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으로 말하는 존재와 존재의 경이로움]
- 오규원, 이동순의 시집에 대하여
이 진 흥
오규원의 시집 [길,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와 이동순의 [봄의 설법]은 매우 대조적이다. 시선과 방법 그리고 언어의 코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편의 시집을 한자리에서 얘기하는 것은 어색하고 무리하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상이점이 오히려 서로를 명료하게 해 줄 수 있다. 전자는 오규원이 스스로 시집의 <자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현상으로 말하는 존재>에 주목하고, 후자는 이동순이 시집의 <후기>에서 말한 바처럼 <존재의 경이로움>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1>
오규원의 시는 주목받는다. 그의 시는 언제나 신선하기 때문이다. 낯익은 관념이나 익숙한 소도구는 말짱하게 치워 버리고 그는 늘 새로운 어법을 보여준다. 보여준다는 말보다는 늘 <말의 살아 있는 의미>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표현이 적당해 보인다. 그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그는 <존재는 현상으로 자신을 말한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존재는 말하는 현상, 인간이 정한 관념으로 이미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하지 않은, 살아 있는 의미인 날 이미지와 그 언어의 축을 찾아>가는 것이 그의 시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기존 어법이나 관념의 틀에 넣어 읽으려는 독자들은 헛수고만 하게 될 뿐이다. 그의 말대로 존재는 현상으로 자신을 말한다. 우리는 현상 배후의 존재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의 징후 혹은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읽어야 한다. 예컨대 우리는 기침을 통해서 감기를 감지할 뿐이지 감기 그 자체를 포착하지 못한다. 따라서 감기의 여러 가지 징후 중 기침이라는 드러난 현상을 면밀하게 관찰함으로써 감기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감기라는 존재가 아니라 기침이라는 현상이다. 오규원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의 현상의 언어이다. 그의 시에서 우리는 기존 의미를 포기해야 한다. 낯선 장면과 풍경만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관념이다. 싱싱한 존재의 현상을 드러낼 수 없는 죽은 관념의 잔해일 뿐이다. 우리는 대체로 사물을 볼 때 어떤 의도를 갖고 본다. 그러므로 대상은 의도에 의해서 굴절된다. 오규원은 이점을 경계한다. 익숙하게 된 것은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현상의 언어가 드러내는 즉물적 풍경을 선입견 없이 바라볼 것이다. 그것이 존재에 육박해 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뜰 앞의 잣나무가 밝은 쪽에서 어두운 쪽으로 비에 젖는다
서쪽 강변의 아카시아가 강에서 채전 방향으로 비에 젖는다
아카시아 뒤의 은사시나무는 앞은 아카시아가 가져가 없어지고 옆구리
로 비에 젖는다
뜰 밖 언덕에 한 그루 남은 달맞이가 꽃에서 잎으로 젖는다
젖을 일이 없는 강의 물소리가 비의 줄기와 줄기 사이에 가득 찬다
「우주 2」 전문
지금 눈앞에 전개되는 것은 비 오는 풍경이다. 그것이 단순하게 묘사되고 있다. 비는 아마도 사선을 그으며 내리는 모양이다. 모든 사물들이 따라서 비스듬하게 젖어든다. 잣나무는 밝은 쪽에서 어두운 쪽으로, 아카시아는 강에서 채전 방향으로, 은사시나무는 옆구리로, 달맞이는 꽃에서 잎으로 젖어들고 있다. 그리고 젖을 일이 없는 강의 물소리가 비의 줄기와 줄기 사이에 가득 찬다. 현상은 매우 단순하다. 우리는 그것을 어설프게 해석하고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관념의 실타래에 엉기고 꼬여서 현상 그 자체를 놓지고, 현상으로 말하는 존재를 잃는다. 후설의 명제대로 우리는 모든 선입견을 괄호 속에 넣고(판단을 유보하고) 순수한 현상학자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시인은 타고난 현상학자라는 볼노브의 말은 우리들이 오규원의 시를 읽는데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시인의 시선은 세상의 하고 많은 것들 중에 비에 젖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비는 무엇인가? 물은 무엇인가? 젖음은 무엇이고 서쪽은 무슨 의미인가? 라고 자꾸 분석하고 캐어묻는 것은 이 시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시인은 사물로부터 거리를 떼어놓고 아주 자유롭게 바라볼 뿐이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파라솔 그늘 밖으로 나간
자신의 다리를 따라간다 다리가
이어져 있는 발의 끝까지 따라가서
발가락 끝의 다음을 찾고 있다
물의 강으로 흐르는 한가운데로
들어간 사내가 보인다
사내의 몸은 물이 되고 머리는 사실로
둥 둥 떠 있다 너무 멀리 가서
머리가 없어지고 전신이
강이 된 여자도 있다 거기 있었다는
증거는 강이 가져갔다 물 위에 있지만
사내의 머리를 찾아가는 새는 없다
햇볕만 내려와 엉기다가 풀리고
그러나 강변의 사람들은 물이 되지 않고
물 밖에서 벗은 몸이 사실로 있다
「물과 길 5」 전문
파라솔을 쓰고 걸어가는 한 여자의 동작은 의도나 기존관념을 배제하고 바라보면 자신의 다리를 따라가는 것이고, 발의 끝, 발가락 끝의 다음을 찾고 있는 것이다. 강물 속의 사내의 몸은 보이지 않아 물이 되고(물만 보이고), 물 밖에 떠 있는 머리는 지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있다. 물에 들어가 멀리 있는 여자는 그 몸이 잘 보이지 않고 강만 보인다. 다만 여자가 거기 있었다는 증거는 강이 가져갔다. 강 밖의 사람들은 물이 되지 않고 벗은 몸(옷을 벗은 채로 있는)이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존재한다. 여기서는 그것이 좋다, 나쁘다, 혹은 맞다 틀리다, 라는 진위나 선악 혹은 호오의 모든 판단은 유보된다. 그냥 거기 그렇게 있을 뿐이다. 그냥 거기 그렇게 있는 것들을 시인은 그냥 거기서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판단해야 할 정황으로부터 몹시 자유롭다. 존재는 거기 그냥 그렇게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관념과는 무관하다. 자유이다. 시인은 그 완벽한 자유의 시간과 공간을 그대로 바라보고 묘사한다. 모든 의도에서 벗어나므로 순수하게 볼 수 있고, 관념에서 벗어나므로 존재의 진리를 포착한다. 그럴 때 우리는 감동한다. 그 순간은 사르트르를 빌리면 지금 거기 그렇게 있는 즉자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대자가 통합되는 순간이다. 이때 오규원의 시간과 공간의 지평은 우리들의 기존관념을 밀어내고 그 자체로서의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그것이 이 시집 [길,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이고 오규원의 시의 세계이다.
<2>
오규원의 시가 방법적 모색에 힘쓰고 있다면 이동순의 시는 내용 혹은 의미의 잔잔한 울림에 귀기울이고 있다. 전자가 일체의 판단을 유보하고 현상을 그대로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면, 후자는 가슴으로 보고 핏줄로 감싸며 숨결로 만난다. 한마디로 이동순은 요즘 우리 시에서 보기 힘든, 잔잔하고 맑으면서도 무엇인가 범할 수 없는 준엄함을 보여준다. 예컨대 ‘포릇포릇 움트는 저 새싹들’(31쪽)의 봄은 그냥 자신의 자태를 드러내고 있지만 이동순에게는 그 자체가(자연의 미세한 현상들이) 하나의 설법으로 다가온다. 자연의 작디작은 음성을 듣는 그의 청력과 미세한 생명의 의미를 읽는 그의 시력 그리고 우주의 질서를 느끼는 그의 감응력은 실로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후기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이 시집은 그가 살고 있는 경산 고죽 마을에서의 생활과 주변의 자연환경, 그리고 주로 그 지역농민들의 삶을 그린 소묘집의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우선 그가 말하고 있는 자연은 그의 극명한 고독의 눈으로 포착할 수 있는 저 본래적인 피지스이고 그 피지스의 아들인 인간에게 따뜻한 모성으로 포근함을 보여주는 존재이다.<이 세상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내 어머니 아닌 것이 없어라>(31쪽)라고 그는 노래한다. 이 구절은 물론 그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 것이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자연은 바로 어머니인 것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은 아름답고 생명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청산에 새소리 가득 차고
안개가 고죽 마을을 휘감고 있는 새벽
천지의 꽃들은
꽃눈 속에서 터져 나오려고
젖꼭지 같은 망울을 한껏 부풀리고 있는데
이 꽃나무 밑에서
우리 집 암캐 진도란 년도 방금
첫 발정을 해서
빨간 꽃잎을 땅바닥 여기저기에
뚝뚝 흘리고 다녔다
「청산에 새소리 가득 차고」 전문
이동순의 자연은 청산이다. 천지의 꽃들은 지금 피어나려고 망울을 부풀리고 있고 집에서 기르는 암캐도 첫 발정을 해서 요란을 떨고 있는 풍경이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이 봄이라는 생명의 발동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꽃들이 꽃눈 속에서 마치 <젖꼭지> 같은 망울을 부풀리는 것과 특히 우리 집 암캐 <진도란 년>도 첫 발정을 해서 빨간 꽃잎을 땅바닥 여기저기에 뚝뚝 흘리고 다닌다는 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제 새소리로 가득 찬 청산, 그리고 그곳에 안개로 감싸인 마을, 젖꼭지처럼 관능적이고 그립게 부푸는 꽃망울과 발정난 개로 드러내고 있는 건강하고 싱싱한 생명으로 한껏 고양된 봄의 시간과 공간이 본래적인 피지스로서의 이동순의 자연인 것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작은 짐승처럼 귀 쫑긋 세우고/ 대지에 울려 퍼지는 잔잔한 봄의 설법에 귀 기우>(16쪽)린다. 그런 곳에서 <풀과 나무를 만지고 살거나/마음 속에 풀과 나무를 가꾸고 사는 사람들은/그래도 나무의 겸양과 /조화로움을 조금은 닮아 가고 있>(18쪽)다. 그러므로 시인 자신도 그곳에 살면서 <햇살에 콩깍지가 말라 갈 때/하느님이 내려와서 콩깍지의 콩과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22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본래적인 자연으로 표상된 고죽마을의 주민들의 삶의 이야기와 시인 자신의 느낌들이 아주 진솔하게 드러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일상의 생활모습은 분위기는 다르지만, 마치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를 연상케 하는 또하나의 <신화>를 일구어 내고 있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인물들, 예컨대 <술꾼 봉도> <신천 할부지> <달래 할머니> <말숙 어미> <서동 영감님> <허경행씨> 등등은 현대 산업화되는 시대에 뒤떨어져서 옛날의 삶을 그대로 계속하고 있는 어리석지만 천진무구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무대가 되는 <새알산> <미산 숲> <속알못> <고죽 개울> 등은 도시의 빌딩이나 골목에 비하여 아직도 때묻지 않은 청청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바라보는 각도를 바꾸어 보면 지금 농촌의 현실은 매우 피폐하고 쓸쓸하다. <아들네들 도시로 떠나고 없는/ 빈집에 혼자 남아서> 고양이 등만 쓰다듬는 <달래 할머니>(57쪽),그리고 <농사를 짓다가 도시의 청소원으로/청소원에서 알콜 중독자로/드디어 망가진 몸으로 한 생을 마감한 이 시대의 농민의 얼굴>(60쪽)인 <봉도씨> 등을 통하여 시인은 피폐한 농촌 현실을 아파하고 있다.
봉도 죽고
봉도 살던 집은
논까지 끼워서 팔려고 내놓았다
예수 믿는 상철씨는
새마을 지도자에 농민 후계자인데도
집 팔고 도시로 나가서 살고 싶어한다
이장 태어난 집터는
막내 아들
아파트 중도금 재촉이 심해서
팔아달라고 부탁이다
집집마다 대개 팔고 나갈 생각들이지만
그러나 부동산 경기도
한물 간 뒤라
누가 거들떠보기나 하랴
눈을 감으면
사람들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이 썰렁한 고죽 마을이 떠오른다
「요즘 농촌」 전문
인공화 된 도시에 대해서 농촌은 아직 자연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연은 본래성이다. 인간은 자연의 아들이면서도 자연을 배반하고 훼손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자연에게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자연으로부터 삶의 태도를 배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현실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우리는 자연과 친화해서 더불어 살려고 하지 않고, 자연을 편의의 수단으로만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대표적 자연인 농촌은 피폐해지고 있다. <대추나무를/ 전지하면서 살펴보니/ 나무의 가지와 가지들은/ 결코 서로 다툼이 없다는 것이었다....(중략)....이런 나무의 이치를 알고서 세상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고/ 차고 꺾고 심지어는/ 제 살기 위해서 남까지 죽이려고/ 칼을 갈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 중에서도/ 풀과 나무를 만지고 살거나/ 마음속에 풀과 나무를 가꾸고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 나무의 겸양과/ 조화로움을 조금은 닮아 있는 것이었다>(18-19쪽). 그러나 나무의 겸양과 조화로움을 조금은 닮아 있는 농촌의 사람들이 지금은 거의 모두가 <집 팔고 도시로 나가서 살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이제 <사람들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이 썰렁한> 마을이 되고 있다. 보다 깊이 삶을 바라보고 본질적인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현상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누구나 겉으로는 그 심각성을 걱정하면서도 아무도 그 농촌(자연)에 들어가서 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시인은 사람들이 떠나간 빈 공간에 남아 극명한 고독을 느끼며 삶의 진실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도시를 뒤로하고 고죽마을로 들어가서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쇠똥 거름을 / 퍼담아 마당 곳곳에 부>(10)으며, <분홍 동백 한 그루 사와/ 뜰마당에 심>(36쪽),<별 총총하고/ 깜깜한 밤이 깊>어 가면 <등불을 켜고><책상 앞에 앉>아 <혼자 시를>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79쪽). 시인은 그곳을 <이승의 내가 잠시 머무르는 쉼터>(78쪽)라고 하면서 <이 새로운 땅에 내 삶의 뿌리가 튼튼히 내려지기를 소망>(104쪽)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의 생명이 싹터 오르는 비밀한 소리(봄의 설법)를 몸으로 듣고 그 소리를 받아 적는다. 또한 그는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세계로서의 피지스인 자연(농촌)이 피폐해지고 사람들이 떠나가는 쓸쓸함에 대한 아픔을 잔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또한 이 시집 의 표제인 [봄의 설법]이기도 하다.(*) <시와 반시/1995/가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