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기억과 청킹
단기기억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용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숫자를 몇 개 들려주고 나서, 들려준 숫자를 순서대로 회상하게 하면 단기기억의 용량을 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무 관련이 없는 숫자는 대략 일곱 개 저도를 들려준 순서대로 회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일곱 개가 절대개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낱자를 기억하게 하면 일곱 낱자 정도를 기억하지만, 단어를 기억하게 하면 일곱 단어 정도 기억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기억할 때 어떤 단위로 부호화하느냐에 따라 절대 개수는 달라지지만, 처리 단위로 보면 비교적 일관되게 일곱 단위 정도로 그 용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조지 밀러의 유명한 구절 '마법의 수 7±2'라는 것이다(Miller, 1956). 낱자보다 단어일 때 훨씬 더 많은 철자를 기억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이 보다 큰 단위로 부호화하는 것을 청킹(chunking)이라 하며, 청킹을 통해 우리는 단기기억의 용량 제한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작업기억
작업기억은 단기기억을 대체하여 제안된 기억체계다. Badderley의 작업기억모형(1998; Badderly & Hitch, 1974)에 따르면 작업기억은 세 가지 성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조음 루프 또는 음운 루프로서 언어이해와 청각적 되뇌기를 위해 속의 말을 잠시 유지한다. 둘째, 시공간 스케치판으로서 시공간적 정보를 잠시 유지한다. 셋째, 중앙집행기로서 주의통제 및 판단 과정을 개시하고, 미래 행동 계획을 수립하며, 언어이해와 추론활동을 주관하고, 장기기억으로부터의 인출 및 장기기억으로 정보를 전이시키는 작업을 담당한다.
조음 루프와 시공간 스케치판은 중앙집행기의 관장하에 있는 노예체계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즉각적 회상을 위해 되뇌기와 같이 정보를 재순환시키는 작업은 조음 루프에 의해, 시각적 이미지를 생성하거나 조작하는 작업은 시공간 스케치판에 의해 이루어진다. 중앙집행기는 '{(5+3)×4}/{6+(2×5)}'와 같은 문제를 풀 때 (5+3, 8×4)의 답을 장기기억에서 인출하며, 곱셈이나 나눗셈 규칙 등을 불러내고, 32와 같은 분자값을 분모값이 구해질 때까지 조음 루프가 잠시 동안 유지하게 한다.
조음 루프와 시공간 스케치판은 비교적 낮은 수준의 정보처리를 담당하는데, 이 노예체계들은 단순한 조음 과정이나 되뇌기, 시각적 이미지나 공간적 표상의 단순한 유지에 관여한다. 반면, 중앙집행기는 높은 수준의 정보처리를 담당하는데, 예를 들어 언어의 이해와 추론에 관여한다. 또한 노예체계들은 제한된 주의자원을 각각 가지고 있는데, 용량 요구가 작은 과제는 작업기억이 다른 성분을 간섭하지 않고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려운 과제를 수행할 때에는 더듬거리거나 중앙집행기로부터 추가적인 지원을 끌어쓴다.
제한된 주의자원과 관련하여 작업기억의 특성을 밝히는 데 많이 사용되어 온 과제가 이중과제 방법이다. 이중과제 방법은 두 개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게 하면서 한 과제의 수행이 다른 과제의 수행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방법으로서, 특히 두 과제 간에 경합이나 간섭효과가 있는지 여부가 관심사가 된다. 과제 간에 간섭이 없을 때에는 두 과제가 상이한 정신기제나 정신자원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한 과제가 항상 다른 과제를 간섭한다면 두 과제는 동일한 정신자원을 사용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상황에 따라 과제 간 간섭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우에는 두 과제가 정신자원을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1) 조음 루프
조음 루프는 음운저장고와 조음통제 과정의 두 하위 성분으로 구성된다. 음운저장고는 말소리 정보를 짧은 시간(약 1.5초 내지 2초) 동안 파지하며, 조음통제 과정은 내적 되뇌기를 통제한다. 음운저장고에 들어온 말소리는 조음통제 과정에 의해 계속 유지될 수 있으며, 시각적 언어정보는 조음통제 과정에 의해 음운부호로 변화되어 음운저장고에 저장될 수 있다.
조음 루프는 지지하는 대표적인 증거로서 음운유사성효과, 조음억제효과, 단어길이효과, 무시된 말효과를 들 수 있다. 음운유사성효과란 소리나 조음 특성에 있어 서로 유사한 항목들이 그렇지 않은 항목들보다 잘 기억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PGTVCD는 RHXJW보다 회상이 잘 되지 않는다. 조음억제효과란 조음을 못하게 함으로써 조음 루프의 작용을 방해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숫자폭과제를 수행할 때 숫자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the'를 되풀이하여 말하게 하면 숫자폭이 뚜렷하게 감소하는데, 숫자를 시각적으로 제시하던 청각적으로 제시하던 동일한 효과가 관찰된다. 이는 'the' 조음이 조음통제 과정을 지배함으로써 내적 대뇌기를 방해하여 음운저장고에 숫자를 유지하지 못하게 하거나, 시각적 자료가 음운 부호로 저장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음억제는 시각적 자료의 음운유사성효과를 제거시키는데, 이는 시각적 정보를 음운부호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단어길이효과란 기억폭이 단어길이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을 말한다. '물'과 같은 1음절어들은 '바람개비'와 같은 4음절어들보타 기억폭이 큰데, 이는 조음시간이 긴 단어일수록 내적 되뇌기에 소요되는 시간 역시 길어져서, 조음통제 과정에 의해 계속 음운저장고에 유지될 수 있는 확률이 작기 때문이다(박태진 등, 2006; Baddeley et al., 1984). 언어권에 따라 숫자폭이 상이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단어길이효과에 기인한다. 중국어, 영어, 웨일즈어의 조음속도와 숫자폭을 비교한 연구(Hoosain & Salili, 1988)가 있는데, 숫자의 평균 조음속도가 중국어에서 가장 빠르고 웨일즈어에서 가장 느리다. 숫자폭은 조음시간과 부적 상관관계를 보이는데, 중국어 사용자의 숫자폭이 가장 크고 웨일즈어 사용자의 숫자폭이 가장 작았다. 흥미롭게도, 수화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 역시 복잡하고 긴 동작을 요하는 신호보다는 단순하고 짧은 동작을 요하는 신호에 대해 더 큰 기억폭을 보이는데, 이를 수화의 단어길이 효과라 한다(Wilson & Emmorey, 1998).
무시된 말효과란 비록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된 말소리라 할지라도 즉각적 기억에 장애를 일으키는 효과를 말한다. 시각적으로 제시된 숫자들을 기억하도록 하면서 실험참가자가 전혀 모르는 언어로 글을 읽는 소리를 함께 들려주면, 숫자에 대한 즉각적 기억과제 수행이 떨어진다(Colle & Walsh, 1976). 이는 무시된 말이 음운저장고를 차지하여 숫자가 음운저장고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2) 시공간 스케치판
시공간 스케치판은 시각적 정보와 공간적 정보를 함께 다루는 작업기억 성분이다. Logie 등(Logie, Zucco, & Badderley, 1990)은 시공간 스케치판이 조음 루프와 독립적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들은 이중과제방법을 사용하였는데, 1차과제로서 실험참가자들은 시각적 형태에 관한 시각적 기억폭과제를 수행하거나 글자폭과제를 수행하였다. 2차과제로서 암산과제 또는 심상과제를 수행하였는데, 전자는 시공간 스케치판과 무관한 반면 후자는 조음 루프와 무관할 것으로 짐작되는 과제였다. 실험 결과, 암산과제는 시각적 기억폭과제 수행보다 글자폭과제 수행에 훨씬 큰 간섭을 일으킨 반면, 심상과제는 반대의 효과를 일으켰다. 이러한 결과는 시공간 스케치판과 조음 루프가 상이한 정신자원에 근거한 독립적 성분이라는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3) 작업기억과 추론: 중앙집행기
Badderley는 이중과제 방법을 사용하여 추론과제 수행이 중앙집행기에 의존함을 보여 주는 실험적 증거를 제시하였다. 한 실험(Baddeley & Hitch, 1974, 실험 3)에서 실험참가자에게 다음 추론과제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먼저 AB와 같은 자극을 보여준 다음, 문장을 제시하고서 이 문장이 앞서의 자극을 정확하게 기술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고서 반응시간을 측정하였다. 문장은 능동 긍정문(예: A procedes B), 수동 긍정문(예: B is preceded by A), 능동 부정문(예: B does not precede A), 수동부정문(예, A is not preceded by B)의 제 가지 중 하나였는데, 문장 유형에 따라 추론과제의 난이도가 다를 것으로 예상하였다.
추론과제를 수행할 때 2차과제로서 조음억제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도록 하였는데, 조음억제과제는 다음 세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the'를 반복하는 과제, 'one two three four five six'를 반복하는 과제, 시행마다 상이한 무선적 숫자열을 반복하는 과제. 이 과제들은 조음량에 있어서는 동일하였지만, 기억 요구에 있어서는 첫번째 과제가 가장 적었고 세 번째 과제가 가장 컸다(세 번째 과제는 기억폭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의 통제조건으로서 아무런 조음도 수행하지 않는 조건이 포함되었다.
그 결과 2차과제 없이 추론과제만 수행하는 통제조건의 경우 문장 난이도가 클수록 반응시간이 증가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2차과제로서 조음억제과제를 수행하는 조건들이다. 'the'를 반복하거나 'one two~.'를 반복하는 경우에는 추론 시간이 약간 증가하였지만 전체적인 반응시간 패턴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무선적 숫자열을 반복하는 경우에는 난이도가 높은 문장 추론과제일수록 급격하게 반응시간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Baddelry의 작업기억모형에 잘 들어맞는다. 2차과제의 난이도가 높으면 조음 루프는 중앙집행기의 자원을 끌어다 쓰게 된다. 이 때문에 자원이 부족해진 중앙집행기는 특히 어려운 추론과제를 수행할 때 속도가 느려지거나 정확도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
4) 작업기억폭과 언어 이해
Daneman과 Carpenter(1980)는 단순한 기억폭이 아니라 작업기억 전체 용량을 측정하는 과제를 고안해 냈는데, 이 과제는 정보의 저장과 조작을 동시에 수행하게끔 한다. 참가자들에게 여러 개의 단순 문장을 제시해 주는데, 이때 각 문장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각 문장의 마지막 단어를 기억하도록 지시한다. 마지막 문장을 제시한 직후 각 문장의 말미 단어를 순서대로 기억해 내도록 한다. 처음에는 한두 개의 문장에서 시작하여 점차 문장의 수를 늘려 가는데, 말미 단어를 최대한 기억해 낼 수 있는 문장의 수를 측정한다. 이 과제를 읽기폭(reading span) 또는 작업기억폭(working memory span) 과제라고 부른다. Daneman 등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읽기폭을 측정하고서 읽기폭이 독서능력, 즉 언어 이해능력과 높은 상관이 있음을 밝혔다. 이병택(이병태, 김경중, 그리고 조명한, 1996)은 한국어 읽기폭과제를 고안하고서 읽기폭이 큰 사람이 작은 사람보다 언어 이해능력이 우수함을 밝혔다.
작업기억폭은 언어 이해능력의 강력한 예측인자다. 작업기억폭과제는 비교적 복잡한 과제로서 조음 루프, 어휘지식, 책략 선택 그리고 이상 여러 기억양상들의 조절능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여러 작업기억성분, 즉 조음 루프, 중앙집행기 등의 작용을 함께 요구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작업기억폭이 언어기술에 특유한 능력만을 측정하는지, 아니면 보다 일반적인 작업기억능력을 측정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출처 : http://blog.naver.com/hyderay?Redirect=Log&logNo=150045396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