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한국축구가 경우의 수까지 계산해야 되는 상황이 됐는지 한심하네요..
어제 상암경기장에서 이란을 이겼더라면 경우의 수 계산이 필요가 없겠죠..
제가 경우의 수를 따져봤던 적이 예전에 딱 한 번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94 미국월드컵 대회
그 대회는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지 못한 대회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회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첫 경기는 볼리비아와 0:0 무승부
근 100분가 치러졌던 같고 막판에 하석주가 골키퍼와 1:1로 마주친 상황이 무척 아쉬웠죠?
두 번째 경기는 스페인과 2:2 무승부
스페인 선수 한 명이 퇴장당한 상태에서 수적 우위를 보였지만 0:2로 끌려가다가 홍명보 프리킥이 굴절되어 한 골 만회하고 종료 즈음에서 서정원이 동점골을 터트렸죠...
마지막 세 번째 경기는 독일에 2:3 패배
노쇠한 녹슨 게르만 전차군단을 맞아 내리 3골 헌납 후 후반전에 황선홍 그리고 홍명보의 대포알 슛으로 2골까지 따라붙었지만 거기가 끝이었죠.. 날씨도 무척 더웠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최인영 골키퍼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그 장면 생각하니 화가 나네요.. 우리나라 A매치시합에서 가장 큰 실수)로 본인은 강판당하고 후반전에는 20대 초반의 이운재가 골문을 책임지게 되죠..
독일에 승리하기에는 벅찼겠지만 적어도 2:2로 막을 수 있는 시합이었습니다.
조3위도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만약 3무승부가 되었더라면 16강에 올라갔을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참고로 처녀출천했던 사우디는 16강에 진출했죠.. 그 당시 사우디가 벨기에를 이겼는데 오와이란 선수가 마라도나 처럼 드리블해서 골을 넣은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회 관문이 바로 그 전년도에 치러진 카타르 도하 월드컵 최종예선전입니다.
우리에게는 도하의 기적 (일본에게는 도하의 비극) 이라고 불리는 대회를 살펴보죠..
그 당시에는 참가 6개 팀 중 2팀에게만 미국행 티켓이 주어졌습니다.
참가팀은 한국 , 북한 , 사우디 , 이란 , 이라크 , 일본
한국은 첫 시합에서 예상 외로 이란을 3:0으로 쉽게 제압합니다. (이란이 너무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두 번째 시합인 이라크와는 비겼습니다. (정종선의 문전 앞 헛발질 클리어링으로 이길 경기를 놓침)
한국 팀은 바로 이 두 번째 시합서부터 꼬이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 시합도 다 이긴 경기였는데 놓쳐 비겼습니다.
종료 직전 코너킥에 의한 동점 골 허용으로 사우디에 비겼죠..
이겼어야 할 2차전 (이라크) , 3차전 (사우디)을 비겨버리는 바람에 선수단 분위기가 무거워졌고..
이는 네 번째 경기에 직격탄을 날렸죠..
네 번째 시합은 일본과의 대결이었는데.. 미우라에게 골을 허용해 0:1로 졌습니다.
혹시 그 당시 멤버들 기억하세요? 네덜란드 출신 한스 오프트 감독, 귀화인 라모스 , 하시라타니 , 나카야마 , 키타자와..
이렇게 1승 2무 1패를 한 상황에서 한국은 경우의 수를 따져봐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참고로 당시에는 승리하면 2점이 주어졌습니다.
마지막 5차전은
- 한국 : 북한
- 일본 : 이라크
- 이란 : 사우디
일본과 사우디가 승점 5점으로 조 1,2위... 앞서나가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국, 이라크, 이란은 승점 4점으로 조 3,4,5위...
북한은 승점 2점으로 조6위
북한을 제외하고 나머지 5 팀 모두 조2위가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경우의 수를 따져 봤더니
일본 > 이라크 and 사우디 > 이란 ....... 한국 > 북한 이어도 한국 탈락..
결국 자력으로는 월드컵 진출이 불가능한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우디가 이란을 이기고 일본이 이라크를 제압한다는 가설이 현실성 있어 보였습니다.
시나리오가 그렇게 잡혀있다는 Doha發 괴소문까지 나돌았습니다.
우리가 북한을 제압한다는 전제하에 다른 두 시합 중 최소 하나는 무승부가 나와야만 됐습니다.
만약 일본이 이라크와 비긴다면 한국은 북한을 2골 차로 이겨야만 조 2위가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을 한 골 차로 승리하게 되면 한국은 일본과 승점도 같고 다득점 득실차도 같게 되는데 이 경우 한국이 일본에게 0:1로 패했기 때문에 일본이 조 2위가 됩니다.
결론 ☞
북한을 2골 차 이상으로 승리하되 나머지 2 경기 중 일본: 이라크 경기는 무승부가 되어야 한다.
만약 사우디 : 이란 경기가 무승부가 된다면 북한을 이기기만 하면 된다.
어느 하나도 충족이 안 되면 월드컵 탈락입니다.
그런데 한국이 북한과 시합을 가지면 한골 차로 승리하거나 비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한국이 북한을 2골 차 이상으로 승리한 적이 예전에 있었던가요? ... 없었습니다.
물론 사우디와 이란이 비길 경우 한국은 북한에 이기기만 하면 되는데..
당시 사우디가 이란보다 평판이 훨씬 좋았습니다. 대체적인 분위기는 사우디 승리 예상.
결전의 날이 밝아오고 담합을 방지하기 위해 3 경기가 동시에 kick-off 됩니다.
TV 시청 중 타구장 변동사항이 있으면 실시간으로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력진출이 불가능한 까닭에 TV 시청자들은 本 방송보다는 타구장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타구장 경기 중 최소 하나는 무승부로 끝나야만 한국이 월드컵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타구장 변동사항이 없어야만 했습니다.
무승부 상황이 계속 진행되면 타구장 소식이 실시간으로 알려주지 않죠..
그래서 타구장 소식이 알려지지 않기를 기대했죠..
그런데 웬걸..
시합 시작한지 5분 만에 일본이 미우라의 한 골로 이라크에 1:0 으로 앞서나간다는 동영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사우디마저 이란에 앞서나가기 시작했고 전반전이 끝났을 때는 2:1이 됩니다.
실시간 동영상이 나올 때마다 시청자들은 가슴을 졸이면서 탄식을 합니다.
탈락이 확정된 북한의 경기력은 기대 이하였지만 한국도 별로여서 전반을 0:0으로 마칩니다.
전반 종료 상황은
일본 7pts , 사우디 7pts , 한국 5pts , 이라크 4pts , 이란 4pts , 북한 3pts
후반전 시작과 함께 사우디가 한 골(47분)을 더 추가해 이란에 3:1 로 앞서나간다는 동영상을 보여줍니다.
사우디와 이란이 무승부가 될 가능성은 요원해지고 이젠 이쪽에 대한 희망은 접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인 일본/이라크 시합은 반드시 무승부로 끝나야만 됩니다.
그런데 계속 일본이 1:0으로 앞서고 있습니다.
한국도 후반 시작 얼마 안 돼서 고정운이 골 (49분)을 넣어 북한에 1: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란이 한 골 (52분)을 넣어 3:2 로 따라붙었다는 반가운 동영상을 접하게 됩니다.
이 동영상이 끝남과 동시에 황선홍이 추가골 (53분)을 터트려 북한에 2: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북한을 2골 차로 앞서 나가고 있으니...
외부 요건만 충족해주면 월드컵에 나가게 되는데 아직까지 Saudi > Iran , Japan > Iraq
아무리 북한에 10골 , 100골 차로 이겨도 타구장 상황이 이러면 한국은 월드컵 못 나갑니다.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반가운 소식이 전해집니다.
일본/이라크 동영상이 나오길래 행여 2:0이 되었나? 가슴 조아렸는데..
이라크가 동점 만회골 (54분)을 터트렸다는 내용입니다.
후반 첫 10분 동안 3경기에서 5골이 터집니다.
이 상태로 게임이 종료되면 한국은 조2위로 월드컵에 나갑니다.
앞으로 30 여분이나 남았지만 여기서 게임이 끝났으면.. 했습니다.
이젠 다른 타구장 소식에도 욕심이 생깁니다.
이란이 사우디에 한 골 더 만회해 3:3이 됐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
이후 15분 동안은 3 경기 모두 소강상태입니다.
이젠 더 이상 일본/이라크 경기 소식을 접하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그런데 후반 중반에 비보 (69분)가 전해집니다.
나카야마가 골을 넣어 일본이 이라크에 2:1로 앞서나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라크 선수가 부상으로 그라운드에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 골을 터트린 겁니다.
한국 시청자들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경기를 진행시킬 수 있느냐?고 난리가 납니다.
얼마 안 있어 다른 타구장에서도 안 좋은 소식 (74분)이 전해집니다.
사우디가 쐐기골을 터트려 이란에 4:2로 앞서나간다는 겁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길어야 20분 .. 이란이 2골을 넣어 비길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사우디/이란 경기가 무승부가 될 상황이 이젠 아니기에
앞으로 남은 max 20분 동안 이라크가 동점 만회골을 넣어야만 한국은 월드컵에 진출할 수 있게 됩니다.
골을 더 안 넣어도 되는 상황인데 하석주가 쐐기골 (75분)을 넣어 북한에 3:0으로 앞서나갑니다.
그럼에도 김호 감독님과 박항서 코치는 전혀 기뻐하지 않고 넋이 나간 듯 맨붕 상태 ...
이젠 타구장 소식이 전해져야 하는 시점입니다.
후반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인데도 타구장 소식이 안 들어옵니다.
이때의 애타는 심정이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구나!
일본, 사우디 월드컵 가고 한국은 탈락!!
정규 45분이 지나고 loss time에 들어갈 무렵 반가우면서도 두려운 타구장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런데 일본/이라크 경기 소식이 아니고 사우디/이란 경기 소식입니다.
혹시 게임이 종료되었나?
이란이 만회골을 터트려 3:4까지 따라 붙었고 게임이 종료되었다 라는 내용..
좀 있으면 일본/이라크 경기 소식도 동영상으로 접하게 되는 상황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있어 일본/이라크 경기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대로 게임이 종료되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찰나
동영상이 아니고 화면 중앙에 긴급 속보 형식으로 큰 글자로 이라크 : 일본 2:2
그리고 나서 자파르 올란의 동점 헤딩골 and 게임 종료 동영상
27년 전 당시 TV 화면을 회상해볼까요?
한국도 경기가 끝나서 북한과의 게임을 3:0으로 마칩니다.
이겼음에도 한국 선수들은 게임에 패한 것처럼 풀이 죽은 채 북한 선수들과 인사합니다.
김호 감독 포함 한국 코칭 스태프들은 망연자실한 상태였죠..
“3:0으로 이기면 뭐하나.. 월드컵 탈락했는데”란 생각이었겠지요..
그런데 관중석에서 함성이 울립니다.
그라운드에 있는 한국 선수들은 처음에는 영문도 모른 채 의아해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직감이라도 한 듯 환호합니다.
고정운 선수가 환호하면서 뛰어 들어오는 모습..
박항서 코치가 실성하듯 그라운드로 뛰쳐나가는 모습..
그리고 감격에 겨워 흐느끼는 김호 감독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그런 상황에서도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 라고 반응을 보이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터벅터벅 걸어 들어온 막내 홍명보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도하의 기적 현장이고
도하의 비극 현장인 타구장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이라크가 2:2 동점 만회골을 넣고 나서 주심이 공을 들고 하프라인에 갈 때
이라크 주장인가가 주심에게 다가와 보여준 행동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너희가 일본과 사우디를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키려고 시나리오를 가동하는 모양인데..
그렇게는 안 될걸!“ 하면서 주먹감자 비슷한 행동을 취했죠..
일본 진영은 정말 처참했죠!
골이 들어가는 순간 일본 선수 대다수가 운동장에 덜썩 주저앉았고
벤치 상황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 이긴 상황이어서 자축이라도 할 심산으로 경기장에 뛰어 들어가려는 찰나에 폭탄을 맞았으니..
모두 바닥에 자빠져버렸죠..
오카다 (98월드컵 감독) 해설위원을 포함한 일본 TV 관계자 및 일본 TV 시청자들은 믿기지 않은 현실에 침통해했습니다.
경기가 종료되자 미우라를 포함한 대다수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무릎 꿇고 “이게 현실이 맞냐?” 라고 반문했죠..
눈물을 흘리는 키타자와 , 하시라타니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뒤이어 오프트 감독이 선수들을 다독이며 일으켜 세웠죠..
글쎄! 축구에 관심이 있는 30대 후반 이상의 연령대이면 대부분 기억하실 겁니다.
지금까지는 27년 전 이야기이고
코앞에 닥친 이야기를 다음 편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