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광해군의 논술문제(과거시험)
'섣달그믐밤, 그 쓸쓸함에 대해 논하라'
지긋지긋한 삭과 파동에 질린 탓일까. 광해군은 1616년(광해군 8년) 치러진 증광회시에서 낸 책문, 시험문제가 걸작이다.
※증광시 : 조선시대 나라의 경사가 있을때 실시된 임시과거 시험.
‘섣달 그믐밤이 되면 서글퍼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논하라’는 것이었다. 광해군의 책문을 한번 보자.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해이고, 밝으면 반드시 어두우니 밤이로다. 그런데 섣달 그믐밤에 꼭 밤을 지세는 까닭은 무엇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광해군의 ‘센치’한 문제에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의 현안을 예상문제로 뽑아 잔뜩 외우고 공부했을 수험생이라면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혹시 ‘임숙영 삭과파동’을 떠올린 광해군이 수험생들에게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글제를 내린 것은 아닐까. 주제와 상관없이 임금에게 직언을 해대는 젊은 급제자들이 딴소리 하지 못하도록 의표를 찌른 것은 아닐까. 임금의 글제를 받아든 급제자들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으리라. 그러나 광해군의 쉽지만 대답하기 까다로운 이 글제에 제대로 대답한 이가 있었다.
바로 당대의 시인이자 문인인 이명한(1595~1645)이다. 이명한은 당대 한문 사대가의 한사람인 아버지 이정구(1564~1635), 아들 이일상(1612~1666)과 함께 ‘대제학 3대’를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명한은 광해군의 문제에 일단 “뜬구름 같은 인생이 어찌 이리도 쉽게 늙는다는 말이냐”고 광해군의 심중에 맞장구를 쳐준다.
그러나 이명한은 “인생이란 부싯돌의 불처럼 짧고 우리네 인생도 끝이 있어 늙으면 젊음이 돌아오지 않는다.”면서 인생이 무상함을 지적한다. 이명한은 “유독 섣달 그믐날 밤을 지새우는 이유는 지나가는 세월이 안타까워서…”라 한다.
“밤이 새도록 자지 않는 것은 잠이 오지 않아서가 아니고,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흥에 겨워서가 아닙니다. 묵은해의 남은 빛이 아쉬워서 아침까지 앉아있는 것이요, 날이 밝아오면 더 늙는 것이 슬퍼서 술에 취해 근심을 잊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명한의 한마디 결론은 촌철살인이다.
“그런즉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然則人能傷歲 歲不傷人)”(<백주집> ‘잡저’)
이명한은 광해군이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을 논하라’고 하자 “세월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것”이라는 답안을 제출했다. 답안지의 말미엔 “그저 일평생 학문에 힘써 밤늦도록 꼿꼿이 앉아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사색하고 공부하게 되면 늙는 것도 모른 채 때가 되면 순순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럴 경우 무슨 유감이 남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대책을 만 21살의 파릇파릇한 청년 이명한이 제출했다. 마치 세상의 이치를 꿰뚫은 성인군자 같은 답안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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