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오랜 밤을 괴롭혀온 불면증 외에도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한 몇 가지 잔병이 늘 동반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영양소 결핍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골감소증인데, 이 때문에 한동안 건강기능식품에 심정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종합 멀티 미네랄 비타민 같은 복합 영양제가 복용하기에도 편리하고 몸에도 두루 좋으리라 막연히 신뢰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몸의 피로나 수면의 질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의구심이 생겨 개인적으로 대사 메커니즘을 공부하게 되면서 놀라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신체 구조는 참으로 오묘하여 각종 영양소를 단순히 한 알에 한데 모아 뭉쳐놓는다고 해서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별 영양소가 몸속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흡수되는지에 대한 생리적 배려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늘 각성 상태에 시달리는 저 같은 불면증 환자에게 마그네슘 결핍은 교감신경을 지속적으로 활성화시켜 뇌가 휴식으로 진입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곤 합니다. 과거에는 마그네슘이라는 이름만 붙어 있으면 모두 동일한 효능을 내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니 산화 마그네슘이나 스테아린산 마그네슘 등 그 종류와 결합 형태가 무척이나 다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복용하던 종합 영양제에는 한정된 공간 안에 최대한 많은 종류의 성분을 밀어 넣어야 하기에, 상대적으로 부피가 작고 가격이 저렴한 산화 마그네슘 계열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대사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정작 우리의 혈뇌장벽을 통과하여 중추신경계에 직접적으로 안정 작용을 공급하는 것은 마그네슘 트레오네이트라는 정교한 형태이며, 신체의 전반적인 근육 이완과 스트레스 완화에 유익을 주는 것은 마그네슘 글리시네이트 계열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품질의 원료들은 기본적으로 분자 구조의 부피가 커서 복합 영양제 안에 다른 성분들과 함께 다량으로 배합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원가 측면에서도 상당한 고가에 속합니다. 소비자가 이러한 세부적인 흡수율과 원료의 차이를 모른다면, 제조사 입장에서는 굳이 비용이 많이 드는 트레오네이트를 쓰기보다 화려한 대중 광고를 통해 마그네슘 함유라는 상징성만 판매하는 편이 상업적으로 훨씬 유리했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제가 종합 복합 영양제 전부를 알지 못하기에 제가 복용했던 종합 영양제에 한정 관련하여 쓴 글이니, 종합 영양제가 자체가 다 나쁘다고 오해하지는 말아 주세요.)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수십 년간 눈에 보이는 편리함에만 의존해 왔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마음 한구석에서 묘한 허탈감과 분함이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몸의 대사 해독 기관에 무리를 주는 복합제를 기피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뼈 건강에 유익하다고 알려진 비타민 K 역시 혈관의 석회화를 방지하고 칼슘을 골격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역할은 K2가 담당하는데, 제가 복용하던 종합제에는 K1만 들어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번거롭더라도 단품으로 비타민 K2를 찾아 따로 섭취하고 있습니다. 암 예방과 세포 본연의 건강에 기여한다고 알려진 비타민 B3의 경우에도, 일시적인 안면 홍조를 유발하는 일반 니코틴산 형태보다는 체내 순응도가 높은 나이아신(니코틴산)아마이드 형태를 단품으로 선택하는 것이 저의 연약한 체질에는 훨씬 지혜로운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내면의 흡수율을 도외시한 채 그럴싸한 포장과 광고로 소비자를 현혹하는 시장 구조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복합제에 대한 깊은 불신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전 욕조에 미지근한 물을 받아놓고 반신욕을 즐기던 평화로운 시간에 이와 무척이나 닮은 일상의 풍경을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잠시 위안을 얻고자 유튜브에서 7080 명곡 모음집이라는 종합 영상을 재생했습니다. 그러나 첫 곡이 흘러나오는 순간 조용히 헛웃음을 짓고 말았습니다. 제가 청춘의 시절부터 나를 위로해줬던 이문세의 명곡들을, 어느 정체불명의 가수가 자신의 독특한 가창력과 창법으로 전곡을 재해석하여 혼자 부른 컴필레이션 영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원곡이 품고 있는 특유의 아련한 감성과 영혼을 어루만지는 섬세한 결은 완전히 증발해 버린 채, 그저 외형적인 멜로디만 흉내 내는 그 소리는 저에게 감동이 아닌 소음으로 다가왔을 뿐입니다. 결국 저는 다소 수고스럽더라도 욕조 밖으로 손을 뻗어 이문세 고유의 단품 영상을 하나하나 찾아 재생하게 되었습니다. 제 영혼이 진정으로 갈급해했던 것은 온갖 목소리가 기괴하게 섞인 종합 예술이 아니라, 그 가수의 순전한 목소리 단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문득, 시중의 종합 음악 영상이야말로 생리적 흡수율을 무시한 종합 영양제의 속성과 너무나도 닮아있다는 사색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러한 일상의 소소한 사유를 종교적 담론의 공간에서 꺼내어 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작은 파편들 속에서도 십자가가 지닌 절대적 진리의 흔적을 발견하고 깊은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사후의 두려움과 종교적 결핍을 교묘하게 자양분 삼아 성도들의 영혼을 정신적으로 가스라이팅하고 내면의 에너지를 착취하는 그릇된 교주들의 모습을 목도하게 됩니다. 성경적 비유를 고찰해 보면, 예레미야나 에스겔 등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중을 남편을 배반하고 이방 우상을 따르는 음녀나 창녀로 비유하셨고,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들의 이익을 취한 거짓 목자들을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겔 16:35, 겔 34:2).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성도들의 영혼을 가두고 종교적 열심을 채찍질하는 이들을 영적 포주에, 그리고 그 통제 아래에서 천국이라는 보상을 얻기 위해 스스로의 영혼을 팔며 피나는 위선적 노력을 기울이는 상태를 영적 창녀의 처지에 비유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종교적 영혼들은 율법이라는 무거운 채찍을 맞으면서도, 그것이 신성한 안식처로 향하는 유일한 정로라 맹신하며 종교적 행위에 몰두하곤 합니다. 억압과 고행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도리어 기묘한 영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악순환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인도자들이 제공하는 영적 영양제는, 외형적으로는 온갖 도덕적 훈계와 도덕주의적 성화의 당위성들을 달콤하게 버무려 놓았기에 언뜻 보기에는 무척이나 수려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맹이가 빠진 7080 종합 음악 영상처럼, 죄인을 근본적으로 살려내는 단품으로서의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경건의 모양을 완벽하게 흉내 내지만, 십자가의 본질적인 진수를 소외시킨 채 오직 인간의 책임과 성실함만을 강조하는 가르침은, 결국 영혼의 대사에 치명적인 독소로 작용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그저 종교적 액세사리나 장식품으로 전락시킨 채, 자신들의 교단과 체제를 열심히 따르고 맹종하며 재물을 바쳐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속삭이곤 합니다. 혹은 인간의 본성적인 양심에 따라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감미로움으로 영혼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수많은 영혼이 이러한 음성에 취해 눈을 감은 채 맹목적인 걸음을 내딛는 현실을 볼 때, 이는 영적 포주에게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과 영혼의 자유를 통째로 저당 잡힌 안타까운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슬픈 조망을 해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사랑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전 글에도 썼듯이 저는 위선일지라도 사랑을 추구하려 합니다. 다만 근본적으로 참된 사랑은 오직 창조주만의 신성한 주권이며 피조물은 그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위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의 생수가 내면에 가득 채워져 넘칠 때에만 인간은 하나님 사랑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 사랑이 이웃에게 베풀어 진다고 믿습니다. 만약 은혜가 아닌 내 안의 도덕적 자산이나 의지를 쥐어짜내어 베푼다면 그것은 위선이 될 위험이 큽니다. 스스로 의를 쌓으려는 열심은 도리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를 부인하는 안타까운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사랑의 극치는 다름 아닌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지신 과거 완료형의 보편적 용서에 있다고 믿습니다 (요일 2:2). 이 극치의 사랑만이 우리 안의 생존 본능을 초월해서 성령의 참된 열매를 맺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갈 5:22). 내면에 일말의 뿌듯함도 남기지 않은 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나의 자아가 삶의 고난으로 철저히 부인당하고 오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만 남을 때 비로소 가능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갈 2:20). 이런 생각은 자아의 한계와 매일 부딪히며 살아가는 저 개인의 얕은 경험에서 나온 서툰 고백일 뿐입니다. 저와 다른 삶의 궤적을 지니신 분들에게까지 이 미천한 생각이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겐 복잡하지 않은 예수 십자가 단품만 있을 뿐이기에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