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8년 12월부터 2014년 2월까지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서 비평을 가르쳤으며, 2014년 3월부터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1994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시가 추천되어 시인으로 등단했고, 2005년 문학수첩 작가상에 장편소설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현재 창비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3. 작품 목록
3.1.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사, 2002)
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사, 2006)
생년월일 (창비, 2011)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사, 2016)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현대문학, 2018)
음악집(문학과지성사, 2024)
3.2.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문학수첩, 2005)
천국보다 낯선 (민음사, 2017)
캐럴 (문학과지성사, 2021)
3.3. 소설집
고백의 제왕 (창비, 2010)
기린이 아닌 모든 것 (문학과지성사, 2015)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문학동네, 2019)
트로츠키와 야생란(창비, 2022)
3.4. 이론서
혁명과 모더니즘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 개정판: 시간의흐름, 2019)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 (창비, 2005)
3.5. 번역
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레오니드 치프킨, 민음사, 2006)
4. 수상 목록
2003년 제8회 현대시학작품상
2005년 제3회 문학수첩작가상
2010년 제1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2011년 제2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2011년 제1회 문지문학상
2013년 제4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2014년 제8회 김유정문학상
2015년 제6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2016년 제24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
이상한 나라 / 이장욱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속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힘겨워서 밤눈 내리는 월계동 언덕길은 아득하던 그 이상한 겨울.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 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로만 위태롭던 산동네.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고 녹슨 제 땅에서 제 어둠을 파내려갔으므로 단 한번도 송신할 생애를 갖지 못한 그 오래된 이야기.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어서야 시작하는 이상한 나라. 그 나라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 같던 이야기. 다시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지만 아, 문득 당신이 없고서야 시작할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문득 끝이어서야 시작할 수 있는 이상한 나라. 당신에게 이제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정말로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 이장욱
서로 다른 사랑을 하고
서로 다른 가을을 보내고
서로 다른 아프리카를 생각했다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드디어 외로운 노후를 맞고
드디어 이유 없이 가난해지고
드디어 사소한 운명을 수긍했다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었다
그가 결연히 뒤돌아서자
그녀는 우연히 같은 리듬으로 춤을
그리고 당신은 생각나지 않는 음악을 찾아 바다로
우리는 마침내 서로 다른 황혼이 되어
서로 다른 계절에 돌아왔다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으면 물이 돼버려
그는 零下의 자세로 정지하고
그녀는 간절히 기도를 시작하고
당신은 그저 뒤를 돌아보겠지만
성탄절에는 뜨거운 여름이 끝날 거야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어
여전히 사랑을 했다
외롭고 달콤하고 또 긴 사랑을
토요일의 관심사 / 이장욱
오늘의 푸른 하늘은 마치 어제의 푸른 하늘 같애.
진부하고 아름다워.
뭐랄까,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 상태랄까.
1루로 뛸 수도 없고 뛰지 않을 수도 없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문장은 비문인가 아닌가?
나는 허무주의자,
오타쿠,
각종 폐인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오늘 화양리 뒷골목에서 박복순 씨(82)가 모은 폐지의 양은
15.5 kg, 근래 최고였지.
하지만 내 인생에 흥미로운 것이라곤 없다.
휴대폰을 껐는데도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지 않네.
침묵의 기술을 연마한 자만이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다.
늦어도 정오까지는 일어나자.
어제의 푸른 하늘이 떠 있을 테니까.
박복순 씨의 리어카를 향해
늙은 개들이 짖어댈 테니까.
오늘은 또 모든 것이
토요일의 관심사.
동사무소에 가자 /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
외로울 때는
동사무소에 가자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어제 죽은 사람들도 아직
떠나지 못한 곳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前生이 궁금해지고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
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
짧은 질문을 던지지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는 그 질문이 없는 곳
그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에 가자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라든가
그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
자꾸 생각하게 될 때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거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을 때
왼발을 든 채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자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무한해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고
왼발을 들고
소규모 인생 계획 / 이장욱
식빵 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인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모레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한 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사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 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달콤한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 올랐다.
청소합시다 / 이장욱
아침의 청소가 시작되자 먼지들은 어디론가 이동했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돌아오고
어제도
10년 전도
자꾸 더러워지고
나는 유통기한이 있다.
너는 변질되었다.
깨끗한 악몽
남은 인생을 합친 것보다 더 더러운 연애
혼자 하는 욕설
우리는 위생적인 생각에도 소질이 있다.
악수하고
고개를 흔들고
숨을 멈추고
한참 후에는
혼자 운다.
그림자들은 깨끗한가?
그대의 먼 잠은?
밤이 되자 우리는 어디론가
점점이 이동했다가
자명종이 울리자
돌아왔다.
午前 / 이장욱
나는 나의 꿈속에서 당신을 보고
당신은 당신의 꿈속에서 나를 보았다
우리는 자주 지나친다
손을 스치려다가
손을 거둔다
급수차가 아스팔트에 흘린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순간
나는 당신의 섬세한 명암을 떠올린다
그 아침이 약간 지나자
나는 당신을 잊는다
내 시선 끝, 지하철 창 밖으로 희끗 지나가는 것,
나는 깜빡깜빡 사라진다
당신은 나의 짧은 꿈속에
가볍게 손을 집어넣는다
밤의 연약한 재료들 / 이장욱
밤이란 일종의 중얼거림이겠지만
의심이 없는
성실한
그런 중얼거림이겠지만
밤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않고
맹세를 모르고
유연하고 겸손하게 밤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중
죽은 이의 과거가 빈방에서 깊어가고
소년들은 캄캄한 글씨를 연습하느라 손가락만 자라고
늙은 개의 이빨은 밤마다
설탕처럼 녹아가는데
신축건물들이 들어서자
몇 개의 골목이 중얼중얼 완성되고
취한 남자는 검게 그을린 공기 속을 흘러가고
밤은 그의 긴 골목이 되었다가
그가 되었다가
드디어 외로운 신호처럼
보안등이 켜지자
개의 이빨은 절제를 모르고
갓 태어난 울음들이
집요하고 가득한 밤을 향해
오늘도 녹아가는 이빨을
필사적으로 세우고
인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이장욱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기념일 / 이장욱
식도에서 소장까지
기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우리는 꼭꼭 씹어 먹는다
위를 기념하고
쓸개를 기념하고
무엇이든 녹이는 침을 기념하고
오늘도 누군가의 기일이며
전쟁이 있었던 날
창밖의 구름은 지난해의 농담을 닮았고
농담에는 피가 부족하다
어제까지 어머니였던 이가
오늘은 생물이라고 할 수 없고
아이는 하루 종일 거짓말에만 흥미를 느끼고
식물들의 인내심은 놀라워
이빨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에게는 반드시
식도가 있고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지구의 공전이 계속되자
지난해의 농담들이 잊혀졌다
흰 떡 위에 수많은 이빨이 돋아나고
우리는 무엇이든 꼭꼭 씹어 먹고
모두들 별의 속도를
천천히 이해했다
점성술이 없는 밤 / 이장욱
별들은 우리의 오랜 감정 속에서
소모되었다.
점성술이 없는 밤하늘 아래
낡은 연인들은 매일 조금씩 헤어지고
오늘은 처음 보는 별자리들이 떠 있습니다.
직녀자리
전갈자리 그리고
저기 저 먼 하늘에 오징어자리가 보이십니까?
오징어들,
오징어들,
밤하늘의 오징어들,
말하자면 새벽 세 시의 아파트에서
밥 말리를 틀어 놓고
혼자 춤추는 남자
말하자면 지상의 모든 개들이 고개를 들고
우우우 짖는 밤에
말하자면 빈 그네가 쇠줄 끝에서
죽은 아이처럼 흔들리는 밤에
말하자면 별빛 같은 집어등을 향해 나아가는
외로운 오징어들의 밤에
그런 밤에,
별들은 어떻게 소모되는가?
오징어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새벽 세 시의 지구인들과 함께
음악도 없이
점성술도 없이
보이지 않게 이동하는 은하수
우리 모두의 초능력 / 이장욱
오래전에 우리는 순서대로 태어났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있고
흘러간 시간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다.
수많은 사건들을 창조하자 스르르 얼굴이 변하고
누구나 문득
살인자의 밤을 맞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먼 곳에서 잠든 채
새로운 과거를 생산했다.
어제보다 나쁜 자화상을 발명한 뒤에는
지난해의 잡담을 반복하고
희미한 손바닥으로
새벽에 내리는 눈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느낄 때에는
아침 뉴스의 화면을 향해 드디어
짐승의 욕을 내뱉을 때에도
우리는 매일 그림자를 창조할 수 있고
조용히 그림자와 손바닥을 마주할 수 있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비명을 지를 수 있고
밤의 상점 / 이장욱
손가락은 외로움을 위해 팔고 귀는 죄책감을 위해 팔았다.
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팔았으며
흰 치아는 한 개에 한 번씩
혐오감을 위해 팔았다.
아무것도 후회할 수 없었다.
이제 불 꺼진 네온사인을 위해서는 무엇을 팔아야 하나.
손목을 팔고도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있나.
안녕. 잘 있나요?
새벽이 오면 여름의 저편으로 사라졌다가 돌아올게요.
이 비 그치면
이 비 그치면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혀를 팔아치우겠어요.
발끝에서 처음 보는 그림자가 피어나고
등이 휘어 외로운 곡선을 이루었다.
냄새와 모양을 상상하는 힘으로
끝나지 않는 편지를 이어갔다.
부디 악몽을 느끼는 근육은 그대로 남겨 줘.
솔직한 관절은 내 곁에 있어 줘.
발목의 뼈들을 모두 팔고도 힘이 남는다면
콩팥을 쥐고
폐를 쥐고
텅 빈 밤거리를 달릴 수 있도록
겨울의 원근법 / 이장욱
너는 누구일까?
가까워서 안 보여.
먼 눈송이와 가까운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
완전한 이야기가 태어나네.
바위를 부수는 계란과 같이
사자를 뒤쫓는 사슴과 같이
근육질의 눈송이들
허공은 꿈틀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네.
너는 너무 가까워서
너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을 수는 없겠지만
드디어 최초의 눈송이가 된다는 것
점 점 점 떨어질수록
유일한 핵심에 가까워진다는 것
우리의 머리 위에 소리 없이 내린다는 것
나는 너의 얼굴을 토막토막 기억해.
네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을 스쳐갔을 때
혀를 삼킨 입과 외로운 코를 보았지.
하지만 눈과 귀는 사라졌다.
구두는 태웠던가?
너는 사슴의 뿔과 같이 질주했네.
계란의 속도로 부서졌네.
뜨거운 이야기들은 그렇게 태어난다.
가까운 눈송이와 먼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
나는 겨울의 원근이 사라진 곳에서 너를 생각해.
이제는 아무런 핵심을 가지지 않은
사슴의 뿔이 무섭게 자라나는
이 완전한 계절에
코인로커 / 이장욱
두 시간 동안 코인로커 속의 어둠에 몰두했다.
어디에도 빈틈이 없는 세계는 서류와 비슷한가.
사과와 비슷한가.
사각형인가. 얼마나 붉은가.
어둠은 소중한 것과 훔친 것을 구분하지 않고
무심한 것과 슬픈 것을 가리지 않고
죽은 사람을 움직여서
생각하는 사람에게 겹쳐놓는다.
모퉁이마다 낯선 얼굴이 서 있는 밤
어둠의 입장에서 보면 목적지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계단 쪽일까. 비상구 쪽일까.
혹은 환승역.
오늘도 사람들에게는 자꾸 맡길 것이 생긴다.
의심스러운 봉투와 검은 가방.
음식물.
시신의 일부
코인로커 속에서는 어둠이 모든 것을 만들지만
모든 것에 유통기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터널 속을 달리는 나와 그대와 신문들
오해와 농담과 말다툼들.
어디에도 빈틈이 없는 세계란 그러니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나
사망신고서
손가락이 들어 있는 가방의 모습
나는 어둠 자체를 발견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코인로커 속에서 가장 슬픈 자세는 무엇일까.
지금은 붉은 사과가 무릎을 모은 채
어둠에 몰두하고 있다.
캄캄해지는 것은
사과인가.
목적지인가.
누군가 코인로커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사각형의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물건을 회수해 간다.
연장전 / 이장욱
야구장과 축구장에서는 언제나 극적인 승부가 벌어지지만 실은
동물원에서도
꿈속에서도
심판은 사랑의 마음으로 선언한다, 승리와 패배를.
또는 영원한 타협을.
리플레이를.
나는 목표물을 향해 공을 던지고
편지를 쓰고
애원하고
정지한다.
공의 궤적이 툭 끊어지자,
갑자기 중력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코알라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코끼리가 풀밭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심판은 사물들을 정확히 바라보려 한다. 수첩과 시계와
또 가족관계를.
퇴장이 선언되는 순간 우리 모두의 죄책감은 어디로 가는가?
정거장 바깥에도 적들은 존재하는가?
울타리가 무너지면 순한 동물들은 어디로 달려가는가?
내가 찬 공은 아직도 다른 시간을 향해 나아가네.
이것이 무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넓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승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것이,
나의 오늘밤이라는 것입니다.
이별과 망각이 선언된 뒤에도 선수는 질주한다.
포효하는 짐승들
극적인 정지장면
어디선가 날카로운 리듬으로 휘슬이 울린다.
기나긴 연장전이 시작된다.
늪 / 이장욱
한 남자가 벌거벗은 채 누워 있어.
어디에? 우리 집 욕실에.
죽었나?
죽었다.
악어는 좋아했나?
20세기 소년은?
장래희망은?
나는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난데없이
인생이 깊은 늪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악어가 된 것 같아.
깊숙이
더 깊숙이
습한 욕실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우리 집 욕실에 죽어 있는 남자는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더군요.
희고
차갑고……
점점 더 부풀어 올랐습니다.
시체는 괄호 속에 넣어 둘 수가 없다.
팔이 툭 튀어나오고
자꾸 혀를 내민다.
동거냐,
사육이냐,
사물이냐.
나는 갑자기 뛰어나가 대문을 열었다.
미친 듯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외치고 선언했다.
악어의 꼬리가 사라지도록
시체가 토막토막
거리로 흩어지도록
누구나 만져볼 수 있도록
공기처럼
늪처럼
재크의 골목 / 이장욱
골목은 술래잡기나 오해로 만들어져 있다.
또는 밤하늘,
달콤한 과자로는 만들지 않는다.
모퉁이에서는 매일 무서운 비밀이 발생하고
재크가 콩나무를 키우는 곳
깨진 유리로 금 긋기 좋은 곳
부드러운 손목이나 시멘트 바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재크의 골목,
목숨을 건 수수께끼의 답은 왜 언제나 동일한가?
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것은 골목의 결론일까?
모퉁이를 돌면 남자의 성기가 나타나고
아무리 걸어가도 큰길은 나오지 않네.
재크는 열심히 늙었지만 아직도 골목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
골목에서는 누구나 극적인 승부를 벌이고
연장전 끝에 막다른 하늘에 도달하네.
콩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이 깨진 소주병을 들고 있다면 그것은
손목이 위험한 순간,
재크의 골목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
욕설과 날아다니는 밥상 그리고
수수께끼로 가득한 밤하늘까지.
운구차가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는 곳
누구나 술래가 되어 뒤돌아보는 곳
오늘도 재크는 콩나무를 키우네.
만일의 세계 / 이장욱
만일……이라고 누가 말했다.
왼쪽 귀로 들어왔다가 오른쪽 귀로 흘러나간 수많은 목소리들처럼
문득 다른 궤도로 들어선 기차처럼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만일……이라고 누가 말했다.
오후 내내 숨어 있던 소년은 결국 캄캄한 다락을 나가지 않았다.
당신과 함께 간 외딴 바닷가에는 당신이 너무 많고
오른쪽 귀로 흘러나간 것을 왼쪽 귀로 모아 이야기를 지어내느라
할머니는 죽지도 못했네.
소년은 자라지 않고 어둠이 되었다.
어둠 속의 바퀴벌레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었다.
수많은 당신들은 아직 그 바닷가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는 단 하나의 당신과 손을 잡고 돌아왔지.
연애하던 호시절을 이야기할 때 할머니,
할머니는 살아 계셨네.
하지만 만일……이라고 누가 말했다.
거기는 어둠뿐이야, 그것이 좋지, 라고 소년이 대답했다.
바닷가의 의자들은 거꾸로 서 있고 태양이 밤에 뜨는 곳,
수많은 당신들은 거기서 외롭게 앉아 있지.
긴 귀를 가진 할머니는 어둠처럼
파도처럼
끊이지 않는 이야기를 해주었네.
밤이 새도록 나는 낯선 길을 달려갔다.
다락에서 나온 소년은 두 귀를 잃어버렸다.
할머니는 오늘밤도 무덤 위에
산 채로 앉아 계셨다.
만일……이라고,
누가 힘겹게 말했다.
평균치 / 이장욱
집을 나서는 길에 점점 키가 줄어들었네. 나는 장다리도 아니고 꺼꾸리도 아니지만 자꾸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조금 낯선 높이에서 당신을 보게 되었지. 모두가 동의하는 높이에서,
오늘의 강수량을 측정하는 방법은 이렇다. 수많은 빗방울들에게 계급과 역할을 분배하고, 모든 빗방울들 가운데 가장 빗방울다운 것을 선택한 뒤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거야. 언제나 조금 늦거나 빠르게 오는 것들이 있네. 가령 당신…… 고백…… 죽어가는 사람들은 조금씩 늦거나 빠르게 죽어갔다. 평균수명은 점점 늘어났으나,
나의 미래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먼저 도달해 있을 거야. 가까운 친구, 왕자와 거지, 파푸아뉴기니 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일지도 모르지. 나의 사랑스러운 인파들, 인파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겠다. 나아가고 또 나아가겠다. 당신을 찾아내겠다. 이제 막 공항의 탑승구로 사라지려는 당신을……
정오와 자정 같은 단어로만 이루어진 그런 시간이 흘러가.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아져. 중력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구름은 표준고도로 떠오르고 그 순간 두터운 구름장을 뚫고 비행기 한 대가, 음속으로 날아갔다.
핀란드 / 이장욱
손 대신에 발을 넣을 수 없을까.
그곳에.
호주머니의 깊은 곳에.
핀란드의 어두운 겨울에.
두 눈이 감기고
두 발이 깨어날 수 있도록.
월요일의 핀란드라는 것은 촛불처럼 조용해서
소리들도 나무처럼 자라니까.
누군가의 손수건이 하늘에서 타오르고
길들은 문득 북극에 이르는 곳,
아이들이 하나 둘
다른 아이들의 잠 속으로 흩어지는 밤이 오면
태양이 동전처럼 빛나는
그런 밤이 오면
이제는 식물들이 안개를 생산하는 화요일
안개를 열고 누구나 이방인을 맞이하는 수요일
이곳에서 지폐의 일은 단지
깃발처럼 펄럭이는 것.
목요일의 주민들은 다섯 갈래의 운명을 감추고
가위나 바위
또는 보를 감추고
마침내 금요일과
또 유배자의 마음으로.
아무래도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도 아니다.
누구나 차가운 공중을 동그랗게 쥐고 있다.
한숨도 잠들지 못하는
태양의 밤,
거대한 손가락들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생년월일 / 이장욱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내가 태어난 건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이었는데,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쾅!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에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더군.
수평선은 생후 십이년 뒤 내 눈앞에 나타났다. 태어난 지 만 하루였다가, 십이년 전의 그날이 먼 후일의 그날이다가,
수평선이다가,
저 바다 너머에서 해일이 마을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생일이 찾아오고, 죽어가는 노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연인들은 처음으로 입을 맞추고,
케이크를 자르듯이 수평선을 잘랐다. 자동차의 절반이 절벽 밖으로 빠져 나온 채 바퀴가 헛돌았다.
우울하고 감상적인 삼단논법 / 이장욱
기린은 자전거가 아닙니다. 진리는 푸른색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은 삼거리식당이 아닙니다.
창문은 실망이 아니며, 실망은 사자의 네 발이 아니며, 따라서 지금 초원을 달리는 것은
오늘의 창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침묵하는 사람이 서랍일 수 없고,
탁자가 죽은 동물들일 수 없고, 그래서 개인은
토성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외투는 호주머니나 그리움이 아닙니다.
약속시간이 은하계를 모릅니다.
걸어서 12월이 오지 않습니다.
아주 먼 곳은 등 뒤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손은 당신의 안구가 아니기 때문에
당신의 뒷모습이 없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대말들 / 이장욱
오른쪽의 반대편이 사라질 때
먼 곳에서 나의 뒷모습을 보게 될 때
회색으로부터 검은 빛과 흰 빛을 구분할 때
오늘의 반대말은 무슨 요일인가?
너의 반대말은 누구인가?
복잡한 예감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하지만 사랑해,
라고 말하는 사람이 칼을 만지작거린다면
밤이 점점 뾰족해진다면
한 그루의 부드러운 나무가
아가리를 벌린 채 자라난다면
의자는 책상의 먼 곳에서 타오르고
대답은 질문을 부수고
나는 왜 조금씩 내가 아닌가?
누가 내게서 자꾸 왼쪽을 가져가는가?
내 오른쪽의
무한한 반대편을
수요일의 인사 / 이장욱
나는 수요일을 가지고 있네.
수요일에는 주말의 당신이 없고
수요일의 잠은 나무와 같아.
팔이 자라고
다리가 돋아났으니
수요일의 아침에는 국민체조를.
그리고 집과 버스와 전봇대들을
수요일에 세워두고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 걸어보자.
거리의 수많은 뼈들은 삐걱거리다가
위치를 바꾸다가
먼 후일의 수요일에는 마른 잎을 피우네.
낡은 오후를 위해 비는 내리고
석간에는 신선한 부음이 실리고
수요일의 졸음이 오면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다.
오늘은 수요일이 흰떡처럼 부풀어.
수요일은 언제나 증발하네.
먼 후일의 당신은 자꾸 젊어지고
자꾸 어려지고
당신은 어느덧 수요일에 내리는 비.
수요일의 저녁은 자라고
캄캄한 수요일에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를.
어둠 속의 나무처럼 조용한 인사를.
오른손은 모르게 / 이장욱
왼손은 수십 개의 사소한 실망들을 알고 있다. 왼손은
조금 더 가까운 데서 생각한다. 왼손은
먼저 떨린다.
지붕 위에 내려앉는 새들의 무게와 함께
밤의 이동속도로
나의 왼쪽에서는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색.
왼손에겐 친구가 필요해.
아주 분명한 친구.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목으로
악수를 청하는 친구.
왼손이 좋아하는 것은
갑자기 왼손이 되는 것.
안개야 양떼처럼 흩어질 수 있겠지만
그 순간 왼손은 사냥개가 되는 것.
그것에 꽂히는 것.
매일 오른손도 모르게
왼손이 사라진다.
세어야 할 것들이 많은데
가리켜야 할 것들이 많은데
스르르 펴진 뒤에 왼손은
낯선 이에게 인사하는 데 천재.
쥐락펴락 혼자 손금을 만들다가 불현듯
그것이 되는 것 역시.
한낮의 거리에서 당신과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당신의 손바닥을 뚫고 튀어나간
나의 왼손은.
토르소 / 이장욱
손가락은 외로움을 위해 팔고
귀는 죄책감을 위해 팔았다.
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팔았으며
흰 치아는 한 번에 한 개씩
오해를 위해 팔았다.
나는 습관이 없고
냉혈한의 표정이 없고
옷걸이에 걸리지도 않는다.
누가 나를 입을 수 있나.
악수를 하거나
이어달리기는?
나는 열심히 트랙을 달렸다.
검은 서류가방을 든 채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고
밤의 쇼윈도우에 서서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보았다.
악수는 할 수 없겠지만
이미 정해진 자세로
긴 목과
굳은 어깨로
당신이 밤의 상점을 지나갔다.
헤이,
내가 당신을 부르자 당신이 고개를 돌렸다.
캄캄하게 뚫린 당신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순간,
아마도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당신의 그림자였던 적이.
당신이 나의 손과
발목
그리고 얼굴이었던 적이.
당신이 말하는 순서 / 이장욱
당신이 입을 벌리는 순간
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솟아난다
그다음엔 언제나 불안에 대한 이야기
반드시 그 순서로
당신은 말한다.
당신은 사차선 도로를 건너가는 개에 대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외투에 대해
카드놀이의 불운에 대해
조금씩 넘친다
골목 모퉁이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불쑥
춤을 추며 우리 앞에 나타나듯
당신은 말하는 법이니까
뒤꿈치를 들고 걷다가도
개를 향해 중얼거리다가도
생일 다음에는 불안.
드디어 당신은 기우뚱한 느낌이 든다
만원 버스 안에서 빽!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묻는다
개들은 평생 무엇을 기다리는 겁니까?
대체 춤이란
몸의 어디서 탄생하는 것일까요?
당신은 곰곰 생각하고 생각한 후 간신히
생일 다음에 오는 불안에 대해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