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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치 게시판

박정희의 문란한 여자관계

작성자행복해졌어요|작성시간12.12.08|조회수58,346 목록 댓글 1

독재자 박정희는 여성편력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당시 청와대에 '채홍사'라는 직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자 연예인이나 텔런트 등을 섭외하여 대통령 연회장에 보내는 직원을 말합니다.

 

'안가' 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은 박정희 대통령이 여성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장소를 일컫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곳이 궁정동 말고도 5~6군데가 더 있었다고 합니다.

 

박정희는 TV 등을 보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 연예인이 있으면 쟤 좀 데려와 라고 하면 채홍사가 연예인협회에 연락을 취해

 

그 여자 연예인을 안가로 데리고 와 함께 술을 마시고 이러저러 했다는 것이죠.  술만 마셨을까요?

 

유명한 사건으로 '정인숙 사건'도 있습니다.  박정희 정인숙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자세히 나올 것입니다.

 

이 아래로는 박정희의 여자관계에 관한 인터넷의 글들을 모아봤습니다.

 

참고로 이 이야기들은 다 허구가 아닙니다. 다 근거 자료가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것은 알기 싫다 라는 팟케스트 방송에서 대학 교수와 오랜 세월 언론인을 한 사람이 증언한 내용이고

 

박정희에 관한 시중의 책들에도 나와 있는 내용들입니다.

 

 

궁정동 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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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자신이 여자들을 직접 지명하기도 했다.

그가 영화나 TV를 보다가 맘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 번 보고 싶다’고 그러면 즉시 불려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수십 명의 일류 연예인들, ‘누구나 한 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TV 드라마와 은막의 스타들’이 궁정동 안가의 밤 연회에 왔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갑작스런 궁정동 연회의 차출 지시로 영화나 TV 프로 촬영 스케줄이 펑크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연예계의 힘있는 ‘협회’에서 무조건 출두하라는 연락이 가는 것이다. 이런 일로 한두 차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연예계의 제작진 사이에서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중정)는 여자들을 조달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마담' 2명을 활용해 200여명의 여성 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발을 드는 여성을 선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궁정동 말고도 한남동과 구기동, 청운동, 삼청동 등 5∼6곳에도 안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이 아니면 모든 안가는 24시간 대기 상태에 들어간다"면서 "하루 중 언제라도 불시에 대통령이 방문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대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1980년 1월 23일 열린 고등군법회의 2차 공판에서 박 과장은 '대통령의 여인들'과 관련해 "지금도 수십명이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단을 밝히면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킨다"고 밝혔다.

 

1975년부터 3년간 서울신문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약했던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육영수 여사가 죽은 뒤로 박정희 대통령은 근혜씨 등 자식들에게 약점을 잡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문란한 여자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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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들까봐 한여자와 2번 이상 잠자리를 못하게 했데요.

그래서 모든 여자와 한번씩

정 원하면 한번더 하게 해줬다고 하네요. 그거 관리하는 팀도 있었다는데

정말 대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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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채홍사(采紅士)란 직책이있었습니다.  

 

연회담당직원중 연예인이나 텔런트등을 섭외하여 대통령 연회장에 보내는 직원을 말합니다.

 

10월26일 박정희가 사망한 날 마지막 연회장에 출연한 사람은 그때 그사람으로 유명한가수 심수봉씨 그리고 모대학 여대생인

 

신재순양 이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심수봉과 대학생 신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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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여자탤런트, 한 100명쯤 된다”

 

‘인간 박정희’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 중 가장 입길에 오르는 것은 그의 여자관계다.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두 여인의 술시중을 받았던 사실이 말해주듯, 말년에 그의 여자관계에 대한 추문은 사그라지는 권력과는 정반대로 무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는 여러 ‘사실’과 ‘추측’이 뒤섞여 있기는 하다. 하지만 박정희가 유신 말기 무렵 여성을 동반한 술자리를 자주 가진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증언은 김재규 부장의 명령에 따라 10·26에 가담한 박선호(사형집행 당시 46살) 중앙정보부(중정) 의전과장의 법정 진술이다. 10·26 재판 녹취록(<대통령의 밤과 여자> 김재홍, 1994년 발간)에 따르면 1979년 12월11일 열린 10·26 사건 1심 재판(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박 과장은 청와대 경호실과 중정의 ‘안가’(안전가옥) 담당 직원들 사이에서 “대통령만 참석한 행사는 소행사, 대통령과 경호실장, 비서실장, 중정부장이 참석하면 대행사라는 용어를 쓴다”는 등 대통령의 술자리에 대한 증언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 과장은 10·26 현장에 있었던 두 여인에 대한 진술을 시작하기 직전에 김 부장의 제지를 받았다. 당시 박 과장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지난 1월27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박 과장이 여인들에 대한 질문에 막 대답을 하려고 할 때 김 부장이 ‘야, 얘기하지 마’라고 뒤에서 가볍게 소리쳤다”며 “그러자 박 과장은 움찔하더니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과장은 항소심에서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였다. 대통령의 술자리에 대해 1심 때보다 상세한 진술을 한 것이다. 1980년 1월23일 열린 고등군법회의 2차 공판에서 박 과장은 ‘대통령의 여인’들에 대해 “지금도 수십명이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단을 밝히면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킨다”고 밝혀 충격을 줬다. 박 과장은 항소심 마지막 공판에서는 좀더 충격적인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각하께서 평균 한달에 열번 (궁정동 안가에) 나오셨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진술은 온전하게 끝나지 못했다. 법무사(당시 군사법정의 판사)가 “재판과 관계없는 내용”이라며 그의 진술을 제지하고 나섰다.

당시 변호인단은 10·26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을 주요 변론 전략 중의 하나로 삼았다. 강 변호사는 “접견 때마다 김 부장에게 여자관계를 물었지만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며 “이른바 ‘채홍사’ 구실을 한 박선호 과장도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변호인들은 피고인 접견을 통해 ‘여인’들의 이름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강 변호사가 접견(1980년 1월15일) 내용을 기록한 노트에는 ‘여자 연예인 100명’과 함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신인급에 속한 유명 여자 탤런트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강 변호사는 “김 부장에게 여러 차례 물었지만, 겨우 ‘한 100명쯤 된다’는 얘기만 한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유신 말기 무렵 박정희의 여성 편력에 대한 소문은 무수히 많다. 그 내용도 ‘로맨스’부터 추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975년부터 3년간 <서울신문>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약했던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영수 여사가 죽은 뒤로 박정희 대통령은 근혜씨 등 자식들에게 약점을 잡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문란한 여자관계”라며 “큰 행사, 작은 행사 등의 얘기가 근혜씨의 귀에도 흘러들어가 문제가 됐었다. 주변에서 박 대통령을 재혼시키려고 애를 많이 쓰기도 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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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숙 피살 사건 >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부근의 강변3로에 멈취 서 있는 검정색 코로나 승용차에서 권총에 넓적다

리를 관통당해 신음하고 있는 한 사내와,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아 이미 숨진 한 젊은 여인이 발견되었다.

 

부상당한 사내는 정종욱(당시 34세), 숨진 여인은 정인숙(당시 25세)으로 두 사람은 남매 관계로 밝혀졌다.

 

당시 26세였던 정인숙에게는 3살 된 아들이 1명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3][4]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당시 정부의 한 유력인사가 지목되기도 했다.

 

고위 공무원의 딸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여러 명의 친오빠가 있었다. 그 뒤 정인숙은 당시 한일회담도 이루어진 선운각 등 최고급 요정에서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다.[4]

 

나중에 정인숙의 집에서 발견된 정인숙의 소지품에선 정관계 고위층의 명함 26장이 포함된 33장의 명함이 쏟아져 나왔는데,

 

명단에는 박정희, 정일권, 이후락, 김형욱 등 대다수 5.16 주체세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5]

 

이후 경찰 수사는 지지부진해졌고 언론 보도가 수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언론은 정인숙에게 숨겨진 아들(정일성, 정성일, 또는 박승일(68년 3월생)[6])이 하나 있고, 그 아들은 당시 청와대 고위층의

 

자녀라는 소문과 정인숙이 당시 정관계 고위층 전용이라 할 수 있는 고급 요정 '선운각'을 드나들었다는 것 등을 밝혀냈다.

 

이 아들의 아버지가 박정희 또는 정일권이라는 소문이 있다.

 

 

정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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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1993년 <주병진 쇼> 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최근 정일권씨가 나와 통화하면서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고 내가 모시던 분(박정희)의 아들이다 라고 말했다. "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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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그 시대에는 남자들이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냐고, 대통령 정도 되면 다 여자 밝히고 그런 거 아니냐고

 

말을 합니다만, 박정희 이전의 이승만 대통령이나 윤보선 대통령은 이렇게 여성 편력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박정희와 전두환만 그랬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면 왜 그런 일을 당한 여자 연예인 중 내가 박정희에게

 

당했다 라고 말하는 여자연예인이 하나도 없냐 라고.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댁이 그 당사자 여자 연예인이라면 내가 박정희에게 몸을 빼았긴 여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고요.

 

다들 이미 가정을 꾸미고 잘 살아가고 있을, 지금은 나이가 지긋한 여자 연예인들일텐데 말입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줄까요?  박정희가 건드린 여자 연예인 중에는 처녀 연예인 뿐만이 아니라

 

유부녀 여자 연예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정희 부하들 사이에서도 아무리 대통령이라 하지만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라는 말들이 오갔다고 합니다. 이게 인간 박정희의 실체입니다.

 

경제발전?  백번 양보해서 경제발전 시켰다 칩시다. 그렇다고 그의 군사 쿠테타와 이런 비민주적인 행위가

 

용서가 됩니까?   너무나 훌륭해서 그의 딸도 대통령 시켜줄 만큼 훌륭한 대통령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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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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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튼튼하게~ | 작성시간 12.12.10 하나만 보면 열을 안다고 하죠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이렇다니.. 그 밑 부하는 어떻겠습니까?
    정인숙 아들이 박정희의 씨였군요
    사실이라면 결국 자기 이름 오르내릴까봐 정인숙을 죽인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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