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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소개

도서관 시모음

작성자시냇물|작성시간25.08.11|조회수91 목록 댓글 0

[202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도서관의 도서관 / 임효빈


한 노인의 죽음은 한 개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거라 했다

누군가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나는 열람실의 빈 책상이었다 책상은 내가 일어나주길 바랐지만

누군가의 뒤를 따라갔으나 나의 슬픔은 부족했고 무수한 입이었지만 말 한마디 못했고 소리 내어 나를 읽을 수도 없었다

대여 목록 신청서에는 첨언이 많아 열람의 눈이 쏟아지고 도서관은 이동하기 위해 흔들렸다

당신은 이미 검은 표지를 넘겨 놓았고

반출은 모퉁이와 모퉁이를 닳게 하여 손이 탄 만큼 하나의 평화가 타오른다는 가설이 생겨났다

몇 페이지씩 뜯겨나가도 도서관 첫 목록 첫 페이지엔 당신의 이름이 꽂혀 있어

책의 완결을 위해 읽을 수 없는 곳을 읽었을 때 나는 걸어가 문을 닫는다

도서관의 책상은 오래된 시계를 풀고 있다.


2021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도서관 / 신윤주

  커다란 눈이 하늘을 올려다봐요. 수백의 실핏줄들이 네모난 바스켓을 움켜쥐어요. 하늘로 날아올라요. 바다의 표지는 잔잔해지고, 파도가 물러간 페이지마다 떠밀려온 해인초들이 엉겨 붙어요. 해인초가 손끝에서 잘게 부서져요. 낮과 밤을 알 수 없는 시간이 이어져요. 키잡이는 가시 박힌 손으로 안개를 더듬으며 항로를 찾고 있어요. 날씨만 도와준다면 오늘 안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그곳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거든요. 시커먼 해초들이 대서양을 밀고 들어와 바다의 귓속에 이야기를 풀어 넣어요. 귀를 막아도 노랫소리가 들려요. 저기 범고래 떼가 몰려와요. 표류하는 낱말 조각들을 등에 실어 해안선으로 날라요. 실핏줄이 터지고, 열기구가 휘청거려요. 행운이 문단 밖으로 달아나려 해요. 숨이 차요. 하강하고 있어요. 저 멀리 익숙한 초록색 대문이 보여요. 마당에는 안개꽃이 흐르고요. 열린 창문으로 파도가 들이쳐요. 파란 잉크가 옷에 튀어요. 발목이 잠겨 첨벙거려요. 이만 돌아가야 해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손끝으로 모래의 지문들을 털어내요. 숨을 크게 들이쉬어요. 한없이 부풀어 올라요.



도서관에서 / 차창룡


지식의 배설물들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쌓아놓으니
참 두엄자리 장관이로다
이 거름 뿌리면 저 수많은 두뇌의 화초들
이파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리니
복사실에선 지식을 태우는 연기가 스모그를 이루고
사람들은 스모그 속에서 의식의 사리를 줍는다

계통적으로 정리된 나무의 납골당에서
진시황이 불태운 책 한 권을 꺼내드니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들의 시체가 시커멓다
얇은 종이관에 안치된 시체들에게 소중히 경배하면서
우리는 제사장에게 우리들의 이름 한 점씩을 떼어주고
시체들이 제공하는 언제나 날것인 죽은 회를 음복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새로운 제사법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썩어가노라

달마는 지혜의 해골을 혜가에게 건네주고
혜가는 승찬에게 건네주고
승찬은 도신에게 건네주고
도신은 홍인에게 건네주고
홍인은 혜능에게 그 해골 건네주니
지혜 또한 썩고 또 썩어 다시 똥이 되는데

그 똥 먹기 위해 이렇듯 북새통을 이루니
똥을 퍼주는 배식원들은 자꾸만 불친절해지고
오줌 한 방울도 흘리지 않기 위해 배고픈 사람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똥독을 소중히 받아 안는다
아 그 거름 모래비처럼 세상에 쏟아질 날
입 벌리고 기다리노라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새로운 고행법이다

나무의 시체를 먹고 또 먹어
나의 뱃속에 도서관만한 나무 한 그루 뿌리내릴 때까지
나는 나를 낳고 나는 나를 낳고
나는 나에게서 나와 나를 낳고
먼저 죽어야 할 나의 고기로 회를 쳐먹는 시간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헛된 식욕을 위해
시간의 목탁을 두들기며 탁발하는

* 마태복음 1장 2 ∼ 4절.


도서관 간다 / 이인원


질기고 긴 문장 붕대로 꿈틀대는 그리움을 
꽁꽁 殮해 두러 간다

과월호 잡지 신세 같은 쓸쓸함을
훌훌 거풍시키러 간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에도 깨서 보채는 외로움을
고문서보다 깊은 잠 재우러 간다

머릿속에 빼곡한 ‘너’라는 낱말을
모조리 삭제하러 간다

고전이 되지 못할 내 비밀을
고전 속에 암호처럼 밑줄 그어두러 간다

끝내 못다 읽은 어떤 사랑이야기를
아쉽지만 기일 반납하러 간다

온갖 잡다한 사연 다 끌어안고도 의연한 도서관을
눈꼽만큼이라도 닮으러 간다

 
 
―《시와반시》 2006년 가을호 수록작
2007년《현대시학》작품상


사라진 도서관 / 강기원

 
도서관이 사라졌다
익숙했던 내 의자가 없어졌다
빌려온 책들의 반납 기일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고백컨대
책을 읽는 대신 나는
그 도서관의 책들을 한 장씩 씹어 먹었다
젖을 먹어야 할 때 그림 형제의 삽화를
초경이 시작될 무렵 데미안의 알을
머리에 피가 마르기 시작했을 때 사랑의 기술을
아무리 기다려도 피 다 마르지 않아
북회귀선의 금지된 선을, 위기의 여자를
자근자근 씹어 먹었다
그 낡은 도서관의 책들을
한 권씩 뽑아들 때마다
도서관의 갈빗대가 하나씩 뽑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책은 먹을수록 허기가 져 자꾸 먹어댔고
내가 뜯어 먹는 것이 피와 살덩이인 줄
그땐 정말 몰랐다
개정판 사전도 베스트셀러도 없던
사라진 말들의 유적지
폐관시간도 없이 모든 게 무료였던
나의 파라다이스, 책만큼이나 많은 돌무더기
나의 찬란한 폐허, 낡은 도서관 내 어머니
내가 파먹은 그의 부장품들
아직도 입 속에서 우물거리고만 있는
이 경전들은 어쩌라고
사라진 도서관 한 채가 관 속에 누워 있다


하늘 도서관 / 최승자


오늘도 하늘 도서관에서
낡은 책을 한 권 빌렸다

되도록 허름한 생각들을 걸치고 산다
허름한 생각들은 고독과도 같다
고독을 빼앗기면
물을 빼앗긴 물고기처럼 된다

21세기에도 허공은 있다
바라볼 하늘이 있다
지극한 無로서의 虛를 위하여
허름한 생각들은 아주 훌륭한 옷이 된다

내일도 나는 하늘 도서관에서
낡은 책을 한 권 빌리리라


국립중앙도서관 / 고영민


허공에 매화가 왔다
그리고 산수유가 왔다
목련이 왔다

그것들은 어떤 표정도 없이
가만히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쭈욱 빼고 내려다보았다

그저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하다가
매화가 먼저 가고
목련이 가고
산수유가 갔다


키위 도서관 2  최승철

 
   형이 야구를 하자고 했다
   나는 던지고 형은 치고
   그날 이후
   잡초 속의 야구공이 슬퍼 보였다

   조카들을 데리고 동네 상점에 가서 사탕 몇 개를 사 주었는데 또 옷이 더러워졌다 국제신용평가사 S&P는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한 단계 강등한 AA+로 결정했다 식사 예절법에 따르자면 사용하지 않는 손은 언제나 무릎 위에 두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분노의 칫솔질!
   1년 된 칫솔로?

   몇 달 간 운전하지 못한 경차의 먼지 낀 유리창에 병신이라고 쓰여진 낙서가 부각되어 있었다 거미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 짓이겼다 거미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 다만, 자기 나름의 혈흔을 남기는데 모기에게는 치명적인 죽음을 안긴다

   젊은 여자의 흰 운동화가 앞에서 걸어가는데
   흰 무명천이 나풀거리는 승무가 생각나는데
   예쁜 여자 무당이 태양 속에 살고 있었다

   꽉 찬 방광으로 잠을 자다 발가락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가 꼼지락거리면 휴대용 부탄 가스통이 만져지곤 했다 겨울 하늘을 날아 본 적 없는 나비에게, 저 겨울 하늘 적막에서 쏟아져 나오는 흰 눈들을 보여 주고 싶었다

   태양 아래 볼보이
   지난밤에 쏟아 놓은 형의 말들
   벚꽃은 저리 지는데
   ————
   * 키위(kiwi): 키위과에 속하는 새. 날개는 퇴화하여 날지 못한다. 꼬리깃이 없으며 발톱으로 격렬하게 차서 적을 막는다.


도서관 / 윤덕남(1969∼ )

 
고이 잠든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곳인지라
이곳에 들어찬 것은 침묵과 그림자들뿐이다.
잠든 책을 깨우기 위해서는 열과 행을 지나
고유번호에 얽힌 내력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은 책들도 꽂혀 있는 곳이라
잠든 책을 끄집어낼 때는 신중한 손길이 필요하다.
겉장을 넘기는 순간 알게 되지만
잠든 책을 잉태하고 출산한 산모의 증명사진이
박혀 있다. (때로는 박혀 있지 않을 때도 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면
갠지스 강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벵골호랑이 한 마리가
책장을 넘기던 손가락을 핥을 때도 있고
불시착한 우주선 안에서 끄집어내 달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릴 때도 있고
책장을 넘기던 손가락을 타고 달팽이가
기어 나올 때도 있다.
그리고 가끔씩 흰 눈이 펑펑 내릴 때도 있다.
어느새 다정한 친구가 되어버린 침묵
어느새 저 멀리 구석진 자리에서
다른 그림자와 밀회를 벌이고 있는 그림자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망각할 때도 있다.
깨어난 책을 다시 꽂아놓는 일은
아주 특별한 규칙과 행동이 요구되기에
침묵에 잘 길들여진 손길에 맡겨놓아야 한다.
깨어난 책을 다시 꽂아놓는 일은
장의사보다 엄숙한 것은 아니지만
깨어난 책을 다시 잠들게 하는 일이기에
아주 신중한 판단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곳에 들어와
단 한 번도 잠든 책을 깨우지 못한 자들도 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런 분이다)
늘 언제나 침묵이 도사리고 있는 곳
그림자들의 은밀한 생이 펼쳐지는 곳
나는 오늘도 이곳에 앉아 침묵과 친분을 쌓으며
몸에 달라붙은 그림자를 잃어버린다.       

        —《시인동네》2014년 가을호, 신인문학상 당선작


도서관에 갔어요 / 이근화
 

도서관에 갔어요
걸어서 갔어요

첫째 날은 이별을 고하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꿈의 허연 입술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둘째 날의 도서관은 조금 추웠습니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낡은 스웨터를 다시 꺼내들었어요

멀쩡한 여자가 책과 책 사이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집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셋째 날의 도서관은 텅 비었어요
바작바작 종이를 씹어 먹었는데

물고기 같은 것이 튀어 올라
작고 빛나는 글자들을 토해냈습니다

어지럽고 기분이 막 좋아집니다
도서관에 갔어요
발을 질질 끌고서

사탕을 천천히 오래 녹여 먹으면
죽을 때 그렇게 된다고 했습니다

다정한 팔이 나의 목을 조여옵니다
입 없는 사람들이 무섭게 서 있었어요

도서관에 갔어요
죽음이 덜컹거리는

 
도서관에서 / 하재연


기둥처럼 자라고 있는 것이 있었다
검은 감정들
불투명한 잔여들

사생활을 엿보는 일들로만
우리의 삶은 지속되고 있어서
한 남자는
하루의 내역서를 말로 타이핑하고

목차가 없으므로 목을 늘어뜨리고
나를 기억해내고 싶었다

무섭게 검어가는 포도알들의 밭 가운데서
나의 목소리는 물이 빠지고 있었다

카트에 남은 물건들은 몇 가지 책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잊고 문을 잠근 것이었다
불이 꺼진 다음이었다


사라진 도서관 / 한정원

 
도서관 하나가 불탔다
목이 긴 여름밤이 장마 속에 잠겨
기억의 수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쏟아져 나왔다
어머니가 관장인 도서관이 매운 연기를 뿜어냈다
책들을 베껴야 했다
한 문장 한 문장 꼬리까지
받침이 부러질 때까지 물고 늘어져야 했다
재가 된 구름이 검은 옷을 입고
글자의 그림자가 되어 소리 내지 못하고 흘러갔다
도서관이 불타는 것은 우주의 일
도서관이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도서관이 불에 탔다
미래가 불탔다
혈족들이 잊혀졌다
태울 것이 없어서 앞 건물 뒷 건물 놔두고
불면의 새벽을 망치로 두드렸다
이제 어떤 문장도 어법에 맞지 않는다
입술은 바닥을 드러내고 식은 땅의
유물 속에서 침이 마른 인덱스 목록이 나왔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어서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던
요절한 남자의 차가운 이름을 켜놓고
적막이 된 신전 앞에서 구걸을 한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탔다는 말
찔레꽃도 장미도 깊고 검은 흉터를 남기고
기둥 없는 열람실로 멀어져 갔다


도서관 / 권정일


한 그루의 너만 파헤치지 않겠어.
불을 지를 거야 그리고 뼈를 발굴하겠어.

약간의 비타민 약간의 탄수화물 약간의 호기심 약간의 이기심 적어도 수은처럼 흐르는 나쁜 피와 몸을 섞어야 놀아나기가 좋겠지. 나에게는 am 00:00과 pm 00:00을 사용할 수 있는 아침과 노을이 있거든.

서술하는 형식으로 해석하는 것들은 과학적이지. 비는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거야. 작아지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가치관이기도 해. 책들은 현재형으로 가만히 앉아 있지만 동시다발 사건이다.

도서관에는 울타리가 없다.
그래서 정숙하지 않아도 된다.
도열하고 있는 죽음이 서표처럼 꽂혀 힐끔힐끔 관찰하기 때문이 아니다.
너는 무엇을 훔치려 하느냐. 대하소설 등장인물들이 나를 열람할 때

2층 계단을 올라 몇 개의 플롯을 깨운다.

순하고 드넓은 창문에 기대거나 슬픈 제목의 책에 엎드려 이야기가 정말 슬픈지 울어보고 싶어졌다. 아프거나 어둡거나 고통이거나 죽는 주인공들, 나는 울지 않아, 깊은 강물을 흐려놓고도

나는 울지 않아, 물고기를 낳고 있는 중이거든!


피의 도서관 /  류 흔


 선택은 필수지만
 필수적으로 선택하다간 죽어요

 주제가 흐리거나
 맥락이 문어발인 책을 뽑는다면 당신
 죽어요
 타인의 손때가 묻지 않은 신간(新刊)에
 지문이 찍히는 순간
 죽어요

 지금은 가나다 순으로
 사서들이 살과 뼈를 분류하는 시간
 당신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지 못하죠 그러
 니까, 조심은 필수

 853 ㅍ 독일문학 외진 서가에서 방금 잡혀온
 연인을 보세요 이히리베디히 이히
 이히히히 저들은 곧 피를 보겠군요

 여자는 벼린 책장으로 손목을 쓱
 남자는 책갈피에 끼워 팍! 덮어버리겠지요

 핏핏 돌아가는 스프링클러처럼
 사방 피가 튀고
 터진 배에 내장된 문장들이 꾸물꾸물 흘러나와요 그러
 므로, 우리 조심하기로 해요 사뿐
 사뿐 다가오는 독신의 사서에게 걸려
 한 아귀에 멱을 잡히거나
 읽던 책을 압수당하는 비극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당신

 신중히,
 몹시 신중히 전화를 해요

 형사에게
 탐정에게

 대출이 안 되는 정숙(靜肅)에게.


빗소리에 서둘러 창문을 닫는 도서관 / 손택수

 
종이들이 나무의 기억을 잊지 못해 습기를 빨아들인다
책들이 저도 모를 향수병에 품은 말들을 잊고
흙처럼 부풀어 오른다
도서관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
빗줄기는 밋밋한 평면을 뛰어가는 여자의 발목으로부터
여울목 물소리를 데리고 온다
발목엔 은피라미 같은 발찌가 반짝인다
징검돌을 건너듯 위태로운 걸음걸이
말과 말 사이의 도약은 춤이 되지 못하지만
구름은 비를 줄자로 모든 공간을 다시 측량한다
비를 쇠파이프 비계로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난다
어느 작가는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들을 땅속에 묻고
그 위에 정원을 만들었다고 하지
책 위로 피어나는 꽃들을 철마다 달리했다고 하지
책 속의 문장들이 지렁이처럼 튀어나와 구불거리기 전에
어서 창문을 닫자 쏴 여울목 물소리에 쓸려가 버리기 전에
포도 바닥을 실로폰으로 후두기는 빗방울,
모든 문장부호들을 삼켜버린 문장부호들
사이에는 생략이 있다 여백이 있다
여울 위로 저를 뒤집는 은피라미의 도약이 있다
빗줄기가 우산살처럼 휘어진다
우산이 치마처럼 뒤집히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젖은 벽에서 은밀하게 부서져 내리는 모래들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침묵의 도서관 / 오정국


죽고 사는 일이 물소리처럼 아릿하다, 여기는 온통
침묵을 베껴 적은 일생일대의 저작물들
죽음은 없고 묘비만 남은 생애들, 온통 여기서
황금빛 서가를 물들이고 있다

형체는 없고 기억만 살아 있는, 여기는 온통
끝없는 갈림길의 문장들, 침묵의 발걸음이
한 뼘 두 뼘 숨을 쉬고, 서가에 이마 기댄 이들의
일평생, 한낱 꿈으로만 흘러갈 순 없으니
오늘 하루의 회전문 곁에
빗물 젖은 우산이 꽂혀 있다

창밖의 나뭇잎을 흔드는 빗방울들
영원의 찰나를 깨워놓는데
사진 속의 여자는 말이 없다 등을 구부린 채
한사코 액자 밖으로 팔을 내뻗고 있다
백 년 전의 이야기처럼

하루의 길이는 달라지지 않는데
일몰의 빛은 짧고
침묵의 투숙객이 펼쳐놓는
방명록, 묵직한 손 글씨가
그 일생의 행적을 말해주는데
결국은 모래시계처럼 비워지는, 여기는 온통


삶이라는 도서관 / 송경동(1967~ )

다소곳한 문장 하나 되어
천천히 걸어나오는 저물녘 도서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거구나
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얌전히 닫힌 입
애써 밑줄도 쳐보지만
대출 받은 책처럼 정해진 기한까지
성실히 읽고 깨끗이 반납한 뒤
조용히 돌아서는 일이 삶과 다름없음을
나만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는 위안
혼자 걸어 들어갔었는데
나올 땐 왠지 혼자인 것 같지 않은
도서관


공공도서관 / 전윤호 (1964~ )


저 숲을 이룬 아파트들
손보다 높이 올라간 서가들
창마다 불이 켜진 무덤들
어차피 다 읽어 볼 수도 없는
색인표 하나씩 둘러쓴
잃어버린 왕조의 유물들
내 살아온 얘기 책으로 쓰면
소설책 열 권도 모자라지
월세 올리러 온 노인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퀴퀴한 침묵이 내리누르는
망자들의 열람실에서
눈에 불 켜고 무덤을 뒤지는 도굴범들
빌릴 수는 있어도
가질 수는 없는 집들
은행이 말한다
당신은 연체 중입니다
대출 금지입니다


검은 돌 도서관 / 이경임


‘2025년 탄소중립 도시’ 선언한 코펜하겐
그곳에서 본 도서관

아프리카 짐바브웨 검은 화강암으로 만든 도서관
블랙 다이아몬드 도서관

거대한 검은 화강암과
강철 같은 유리로 건축한 도서관

도서관 중앙 유리벽으로 쏟아지는 빛들
햇빛 맑은 바람 속에서 일렁이는 운하
밤의 숨결 물결 속에서 춤추는 불빛들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자연의 빛과 어둠
검은 돌 도서관 안 사람들의 어둠 빛과 만나

자연과 사람이 조용한 축제의 시간이 되는
검은 돌 도서관

검은 돌 도서관 입구에는
상점, 카페, 음식점들
음악 연주되고 미술작품 전시되는 공간들 늘어서 있고

연애하는 젊은이들, 기념사진 찍는 신혼부부들
쉬고 있는 노인들, 산책 나온 사람들
유람선에서 손 흔들며 바라보는 여행자들

어려운 책들처럼 오랜 동안 읽기 힘들었던 사람들도
빌려주는 검은 돌 도서관

장애인, 노숙자, 동성연애자, 이주 노동자
소수 종교인, 비만 상태인 사람들
편견 고정관념 거스르는 직업 가진 사람들

마음 열고 눈 귀 열고 책들을 읽듯
그 사람들 만날 수 있는 검은 돌 도서관

그곳에서 『나』에 대한 독후감도 읽었지

탄소 제국 시민권자의 허영심과
유리벽 없는 검은 영혼


구름도서관 / 신현락


강 건너 나무들은 거꾸로 서서
구름 한 조각을 서표처럼 물고 있다.

사서는 나뭇잎을 건네주고 물에 띄워보라고 한다.
구름의 책을 펼치기 전에
먼저 강변의 고요한 무릎을 만나라는 것이다.

가만 들어보면 푸른 하늘에서
빙어 떼 몰려가는 강물소리가 난다.
엽서처럼 가벼운 영혼이 되지 않으면
구름의 서가에 들어갈 수 없는 곳,

물새들의 발자국이 가리키는 곳,
사려 깊은 사서는 내게 나뭇잎배를 권해왔지만
나는 이미 도서관 문턱에서 길을 잃었던 것,

모든 구름의 책들이 불타오르는 황혼녘
나무들은 재가 된 책갈피를 강물 위에 풀어놓고
빙어 떼가 입질하는 수면에서 제 그림자를 거둔다.
사서는 내 손에 나뭇잎을 남겨둔 채 문을 닫는다.

여기는 구름이 몇 번이나 지나간 강변,
지금 몰려가는 새 떼 역시 그곳으로 간다.
이 강변에서 가는 방법을 모르는 건 나뿐이어서
나는 나뭇잎배를 슬며시 띄워 놓고 돌아선다.

등 뒤에선 구름의 책장을 넘기는
강물 소리가 범람하고 있다.


시집『그리고 어떤 묘비는 나비의 죽음만을 기록한다』2015. 북인


도서관 / 박현웅


  몇 권의 구름을 대출한 나무들
  한낮의 졸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우수수 문장들을 쏟아내고
  한쪽 공중을 허무는 구름
  잎들의 필사는 늘 바람의 일,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벌레 먹은 낱장들의 바스락대는 그림자
  반짝거리는 햇볕들이 모여 있는
  몇 그루 나무도서관 들(野)

  수천 권의 문들이 빼곡히 꽂혀있는 도서관
  서 있는 제목들,
  눕지 못하는 고단한 碑文같다
  바람을 불러들여 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줄거리들
  쏟아지지 않는 잠의 저편이 엎드려있다

  나무들은 흔들리며 풍경을 복사한다. 대출이 뜸한 스피노자 영감은 구석의 칩거에 든지 오래. 안경 깊숙이 밀도를 더하는 소용돌이가 잠깐씩 쉬고 있다.

  새들의 낭독, 소란스러운 창문 밖
  자판기 커피 메뉴들이 뜨겁게 끓고 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문득
  삐걱거리는 경첩의 소리 같다는 생각.

  [2011 신춘문예 당선시집] 문학세계사


납골당 도서관 / 김나영


   질기게 하품을 하고 있는 시계 아래, 늙은 사서(司書)가 정물처럼 앉아 있다. 투덜투덜 동어반복만 늘어놓는 선풍기는 지루하게 피어오르는 도서관의 고요를 좌우로 흔들고 있다. 읽히지 않는 책들과 빈 의자가 부동자세를 한 채 졸고 있는 이 곳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빼든다. 세련되지 못한 겉표지에 드문드문 곰팡이가 묻어있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거미 한 마리 황급히 줄을 거두며 사라지고, 입냄새가 울컥 쏟아진다. 1978년 9월 25일 이후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던 그 입. 누군가의 눈빛을 기다리던 그 입. 눈이 맵다. 그걸 눈치 챈 선풍기가 재빨리 공중으로 냄새를 흩어 버린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의 제목이 위패(位牌)처럼 선득하다.



소금 도서관 / 김희업


소금 도서관으로 간다
무게와 색상과 맛이 모두 다른 소금
검지로 살짝 찍어서 맛을 음미하는
짜릿함을 아실는지
맛보지 못한 굵은 소금을 펼쳐본다
깨알 같은 소금의 결정체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

애인과 헤어지려는 대목에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다 누구의 눈물일까,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끝으로 슬쩍 문질러본다 아직 물기가 채 가시지 않아 활자가 스르르 번질 것만 같다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소리내어 흐느꼈을까, 그녀는 몇 명의 애인과 헤어졌을까, 애인이 있기는 있었을까, 그녀의 머리는 어느 샴푸로 감았고, 며칠에 한번 머리를 감을까, 샴푸를 산 날짜는 언제쯤일까, 그 샴푸는 어디서 샀으며, 샴푸의 가격은 얼마일까, ……

그녀의 행간 사이에서만 헤매다
129쪽에 계속 머물러 있다

한 행만 넘어서면 주인공은 애인 곁에서 영영 멀어질지도 모른다 한 번도 애인과 헤어져 본 적이 없는 나는 그리고 한 번도 애인이 없었던 홀가분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어쩌면 주인공은 결말에서 애인과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던 그녀가 떠올라 그렁그렁 다음 행을 넘지 못하고 소금을 덮어버렸다 눈물이 바닥에 쉼표처럼 뚝뚝 끊어질 것만 같았다

소금을 오래 바라본 사람들이여
소금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여
소금이 녹기 전에 돌아오려나
주인공은 애인을 다시 만나려나
눈물을 흘리던 그녀를 우연히 만나듯
나는 소금 도서관으로 간다
가끔 손때 묻은 소금이
모르던 길을 남몰래 슬쩍 일러 주기도 한다


죽변도서관 / 김명인


  책 만 권을 한꺼번에 펼친 바다가
  기슭의 파란까지 덮어버렸으니
  일몰 이후에나 대출된다는 밤바다는
  평생을 새겨도 독해 버거운
  비상의 어둠일까, 이 도서관의 정서려니
  갈피나 지피려고 주경야독한다는
  어부들의 말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일생을 기대 읽는 창窓이야
  시인의 일과처럼 갈짓자 행보지만
  알다가도 모를 달빛을 지표삼아
  어둠으로 안내하는 사서의 직업이란
  그다지 참견할 일이 못 된다
  다만 그 일로 한두 시간 끙끙거리려고
  삐꺽대는 목조계단을 밟고 오른다
  이 도서관이 대출하는 장서라면
  파도 한 단락조차 내게는 벅찰 것이니
  오늘 밤에도 누군가는 등대를 켜고 앉아
  첩첩 어둠을 읽고 있겠다!


나의 도서관 / 최정희

한 권의 책이 사라졌다 내 작은 도서관에서
낡고 오래되어 겉표지가 닳고 해진
이제는 열람 불가한
나를 키운 백과사전

묵직한 두께 앞에 범접할 수 없었다
고루한 지식이라 한때는 외면했다
세월에 깊어진
아버지라는 철학서

책장 가득 살아 있던 진솔한 삶의 향기
지친 생의 모통이에서 언제나 찾아가던
살면서 더욱 그리운
영원한 나의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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