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7절 말씀에 보면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흙에 불과한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생기가 들어감으로 생령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피조물인 줄 알고 피조물의 생명과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사는 행복이며 하나님만이 자신의 계획대로 이루어 가시는 창조주이심을 드러내고 증거하며 기뻐 찬양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생령이 된 인간입니다.
말씀이 있으면 살고 말씀이 없는 것, 그것이 곧 죽음이었습니다. 말씀이 있으면 선이고 말씀이 없으면 그것이 곧 악이었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답게 사는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인간으로 이 말씀을 버리게 한 것입니다. 말씀을 버린다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다 자기의 생각을 끼워 넣게 한 것입니다. 자신이 잘 되면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 하나님과 단절이 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되는 무서운 죄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단의 노림수에 속아서 하나님의 말씀에다 자신의 꾀를 집어넣은 것이 죄가 된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인간 자체가 죄입니다. 인간의 사상과 사고, 즉 형성되어 있는 인격 자체가 죄요 죄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움직이기만 해도 죄가 발생되는 죄의 기계요 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대로 육체라고 합니다.
육체라는 말은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내가 중심이 되어 산다는 말입니다. 내가 잘 되어야 하고, 내가 인정받고 대접받아야 하고, 다른 자는 다 죽어도 나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정신 속에 사는 자를 육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은 이미 하나님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삶의 지혜와 방법을 하나님께서 찾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찾게 되는데 그것이 힘의 원리입니다.
힘이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가 있고, 힘이 있어야 죽음을 이길 수 있고, 힘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진리고 선이며 상식입니다. 그래서 힘 있는 자가 대접을 받고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힘의 원리가 주장되던 시대가 노아의 시대입니다.
여자는 아름다워야 하고 남자는 네피림이 되어야 합니다. 네피림이란 키가 크고 건장한 장부, 골격이 크고 지혜가 뛰어나고 모든 자를 제압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여자의 아름다움과 네피림이라는 건장한 남자가 만나서 자식을 낳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자’라고 4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단이 만들어 낸 작품입니다.
하나님을 빼 버리고 말씀의 가치를 떠나 세상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보다 눈부시게 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찬란하고 화려하며 매료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힘 있는 자가 되고 영웅이 되고 모든 자들이 인정하고 부러워하며 대접받는 그러한 자가 되기 위해서 생각하고 계획하며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것을 하나님은 항상 악할 뿐이라고 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절에서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 버림으로 무엇이 진정한 힘인가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인간들이 추구하고 애타게 집착하는 세상의 조건들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힘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보여주시기 위해서 노아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피조물의 자리를 떠나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세상도, 골격의 장대함이나 아름다운 미모도, 재물이 많은 부자도, 세상의 권력을 가진 권세자도, 인간들이 쌓아올린 문명의 산물도, 모두 다 물거품처럼 무너지고 사라집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은 아름다움도 아니고 인간이 가진 조건은 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과 힘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입혀진 노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자로 보였습니다. 이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외모 때문이 아니라 죄 된 인간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신 은혜만으로 살 수 있음을 깨달은 노아의 마음과 정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노아가 아름다운 자였고 노아를 아름답게 만든 은혜가 홍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이 선호하고 꿈꾸는 네피림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힘이라는 것입니다. 네피림이 힘이라고 주장하던 사단의 말은 모두가 거짓말입니다.
육체가 중심이 되어 세상에서 강력한 힘만 있으면 하나님 없어도 실패하지 않고 죽지 않고 성공 자로 영광을 누리며 살 것이라던 사단의 말은 거짓말로 드러난 것이 노아의 홍수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사단은 지금까지 네피림이 힘이라고 사람들을 꾀고 있습니다. 내가 힘 있는 자가 되어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영웅이 되기 위해서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높아지고 큰 자가 되기 위해서 지식과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탐하고 있습니다. 명예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 육체로 사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셨고 은혜로 오셨습니다. 자신이 삶의 중심이 되어 사는 육체가 된 인간의 시각으로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인 예수님은 자신들이 기다리고 찾던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주장하는 예수,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는 예수는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바라는 메시아야는 로마 나라에서 독립시켜 주고,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경제 대국이 되게 하여 모든 나라 위에 군림하게 하는 그런 메시야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이스라엘은 가나안 백성을 네피림의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민13:33).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바로 그러한 네피림의 후손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가진 유대인들이었기에 하나님의 은혜인 십자가를 주장하는 예수는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라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네피림의 후손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삶의 중심이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육체가 된 인간이기 때문에 힘의 원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에게 힘은 교회입니다. 많은 숫자의 교인과, 웅장한 예배당 건물과, 부족함이 없이 쏟아져 나오는 헌금이라는 네피림만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목사의 능력을 말하는 힘입니다. 이것이 없는 목사는 아무리 예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제대로 선포해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쫓겨나야 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실정입니다.
교인들의 힘은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돈이 있는 교인을 교회가 찾고 알아주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인정을 받고 대접을 받기 때문에 돈이 곧 힘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자기의 사업 잘 되도록 도와주는 그러한 예수를 원하지 십자가에서 죽은 힘 없는 예수는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정신으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러한 말을 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여기 말씀에는 자기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네피림이라는 힘의 원리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 이것이 말씀입니다. 다만 예수님만 자랑되고 증거되면 됩니다. 이것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십자가의 도라는 말씀만 살아서 주장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원히 남을 진정한 힘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