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시인
박영근 시인
박영근 시인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1981년 『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취업공고판 앞에서』, 『대열』, 『김미순傳』,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저 꽃이 불편하다』 등이 있으며, 1994년 신동엽창작기금을 수혜하고, 2003년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2006년 5월 결핵성 뇌수막염과 폐혈증으로 타계했다.
------------------------------------------------게시 목록-------------------------------------------
취업 공고판 앞에서 / 박영근
솔아 솔아 푸른 솔아 / 박영근
길 / 박영근
저 꽃이 불편하다 / 박영근
취업 공고판 앞에서 / 박영근
除隊를 하고, 세월도 믿음도 무심히 멱살을 잡고 흔들던 스물다섯 계급장을 떼고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바람 불면 허수아비 제 가슴을 치는 가을 저녁답, 어머니 또 우시고
높은 굴뚝에서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잘 다려진 작업복을 끌고 어쩌다
계집아이들이 크래카를 씹으며 지나갔다 가로수 가지마다 매달려 떨고 있는 하나, 둘
눈물방울 같은 잎새들 이른 아침 누이의 세수대야엔 붉은 피가 자꾸만 번졌다
발 밑에서 으깨지는 비명소리 나뭇잎들
들판이나 한번 둘러보고 가거라
갯벌이나 한 번 또 한 번 돌부리에 넘어져 어머니
검정치맛자락에 피가 흘렀다
여전히 굴뚝에서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출신도 전북 본적지 서해중학교졸업
고향도 두고 사랑마저 등진 신세가 핸드카를 밀면서 울어야하나
울어야하나 부르면 고향은 조막손 아프게 찌르던 낫자욱들
잘살자 진성전자공원들아 어둡게 화장실 낙서 같은 곳에서도 얼어붙고
오줌을 갈기며 얼어붙은 아랫도리로
이름을 써 갈기며 군대삼년 몸으로 때워나가자 개새끼 처럼 웃던 날들
모집공고 위에도 눈발은 내려쳤다
내려앉고 싶었다 이력서도 구겨버리고 문득 공고판 아래 얼어붙는 어머니
엉겅퀴 들판도 밀어버리고
등 뒤론 움켜쥔 손 마디마디 풀며 떠오르는 눈송이들
하얗게 쌓여가는 불빛들 내려앉고 싶었다
엎드려서 감출 수 있는 것은 눈물들 뿐일까
전봇대 같은 곳에 기대여 바라보면 어느새
눈발 그친 곳에서도 불빛은 흐려지고, 누이여
흩어지고 어디로 또 떠나는 밤기차소리에도 부서지고
솔아 솔아 푸른 솔아 / 박영근
-百濟. 6
부르네 물억새 마다 엉키던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
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
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
주저앉아 우는 누이들
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부르네. 장마비 울다 가는
삼년 묵정밭 드리는 호밋날마다
아우의 얼굴 끌려 나오고
늦바람이나 머물다 갔는지
수수가 익어도 서럽던 가을, 에미야
시월비 어두운 산허리 따라
넘치는 그리움으로 강물 저어가네.
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
살아서 가다가 가다가
허기 들면 솔닢 씹다가
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
네가 묶인 곳, 아우야
창살 아래 또 한 세상이 묶여도
가겠네, 다시
만나겠네.
길 /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저 꽃이 불편하다 / 박영근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딩구는 꽃떨기
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시집-저꽃이 불편하다(창작과 비평사)
어머니 / 박영근
흰 꽃가루가 작업장에 들어와 뿌연 석면가루 속을 떠돌던
봄날에
기진한 몸으로 어머니 자취방을 찾아오시고
쪽가겟방 노름판이 흔하던 큰형님집 술어미 노릇에
지쳐 몇해 뜨내기 밥집 골목 누님네도 지나
나를 찾아 희미하게 웃더니
번지도 없는 고향집에 내려가 한칸 바람벽이 되었다
이주일여 농성 천막을 나와
새벽길로 방문을 열었을 때
내 작업복 어깨를 짚고 간신히 버티다
허물어지던, 텅 빈
방
믿었던 것들의 깊은 허공을 빠져나와
알지 못할 길을 쓸며 눈발은 날리고
공장엔 굳게 닫힌 철대문과
서로 사슬을 지은 채 얼고 있는
붉은 스프레이의 글씨들
나는 닫힌 공장문 앞을 서성대는데
눈발이 번지는 환영(幻影) 속으로
사거리 모퉁이를 돌아 어머니 오신다
버스정류장을 지나 담벽에 몸을 기대고
한번 쉬고
길을 묻다
또 한번 쉬고
천막 농성장 근처 전봇대에서
거친 숨을 고르다
애써 혼잣말을 더듬고 있는
편지 - 어머니에게 / 박영근
새떼들이 날아가고 있어요, 어머니
들판의 가득한 벼 포기들도 오늘은
내 앞에서 자꾸만 흔들리고 있어요. 보고 싶은 어머니
만나야 할 얼굴들도 웬일인가요
고개 숙이고 내가 없는 곳으로
더 먼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가위질에 부르튼 손마디는 더 시리고
자꾸만 어디선지
눈물이 나네요, 어머니
외롭습니다.
北斗 / 박영근
환한 대낮인데
어디선가 나도 모르는 곳에서
흐느끼는 내 울음소리를 듣는다
칼날 위에서조차
차마 나에게조차 할 수 없었던 말들
텅 빈 방 그 낯선 시간들 속에서
소스라쳐 깨어나 홀로 울고 있을
전화벨 소리를 듣는다
어떤 바람이 죽음을 감춘 낡은 집을 덮고
새들
북쪽 우러러 일제히 날아간 뒤
그 위로 떠오르리라
나 지쳐 돌아가 누울 곳
일곱별자리 北斗
물결 / 박영근
강은 내 몸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빗속에서 거칠게 내뱉다가 소리쳐 부르기도 하면서
흐르고 흐르다 살얼음 따위
슬퍼할 겨를도 없이
한꺼번에 얼어붙을 것이다
마을 가까이 귀를 열고 몸을 흔들고 있는 나무 몇 그루
완고한 노인처럼 지나간 시간 속을 걸어내려와
내 몸 위에 눕는 어스름 산그림자
한밤중 어느 때쯤 마을의 빈 집들이 못내 터트리는
기침소리를 듣기도 할 것이다
때로 그런 밤에 스스로 꽝꽝 얼어터져
새하왕게 일어설 얼음의 빛덩어리
내 몸에 새겨질 불꽃
그러나 강물이 풀리고 나는 보게 될 것이다
내 몸이 밀고 가는 추레한 얼음덩어리 몇개,
내가 깨뜨리고 녹여 없애야 할
지나간 소문들
중늙은 사내 하나 어둠에 묻혀가는 강둑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오늘밤도 오래 잠들지 못할 게다
눈이 내린다 / 박영근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나는 평양에 가겠다
공단거리 지쳐버린 사원임대아파트에 핏빛으로 몰려
오는 눈보라로 가겠다
일용직으로 떨어져
일용직으로 떨어져
바라보는 인원감축합의문 벌겋게 찍힌 노동조합 그
이름으로 가겠다
거리엔 백화점과 술집들이 온통 불빛들을 터트리고
그 불빛 속에 내 눈물 속에 비치는 외줄기 낭떠러지
길로 가겠다
이것이 노여움인지 사랑인지 나는 모른다
쌀이 좋다는 재령평야도
눈이 많다는 국경 마을도
나는 모른다
이 눈물이 아픔인지 비굴함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바람 속에
저렇게 떨고 있는 눈송이들을 위해
시커멓게 밟혀버린 눈송이들을 위해
단 한번만이라도
단 한번만이라도
꽃들 / 박영근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녹슨 철조망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트리다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흐르는 바람에 햇살 속에
어둠에마저 빛나는, 내가 아직도 통과하지 못한
어떤 오월의 고통의
맨얼굴 *
* 박영근시선집[솔아푸른솔아]-강
낙화 / 박영근
바람 속에
저 눈부신 꽃자리에
눈을 감는 허공에
꽃이파리가 떨어진다
내 몸 어디
캄캄한 가지 속에서
햇잎이 저를 밀어올리는 것인가
백목련 건너 모과나무 한 그루
마주 선 채 아침놀 받고
밤 사이 누가 왔나보다
온몸이 흥건하다
봄비 / 박영근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 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에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 데서 우레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 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 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흰 빛 / 박영근
밤하늘에 막 생겨나기 시작한 별자리를 볼 때가 있다, 그래
고통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잣소리로 미쳐갈 때에도
밥 한 그릇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치욕일 때도
그것은 어느새 네 속에 들어와 살면서
말을 건네지
살아야 한다는 말
그러나 집이 어디 있느냐고 성급하게 묻지 마라
길이 제가 가닿을 길을 모르듯이
풀씨들이 제가 날아갈 바람 속을 모르듯이
아무도 그 집이 있는 곳을 가르쳐줄 수 없을 테니까
믿어야 할 것은 바람과
우리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침묵
그리고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
이렇게 우리 헤어져서
너도 나도 없이 흩날리는
눈송이들 속에서
그래, 이제 시는 그만두기로 하자
그 숱한 비유들이 그치고
흰 빛, 흰 빛만 남을 때까지
돌부처 / 박영근
저렇게 오래
돌아앉은 돌부처는 말이 없다
골짜기 저 밑바닥에서 안개는 올라와
지난날의 전나무와 갈참나무 숲을 지우고
어두워가는 살 깊은 곳으로
바위 가파로운 산줄기를 문득 밀어버린다
어느 때쯤 돌부처마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구나
다만 맨몸인 내가
사방 허공에
뼈마디까지 적나라한데
어디선가 희미하게 물소리 들리고
바람에 불려가는 안개
뜨거운 이마에 맺히는 시간의 물방울들
내 안에서 수천수만 햇살의 숨구멍들이 한꺼번에 열린다
돌부처 하나이 바위 절벽 속에 제 몸을 맡기고 앉아
빙그레 웃고 있다
변산 기행 / 박영근
1. 산다는 일은 저렇게 곧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기어이 산맥은 길을 끊어 왕포나
채석강에서 바위 절벽 아래 떨어지고
바다 끝까지 달려간 마음도
저녁 노을로 스러지고
2. 방첩대나 지서 사람들이 밤새 술상머리를 두드리며 부르던
그 유행가 소리를 옛집에서 듣는다
선거장이 설 때마다 공화당 표몰이꾼들에게
말들이 막걸리와 그 질긴 만월표 고무신짝을 풀며
신명을 내던 아버지
내 모든 생각들이 숨을 멈추고 엎드려 있던
대공수사대
벌건 갓등 아래
시멘트벽에
발가벗겨진 내 알몸의 그림자
외롭게 춤출 때 듣던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
빨치산 전향자라는 이름
할아버지 살아계시던 옛집엔
지금도 정정한 참오동나무 한그루
아침저녁으로 가지를 흔들며
마당에 옛말을 뚝뚝 떨구고 있다
아들의 목숨을 사기 위해
한 마을을 부리던 논마지기도 당신이 묻혀서
들판을 지켜보고 싶던 선산마저 올려세우더니
그예 돌아가셨다는 말
3. 세월이 어떤 시간의 물살에 허물어져
그 이름이 쓸려가고
살붙이들에게마저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거기 묻힌다 한들
아버지에겐 끝내 지울 수 없었던
칼날의 마음
흰 눈에 호랑가시나무 마냥 푸르른
겨울숲에 홀로 들어
그 붉은 열매 앞에
몇 번이나 멈추어서서
고개 돌리고 눈물지었으리
쓰러진 마음들이
바위 절벽으로 저를 세워
파도의 아우성 키우는
변산
4. 파도는 한 바다를 이루어놓고도
저렇게 돌아서고
돌아서서 어느새
물소리 한 자락 없이
제 생애를 비워놓고
절정 / 박영근
매, 미, 들, 이, 매, 미, 들이, 매, 미들이, 매미들이
온통 살아 제 몸을 운다
한낮이 쟁쟁할수록 맹렬하게
지쳐가는 내 몸을 흔들어대고
숲의 여름빛 전체를 들어올린다
그늘의 허기까지
뜨거운 바람 속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나기
저것이 온 살을 부벼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라면
못견디게 만나
한몸으로 이레나 열흘쯤을 울고
어두움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대로 절정이다
한 삶을 지나 문득 내가 듣는
저 눈부신 허공 위의
또다른 생
그러나 끝내 몸도
주검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생명의, 그 밝은 첫자리
외촌 박서방 / 박영근
해종일 손으로 쪽밭 갈아 대파를 뽑고
해거름 막걸리 한 주발로 마저 산 그림자 훔쳐내고
이려어 이렷 소몰던 옛노래 흥얼흥얼 돌아오는데
잘 늙은 여편네 궁둥짝 같은 늦더위 호박 하나 길섶에 숨어 있네
내가 떠난 뒤 / 박영근
흰 낮달이 끝까지 따라오더니 여주 강물쯤에서 밝은 저녁달이 된다
늙은 비구 하나이 경을 읽다가
돌에 새긴 비문 속으로 돌아간 뒤에도
내가 바라보는 강물은 멈추지 않는다
내 안에서 오래 그치지 않는 그대 울음소리
강물이 열지 못한,
제 속에 잠겨 있는 바위 몇 개
나 또한 오늘 밤 읍내에 들어가 싸구려 여관 잠을 잘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떠난 뒤
맑은 어둠살 속에서 사라지는 경계들을
강물이 절집을 품고 나직하게 흐르기도 하는 것을
내 끝내 얻지 못한 강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그대 모습을
이 강에서 하루쯤 더 걸으면
폐사지의 부도를 만날 수 있다
------------------------------------관련 기사-----------------------------------------
박영근 시인. 그는 1958년 9월 3일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에서 태어났다. 1974년 3월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제도권 교육에 실망하여 스스로 그만두었다. 1980년 군에서 제대한 뒤 서울로 와 구로공단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시동인 《말과힘》에서 활동하였다. 1981년 《반시 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84년 펴낸 《취업공고판 앞에서》는 한국에서 처음 선보인 현장노동자 시인의 시집으로 인정 받고 있다. 이 시집은 출간된 뒤 많은 대학생들이 읽었으며 안치환이 작곡한 민중가요 〈솔아 푸르른 솔아〉가 실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4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985년 노동문화패 두렁에 참여하였고, (사)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과 이사,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인천지회 사무국장과 부지회장 등을 지냈다.
《취업공고판 앞에서》외에 작품집으로 《대열》(1987), 《김미순傳》(1993), 《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1997), 《저 꽃이 불편하다》(2002) 등의 시집 5권과 산문집 《옥상공장에 올라》(1983), 시평론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2004)가 있다. 1994년 제12회 신동엽창작상과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을 받았다. 2006년 5월 3일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같은 달 11일 오후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시절 "지난 몇년 동안 나는 내 안의 세계가 격심한 혼란 속에서 해체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라는 고백. 시인은 『취업공고판 앞에서』라는 시로 처절했던 80년대의 노동현실을 고발했던 사람이었고 그의 시는 현장에서 구호를 외치던 이들에게 많은 힘을 주었다. 그런데, 왜 '혼란'과 '해체'라는 말을 쓴 것일까? 여러 대답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시를 쓰면서 스스로 '치유'의 과정을 걸어왔다. 문득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아득할 때, 그의 시를 읽어보라.1980년대에 노동시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여 『취업공고판 앞에서』를 상재한 이래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노동문학의 전위에 있어온 박영근 시인이 펴낸 시집『저 꽃이 불편하다』에서 어지러운 세상 질서에 대응하고 변모해온 그의 궤적과 더불어, 뿌리 없는 삶이 어떻게 흔들리며 사람과 길을 찾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고집하고 가는 길은 막막하기 그지없다. 그 자신의 말처럼 길을 잃고 찾는 그의 20년 문학활동은 오롯한 것인가.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한 시인의 모습이 사라질 듯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무슨 연유일 것인가.
박영근 시인은 이 시집에서 삶과 시에 대한 변화의 기미를 드러낸다. 「시인의 말」에서 "이 시집을 다시 펼치는 것이 두렵다"고 했듯 그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고 싶은 한편 그 도정을 바꾸고 싶은 심정을 나타낸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성하면서 곳곳에서 자신을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개를 숙인다」에서 보듯 시인은 이제 넘쳐나는 불빛과 소란 속에서 고개를 숙인다. 이전과는 다른 이 태도에서 우리는 80년대 초반 이후 우리 시의 한 가능성으로 자리했던 노동시의 피곤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스스로 어두워오는 산 속에서 "더 무겁게 뿌리를 내리는 돌"(「나에게 묻는다」)처럼 침잠하는 자신에게 끝없이 묻는다.
이 시집속의 「겨울비」는 20년간 지속해온 박영근 노동문학의 빼어난 한 결과물이다. 그것은 또 우리 시대의 슬픈 노래이기도 하다. 「겨울비」에는 삶에 대한 뼈아픈 참회가 녹아 있다. 한 시인의 내면 에서 일어나는 화자의 심리적인 대화는 절규처럼 들린다. 시 중의 어느 독백 부분은 화자의 친구 것일 수도 있으나 시인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타자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과 포개고 있다. 시 속의 한 여인은 이번 시집 내내 중요한 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박영근 시인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면서 발견하는 것은 상처투성이의 삶이다. 돌아가봐야 아무것도 남지 않은 「길」을 노래하고, 스스로를 "한밤중 온통 얼어가는 얼음덩어리"(「봄」)라고 규정하며, "이 무거운 몸 헐어버리자"(「비수구미에서」) 한다. 이 상처와 절망 속에서 시인이 갈구하는 곳은 연평도 '말'의 세계다. 「연평도의 말」 제3연에서 "어린 칠산바다에서 억센 파도를 배우고/황금색으로 단단해지는 비늘의 바다/서산 태안을 지나/바람 잔잔해지는 한저녁쯤에/내 깊은 곳에서 알을 싣던/물고기떼의 길"이고 싶은 것이 그의 원(願)이다. 이 연평도의 '말'이란 곧 자신의 누추한 삶이 칠산바다의 흐르는 물과 고기와 합일을 이루는 몸짓이며 산란일 것이다. "내 깊은 곳에서 알을 싣"는 「연평도의 말」은 삶으로써 진정한 '말'(바다와 고기)이 되고 싶은 바람을 나타낸, 이 시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세계관이 없을 수 없고, 또 그것은 세계를 우수에 젖게 하여 우리를 돌아보고 완성해가는 한 동기이기도 하다. 부정과 내면의 절규뿐 아니라 의외의 희망이 함께 숨쉬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이번 시집이 보여주는 넉넉한 '말'과 몸을 찾아가는 시적 태도는 오히려 든든하다. 공장 담벼락을 '타고 넘어' 꽃을 피우는 본능이나 "더 깊이 가라앉아/꽃의 뿌리에 닿도록" 하려는 아픈 몸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을 향한 시인의 일여(一如)의 마음일 것이다.
흔히들 박영근 시인을 ‘노동시인’으로 불러왔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그의 시적 행보를 주의깊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격동의 한 시대를 건너오는 동안 그가 펼쳐온 시세계가 내적으로 깊어지면서 가난한 시대에 내던져진 이웃들에 대한 깊은 연민, 그리고 21세기의 시대정신을 꿰뚫어보는 치열함에 주목했을 것이다. ‘책머리에’에서 온밤을 꼬박꼬박 새우면서도 “그 비유의 세계의 씨줄과 날줄 사이를 아슬히 휘청거리듯 걸으며 느끼는 행복감을 달리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치열성은 이 책의 집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남달리 많은 시와 글들을 읽는 것으로 알려진 저자이기에 다른 이들의 해석이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경지에 이를 때마다 그와 같은 충족감으로 밤을 지새운 고통을 보상받았을 것이다.
박영근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사는’ 사람이다. 이는 시를 대상화하여 해석하고 평가하는 비평가들의 글쓰기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저자는 곧바로 시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어 시의 내재적 움직임과 교감하며 그것을 절제된 언어 속에 담아낸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한편한편의 글들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상식과 교과서적 해석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시의 내밀한 자궁’이다. 이론이나 외적 규정이 섣부르게 시의 해석에 끼어드는 것을 경계하면서, 시 한 편을 “그것만으로 독자화시켜 온전하게 읽”(‘책머리에’)어내기 위해 펼쳐진 노력들은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곧바로 우리를 시의 본령으로 안내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심미적인 문장들은 시적 영혼의 고백과 반응하면서 독자적인 시들이 뿜어내는 숨결과 호흡을 같이하는 드문 경험을 선사한다. 거기서 우리는, 낱낱의 시들이 내밀한 자궁 속에서 탄생하는 과정을, 그 시들이 그 나름의 깊이와 그늘 속에서 비상하고 꿈꾸는 여정을 지켜보게 된다.
시인은 세상을 이기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시는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에 남았다. 마흔여덟의 생애를 겨울 산정에 서 있는 한 그루 외로운 나무처럼 살다간 시인. 안치환이 노래부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백제’)의 원작자로 장시 ‘김미순전’과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를 통해 노동자 문학이라는 장르를 최초로 열어보인 시인.
가을호로 출간된 계간 문예지들이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고 박영근 시인의 추모 특집을 마련해 눈길을 끈다. 계간 ‘창작과비평’ ‘시작’ ‘작가’ 등 3개 문예지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고인과 58년 띠동갑 시인 이승철과 이재무의 추모글은 온 몸으로 삶을 밀고 나가면서 세계와 대결한 박영근의 인간적 체취를 전하고 있어 코끝을 찡하게 한다.
1981년 박영근이 ‘반시’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며 등단한 직후 그가 살고 있는 영등포 신정동의 뚝방촌 단칸방을 무작정 찾아간 이승철은 ‘시작’에 실린 ‘문학이라는 이름의 가시면류관 앞에서’라는 글을 통해 회상한다. “그 석양녘,나는 번지수도 없을 법한 박영근 시인의 집을 물어물어 간신히 찾아갔지만 그의 초라한 행색 앞에 내심 놀랐다. 시인의 행색이 저리도 민중적이어도 되는 것인가. 나는 그의 박학다식에 놀랐고 전라도 출신치고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 그의 서울 말씨에 대뜸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신흥 명문고인 전주고등학교를 다니다 어느날 갑자기 문학병이 도져 학교를 때려치우고 경향 각지를 떠돌던 박영근이 가난한 사람이 모여사는 영등포 뚝방촌에 흘러든 것은 1977년 가을이었다. 그는 시에 미친 문학청년이었고 난독에 가까울 정도로 수많은 책을 독파하며 문청 시절을 살았다. 뚝방촌에서 그가 만난 것은 민중의 실체였다. 고교 중퇴에 노동자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지만 그가 열변을 토한 민중문학론은 기라성같은 문학평론가들도 숨죽여 경청할 수밖에 없는 진언이었다.
이승철의 회고는 이어진다. “그의 아버지는 빨치산 전향자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공화당 선거꾼에 가산을 털어 막걸리와 만월표 고무신짝을 풀어야 했다고 그는 자신의 시 속에 고백한 적이 있었다. 산다는 것의 허망함,그 생존의 허허로움 때문에 그가 때론 막김치처럼 헤픈 웃음을 날렸지만 나는 그 웃음의 깊은 의미를 아직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계간 ‘작가’는 문학평론가 이성혁의 ‘박영근론’을 필두로,시인 이재무 박일환,소설가 이인휘 김지우의 회상기를 싣고 있다. 이재무는 “넌 영원히 철들기를 거부한 만년 소년이었다. 네가 흘린 그 많은 맑은 눈물은 네 몸속의 늙지 않는 소년이 시킨 짓이었다”고 회고한다. “너와 입씨름을 하고 난 날은 허기가 일찍 찾아왔다. 너는 라면을 무척 싫어했다. 귀찮아하는 나를 달래 손수 밥을 지어 밥상에 올려놓는 걸 보면서 ‘저 놈은 그래도 제 몸 하나는 일구월심 챙기겠구나,명은 길겠네’ 속으로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이인휘는 “박영근이라는 이름을 거론하면 닭장집들이 모여 있던 공단의 어두운 뒷골목이 펼쳐지고 가리봉 오거리에 있던 취업공고판 앞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고 썼고 김지우는 “무엇인가 마음에 들면 늘 손을 꼬옥 붙잡아다 악수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시인 김사인의 말처럼 박영근은 십년 전 외적 억압에 의해 비극적 생의 종결을 맞았던 고 김남주 시인과 본질상 비슷한 사정으로,삶의 벼랑끝에서 자본의 논리와는 상극인 근대 이전의 체질로 맞서다 고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지,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이 적 서툰 노래/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원추리는 그 주홍빛 꽃을 터뜨릴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듯 올 봄 문예지 ‘리토피아’에 발표한 그의 마지막 시 ‘이사’의 한 구절이다.
----------------
박영근의 시집『저 꽃이 불편하다』는 폐허로서의 현실을 견디는 '인고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으며, 비극적 실존의 초상을 보여준다.
이 시집은 역사에 대한 정직한 응시와 일상 속에 은폐된 비극성을 고발하는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며,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함께한 일상적 삶을 다룬다.
시인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황량한 '겨울'의 '길' 위에서 실존적 고뇌에 휩싸인 모습을 그리며, 절망적 현실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사유의 집짓기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박영근의 시는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는 행위가 현재를 견디고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그 과거를 무화시킬 정도로 강렬한 현실의 절망을 노래하고 있다.
--------------------------
https://naver.me/GRoPvPn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