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좋은 시 소개

임효빈 시모음

작성자시냇물|작성시간25.10.31|조회수212 목록 댓글 0

<<임효빈 시인 약력>>

*1966년 충남 부여 출생.
*202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 『우리의 커튼콜은 코끼리와 반반』


도서관의 도서관 / 임효빈


한 노인의 죽음은 한 개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거라 했다

누군가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나는 열람실의 빈 책상이었다 책상은 내가 일어나주길 바랐지만

누군가의 뒤를 따라갔으나 나의 슬픔은 부족했고 무수한 입이었으나 말 한마디 못했고 소리 내어 나를 읽을 수도 없었다

대여 목록 신청서에는 첨언이 많아 열람의 눈이 쏟아지고 도서관은 이동하기 위해 흔들렸다

당신은 이미 검은 표지를 넘겨 놓았고

반출은 모퉁이와 모퉁이를 닳게 하여 손이 탄 만큼 하나의 평화가 타오른다는 가설이 생겨났다

몇 페이지씩 뜯겨나가도 도서관 첫 목록 첫 페이지엔 당신의 이름이 꽂혀 있어

책의 완결을 위해 읽을 수 없는 곳을 읽었을 때 나는 걸어가 문을 닫는다

도서관의 책상은 오래된 시계를 풀고                                                                     (등단작)

             —시집 『우리의 커튼콜은 코끼리와 반반』 2022.10
-----------------------

몇 번 죽어야 할 신화 / 임효빈


아이들이 신화를 그린다 아이들의 제국엔 흩뿌려진 옥상이 있고 아이들이 쓴 일기장엔 밀랍 날개가 녹아내 리듯 주술이 풀리고 있다 잠언은 고백의 장에서만 이루어져 우리의 미안함이 지상의 안녕 속을 구른다 오래된 신화는 쉽게 다가오지만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때마다 어깨를 맞대고 주머니 속에서 쓰다 만 일기장을 꺼내 거꾸로 들어 보인다 신들의 옅은 미소가 새소리에 놀라 흩어진다 신화 속 신들은 어느 별에도 살지 않아 그들이 수많은 별들을 끌어안고 뛰어내린다 오래된 신화는 몇 번 죽어야 산다

아이들의 눈에 새로운 신들의 미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곡선은 시작의 반성이다 / 임효빈

두 달간 로드 매니저가 되어주실래요

백일의 고민도 함께 할 수 있나요 파도타기 같은 상상이 필요하겠지만 날아간 나비처럼 끝나면 습관이 되겠죠 그러니 파장의 녹색 불은.켜지 마세요 위험한 시그널입니다

함정에 빠지는 일이 쉬웠다는 회고록을 써도 될까요

혼자 노는 굴뚝엔 끼고 싶지 않았어요 말없는 의자가 될 수 없으니 서서 관람하는 마지막 공연처럼 문을 조금 열어두어요 첫 쓸쓸함을 위해 코너링을 해야겠죠 생의 문장들은 핸들을 두 손으로 잡고 항상 심장을 조심해야 해요 베스트셀러가 되기 전 샴페인이 버블버블 터질 수있으니까요

몽상은 트릭이라고도 하죠 슬기로운 이중생활을 즐기려면 목차를 잘 감추어야 해요 불시 검문도 예정된 거잖아요 악마를 죽이려다 천사가 죽었다는 회고는 이제 무섭지 않은 고해성사가 되었어요

당신이 많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나를 덮어야겠지만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검은 여백 / 임효빈


세 번째 늑대가 울면 열던 밤을 책장 속에 밀어 넣었다 거인은 페이지를 넘기며 잠들고 최면을 걸 듯 밑줄 친 불안마다 젖어 있어 검고 투명한 기분이 들었다 숨소리를 키울 수 없어 베란다 유리창에 집어 던지고 창과 창 사이를 오가며 얼어붙는 시간을 녹이기도 하였다 여럿인 세계에서 쉽게 사라지기란 어려운 일이라 늑대는 또 태어났다 티나 모도티*의 사탕수수가 불타듯 펼쳐진 들판에서 너의 입에서 자란 늑대들을 누가 데려가는지 보고 싶었다 신성한 나무는 늑대들의 발자국이 침묵하는 상자에서 계절풍을 꺼내기도 하였다 휘 쉬익! 양치기가 휘파람으로 양파를 몰아도 어둠은 곧 잠들 것이다 그 여백을 나로 채운다

*멕시코에서 활동한 여성 사진가이자 사회주의 혁명가.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몇 번 찔렀을 뿐인데* / 임효빈


노래는 코인을 불러내지 동전은 잘 찔러야 해 꽃잎은 관심조차 없는 꽃길을 내지 꽃길의 전설 너머는 시리즈로 가는 터미널 그곳의 그림자는 영영 생기지 않아 노래는 나선형으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 하지

물결은 반 나선형이지 물결을 따라가면 소용없는 소용돌이가 있지 그래도 소용돌이치는 죄목으로 판결을 내리지 마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스무 번도 안 된다고요** 수형중이니 첫 물결을 찾으려 하지 마 그래야 한 호흡에 불려 나온 아름다운 비굴에 동의하지 폭발은 한 번에 이루어질 때 완성된다는데 현장 검증에 동원된 빛의 파동을 봐둬 뒤섞인 이면의 마주친 눈을 확인해봐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작품.
**몇 번 질렸을 뿐인데'를 그리게 된 실제 살인범의 법정 진술.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나는 날마다 파혼한다/임효빈

 
   헤르만 헤세는 세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고 한다

   첫 번째 부인은 사랑의 병에 걸려죽고 두 번째 부인의
사랑은 헤세답게 식었지만 늙은 헤세는 세 번째에도 사
랑을 걸었단다

   그는 사랑을 만나기 위해 헤어지고 검은 원피스를 입
은 그녀들의 사랑은 하얀 드레스에 있었단다

   헤세의 사랑은 슬픔에 잠겼고 오래된 사랑은 자정을
위해 스스로 불타버렸단다

   나비 날갯짓처럼 사랑을 위해 이혼한 헤세

   나비와 헤세는 사랑을 모았지만 꽃술에 걸린 그녀들의
사랑은 꽃만을 기억했단다

   꽃이 궁금한 사람들이 헤세에게 물으면 헤세는 주저
없이 어떤 사랑도 첫사랑이라 말했단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어제의 나와 파혼했지만 언
제까지 파혼해야 나를 만날 수 있을지

   헤세에게는 묻지 않았다


베를린 침대 자전거 / 임효빈

강의 수면이 반짝이는 베를린에서 헤어졌다

슈프레 강가에서
불어난 물처럼 짖고 있는 두 마리 개를 보았다
개들의 예민한 꼬리는 끊임없이 어떤 기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강물과 섞이지 않았다

멍멍,
강을 옆에 놓고
개의 젖은 눈처럼 싸웠지만
눈물이 흐른다고 말하는 나와 개의 눈물은 미완일 뿐이라고 말하는 당신

그런 당신의 눈물을 개들이 보는 순간 강물이 뒤척였다

우리의 사랑은 맞을 거라 했지만 심장이 불규칙해 프로크루테우스가 지켜보는 곳에서 사람을 탓할 뿐이었다

약간의 흔들림에도 이층의 잠이 무너지고 나는 불어난 물처럼 흘러넘쳐 아슬아슬하게 커브를 돌았고

우리는 눈물의 함량이 같아질 때까지 베를린 침대 자전거를 탔다

등이 등을 밀면서


깃털의 클리셰 / 임효빈

 
새의 깃털을 꽂아둔 화병이 깨졌다

아무렇지 않게 훔쳐 온 새의 깃털을 꽂아둔 물이 없는 화병이었다

정물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플라이 타잉의 줄을 타고 날았던 깃털의 기억이 윤슬처럼 들어온다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살아 있는 척 포용하는 척 날개를 펼치면 아가미를 들썩이는 것들

날고 있는 기쁨이 물에 젖으면
휘어진 기분은 반대편도 가라앉지

가벼운 미끼의 화려함에 전부를 던진
물속 것들의 원래 슬픔은 그렇게 팽팽한 것인지
낙인처럼 물에 찍혔다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슬픔을 익사시키려 했는데 이 나쁜 녀석들이 수영하는 법을 배워버렸어*

파문이 있어야 고요한 것처럼
유리 파편 위로 깃털의 통점이 내려앉는다

완벽하게 낚여봐야 낚을 수 있다는 교본을 펼친다

* 프리다 칼로.



그대와의 키스를 세어보아요 / 임효빈

 

프렌치였을까
거품이었을까
딥, 딥, 딥

느낌을 살려봐 입이 다른 욕망이 혀끝에 묻었군 더듬다 만, 백 번째 비명의 서늘함과 몸의 쾌快가 몇 번의 번지드롭을 하던 그것, 그 맛을 찾아야 해 기억이란 점프의 오류를 범하는 회로

버려진 첫 키스의 소환
패러디의 이름으로 또 다른 얼굴을 찍는다
완전 삭제를 잠시 불러봐

불현 듯 2막을 디밀어 조각을 맞추지는 마 다른 입술의 배경에 흠이 생기고 있어 보고픈 건 나와 그대와의 키스를 바라보는 너의 푸른 볼* 기어코 500번의 키스를 거두어 재생해야만 해 짧은 기억과 주름진 기억과 가면 속 기억의 모서리에 가면 되겠니 예민한 요일에 숨은 이야기는 없어 허술한 비밀 보장이야

그대와의 키스는 너에게 맡길게

 
*‘제프쿤스’의 작품 소재

 

슬쩍 훔쳐보는 건 틀린 걸까요 / 임효빈

 

왜 그랬냐 묻지만 운명의 수레바퀴*가 손에 들렸던 건 바람의 아침 냄새 같은 거 아닐까요 별일 아니라 생각한 거죠 햇볕이 좋아 발로 무심히 찬 깡통 소리 같은 그런 거 말이에요 소리는 또 소리 없이 빙빙 도는 거잖아요 운명이 내게 오는 것도 그래요 13번 카드를 잡았다고 해봐요, 죽음으로 새로운 변화가 올까요 죽음은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아직 죽지 않았거든요 서른두 개의 카드를 모두 집어 운으로 만들어 버릴까 생각해 봤어요 운도 운명처럼 일회용이니까요 이리저리 한번 쓰고 말 눈을 굴리며 아침 맞을 궁리를 하겠죠 끝내주는 운을 맞을 사람과 그 옆 사람 뒤에 서있는 내게도 잠깐 올까요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이라 했어요 뒤돌아보는 운명은 모두 지나온 걸까요 뒤돌아보고 나면 나아갈 수 있을까요 슬쩍 훔쳐보는 건 틀린 걸까요

 
*타로 점을 치는 카드 중 10번 카드의 의미
**이돈형 시집 제목

 

수서 / 임효빈

 
수장을 끝낸 강물의 뒤척임이 조심스럽다 말을 건네려는 강물의 눈빛에 나무는 강모래 한줌 쥐고 뿌리를 내린다 바람에 물들면 소망이 길어져 강의 기침이 쌓인 바닥을 가만 품는다 기별처럼 다녀간 별의 발자국에 휘기도 한다 새들의 영혼을 허밍으로 빼앗아간다는 수초와 물에 빠진 달빛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나무가 귀를 연다 나무의 심장소리가 들리고 강물이 흐르는 웃음으로 옆구리를 흔든다 안도하는 몸짓으로 강은 물을 힘껏 밀어 올려 나무의 입술에 닿는다 어린 말이 터지려 한다 나무의 봄이 열리는 동안 사람의 기척으로 강물이 귀를 닫는다

강물이 연두를 훅 불어 꽃잎을 당긴다

 

기분이 같은 문은 없었어 / 임효빈

 
버스 안에서 손잡이가 너를 향해 달리고 있어 정류장에 정차하지 않고 일렁이는 말들의 무표정으로 잡고 싶은 의미가 하나 둘 생겨났지 새겨들을 일이 아니라 역자나 옮긴이의 자리를 두지 않기로 했어 멈춤 버튼을 누르면 민감함이 먼저 열리고 다가올 현실은 문과 너무 가까웠어 지나치는 것은 모두 밖에 두고 싶었지만 도어를 당기거나 밀기 위해 손잡이를 잡아야했어 입구에 걸린 누군가의 걸음에 종점이 궁금해지고

버스가 교각의 모퉁이를 돌며 보이지 않던 구석의 전광판은 누구의 것도 아닌 그날의 운세를 풀어내고 있었어 한 번의 운세에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손잡이를 잡고 가까스로 그 자리에 서 있었어 등 뒤엔 수건돌리기의 술래처럼 짧게 스쳐간 누군가의 등이 남아있었지 잡은 손이 많아 손잡이가 하나의 기분이 될 때 반대편으로 버스 한 대가 교차했고 너는 거기에 있었어

손잡이를 놓았으나 기분이 같은 문은 없었어

 

전용 스크린을 펼쳐봐 / 임효빈


#
스크림*을 넘기면 컷, 컷
그녀의 식빵**은 방송용 슬랩스틱
한편으로 펼쳐지고 있어

플란다스 개가 그녀를 데리고 산책하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 너무 멀리 왔어

미장센은 가장 화려한 조명을 조명해
지폐 위조가 가장 쉬웠다는 사랑스러운 그녀
유리천장에 묻힌 그녀의 편력

##
공포는 흔한 백색이 아니야
현란한 다트 판에 멈춘 바늘
조작된 대형 스코어 한 판을 기대해

스크린도어를 열면 추락하는 무비는 만들지 말자
지문을 요해(바람을 맞아도 태연한 척)


###
무리생활 영장류를 떠나자
배후가 없는 무리를 꿈꾸고 있어
지독한 연애는 죽여주지 말았으면 좋겠어

신은 무리를 위해
끝나지 않을 전쟁과 평화를 찍지
오 마이 갓!

베드 신을 끝낸
여신은 케이크의 촛불을 싫어해

쏟아지는 흑백 화면의 스크래치 사라지는 엔딩 자막


*뭉크의 그림, 영화 제목
**방송에서 우회적으로 표현한 욕설

 
 나는 알바 아니다 / 임효빈


휙, 얼굴을 강타한 햄버거를 볼 수 없어요 직구였거든요 변화구였다면 약간의 낌새를 챌 수 있었을 거예요 햄버거는 무안하죠 속이 쏟아진 거죠 비어서 식어서 나와 햄버거 속은 붉은 거예요 바닥에 떨어진 얼굴은 누구의 얼굴일까요 지나가던 개가 피해 가고 있죠 나는 툭툭 털어요 질문은 사절입니다 속이 사라진 나를 당신은 자꾸 물어요 물려서 답할 수가 없어요 내가 묻고 싶네요 당신은 어디서 굴러온 뼈인가요 통뼈라도 나는 알바 아닙니다 굴러 가세요 굴러가다 보면 네거리가 나와요 당신이라면 빨간 신호등도 푸른 신호등으로 보일 거예요 성격이니 그냥 가도 무방하겠죠 다만 당신 안의 개는 데려가세요 지나가는 개도 알바 아니니까

 

한 줌 모레가 흩어지고./ 임효빈

 
 나는 달을 보기위해 막차를 타야했어 누구나 봄날은 간다잖아 선을 넘어도 아슬아슬함은 당길 수 있어 사랑은 변하다, 변하지 않는다 막차의 맨 뒷자리에서 입술은 지워지고 초승달을 바라보던 너의 손가락이 나의 달을 견디지 못했어 나를 위해 지운 문은 이채로워 처음 네게 돌아가는 길을 모르겠다고 했어 너는 해시시해시시* 난독의 중독을 즐기고 있지 이지러지는 브레이크 타임에 제동이 걸리지 않아 뒤돌아 선 달의 그림자가 사라진 걸까 너의 한숨에 흘러들어간 타액 같은 기억뿐이야 우리는 약속을 씹은 거지 씹힌 걸까 실수는 반복되어 딱 한번 하기 좋은 날이야 나는 내일을 기록해야해 너의 어깨는 한쪽으로 기울지 않아 한 낮의 신음 없는 정사에 풀어버린 거야 몇 온스의 이별의 무게가 시간의 난간에 애써 걸치겠지 모레는 쉽게 흩어지고 네가 오는 어떤 문도 해시시해시시

너의 어제와 내일이 오가는 사이 한 줌 모레가 흩어지고 있어

*마약

 

당신의 밤은 6펜스 / 임효빈


 당신이 비행하는 밤은 찬란으로 쌓입니다. 몇 개의 날개를 접었는지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혹, 군데군데 채울 단추는 준비했는지요 당신은 열락의 소용돌이를 계산합니다 칩, 칩, 웃음은 미끄러지는 베팅에 터져 팝콘처럼 튀어 오릅니다 딜딜 달릴 뻔 했습니다 스플리트*, 두 개의 문을 주문합니다 불빛을 가르며 밤의 여왕처럼 피어납니다 팟팟팟 제자리에 익숙한 색의 꼬리를 칩니다 세지 못한 체불의 시간에 기대어, 팁이 없는 내일을 거래 합니다 마지막 판을 뒤집어 운 좋은 잠을 잘 수 있을까요 당신의 신용이 슈 슈 묻히기 전에


*블랙잭 게임의 용어

 

한 시절 보이지 않는 알람, 알람 / 임효빈

 
새벽 네 시 삼십육 분은
달에서 계단을 밟고 내려온 시간

아는 사람과 알기위한 사람이 다녀갔을 자리엔 악수의 냄새가 퍼져있지

은둔의 중력이 커튼을 젖힐 때
당신의 기침과 침 넘김 소리로 오늘의 귀를 열어 놓지

검은 온도를 날숨으로 풀며 일제히 벽을 잡고 일어나려 하고
골목을 배회하던 어제의 영혼들이 어제의 일처럼 빠져나가고

밤새 안녕을 확인한 안개가
불쑥 들어온 풍경을 위해 막간의 여유를 피워 올리지

알람을 세 번 끄기엔 미안한 시간

거미줄을 헝클지 않고 지나가는 바람의 암묵적 예의에서
사이의 여백을 목격하면서

오늘의 노동이 몸을 일으켜
눈 맞추려는 새벽 네 시 삼십칠 분

고요의 완강함으로 한 시절이 보이지 않는

 

  불임의 봄밤 / 임효빈


나의 bed는 불친절해요
그의 취향을 몰라 샤넬 넘버 5와 베르사체 향수를 뿌리죠 배꼽은요? 치명적 향기잖아요 불친절도 휘발하는 마력이거든요 나는 늘어진 고양이가 아니라서 리드미컬한 몸을 타고 싶지만 불통의 bad

색에 빠져들지 않는 봄을 버리고 우리의 불타는 봄밤을 낳자 했어요 머리맡 꽃향기에 출렁이는 나의 심장을 태양으로 데려가라 하네요 그는 씨앗을 키우지 않는 불임의 bad

나는 암막 같은 그의 꿈으로 들어가 열정을 엎어버릴 작정입니다 펑퍼짐하게 꺼진 엉덩이를 일으켜 스프링의 근육을 키울 겁니다 스위치를 눌러 자주 옷을 벗길 겁니다

큐브는 기억해요 입체적 조작을
나의 무심한 침대는 꿈마저 bad

분리불안으로 분리배출의 스티커를 붙이지 못하죠 기억의 큐브를 돌리려 짐짝 같은 웃음을 던져 오는 나의 bed

늘어진 고양이가 되어 뒹굴었고
다시 뒹굴어요 나는

 
반면/임효빈

   보여줄게 있다는 거니?

   너의 뒤집기는 되풀이되고 그때마다 달랐다 밀랍 증후
군의 실마리처럼

   너를 위해 너는 친절히 다가왔다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잎처럼 뒤집히기도 하였지만 거울의 앞과 뒤를 살피며
왔다 그 옆에서 한 아이가 술래놀이를 하고 있다 숨다가
찾다가 내가 던진 이파리에 걸려 넘어지자 너는 쾌활하
게 웃고 슈트 자락이 아이를 덮었다 아이의 심장을 가린
이파리처럼 너의 웃음은 위험했다

   아이는 일어서며 괜찮다 했고 덮었던 슈트가 약간 헐
렁해졌다 꿈꾸기 위해 꿈꾼다는 아이는 거짓말처럼 정직
했다

   그러는 동안 너는 잠깐 너를 잊고 손뼉을 치는 바람에
방향을 잃게 되었다

   묻지 않는 이야기는 듣지 않는게 낫다

   멀어지는 뒷걸음처럼


코끼리는 마지막 카드를 보았을까/임효빈


   서커스 무대에서 코끼리가 발로 숫자를 말한다
   당근을 주고 당연을 받아먹고 수가 떨어졌다면

   점핑 점핑

   세 번째 카드와 일곱 번째 카드가 섞이고 그 사이 뭘
먹었니? 조명에 비친 아홉 번째 카드에서 수가 빠지고 채
찍이 올라가고 빚이 떨어지고 동시에 멀어지는 수를 찾
아 밟고 넘어설 수 없는 금을 밟고 금방 튀어나간 수많
은 수

   커튼은 내려주세요
   커튼콜을 준비해 주세요

   점핑 점핑

   아침이면 울리는 알람처럼
   넘겨도 밀려오는 숫자처럼
   찾아오는 사람은 달라도 같은 시간에 울리는 예배당
종소리처럼

   자라는 수

   코끼리는 다리를, 사람은 숫자를 걸어
   반올림의 반올림은 끝없는 수직이라는 끝을 열었다

   사람과 코끼리가 반반?


대관람차/임효빈


  우리가 탔던 대관람차 기억나니?

  오전의 대관람차였지 다른 놀이 기구도 많은데 느리고
스릴도 없고 유리 상자에서 아슬아슬해지는

  투덜거리다 너를 보았을 때 너의 눈빛은 깊이 내려가고
있었어 돌고래가 마지막 숨을 견디며 한 번 더 내려갔다
올라오겠다는 듯 나를 가르며

  대관람차 안은 돌고래가 수면 밖으로 고갤 내밀 듯 물
방울이 튀었어 거칠어졌지 나는 쏟아지는 햇빛의 비늘만
건드리고 있었지

  대관람차는 정오의 방향을 지나 떨어졌지 유리에 기댄
나는 출렁였고 너의 어깨는 젖어 있었고 다가가려 했지
파랗게 고요했어 

  그날,
 우리는가 어떻게 헤어졌을까?

 지상에 닿았을 때 등 쪽에 보이지 않는 물의 무늬가 만
져졌어 손에만 잡히는

  헤엄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뒤척이는/임효빈


  중력에 의하여 서서히 떨어지는 모래의 부피로 시간을
재는 것이 내 사랑입니다 하나의 얼굴로 두 개의 얼굴을
비빌 수 없는 나만의 심장입니다

  첫 발걸음도 중력의 시작이었나요

  새벽이 하루를 불러오거나 한밤중이 하루를 데려가도
나는 뒤척여야 합니다 쉼 없이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시
간을 열어둡니다

  지운 사랑이 웃음을 짓네요
  반복과 반목은 어느새 사랑의 공식이 되었죠

  되풀이죠

  지운 기억을 다시 지우고 싶다면 더 선명해져야 합니
다 꽃이 활짝 피어야 지듯이

  그래서 참았고
  걷히는 사람이 두려워 참았고

  더 참아야 했던 건 사람이 없었다는 어떤 시간 여행자
의 독백 때문입니다 여행자가 남긴 없었다를 나는 풀고
싶습니다

  물렸던 하루가 너무 많아
  오래된 모래에 지문이 생겨납니다

 
램프 이야기/임효빈


    그린란드 이누이트족은 성자처럼 산다지 삼백예순다
섯 날 물개 기름 램프를 켜놓은 이글루는 성전이 된다지
그을음 없는 어깨와 어깨를 비벼 체온을 지핀다지 성전
의 문을 열고 입김을 뱉어내면 난기류도 기침을 멈춘다
지 자신들을 날것으로 여겨 어느 것도 익히지 않는다지
천천히 혹한의 뿔을 살피고 두 손을 모아 기다릴 뿐 벗
겨질 껍질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지 물개 기름 램프는
꺼지지 않을 침묵만 피운다지 그림자를 태워 성잔의 심
장을 만든다지 한 사람의 그림자가 다 탈 때까지 생각의
재를 쓸 방법에 대해서 고민한다지 고민의 시간이 쌓여
이글루 안은 푸르게 희다지 어둠이 바다사자와 물개 피
를 마시며 이글루를 지키다 그중 하나의 울음이 빙하를
적시면 떠난다지 이누이트족은
   그들의 발자국에 성호를 긋는 램프를 켜놓고

 


시계 밖의 시계 / 임효빈



열쇠를 돌렸다

시계는 어떤 것으로 꽉 차 있었다
숨이 차도록 달리는 것 성큼성큼 뛰는 것 달팽이 걸음으로 바라보는 것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나뭇잎 멈춰있는 것은 없었다

시계의 구성은 시침과 분침 초침 그리고 눈동자

순간을 찾아 달렸다. 달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한순간도 순간을 보지 못했다 떠올릴 수 없었다. 물리의 세계 시계가 아니었다

계속 순간을 달렸다
돌아보면 처음이 계속 달리고 이쯤이라 생각하면 생각을 가르는 숫자가 달려왔다
너무 많은 공식이 밖을 보고 싶어 했다

열쇠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길게 팔을 뻗어 보아도 나는 잡히지 않는다
시계는 순간만을 살 뿐이라 끝나지 않는 걸까 눈을 감으면 1분 전의 내가 멈춰있다

너무 많은 내가 멈춰있다
웅크려 있다
그곳인지
거기
그때
그,


버티지 말아야 했다

결코 열리지 않는 열쇠



원 테이크 / 임효빈


가누지 못하는 고개는 끄덕거리고 연속되는 이야기 속 레퍼토리는 멈추지 않아요 화자는 나인가요 내가 풀지 않는 이야기는 내게서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야기와 말에는 기포와 기표들이 숨어있어요 빗방울로 떨어지는 랩소디였나 수직의 하강은 막을 수 없는 기류를 몰고 옵니다 여기 좀 봐주세요 게거품인지 개거품인지 확인이 필요해요 기류도 타이밍, 최고점을 기다려 힘껏 잠금 스위치를 누릅니다 나와 이야기 사이에 건너야 할 복선이 있네요




횡으로 가로지른다면 거품이 꺼지는 걸까요 낯선 냄새를 풍기며 내게로 몰려오는 형체 없는 저 글자들은 나일까요

그래요 이제 그만
결말을 바꾸고 싶어요
한 컷으로

불타는 글자처럼 산화되는 이야기는 없어요 플라타너스는 낙엽이 되어도 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 이전의 다시 이전의 이야기를 살 수 있나요
나는 나 이전의 이전의 또 이전은 나였어요 그 다음은 모릅니다 스위치를 다시 눌러도 답은 모릅니다 모릅니다 아 답답해 죽겠네 그만합시다

마침내 건너고 말아야 할 횡과 단을 끝내 건너지 못한 이야기에요
화자는 내가 맞습니다
이야기 속 웃음소리만 수직으로 하강 중 시시시쉬



자라나는 도감 / 임효빈


돌멩이를 옮긴다
내 방에서 다른 방으로
내 방에서 너의 방으로
너의 방에서 네 방으로

꿈이니까
꿈으로

어느 순간 돌멩이가 돌멩이를 나르거나 내게 말을 건다
아픈지 무거운지 쓸쓸한지 견딜만한지
돌멩이는 너보다 나를 더 잘 알아
모래알처럼 가볍게 내 기분을 따라 얼굴을 바꾼다

너와 만나기로 한 공원엔 돌멩이가 먼저 나와 기다렸다
오지 않는 너, 돌멩이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공원엔 누군가의 손을 맞잡은 돌멩이들이 많았다
벤치에 앉아 훌쩍이는 어깨를
토닥이는 돌멩이 한쪽이 젖어 있다
공원엔 사람보다 돌멩이가 더 많아
소란스럽지 않았다

돌멩이는 내가 버린 것들을 주워 돌멩이를 만들었다
그것들이 돌멩이를 먹어 치웠는지 모른다
감정을 증식하며 커지는 돌멩이

돌멩이 옮기기를 멈추기로 했다
내 방
네 방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

꿈의 도감에 넣기로 한다


폐관 전 30분/임효빈


  열이 오르기 전 마지막 악수를 했다
  서로를 감지하기엔 희박한 맥박이었다

  붉어진 얼굴
  붉어진 관엽
  붉어진 그림자

  30분 후면 폐관이잖아

  온실 안에는 30분을 길게 늘어뜨리려는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여

우리는 사소해졌다

  앉고 싶지만 끝까지 갈거야 30분이나 남았잖아
  우리는 늘 그랬다

  온실 속에서도 우리는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온실엔 할 얘기가 끝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온실 천정을 향해 끓

어오르는 식물의 숨소리

  들어올 때는 즐거웠는데
  너도
  왜 입구와 출구가 같은 걸까 서둘러 가는 쪽이 뒷모습을 남긴다는 것

을 알기에 한발 물러섰다

  끝내 손을 놓은 채
  폐관 전 30분을 채우지 못했다

  가장자리부터 더워졌던 온실
  가장자리를 향해 내려가고 있는
  우리

  스피커에서 끝을 알리는 노래가 쏟아지며
  봄날 오후가 풀린 커피를 쏟았다

므두셀라 증후군/임효빈


  체크무늬 자켓을 입고 출근한 그날은
  책장에서 지나간 한 권의 책을 뽑아 든 것과 같았다

  서늘한 잿빛 구름 사이로 화살처럼 빛살이 내리꽂히던 목요일이었던가, 너의
심장을 닫고 싶은 것이야 네가 골라준 체크무늬였다. 오래 닫아둔 옷장 문을 열
었을 때 걸려있던 기억이 옷들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뜯어진 박음질처럼
밑도 끝도 없는 풀림과 엉킴이었다 구석에서 자란 이야기가 깊은 숨을 뱉으며
머리를 들 때쯤 옷장 앞에서 펄쳐진 이몽(異夢)

  출근 버스 창에 비친 체크무니 자켓의 나를 봤어 두 개의 단추가 꺾인 해바라
기 목처럼 대롱거렸지 사람들의 한숨은 거리를 좁혀오고 입체적이지 않는 어
깨가 어깨를, 다른 어깨를 불러왔어 뜻 모를 고백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조각으
로 편집된 지난 냄새 같아 눈을 감았지 롤러코스터처럼 몇 번의 커브를 돌고나
서야 지상에 내려선 나는 단추가 없어진 걸 알았어 그제야 내게 맞는 옷으로
몸에 붙었다

  재채기를 참을 수 없었다

*나쁜 기억은 빨리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심리 현상


꽃잎이 떨어지는 무게/임효빈

꽃잎이 가슴의 밑바닥을 향해 가는 소리
어느 별의 중력도 누르는 무게

당신의 발자국 소리를 지워가는 속도
수도자의 기도문이 닫히는

너머는 어둠이 꽉 차 비워지지 않는 세계

발자국이 떨어뜨린 신발들*
수많은 한 사람이 두고 간
잊히지 않는 영혼의 마음이 모여 있는 자리
이름표가 없어 호명에도 대답할 수 없다는 여기,
누구입니까

들녘을 구르다 헤진 그날의
햇살은 당신을 위해 삼킨 심장에 핏빛이 되었다

​꽃잎을 받아 든 벤치는 말로 전할 수 없어 또박또박 제 몸에 적었지

나는
벤치에 앉아 어둡지 않은 세계를 열어 둔다

삭지 않는 것과 썩지 않는 것
시간이라고 말한다면 미완의 대답

무명 위에 무명, 다시 무명들이 덮고 있는 이라

*2차 대전 당시 폴란드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신발을 보관하고 있다



에어기타/임효빈


  몇 번 코드를 튕겼나 당신, 과한 액션이군 비의를 뜯고 싶다면 엄지손가락의 힘을
빼보게 당신은 샤우트보다 솔(soul)이 어울리지 음계로는 따라갈 수 없는 울림이지
안단테, 입 다물리는 소리의 월식을 들어보았나 엇박자인 채 사라지더군 허공에 날
리는 현란한 음(音), 난(亂) 축제를 즐겨보게 아차, 줄을 놓쳐버렸군 점멸하는 빛에
손목을 삐었나 정점에 오르자 튕겨나가는 음표마다 피크를 놔주더군 모자란 화음을
입으로 채우지는 말게 관객의 연호가 들리나 편집되지 않은 생생함이라네 쿵쿵거릴
뮤즈가 필요한 때야 곧 여린 왈츠를 추겠지 당신

  액션의 전모가 드러나자 텅텅
  끊어질 줄 모르는 그러나 들리지 않는 완벽한 소리


작법(作法)/임효빈


불행은 불행해지기로 결심하여 일관되었다
스치듯 잡은 문의 손잡이에 있었다
닫히는 손잡이에도 닫히지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래야만 하는 듯
불행은 모든 문장 속에 있었고 문체를 따라 심장의 박동이 달라졌다
여름이 쏟아지는 해안의 이안류처럼 온다

왜 버려지지 않는 거지? 그가 물었다
욕망이 없는 거야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거리에도 있고 정원에도 있고 고양이의 검은 수염에도 있는데

작법(作法)의 목록으로 지면에 갇혀 있다

다 쓴 이야기가 꽂혀 있는 펜 통은 접근 금지

어쩌자고 죽음은 없는 거지? 다시 그가 물었다
너의 행복을 보고 싶지 않아서야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수직으로 와 수평으로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좋은 작가가 많을수록
불행을 목격하는 불운도 잦을 거라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