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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평론

<서평>보이지 않는 고릴라..."누가 고릴라를 본 사람 있나요?"

작성자여여|작성시간11.03.05|조회수119 목록 댓글 0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지상정?...인지심리학적 설명은


인간이 사물을 지각하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등의 정신 활동이 진행되는 동안의 심리 과정을 탐구하는 인지심리학은 경험과 실험을 주된 방법으로 활용한다.


1997년 당시 하버드대의 젊은 심리학자였던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 Chabris)와 대니얼 사이먼스(D. Simons)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보려는 것만 본다'는 명제를 명쾌하게 입증하여 유명인사가 되었다.


두 사람이 설계한 고릴라 실험은 인지심리학의 고전이 됐고, 공저자인 두 사람은 각각 유니언대학과 일리노이대학의 교수가 됐는데,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가 번역서로 국내에 뒤늦게 소개됐다(크리스토퍼 차브리스·대니얼 사이먼스 지음/김명철 옮김, 『보이지 않는 고릴라』, 408쪽, 김영사, 1만4000원).


이 책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고릴라 실험에서 출발해 인지심리학의 고전을 종횡무진 인용하며 인간의 지력이 얼마나 박약한지 조리 있게 설명했다. 이 책의 결론은 한마디로 "너 자신을 알라"였다. 아인슈타인은 "세상에는 무한한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우주,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무지"라고 했다는데, 우리 중 절반은 '고릴라를 보고도 못 봤다고 우기는 존재'라고 겸손하게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인간은 고릴라를 뛰어넘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고릴라 실험의 핵심은 자기가 보려고 하는 사물에 주의를 집중한 나머지 다른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마는 '주의력 착각'인데, 저자는 주의력 착각의 원인을 진화에서 찾고 있다. 인간은 삼라만상을 전부 눈에 넣으려 애쓰는 대신, 재빨리 의미 있는 사물이나 패턴을 파악해 한정된 주의력을 쏟아붓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고릴라를 놓치는 것은 그 와중에 나타난 역작용이다.


문제는 인간의 기대를 뛰어넘는 '돌발상황'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보행자를 친 운전자들은 "거기서 보행자가 튀어나올 줄 몰랐다"고 하소연하는가 하면 의사가 수술도구를 환자 몸속에 넣고 꿰매는 바람에 환자가 폐색전을 일으켜 세 차례나 엑스레이를 찍었지만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사례도 있다. 수많은 의사들이 엑스레이를 들여다봤지만 저마다 자기 전공에 맞는 병인(病因)을 찾는 데 골몰하느라 정작 사진 정면에 떡 하니 찍힌 수술도구는 놓쳐버렸다는 얘기다.


2001년 2월 하와이 근해에서 고릴라 실험을 현실에 옮긴 듯한 대형 사고가 났다. 미군 핵잠수함 그린빌호가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심해에서 수면으로 급부상했다. 힘차게 솟구친 잠수함은 바로 위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어선을 두 동강내버렸다. 당시 그린빌호는 최첨단 음파탐지기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사고 직전 사령관이 직접 규정대로 잠망경까지 봤다고 하니 어선을 못 볼 이유가 없었지만 어쨌거나 대형참사는 터지고 말았다. 어처구니없게도 사령관은 "그 방향에 배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주의력 박약으로 일어난 이런 사고들은 그저 웃어넘기기에는 섬뜩한 구석이 있다. 주의력만 박약하면 얼마나 좋을까. 주의역 박약만으로도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 게다가 인간의 기억력도 못 미덥긴 마찬가지다. 대개의 인간은 자기 기억을 확신하지만 인간의 기억은 매번 똑같이 재생되는 DVD가 아니라 바람 불 때마다 유동하는 모래 언덕에 가깝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자신감 착각', 모르면서 안다고 우기는 '지식 착각', 우연의 일치를 놓고 얼토당토않은 이론을 만들어내는 '원인 착각', 훈련을 통해 지력을 몇 곱절 증대시킬 수 있다고 믿는 '잠재력 착각' 등 저자들이 조목조목 짚어낸 인간의 모자람은 끝이 없다.


지력이 박약한데도 그런 줄 모르고 자신 있게 행동하는 데서 각종 사건·사고가 발생한다. 1984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살던 22세 여대생 제니퍼 톰슨이 자취방에 침입한 흑인 남자에게 성폭행 당했다. 톰슨은 범인이 빈틈을 보인 사이 잽싸게 이웃집으로 달아나 경찰에 신고했다.


여러 용의자 중에서 한 사람을 분명하게 범인으로 지목했는데, 그렇게 해서 구속까지 당한 재수 없는 사나이가 바로 로널드 코튼이었다. 코튼은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교도소에서 자기가 진범이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수감자를 만났는데, 피해자 톰슨은 두 수감자를 비교한 뒤에도 "코튼이 범인"이라고 다시 한 번 자기주장을 확인했다. 사건 발생 11년 뒤 DNA 검사가 이뤄지면서 "내가 진짜 강간범"이라고 주장했던 그 남자가 진짜 강간범이었음이 드러났고 코튼은 비로소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톰슨은 코튼에게 사죄했고, 다행히 두 사람은 현재 형사재판 개혁모임에 나란히 나타나 연설하는 관계가 됐지만, 평생 원수로 살 수도 있었던 무서운 사건이었다. 목격자 진술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사례다.


현재 인지심리학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저자 중 한 사람인 차브리스 교수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고릴라 실험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미디어에서는 미국이 '빨간 동네(red states·공화당 지지 지역)'와 '파란 동네(blue states·민주당 지지 지역)'로 양분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지역이 '보라 동네(purple states·양당이 박빙인 지역)'다. 인간의 마음은 정적(政敵)이 나와 다른 점은 금방 알아채고, 비슷한 점은 잘 모른다.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사사건건 대립하는 것 같지만, 외부에서 보면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 미국은 강력한 사회당도, 공산당도, 극좌 우익 정당도 없는 나라다."


페이스북·트위터 등 최근 넘쳐나는 소설네트워크 서비스가 인간의 지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하는 점, 다시 말하자면 정보의 홍수가 '주의력 착각 대홍수'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점에 대해 차브리수 교수는 "대답은 '예스'와 '노' 둘 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이 많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운전 중 휴대전화 사용이 좋은 예다. 그러나 정보가 늘어난다고 해서 인간이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진 않는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인간은 앞으로도 주의 집중 능력을 보전할 것이다. 정보가 늘어나는 것 그 자체는 좋은 일이다. 인터넷과 트위터, 재밌지 않나."


그렇다면 '주의력 착각' 현상에 문화적·인종적 차이가 있을까. 차브리스 교수는 아직 거기까지 연구를 확장하지 못했지만, 그 문제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이 많다고 했다. 리처드 니스벳 미시건대 석좌교수가 컴퓨터 앞에 아시아 학생과 백인 학생을 앉혀놓고, 전체 구도는 비슷하지만 미세하게 디테일이 다른 이미지를 여러 장 보여줬다. 아시아 학생은 배경의 차이점을, 백인 학생은 중앙 부분의 차이점을 빨리 알아차렸다. 아시아 사람은 여러 가지 사물의 '상대적인 위치'(관계와 맥락)에 집중하지만 서구인은 사물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고릴라' 책에 쓰인 인지심리학의 내용이 과연 한국에서는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지난 2일 오후 7시 프로농구 인천전자랜드와 서울SK 전이 열린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고릴라를 이용한 심리실험을 조선일보 취재팀이 그대로 재현했다.1)


하프타임 때 이벤트 사회자 한세이(26)씨가 관중들에게 문제를 냈다. "지능 측정 이벤트입니다! 전광판 동영상을 보세요. 흰 옷 입은 사람 3명과 검은 옷 입은 사람 3명이 뒤섞여 각자 자기네끼리 패스를 주고받습니다. 흰 옷 입은 사람들끼리 몇 번 패스하는지 세어보세요."


그리고 보여준 동영상에서는 학생 6명이 패스를 주고받는 동안, 온몸에 검은 털이 숭숭 난 고릴라가 9초에 걸쳐 어슬렁어슬렁 지나가면서 학생들 복판에서 두 차례 가슴도 두들기는 장면이 나온다. 사용된 동영상은 1997년 하버드 실험 당시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직접 만든 바로 그 36초짜리였다.


사회자가 낸 문제를 풀기 위해 교정기를 낀 초등학생부터 백발 할아버지까지 이날 삼산월드체육관을 찾은 프로농구 관중 2280명이 열심히 패스를 셌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패스 횟수가 아니었다. "방금 본 동영상에 사람 말고 다른 것도 나왔나, 사람만 나왔나"가 문제였다. 주최 측이 느린 속도로 동영상을 다시 틀자 곳곳에서“저걸 내가 왜 못 봤을까”탄식이 나왔다. 하프타임을 이용한 동영상 심리실험에서 관중 절반 이상이 고릴라를 못 보고 지나친 것이다.


이날 삼산체육관에서 문제를 접한 관중 가운데 주최 측에 문자를 보낸 사람은 총 580명이었다. 이들 중 '고릴라를 못 봤다'는 사람이 315명(54.3%)에 달했고, '사람 말고 뭔가를 봤다'는 사람들(265명·45.7%) 중에서 개와 곰을 보았다고 주장한 사람도 60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고릴라라고 정확히 맞춘 사람은 205명뿐이었고 전체 응답자 중 35.3%에 불과했다.


가족과 농구 보러 왔다가 실험에 참여한 한애란 씨도 “패스 세느라 고릴라를 못봤다”고 했다. 패스 세는 데 주의가 쏠려 코앞에 있는 고릴라를 놓친 사람들이 전체의 64.7%나 되었다. 하버드 실험에서 "고릴라를 봤다"는 사람은 50%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한국의 실험에서는 그보다 훨씬 적었다. 1997년 미국과 2011년 한국에서의 실험결과가 거의 유사하게 나타남으로써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이 책의 주장이 그대로 확인됐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외에도 최근 번역된 '언씽킹'(해리 벡위드 지음·토네이도)과 '왜 트렌드의 절반은 빗나가는가'(애덤 고든 지음, 흐름출판) 역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간의 '헛똑똑이' 특성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언씽킹'은 우리의 일상적 선택에 숨어 있는 '무심코(unthinking)'의 세계를 집중 분석하면서 '노시보(Nocebo) 효과'를 확인시켜 준다. 작년 초 런던에서는 29세 남성이 층계에서 떨어져 6인치 못을 밟아 못이 부츠까지 뚫고 올라온 사건이 벌어졌다. 응급실 의사는 환자의 극심한 고통을 진정시키려고 엄청나게 강한 진통제를 놓아 진정시킨 뒤 부츠를 조심스레 벗겼더니 못은 발가락 사이로 지나가 있었고, 발은 멀쩡했다.


'왜~'는 숱한 트렌드 예측의 실패가 무엇 때문인지 짚어내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인식의 장애물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용하다'며 무릎을 치는 점쟁이를 예로 들고 있는데, 현명한 점쟁이일수록 예언을 할 때 누구에게나 해당될 만큼 모호한 말을 하고, 사람들은 그걸 자기 얘기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는, 이른바 '바넘(Barnum) 효과'에 대해 설명한다.


'언씽킹'과 '왜~' 등 2권의 책은 노시보효과나 바넘효과를 통해 우리의 기대나 예상이 인식과 느낌까지 바꿔놓는 극명한 예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와 더불어 인지심리학의 연구 성과를 알기 쉽게 보여주는 책이라 하겠다.


1)실험해보니… 삼산월드체육관 관중 54%가 "고릴라? 못 봤는데!", 조선일보, 20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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