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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右尹宋公碑銘 - 宋汝悰

작성자송대현|작성시간26.06.06|조회수30 목록 댓글 0

贈右尹宋公碑銘 - 宋汝悰

公諱汝悰。字彥蘊。其先礪良人也。礪良之宋。自麗顯。有諱叔文。官至政堂文學。八代而至諱演孫。以中廟舊學。累遷至通政大夫韓山郡守。韓山生三子。俱以文行樹立。其季諱世珩最貴。爲吏曹判書兼同知經筵。判書生諱昌。補靑巖道察訪。以公征倭勳。追贈嘉善大夫刑曹參判。是實生公。公生十二。喪大夫人。奉先公事繼母撫弟妹。以孝友聞。長而于思岳立九尺。鄕黨皆曰判書有孫。捐去俎豆事。自力於弧矢。累捷於鄕而累不利。歲壬辰。倭賊下海長驅。擧國莫不奉頭爲自全計。公毅然自奮。挺身赴樂安郡守申浩幕。浩素器公。悉以郡事委公。及浩以左水使李公舜臣部署。討倭于閑山島。公未嘗一日不在軍中。及舟師大捷。李公欲得獻馘者。難其人。時大駕蒙塵。三京失守。沿路之賊。複屯相望。奔問官守者。輒以道梗中道還。李公聞公素蓄積徇國心。檄公授狀 啓。公輾轉賊營。晝伏夜動。九死而得達行在。上卽引見。躬問邊上事。賜酒勞問甚備。朝廷皆比之顏平原之李平也。卽除西部主簿。自上傳于吏曹曰。全羅左水使軍官宋汝悰。間關跋涉。千里遠來。至爲可嘉。南方守令中可補有闕處。吏曹卽擬除南平。兵曹又啓曰。鹿島前萬戶中丸死。當極擇其代。宋汝悰雖已除南平。曾立功舜臣管下。諳習水戰。以此人代之。傳曰允。遂轉鹿島萬戶。公到任上訖。以船爲家。日討軍實。甲午四月。朝廷別設武擧於舟師。以慰水軍將士。公中乙科第七名。時年四十二矣。歲丁酉。李公舜臣以言去。元均代爲統制。賊以其年七月陷閑山島。舟師盡覆。而公船獨完。人皆曰神明所扶持。及李公起廢。復統舟師。收合餘燼。繕完未畢。而賊船二百艘已到碧波前洋。我船僅十艘。而無不賈勇先登。一當百者。捷奏。公爲上功。及李公進駐寶花島。聞興陽之賊四出殺掠。以公爲伏兵將。給精兵百餘。公銜枚出入。引還被擄男女。勦殺賊兵無算。賊不得樵采。遂移順天。戊戌七月。李公又令公領蒙衝六艘。把守水路。公卽引發。隱泊鹿島前洋。賊船十艘乘海霧潛至。將爲夜驚計。公卽詗知。擧帆直進。廝殺無遺。凱還。李公卽褒啓。唐將亦賞銀布甚厚。十一月。李公大會舟師。鏖戰于露梁。賊兵大敗。海水爲赤。中興戰功。此爲第一。而公功又爲諸將先。己亥。除丹城縣監。庚子。特加折衝。以酬前勞。入京謝恩。拜司僕將。辛丑。出爲臨淄僉使。瓜滿。拜興陽縣監。乙巳。賜宣武原從功臣錄券。追贈先公。頃之拜昆陽郡守。以事罷。丁未。除慶尙右道水軍虞侯。在任。奔先公喪。哀疚成疾。己酉八月。卒于喪次。享年五十七。將葬。以長子震慶原從功。追贈嘉善大夫漢城府右尹。以其年十一月庚辰。葬于象頭山辛坐乙向之原。公稟性夷粹。操心謹厚。待人物。都削邊幅。恤親戚。多待而擧火者。謙卑巽順。始終如一。而及至臨陣對敵。挺然不撓。八年海國。大小六十餘戰。矢石落左右。略不動色。奮褊裨提孤舟。所立猶如是。使其將三軍當一面。則其成就豈有量哉。公配貞夫人金氏。學生友頤之女。生四男一女。男長曰震慶。中①亥武科。拜黔毛浦萬戶。娶主簿柳謹之女。生一女。次曰震綱。娶守門將柳慶胤之女。生一男。次曰震善。中壬寅武科。拜呂島萬戶。娶學生曺慶膺之女。生一男一女。次曰震祿。娶學生田翰鳳之女。女適鄭德鳳。先公亡。有二男云。銘曰。仁者必有勇。而勇者不必有仁也。爲臣則忠。爲子則孝。如其仁。生亦不願。死亦不動。如其勇。智將固可尙。而福將勝於智將也。知申浩之可以托身。知李公之可與有爲。而樂就之。不可謂不智也。奮白手取金印。其生也榮。其死也樂。不可謂無福也。象頭之麓。體魄所藏。萬古風聲。一片石章。

① 乙 : 己

한국문집총간 > 수은집 > 睡隱集卷四 > [墓碣] > 睡隱 강항(姜沆)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1

 

증우윤송공비명

공의 휘는 여종(汝悰), 자(字)는 언온(彦蘊)이며, 그 선조는 여산[驪良] 사람이다. 여산 송씨(송대립,희립,정립)는 고려조에서부터 현달(顯達)하였는데, 휘가 숙문(叔文)인 분은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8대를 지나 휘가 연손(演孫)인 분은 중종조에 구학(舊學)에 힘써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통정대부(通政大夫) 한산군수(韓山郡守)에 이르렀다.

군수 공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학문을 이루었다. 막내는 휘가 세형(世珩)으로 가장 귀하게 되었는데, 이조판서 겸동지경연사(吏曹判書兼同知經筵事)가 되었다.

판서 공이 휘가 창(昌)인 분을 낳았는데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을 지냈고, 공이 왜적을 정벌한 공훈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이 분이 공을 낳은 분이다.

공은 태어나 12세에 대부인(大夫人)의 상을 당했는데, 부친을 받들고 계모(繼母)를 섬기며 동생과 누이들을 잘 어루만져 효성과 우애로 알려졌다. 자라서는 수염이 많고 산악처럼 우뚝하여 (키가) 9척이나 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판서공(判書公)에게는 자손이라 할만한 이가 있으니 제사를 거르지는 않겠구나.」라고 하였다.

스스로 호시(弧矢)를 단련하는데 힘써서 여러 번을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누차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임진년에 왜적이 바다에서 내려 깊이 쳐들어오니 온 나라가 머리를 감싸쥐고 자기만 온전하게 하려는 계책들을 세우니 공이 의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몸을 빼쳐 낙안군수 신호(申浩)의 막하로 들어갔다. 신호는평소에 공을 그릇으로 여겼기에 모든 고을의 일을 공에게 위임하였다. 신호가 좌수사 이순신(李舜臣) 공에게 소속되어 한산도에서 왜적을 토벌할 때에 공은 단 하루도 군중(軍中)에 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주사(舟師)가 대첩을 거두고서 이공(李公)이 수급을 바치러 갈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데 적임자를 얻지 못하였다. 이 때에 대가(大駕)가 몽진(蒙塵)하고 세 도읍을 모두 지키지 못하여 연로(沿路)의 적들이 겹겹이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주둔하여 문안하러 달려가던 관원들도 문득 길이 막혀 중도에 돌아오게 되니 이공(李公)이 평소 공이 순국(殉國)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공을 불러서 장계를 주었다.

공이 왜적의 진영을 돌고 돌아 낮에는 숨고 밤에만 움직이기를 계속하여 구사일생으로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상께서 불러보시고 친히 변방의 일을 묻고서 술을 하사하시어 수고를 위로하는 것이 매우 각별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모두들 안 평원(顔平原 평원태수 안진경)과 이평(李平)의 관계에 비유하였다. 즉시 서부 주부(西部主簿)에 제수하였는데, 상께서 이조(吏曹)에 전교하시기를, 『전라좌수사의 군관 송여종(宋汝悰)은 험한 길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천리 먼 길을 왔으니 지극히 가상하다. 남방의 수령 중에 빈 곳이 있으면 보직케 하라.』하시어 이조에서 즉시 남평현감(南平縣監)을 제수할 것을 의망(擬望)하니 병조에서 또 아뢰기를, 『녹도(鹿島)의 전 만호(前萬戶)가 탄환에 맞아 죽었으니 마땅히 그를 대신할 사람을 가려 뽑아야 하는데 송여종이 비록 이미 남평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일찍이 이순신의 관하에서 공을 세웠고, 수전(水戰)에도 익숙하니 이 사람으로 대신하게 해야겠습니다.』하니, 윤허한다고 하시어 드디어 녹도만호(鹿島萬戶)로 바뀌었다.

공은 부임하고 나서부터 전선을 집으로 삼아 날로 다스리는데 힘써서 군대가 충실하여졌다.

갑오년 4월에 조정에서 특별히 주사(舟師)를 위한 무과를 설치하여 수군에 소속된 장졸들을 위무(慰撫)하였는데, 공은 을과(乙科) 7등으로 합격하니 이 때에 공의 나이 42세였다. 정유년에 이순신 공이 모함을 당하여 잡혀가고 원균(元均)이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었는데, 왜적이 그 해 7월에 한산도(閑山島)를 함락시켰다. 주사가 모두 무너졌으나 공의 전선은 홀로 완전하니 사람들이 모두 신명(神明)이 도우신 것이라 하였다.

이공(李公)이 기복(起復)되어 주사를 통솔하게 되어서 타다 남은 전선들을 수합하여 완전하게 수리하였는데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적선 200여 척이 이미 벽파진(碧波津) 앞바다에 도달하였다. 우리 전선은 겨우 10척에 불과하였으나 일당백의 용기를 떨쳐 앞장서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승첩을 아뢰는데 공은 수공(首功)이 되었다.

이공이 보화도(寶花島)로 나가 주둔하는데 흥양의 왜적들이 사방으로 나와 살인하고 약탈한다는 것을 듣고는 공을 복병장(伏兵將)으로 정하여 정병(精兵) 백여 명을 주니 공이 매(枚)를 물리고서 (적진을) 출입하며 포로로 잡힌 남녀들을 유인해 돌아오게 하고 적병을 셀 수 없이 쳐죽이니 왜적이 땔감을 구하지 못하여 결국 순천(順天)으로 옮겨갔다.

무술년 7월에 이공이 또 공에게 명령하여 몽충(蒙衝 전선) 6척을 거느리게 하여 바닷길을 파수(把守)하라하니 공이 즉시 출발하여 녹도 앞바다(절이도전투)에 숨어 정박하고 있다가 적선 10척이 바다에 안개가 낀 것을 틈타 몰래 들어와서 장차 야경(夜驚)하려는 계책을 꾸미기에 공이 즉시 염탐하여 알아내고는 돛을 올리고 곧바로 나아가 남김없이 다 무찌르고 개선하여 돌아왔다. 이공이 즉시 포상하는 장계를 올렸고, 명나라 장수도 또한 은화와 포목(布木)으로 상을 주는 것이 매우 후했다. 11월에 이공이 주사(舟師)를 크게 모아 노량(露梁)에서 싸웠는데 적병이 크게 패하여 바닷물이 붉게 변하였으니 중흥의 전공으로는 이것이 제일이었으며, 공의 공로도 또한 여러 장수들보다 앞섰다.

기해년(己亥年, 1599)에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제수받았고, 경자년(庚子年, 1600)에는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절충장군을 가자하기에 서울에 들어가 사은(謝恩)하니 겸사복장(兼司僕將)을 제수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에는 외직으로 나가 임치첨사(臨淄僉使)가 되었는데 임기가 만료되자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제수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605)에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을 하사받고 부친에게 (벼슬을) 추증하였다. 얼마 후에 곤양군수(昆陽郡守)를 제수받았으나 일이 있어서 파직되었다.

정미년(丁未年, 1607)에 경상우도 수군우후를 제수받았다가 재임 중에 부친이 돌아가시어 분상(奔喪)하였는데 슬픔과 괴로움이 병이 되어 기유년(己酉年, 1609) 8월에 상복을 입던 중에 돌아가시니 향년 57세였다. 장사를 지낼 즈음에 맏아들 진경(震慶)의 원종공훈(原從功勳)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고, 그 해 11월 경진일(庚辰日)에 상두산(象頭山)의 신좌(辛坐) 을향(乙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품성이 온화하고 순박하며 마음씀이 근후(謹厚)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모두 겉치레[邊幅]를 없앴으며, 친척들을 구휼하자 (이를) 기다려 끼니를 끓이던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겸양하고 공손히 따르기를 시종 한결같이 하였다. 군진(軍陣)에 임하여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에는 몸을 빼쳐 흔들리지 않으니 8년을 수군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대소 60여 회의 전투에서 시석(矢石)이 좌우에 떨어져도 전혀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편비(褊裨)들을 분발하게 하고 외로운 전선을 이끌고서 (공훈을) 세운 바가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공에게 삼군(三軍)을 통솔하여 한쪽 방면을 담당하게 하였다면 공의 성취가 어찌 많지 않겠는가?

공의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김씨로 학생 우이(友頤)의 딸인데,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진경(震慶)으로 을해년(乙亥年 → 강항의 생몰연대를 보면 己亥年(1599)의 실수로 보인다)에 무과에 합격해서 검모포만호(黔毛浦萬戶)를 지냈으며, 주부(主簿) 류근(柳謹)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

차남은 진강(震綱)으로 수문장(守門將) 류경윤(柳慶胤)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고,

그 다음이 진선(震善)으로 임인년(壬寅年, 1602)에 무과에 합격하여 여도만호(呂島萬戶)를 지냈는데, 학생 조경응(曺慶膺)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그 다음이 진록(震祿)으로 학생 전한봉(田翰鳳)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딸은 정덕봉(鄭德鳳)에게 시집갔는데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들 둘을 두었다고 한다.

비명은 이렇게 짓노라.

어진 이는 반드시 용감한 것이나

용감한 이가 꼭 어진 것은 아니요,

신하된 이로써 충성을 다하고,

자식된 이로써 효성을 다하였으니,

이는 인(仁)과 같고,

살아서도 바라지 않고,

죽어서도 움직이지 않으니,

이는 용(勇)과 같도다.

지혜로운 장수는 진실로 숭상할만하나,

복장(福將)은 지장(智將)보다 낫도다.

신호(申浩)가 (공이) 몸을 의탁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이 충무공이 (공이) 함께 일을 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즐겨 그를 취하였으니,

지혜롭지 않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맨손으로 떨쳐 일어나 금인(金印)을 취하였으니,

그 삶이 또한 영광이요,

그 죽음이 기쁨이니,

복이 없다 말할 수 없을 것이라.

상두산(象頭山)의 비탈은 몸과 혼이 묻힌 곳이니,

만고의 명성을 한 조각의 비석에 새겨 밝히노라.

【정읍시 칠보면 향토사(조선시대 태인현 고현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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