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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칼럼

(너머의 길녘 43) 우상의 황혼 - 이우근

작성자nkwook|작성시간26.06.18|조회수24 목록 댓글 0

바그너의 대표적 악극(樂劇)인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 등 4부로 구성된 대규모 연작이다. 연주시간이 16~17시간에 이르기 때문에, 보통 나흘 동안 나뉘어 공연된다.

‘신들의 황혼’은 매일 저녁 하늘에 떠오르는 저녁노을이 아니다. 우상의 신들이 지배하는 옛 시대의 종말, 새 시대의 탄생을 예고하는 역사의 징후다. 황혼은 한날의 끝이자 새날의 새벽을 알리는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바그너는 ‘신들의 황혼’에서 위선과 자기기만(自己欺瞞)의 권력이 무너지고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가는 구원 곧 정화(淨化)를 그리고자 했다. 바그너에 깊이 매료된 니체는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신들의 황혼>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렇게 바그너를 찬양했던 니체가 나중에는 오히려 바그너를 혹독히 비판한다. 바그너가 사랑과 희생과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가치를 절대적 진리로 여겼다는 이유에서다. 니체는 바그너와 달리 기독교의 신을 우상으로 보았다. <우상의 황혼>은 기독교 종말의 예언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신은 죽었다”(Gott ist tot)고 선언한다. 절대적 진리, 전통적 도덕을 강요하는 신은 죽었고, 인간의 생명력과 창조성을 억압하는 신의 구원도 없다. 신의 구원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새로운 가치창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 법’이라는 부제(副題)를 붙인 <우상의 황혼>은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을 뒤집고 넘어선다. 망치는 기독교를 비롯한 기존의 모든 종교와 도덕의 가치를 두들겨대면서 그 진실성을 시험하는 도구다.

니체는 수천 년 동안 선과 악이라는 도덕의 기준을 인간에게 들이댄 신의 권위를 해체하고, 허무의 세계를 창조했다. 니체의 허무는 그러나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는 초인(超人, Übermensch)의 사상으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낡아빠진 기독교의 옛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 스스로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인은 신의 죽음에 좌절하지 않으며, 인간이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해가는 능동적 인간이다. 인간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자 최고의 기준으로 우뚝 선다.

 

여기에 끔찍한 모순이, 지독한 불행이 숨어있다. 모든 우상이 사라진 자리에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남아있는 마지막 우상, 그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우상을 섬기다가 우상을 죽인 인간이 ‘주체, 실존, 자유’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스스로 우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자기 우상'이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ecedes l'essence.) 사르트르를 실존주의의 대명사처럼 만든 이 유명한 명제는 주체적 실존의 자유를 넘어 인간에게 신적 권위의 면류관을 씌워준 대관식 선언, 자기 우상의 신앙고백이나 다름없었다.

'인간 실존을 구속하는 어떤 객관적 규범도, 어떤 보편적 가치도 없다’는 자기 우상의 독립선언은 인간을 정신의 황량한 광야로, 객관적 우상보다 더 무서운 주관적 우상의 동굴 속으로, 가장 화려한 우상숭배의 제단 속으로 몰아넣는다.

자기애(自己愛)의 이기적 독선, 우리끼리의 폐쇄적 동질감(同質感)이 이념이 되고 신념의 도그마로 자리 잡으면, 그 나르시시즘의 도그마는 개인과 공동체의 마지막 우상으로 등극한다. 인간이 인간을 섬기고 자기가 자기를 숭배하는 모순, 우상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우상이 되는 아이러니, 그것이 자기 우상의 정체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다.” 사도바울의 경고다(골로새서 3:5). 재물이 경제활동의 경계선을 넘어 모든 인간 활동의 토대로 자리 잡으면 물신(物神)이 등장한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극단에 이르면 모두 물신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된다. 물신의 정체는 돈과 재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기숭배의 우상이다.

슬픈 것은, 자기숭배의 우상이 비단 무신론자들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내 삶을 맞추려고 애쓰면 하나님 신앙이지만, 내가 원하는 바에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려 하면 자기 우상의 숭배에 빠지고 만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Imago Hominis)으로 끌어내리려는 반항이요 도전이다.

자기 우상이 최후의 우상이다. 불가에서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나도 없고, 마음도 없고, 몸도 없고, 도마저도 없다”(見性者 無我 無心 無身 無道)고 가르친다(無體法經 '性心身 三端' 중).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마가복음 8:34)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말씀이다.

자기숭배, 그 마지막 우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예수처럼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것, 그것이 마지막 우상의 황혼이다. “오직 올바른 크리스천만이 진정한 우상 파괴자가 될 수 있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Jurgen Moltmann)의 고백이다.

이 우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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