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심한 사람입니다
딱이 해야 할 일도 없고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없습니다
심심파적으로 노래라도 부르고 싶지만
내가 들어도 음치라서 서둘러 귀를 단속해야 합니다
떠나기 전에 이미 지치는 몸, 여행도 내 몫은 아닙니다
술도 젊은 날에 실컷 취해 이제 시들하고
맛보지 못해 아쉬운 와인 이름 몇 개만 입안에 맴돌고 있습니다
말썽 피울 일도 없고 까탈 부릴 나이도 아닙니다
시빗거리도 삿대질할 일도 없습니다
새들이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아침,
창가에 고양이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새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나절을 보냈습니다
또 닥치는 나머지 한나절에 해야 할 일의 목록은
설거지와 세 칸 방을 쓸고 닦고
부실하여 오래 걷지 못하는 발을 데리고
팔부능선쯤 보이지 않는 암자의 풍경소리를 따라가다
부질없이 주저앉아 먼산바라기,
주저앉은 자리에는 언제나 작은 풀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버려져 서러운 마음 같아
자세히 들여다보고
오래 바라봅니다
옥수수 잎에 떨어지는 소나기가 잠시 소란합니다
소란했던 생명이 온몸에서 우수수 빠져나가는 듯
어질머리에 눈을 감습니다
소나기와 먹장구름이 지나간 하늘은 맑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한 권의 인생을 읽다가
읽었으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생의 앞 부분을 뒤적거립니다
중요하다고 붉게 밑줄 친 것들,
놓치고 잊힌 문장들은 여전히 싱싱합니다
싱싱한 가시가 심심한 심장을 찌릅니다
붉게 터지는 노을을 헤치고
느꺼운 미소 한 가닥으로
들꽃 한 다발을 묶어 해 지는 창가에 놓았습니다
하늘의 저문 공터에 별들이 놀고 있습니다
심심한 마음이 별 하나 잡았다 놓았습니다
창밖에 내내 심심했던 고목 한 그루가
싱싱한 잎을 온몸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