든 것으로 인해서 한 몸으로서 같은 통점을 가지고 같은 감각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을 모른다는 말은 한 몸이 된 적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성도는 머리이신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 지체들입니다. 같은 통점과 감각을 가지 유기적인 살아 있는 한 몸이기 때문에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그 한 몸 된 지체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핏줄은 서로 댕긴다는 게 그런 뜻이에요

 

오늘날 개인주의, 실용주의, 이성주의 같은 세상 정신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오다 보니 교회에 와서 내가 필요한 것만 챙겨가면 된다는 사람들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에요. 사람들이 대형 교회를 선호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형 교회에 가면 그냥 많은 사람들에 묻혀서 교회가 자기한테 신경을 안 써서 좋다는 거예요. 일 안 시켜서 좋고 그냥 필요한 설교 듣고 가면 되니까요. 푼돈 몇 푼 참가비로 던져놓고 가면 되고...

 

그런데 단언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 세상 교회 현실이 그래요. 가시적 교회 키우기에만 올인하다 보니 보이는 교회에 충성하는 게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또 강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그 교회가 아닙니다. 주께서 피로 사신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예요.

 

여러분, 성경 66권을 다 찾아보세요. 거기에 교단 나옵니까? 합동측, 통합측, 고신측 나오냐고요. 목사라는 단어도 없고(에베소서 4장에 한번 나오는 목사 포이멘이란 단어는 목사가 아니라 목자입니다) 신학교도 없어요. 모두 종교인들이 만들어낸 거죠.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는 땅에 있는 그 교회가 아니라 묵시 안에 완료된,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교회예요. 그래서 그 교회는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교회가 아니고, 인간의 노력으로 성장하거나 확장되는 교회도 아니고, 인간에 의해서 타락하거나 소멸하는 교회도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는 인간의 손을 떠나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인간이 세우고 키우는 종교 집단은 죽은 것이다. 생명 없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다. 오직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하나님 안에 감추어놓았다. 그러니까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교회라면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참 놀랍죠? 그럼, 이 땅에 보이는 교회들은 뭐란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의 그 교회를 배우라고 잠시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있죠? 지금 하나도 없어요. 그 교회들 자기 역할을 하고 사라지고 없어요. 지금 있는 지상 교회들 모두 마찬가지예요.

 

(골 3장)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그러니까 우리의 실체는 어디에 있다는 거예요? 묵시 안에 있는 그게 실체예요. 이 세상과 역사는 그것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 역사는 두루마리처럼 말려서 다시 묵시로 올라갑니다. 그렇게 역사는 끝이에요.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그것을 배우고 오라고 잠시 세상 만물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지상 교회까지 포함입니다. 그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배와 기도와 찬송 연보 등은 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영단에 드려진 영과 진리의 예배, 지금도 말할 수 없이 탄식하시는 성령의 기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연보가 이 세상 것들과 어떻게 다른 지를 배우라고 잠시 있는 것들이에요. 그게 우리에게 주신 사도들의 모든 서신서에 담긴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연보나 또 너희 사랑과 자랑의 증거라는 말이 다 그것들을 가리키고 있어요. 한 몸 된 지체. 9장 1절에 나오는 성도를 섬기는 일이 어떤 성령의 은사이며 선물인가, 교회가 누리는 어떤 신령한 축복인지를 바울 사도가 8장과 9장에 걸쳐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본문을 가지고 교인들 주머니 터는 데 써먹는 삯꾼 목사들이 워낙 많다 보니 본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연보,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몸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거예요. 제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의 돈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뭐가 답답해서 돈을 받습니까? 그러니까 헌금, 즉 돈을 드린다는 말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예수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한 몸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어요. 하나님은 그 한 몸을 받으셨는데, 세상 교회들이 헌금을 그렇게 강요한다는 말은 하나님도 예수도 십자가도 모른다는 말이에요. 그것을 알면 그런 소리 못하죠. 헌금은 내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의미로서 헌금이란 말입니다. 나는 돈느오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 것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으로 헌금이라면 오케이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 가진 것 전부를 드린 과부의 연보를 칭찬하신 거에요.

 

요즘 보니까 큰 교회들 별의별 헌금을 다 하던데. 일천번제 헌금도 있고, 구약의 절기 헌금도 있고, 별미 헌금도 있고, 생명수 헌금도 있고, 신년 소원 헌금도 있고, 수박 헌금도 있어요. 수박 헌금이 뭔지 아세요? 여름 성경학교 때 하는 헌금이랍니다. 더 재미있는 건 키오스크 헌금이에요. 정말 기절할 일입니다. 한 마디로 돈에 환장한 대한 예수교예요. 그들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란 말에요. 그들이 섬기는 건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풍요의 신 바알 아세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것으로만 존재하는 교회예요. 우리가 무엇을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생명력, 그 모든 것들로 인해서 있음이 돼요. 그게 우리가 있어야 하는 처음 자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신 모든 것을 서로 나누는 한 몸이기 때문에 내 것을 주장할 수가 없어요. 큰 자와 작은 자,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가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내 것을 바치는 그런 내 공로, 내 실적이라는 게 교회에는 있을 수가 없어요. 모든 게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해 있고 주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고백이 헌금으로 연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만 성경이 말하는 서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마중물로 부어졌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는 게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미리 맛보게 되는 천국의 삶입니다. 천국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고 오라고 교회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이 세상에서 체험하고 오라고 교회가 있단 말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아무 가치도 유익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런 보잘것없는 소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저 사람한테 잘하면 그 반대급부로 나에게 돌아올 게 있는 그런 게 바로 세상 처세술인데, 그게 아니라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아무 보잘것없는, 아무 영양가 없는 그런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소자에게 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대표한 게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거든요. 그리고 그 삶을 예수님이 이 땅에서 몸소 실천해 보이셨어요. 어떻게요? 사랑받을 가치가 1도 없는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이게 우리의 구원이니까. 우리의 반응이나 우리의 협조를 전혀 안 보시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 사랑받을 자격이나 가치가 1도 없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단 말이에요.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너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교회 안에서 그거 배우고 그거 한 번 실천해보고 오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 어떤 사랑? 죄인들을 위해 몸을 내어주신 그 사랑.. 그리고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과물로 너희가 있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주라는 거예요.

 

연보는 돈을 나누는 게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린 그 사랑을 나누는 것을 연보라고 합니다. 예수의 피와 살이라고 하는 사랑을 나누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찬송이 되고 그리스도의 영광인 것을 지금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의 현실은 사도가 본문에서 말하는 그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연보, 그리스도라는 연보와는 전혀 다르잖아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 본래 있던 토속 종교가 있었어요. 샤머니즘, 무당 종교, 미신 종교죠. 우리 어른 들 살던 집안에 보면 온갖 신들이 다 있잖아요. 부엌 신도 있고, 장독대 신도 있고 성황당 신도 있고.. 옛날 우리 윗대 어른들을 보면 별별 미신을 다 섬겨요. 정월 되면 팥죽도 문 앞에 뿌리고, 제사 지내고 나면 귀신 먹으라고 밥을 대문 밖에 내놓고.. 재수 없다고 소금 뿌리고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거 잘 모를 거예요. 그런 미신 종교를 바탕에 깔고 기독교라는 겉옷만 입혀놓다 보니 이름은 기독교인데, 그 밑바탕에 흐르는 건 여전히 무속신앙이에요. 그 무속신앙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신에게 정성을 바친 것만큼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많이 바치면 바칠수록 많은 복을 주고 적게 바치면 적게 주고 안 바치면 저주하고 해코지해요.

 

그래서 무속신앙의 밑바탕에는 항상 불안과 두려움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 분명 이름을 기독교인데, 이런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참 많습니다. 믿음 좋다는 집사들, 장로들 십일조 하다가 한 번 빼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불안하죠. 새벽 기도 매일 가다가 한 번 빼먹어도 불안하고. 혹시 나쁜 일 생길까 봐. 목에 십자가 걸고 차에 십자가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합니까? 사고 나지 말라고. 저기 팔공산 밑에 새 차 사면 고사 지내는 장소가 있어요. 귀신 영빨 있다는 곳. 그런데 새 차 사고 고사 지내는 것과 차에 십자가를 붙이고 다니는 게 뭐가 다릅니까?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아침에 밥을 풀 때마다 십자가를 그어요. 이게 다 기독교로 포장된 무속신앙입니다.

 

그렇게 집 문지방에 부적 붙인 것이나 십자가를 걸어둔 거나 뭐가 다르냐고요. 현실이 이렇다 보니 평생 교회를 다녔는데, 십자가가 뭔지를 몰라요. 언약의 피가 뭔지 들어본 적이 없다니까요. 이름만 기독교지 여전히 무속신앙, 무당 신앙이에요. 그래서 김성수 목사가 유명한 말을 한 게 있잖아요. ‘양복 입은 무당’이라고. 목사가 강단에 서서 굿판을 벌이는 게 세상 교회란 뜻이에요. 지성이면 감천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난 겁니다.. 우리나라만 유독 새벽기도가 있는 거 아세요? 그렇게 영빨 있는 시간, 소원 잘 들어 주는 특별한 시간과 장소. 거기다 거룩할 성자만 붙인 게 변질 된 기독교 이교에 물든 기독교 집단 자살하는 교회들인 거에요 그런데 아무도 그거 아니라고 그길로 가면 죽는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어요 다들 교회하는데만 정신이 팔려서...

 

그렇게 우리나라 교회만큼 거룩을 남발하는 데가 없지요. 요즈음은 안 하는데, 옛날에는 교회에 쌀을 바치는 성미란 게 있었어요. 쌀에 ‘성’자를 왜 붙입니까? 뭐든지 교회만 들어가면 거룩이 되어버려요. 성수 주일, 성구, 성직 .. 목사를 성직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왜 목사만 성직입니까? 목사가 왜 가운을 입습니까 성가대는 왜 가운을 입어요? 그거 일반인과 구별하는 거잖아요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인데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대한 예수교, 무속신앙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났어요. 그러다 보니 성경 말씀까지도 기복주의로 변질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옛날에 부흥회 많이 다녀보셨을 텐데, 부흥회 단골 메뉴가 뭡니까? 부흥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네 입을 크게 벌리라 내가 채우리라.. 요런 말씀들만 따로 빼내서 써먹는 거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주시고.. 이게 야베스의 기도잖아요. 히브리서 6장 14절.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우리 동네 돼지 갈비집에 붙여놓은 액자예요. 십일조를 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는지 아니 주는지 시험해보라..이런게 다 하나님과 거래하는 거에요

 

제가 단언하지만, 십일조 하는 건 예수님을 욕보이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욕보이는 게 십일조예요. 예수님이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니까요. 그런데 또 십일조를 하는 건 그걸로 충분치 않다는 뜻이잖아요. 한국 교회를 망친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십일조예요. 그리고 한 가지가 성수 주일입니다. 교회 목사들이 무슨 짓을 해도 웬만하면 면직시키지 않는데, 십일조와 성수 주일 부정하면 자릅니다. 이 두가지가 교회 생존의 기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흥회에 가보면 간증들 많이 하잖아요. 바쳐서 복 받은 사람들 이야기와 십일조 떼먹어서 저주받고 사고 난 이야기가 단골 메뉴에요. 무당들이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한 마디로 성경이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한예수교 교인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 자신을 주신 복이에요. 하나님적인 생명, 영생 주신 그복입니다. 이 외에 다른 복은 없어요. 제가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헌금 안 하고 연보 안 하는 게 복음 아는 건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본문에서 사도가 뭐라고 합니까? 너희 사랑을 보이라고 하잖아요. 그리스도의 영광, 우리의 자랑을 서로 나누라고 합니다

 

그럼, 왜 종교 행위로 헌금하면 안 되는가? 십일조, 절기 헌금, 별미 헌금, 수박 헌금 등이 뭔가 하면 은혜로 의롭게 됨을 받는 것에 대한 부정, 반발 등이 우리 모든 죄인의 마음에 깔려 있기 때문이에요. ‘왜 우리가 은혜로만 살아야 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살아야 해? 우리도 얼마든지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게 많은데, 땀을 흘리면 흘리는 것만큼 수확할 게 있는데’.. 맞습니까? 제가 물어볼게요 여러분은 은혜로 사십니까? 돈으로 사십니까? 은혜로 살죠. 그런데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 안에서부터 늘 충돌이 일어나는 게 바로 그런 거란 말입니다. 왜? 우리 몸 자체가 선악과를 따먹은 선악의 몸이기 때문에 은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대한 반발, 갈등, 불안 충돌이 늘 우리 안에서부터 있어요.

 

그래서 사단이 하는 일은 은혜로만 존재하는 우리의 처음 자리, 또 그런 우리 죄인들을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품에 안고 하나님께 이미 드려졌다는 그 주님의 다 이루심을 가리고 부정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 다 이루심을 알면 인간들이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걸 사단이 제일 싫어해요. 이 말은 인간들의 어떤 율법 행위, 종교 행위도 자기 구원에 도움 되지 않는다, 즉 내 구원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얼마나 힘 빠지게 하는지를 사단이 알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예수 못 믿게 하는 거예요. 예수만 못 믿게 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나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고 세상을 안 믿는다는 말이에요. 모든 인간은 보이는 게 전부일 줄 안단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다 이루심을 자꾸 부정하는 것들이 우리 속에 감추어져 있어요. 우리도 모르게 딱 감추어놨다니까요. 기회만 되면, 동기만 주어지면 튀어나와요. 그래서 하나님께 반발하고 싶은 그것을 펌프질하고 부추기는 게 바로 십자가를 파묻어버린 종교의 세계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도 믿고 교회도 믿고 목사도 믿고 율법도 지키고, 십자가도 믿고 교회도 믿고, 성경도 믿고 나도 믿고 세상도 믿고. 그러나 그건 기독교가 아니에요. 믿음이란 말은 행위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나의 어떤 행함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교회들이 가르치는 게 뭐예요? 구원은 믿음으로, 은혜로 받고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다는 거예요. 그것도 차등 있는 상급이죠. 그래서 십일조를 강요하고 온갖 헌금 봉투를 교회 문 앞에 비치해 둡니다. 이 말은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상급,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신 그 상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이야기예요. 아니 알고 싶지 않은 겁니다. 영생이라는 복 말고 내가 원하는 복이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 외에 자기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다 이루심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모욕하면서 나는 내 하기에 따라서 상급을 받고 구원도 받겠다는 이게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아담의 주체성, 가능성이 발작하는 종교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두고 자크 엘륄이 뒤틀려진 기독교라고 했어요. 나중에 기회 있으면 한 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은혜의 세계, 은혜의 왕노릇이 있습니다. 입으로 은혜는 달고 사는데, 그렇게 은혜 받겠다고 새벽부터 잠도 안 자고 교회 뛰어다니고 산 기도 다니고 영빨 있는 목사가 왔다고 하면 우르르 쫓아다니고 하는데, 은혜가 뭔지를 몰라요. 그래서 은혜의 복음을 이야기하면 교인들 다 떨어져 나갑니다. 그럼 아무것도 할 게 없네.. 하면서. 사람들이 제일 못 참는 게 가만히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사실. 나는 이 교회 싫어.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줄 수 있는 교회, 나를 긍정해주고 나에게 동기 부여가 되는 그런 설교를 들을 거야..

 

(롬 3장)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건 엄청나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게 복음이란 말에요. 우리가 대체 무엇을 바치고 어떤 착한 일을 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겠습니까?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이 말 앞에는 ‘그리스도의 속량으로’가 있는 겁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칭의란 말이죠. 이게 믿어지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자 그런데 이게 믿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뭐가 있어야 합니까? ‘나는 불가능한 죄인 맞습니다. 나는 그 무엇으로도 의인이 될 수 없는 죄인 맞습니다. 내게서 나오는 건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구예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주변에 있던 창녀, 세리, 강도, 38년 된 병자 등입니다. 복음서에 그런 사람이 등장하는 게 괜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그들의 구주가 되십니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우리의 모든 죄를 간과하신다고 하죠. 못 본 척하신다는 겁니다. 이거 아니면 우리는 영원한 심판입니다. 자꾸 성화 강조하고, 상급 강조하는 사람들. 요즘 대부분 기독교가 그렇습니다만, 그들 계산법이 뭔지 아세요? 요즈음은 모르겠는데,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상업시간에 가르치는 회계장부에 보면 차변과 대변이 나옵니다. 그럼 착한 일 80개, 나쁜 일을 20개 하면 60개 많은 이걸 이쪽으로 넘겨줘서 착한 일로 봐준다는 거지요 성화는요, 거룩은요 이렇게 1톤짜리 큰 물탱크가 있다고 칩시다. 이 탱크 안에 똥물 한 방울 떨어지면 그 물 먹을 수 있어요? 하나님께는 조그마한 죄와 부정도 용납이 안 돼요. 갈라디아서에서 말하잖아요. 너희가 백 가지를 지키다가 한 가지를 못 지키면 다 못 지킨 거라고. 그런데 무슨 성화가 있어요? 겉으로 드러난 것만 아니라 우리 중심을 보신다는데. 우리 속에서는 악마가 하루에도 수도 없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데...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고 해요. 믿음이라는 말은 나의 행위는 아니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나는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의 앞에 설 수 없다는 그게 바로 나를 믿지 않고 예수를 믿는 거예요.그 십자가 은혜만 꼭 붙드는 것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겠다고, 나는 저 사람보다 상급을 더 받아야 한다고, 천국에 가면 백 평짜리 맨션 살아야 한다고 하는 놈들은 예수 안 믿는 거예요. 구원받을 믿음이 없단 말이에요. 예수를 믿는 게 뭔지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거예요.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레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어떤 율법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데도 구약의 십일조 절기 헌금 하자는 사람들은 뭐냐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약의 십일조는 그리스도가 십일조로 드려지심을 미리 예표한 거예요. 미리 보여준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십분의 일도 아니에요. 구약대로 정확하게 하자면 23.33%를 드려야 해요. 지금도 예배당 안에서 양 잡고 소 잡고 해야 한다니까요. 아니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지금 무슨 십일조를 드려요?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십일조로 드려지셨기 때문에, 다시 십일조를 하자는 건 예수님이라는 십일조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교회가 모르는 겁니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싶은 거지요 목사들이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한국 교회가 망한 게 십일조 때문이라고. 세금 한 푼 안 떼는 십일조. 대형 교회에는 주일에 은행 직원들이 나와요. 예수 안 믿는 은행 직원들이 계수기로 헌금을 세서 통장에 입금하고 가요. 그 돈이 쌓이고 쌓이니까 대형 교회들이 부동산 사들이죠. 며칠 전에 제가 인터넷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요, 서울 강남구에 있는 교회들 부동산을 공시지가로 합하면 35조랍니다. 교회가 이 짓들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사야서에 나오잖아요.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이게 한국 교회의 민낯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복음 듣고 복음을 안다는 분들은 교회에 연보 헌금을 잘 안 하죠. 복음 전하는 교회에는 목사 사례비도 안 나옵니다. 교인들 교회 봉사도 잘 안 해요. 복음 알면 됐다는 거죠. 이게 마귀가 다른 한쪽에서 하는 작업입니다. 팔공산 아래 제가 오래전에 다니던 교회가 있어요. 예배당이 낡아서 언제 날 잡아서 청소하자고 광고했더니 달랑 세 명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복음 안다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 유익, 자기 합리화에 써먹더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죠. 뭘 해도 죄고 안 해도 죄잖아. 죄인한테서는 죄만 나오는데.. 하면서 자기가 하기 싫은 건 안 하는 겁니다. 연보 안하는 분들 본래 돈 아까워서 안하던 사람들이에요 복음의 함정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러다 보니 복음을 안다는 목사들도 처음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날이 갈수록 적당하게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복음도 전하고 교회도 하고 싶고... 그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복음은 아예 접고 교회 하는 데만 전념해요. 제가 아는 그런 목사들 많습니다. 왜? 그래야 살아남으니까요. 그리고 교인들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서 나온 게 상급론. 이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잖아요 일단 교인들에게는 분명하게 동기 부여가 되니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지금 열심히 교회 봉사하고 충성하고 전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면 천국에서 상급이 달라진다고 하면 안 하시겠어요? 어떤 여학교 고3 교실에 써 붙여놨다고 하잖아요. 10분 덜 자면 남편이 바뀐다. 실제로 그렇게 붙여놨대요. 인간은 동기만 부여하면 죽기 살기로 합니다. 자기 몸까지 불사른다니까요. 그렇게 동기 부여가 되니까 죽자사자 교회에 충성하고. 그러면 목사는 교회 키우고 재정 쌓이니까 좋고. 노회 가면 자랑거리도 많고

 

그런데 결국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 없음이 폭로됩니다. 믿음이 뭐라고 했습니까?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데, 그 믿음이 없으니까 보이는 교회, 보이는 목사, 보이는 실적 보이는 세상밖에 몰라요. 이게 십자가 지신 주님과 어떤 관계도 가지지 못한 종교인들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에 나오는 은혜의 일에 전혀 무지할 뿐 아니라 그 은혜의 일에 참여되지도 못하고 끝까지 자기 의, 자기 사랑, 자기 영광에만 갇힌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게 오늘날 종교화된 기독교입니다. 뒤틀려진 기독교, 오염된 기독교. 한마디로 기독교가 아닌 거죠. 이런 믿음 없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영광을 욕되게 한다는 것을 교인이라는 그들 자신이 모르고 있어요.

 

한 마디로 은혜 아래 있지 않은 자는 은혜의 일에 참여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리 교회에 충성하고 아무리 많은 헌금을 바쳐도 건축 헌금 몇십억을 바쳐도 은혜의 일에 참여되지 못해요. 어떤 열심을 부려도 어떤 종교성을 발휘해도 결국 자기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묻고 싶어요 교회 그렇게 키우고 확장해서 뭐 하려는 겁니까? 결국 그 교회에 내가 투사된 거예요. 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가 커진다는 말은 내가 확장된 겁니다. 그게 우상 섬김이에요. 그래서 신앙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나입니다. 큰 교회에 수십 년을 다니면 다들 자기가 예수 잘 믿는다고 착각해요. 천국은 따논 당상인줄 알아요 그거 내가 나를 속이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의 가장 큰 적은 자기라고 하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자기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은혜라는 말부터 자기 부정을 전제해요. ‘나는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게 은혜예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불쌍히 여김 외에는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이런 죄인의 괴수에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딤전1:15)

 

사도 바울 같은 그런 대 사도가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편지에서 뭐라고 합니까?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은 것은 오직 오고 오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만이 구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죄인의 괴수로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는 거예요. 이렇게 나는 은혜 받을 자격이 1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게 바로 은혜받은 자에게서 나오는 자기 부인이고 또한 그 은혜는 끝까지 갚을 수 없어야 은혜로 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안 갚는다고 다그치는 목사들이 많잖아요. 제가 장담하건대 하나님의 은혜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단의 일꾼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사도가 뭐라고 합니까? ‘같은 간절한 마음을 디도에게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 말은 디도가 은혜의 일에 참여된 것이 디도의 의지나 결단이나 열심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되었다는 말이에요. 동일한 믿음, 동일한 은혜 아래 있는 자들만 은혜의 일에 참여될 수 있다.. 인간의 열심은 환경과 대상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은혜의 일은 그 주체가 은혜요 믿음이란 말이에요. 그리스도의 은혜, 그리스도의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목적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그 은혜의 일에 참여된 자들은 어느 누구도 자기를 앞세울 수가 없다. 자기 공로를 내세울 수 없다. 나는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이 아니란 말입니다.

 

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로마서 14장 7절에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는 말씀이 있어요.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해요. 우리는 24시간 나를 위해서 살고, 내 새끼를 위해서 살고 내 이름을 위해서 살죠. 그런데 사도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도 자기를 위해서 죽는 자도 없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말씀이 뭔가 하면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이 없이 주께서 우리를 이렇게 여겨주신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 되었기 때문에. 나는 내 것이 아니고, 내 인생을 사는 게 아니고 주를 위한 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우리의 정체성이에요. 이게 진짜 현실이라니까요. 이런 현실을 살아내는 자들이 은혜의 일을 맡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주를 위한 인생으로 여겨주십니다. 이게 행복이며. 이게 평안이에요. 이게 우리의 자유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자신을 분석하고 파헤쳐봐야 나오는 게 없어요.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성경 말씀이 옳습니까? 성경 말씀이 진리예요. 이게 진짜 현실이라니까요. 로마서 14장 7절 말씀이 진짜현실이란 말이에요. 이게 하나님이 아시는 진짜 나예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나가 그리스도 안에 있단 말입니다.

 

이런 우리를 바울은 본문에서 나의 동무라고 하고 동역자라고 하고 교회의 사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동역자,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여러분이에요. 여러분은 그렇게 하나님 은혜의 일을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불려 나온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스도의 자랑,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그 엄청난 직분과 그 은혜의 영광을 잊지 마시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디도를 디도 되게 하신 하나님, 바울을 바울 되게 하신 그 하나님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사도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고후 8장)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부요함, 주님이 나누어주신 이 믿음의 부요함, 은혜의 부요함, 그 하늘의 보화를 안다면 잠시 우리가 사는 인생의 불편함이나 부족함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거예요. 세상 사는 것과 다른 완료된 그 무엇이 우리에게 있단 말입니다. 그 무엇이 뭐예요? 소망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현실보다 더 진짜 현실, 그 영원한 현실인 하늘 소망, 그 사랑의 나라가 진짜 현실이에요. 보이는 건 곧 없어질 것들이에요. 우리 인생이 백 세라고 해도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1초도 안 돼요. 우리가 숨이 끊어져서 육신을 벗는 순간 우리는 시간에서 영원으로 튕겨 나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 세상과 역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가르치기 위해서 잠시 펼쳐진 무대일 뿐이에요. 그기고 그 세상은 마지막 성도의 목이 베어지면 그 역할을 다하고 불타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고 사람들의 종이 되라. 그게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마 20장)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천국의 삶의 원리입니다. 너희는 저희와 달리 이 세상 속에서 그 천국의 삶을 살아보라는 거예요. 이것이 성도의 특권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는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다 같이 나누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동일하게 확인하고 균등하게 하라는 뜻이에요. 그 엄청난 사랑을, 죽음 안에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사랑을 우리가 거저 받았기 때문에 거저 나누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연보의 정신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연보, 성도의 나눔은 그 자체가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게도니야 교회가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자원하여 힘에 지나치도록 연보를 한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일, 그 특전에 감사함으로 참여된 것이고, 그들은 그 자체로 복을 받은 것입니다.

 

끝으로 본문에 대한 설명을 좀 더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6절, 17절입니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를 다녀와서 바울에게 교회 소식을 전한 디도 이야기가 나와요. 그에게는 바울과 같이 고린도 교회를 위한 간절함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간절함을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바울이나 디도가 한 모든 일이 십자가 안에서의 자기 부인을 통해서 오직 주님의 일하심만 오롯이 드러내고 있었다는 게 본문 이야기예요. 그들이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수고하고 고생했다는 게 아니고 그것들을 통해서 드러내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오로지 주님의 은혜, 십자가의 다 이루심입니다. 그래서 연보하는 것만 아니라 성도가 사업에 실패해서 어려움을 겪는 것도 성도라면 은혜의 일에 참여된 것이며 누구는 건강을 잃어서 힘든 나날을 살게된 것도 은혜의 일인 거에요 성도라면 그렇습니다. 그들은 다 주님의 은혜의 필연성만 오롯이 드러내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에서 21절을 보면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데 여러 교회로부터 복음으로 칭찬받는 신실한 사람이 나와요. 그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제 생각에는 바울과 동역한 누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으니까 일부러 추측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했다.. 복음을 전하고 연보를 거두고 운반하는 모든 것들이 은혜의 일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 또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다고 하죠. 이 말씀을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모든 일에 열심이 있음을 우리가 여러 번 확인하였고 그가 여러분을 크게 신뢰하고 있으므로 더욱 열심을 낼 것입니다’..

 

자 이렇게 세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연보의 일을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하므로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의 자랑의 증거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럼, 이 연보의 일에 이렇게 신실한 세 사람을 보내는 이유가 뭘까요? 그게 20절과 21절에 나옵니다.

 

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21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오해와 비방이 많았어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교회마다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바울을 비방하고 그를 오해하도록 여러 가지 나쁜 소문을 퍼뜨렸지요. 그래야 바울이 전한 복음이 훼방 받기 때문이죠. 심지어는 바울이 연보를 거두어 착복했다는 소리까지 들렸어요. 그래서 이 은혜의 일이 훼방 받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조심할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신실한 사람 셋을 고린도 교회에 보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조심할 게 많아요. 교회 일을 보면 은혜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그 자리, 그 은혜의 일을 육체의 일로 바꾸려고 온갖 궤계를 꾸민단 말입니다. 특히 돈이 개입되면 교회가 분란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 교회야 제가 십수 년간 한 번도 사례비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문제가 생길 소지가 없는데, 얼마 전에 그 유명한 박영선 목사의 퇴직금 사건도 결국 돈 문제거든요. 그가 전한 복음이 마지막에 돈 몇 푼 때문에 가리어지는 게 안타깝지만, 우리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역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고 하나님만 마무리 하시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끝으로 빌립보서를 함께 읽으면서 오늘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빌 2장)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로와 교제와 긍휼과 자비, 이 모든 은혜의 일에 더욱 열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빌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맡기신 그 은혜의 일이 무엇이며 그 은혜의 일이 어떤 주님의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이제 우리가 알았습니다. 그 은혜의 일에 참여된 영광과 특전을 누리고 자랑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연보로 말미암아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 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사랑이 또한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증거되고 또 균형 있게 나누어지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은혜의 일에 우리 모두 한마음이 되게 하시고 그리하여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만 오롯이 드러나는 복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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