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학년 : 학부4학년
학번 : 20061123
이름 : 정희채 안셀모
머리말
‘신학은 하느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신 진리를 나와 너의 관계 안에서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배웠다. “세상은 떠나야 할 곳이 아니라 파고들어 가야 할 곳이다.1)”하느님께서는 나를 창조하셨고 나의 삶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24년 동안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누렸던 많은 체험들이 나에게 어떤 신앙을 갖게 해주셨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이 레포트를 쓰게 되었다. 전개 순서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믿는‘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이웃’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하겠다.
Ⅰ. 나
철학적 질문의 냄새가 나는 이 질문은 내가 어쩌면 평생 찾아야 할 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레포트를 쓰게 되면서 어쩌면 꼭 지나쳐야 할 과제이기에 과감히 질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1.2. ‘정희채’라는 나의 이름
나는 1987년 4월 9일에 인천 구월동에서 2남중 막내로 태어났다. 같은 해 5월 30일 천주교 신자이신 부모님 덕으로 ‘안셀모’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제민 신부님은 자신의 저서 「그분처럼 말하고 싶다」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신학의 여러 주제들의 일치를 성찰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이름을 통해 내가 출생 이전부터 신학적 존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나의 신원(Identity)은 내 이름에 표현되어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 나는 한 인간의 자서전은 그의 이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본다.2)” 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나도 나의 이름 정희채(鄭稀采)에 대하여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한자어를 간단히 해석하자면 드물 희(稀)자에 캐다 채(采) 즉, ‘드물게 캐어진 무엇’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하동 정씨 문성공파로 항렬의 따라 ‘채(采)’자 돌림을 쓰는데 이를 아버지가 ‘나물 채’자로 잘못 이해 하셔서 이름을 지으셨기 때문에 ‘나물 채(菜)’자로 해석하겠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면 ‘드문 나물’이 나의 이름인 것이다. 누군가가 먹는 것, 그리고 드물게 먹히는 것 나는 여기서 성체를 연상시킬 수 있었다. 성체는 아무 때나 모실 수 없고 평일에 두 번까지(성찬 거행 중에서 만)3) 모실 수 있다. 게다가 ‘나물’이다. 억지스럽지만 독이 없는 한 나물은 몸에 좋고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 영적으로 구원으로 이끄는 그리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주는 천상의 양식 성체와 유사성이 발견되지 않는가? 아무래도 가톨릭 신자이신 부모님은 인간에게 먹히시려 자신의 몸을 빵의 형상으로 축성하시는 예수님의 나눔의 삶을 본받으라고 나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아닐까? 남에게 자신의 몸까지 나누어 먹힘을 당할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나의 이름에서 발견되는 신학이다.
1.2. 하느님으로 향하는 나
이는 신학교 학부3학년 과정인 교육심리학시간에 배운 내용과 책에서 익힌 내용을 기초로 정리해본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앙트완느 슈브리에 신부님의 유명한 생퐁의 도표를 보면 사제는 먹히는 사람인데 ‘맛있는 빵이 되어야 한다.’4)고 한다. 남에게 먹히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나, 하지만 맛없는 나물이라면 아무도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맛있게 되는 것, 맛있는 사제가 되는 것 그것은 어떻게 가능 한가?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Imago Dei) 하느님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영적 지력과 자유 의지를 소유함으로써 나머지 창조물과 구별된다(창세 1,26-31). 인간의 육신은 부모의 결합을 통하여 만들어지지만, 인간 영혼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활동으로 창조된다(창세 2,7; 2마카 7,22-23). 이렇게 영과 육의 합일체로 창조된 인간은 유한한 자신을 뛰어넘어 무한한 존재, 즉 자신의 존재의 원천인 하느님을 향하여 뻗어나가도록 만들어졌는데 여기에 인간이 가지는 근원적인 갈등이 있음과 동시에 인간은 이를 통해서 성장 발달하도록 만들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은 되어가는 존재이지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을 알기가 어렵고 그만큼 생각과 행동 사이의 모순을 갖고 있다. 자신을 찾고자 하는 갈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조의 형상인(形相因)인 그리스도는 인간 이해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5) 인간은 항상 고민하는 존재인 것 같다. 안락함과 자기 발전 사이에서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그냥 지금 상황에 안주할 것인가. 나는 이러한 안주와 변화의 딜레마 속에서 항상 고민했던 것 같다. 나의 성격은 주로 ‘안주’하는 쪽에 가까웠으나 이를 변화시켜 줄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 말년병장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던 어느 날이었다. 다른 부대에 근무하고 있는 동기 신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용인 즉, “함께 유럽으로 여행 갈래?”였다. 말년병장의 심리가 귀찮은 것 싫고 빨리 전역이나 하면 인생 끝나는 것 같은 마음인데 나의 생활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친구의 전화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민해보고 다시 연락 주겠노라 말하고 3일간 생각에 잠겼다. 짧은 영어로 친구와 단둘이 외딴 곳에 떨어진다는 것이 처음에는 무척이나 두려웠었다. 하지만 우린 결국 가게 되었고 나는 이 여행에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가톨릭교회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유럽 여러 나라의 성당을 다니며 안목과 생각의 폭을 넓히는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예수님으로 향하는, 초월로 나아가는 인간에 대한 예로 부적합하긴 하지만 변화와 안주에서 어느 쪽으로 향해 가야 하는지는 확실히 보여주는 나의 인생여정이었다. 누군가에게 맛있어지는 것 자신의 삶의 안락함을 추구하기보다는 비록 불편할지라도 예수님을 따르고 계속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이는 예수님이라는 목표가 있기에 가능하다.) 이것이 맛있는 나물이 되기 위한 농사법일 것이다.
Ⅱ. 예수 그리스도
나의 목표는 예수그리스도이다. 나자렛 사람이었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함으로써 나의 목표는 예수님이며 그 목표를 향해 예수님에게서 힘을 얻고(루카 6,19) 그분께로 향하는 여정 또한 예수님(요한 14,6 참조)임을 고백한다. 이러한 예수님은 인간의 지식으로 찾아지는 대상이 아니며, 이러한 주님은 결코 인간의 지식욕을 충족시키는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시다.6) 그러므로 나는 이천년 전 예수님이 걸었던 길을 지식으로 찾은 것이 아닌 내가 살아온 인생여정과 위에서 인용한 슈브리에 신부님의 묵상을 따라 서술할 것이다.
2.1. 구유 속의 아기 예수님
마리아는 아들을 낳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루카 2,7) 모든 백성들을 구원할 메시아께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비천한 인간이 되신 이 지극한 자기비화사건은 이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누우셨던 곳이 구유라니, 이 위대한 탄생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성자께서 인간이 되신 것 만 해도 대단한 사건인데 인간으로서 처음 경험할 장소를 작은 몸 하나 누일 곳이 없어 구유로 택하셨다. 자신의 가난함과 겸손함의 모범을 태어나실 때부터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시면 이렇게까지 하실 수 있을까? 가난함과 겸손함 구유에 누우신 아기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있는데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마더 데레사이다. 그녀는 인도 캘커타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가난한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그곳으로 갔고 ‘하느님의 몽당연필’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마더 데레사는 더 나아가 가난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유를 얻는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하셨다.
우리의 가난은 우리가 택한 결과입니다. 내가 자유로운 가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을 마음껏 사랑할 자유가 있습니다.7)
예수님께서 구유를 택하시고 자신의 삶을 부유하게 사시지 않았으며 공생활 중에도 거처 없이 떠도시며 가난한 삶을 사셨던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자유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물질적 풍요 때문에 하느님을 맘껏 사랑할 자유를 빼앗기는가?
2.2. 십자가위의 구원자 예수님
예수님의 삶을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행복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때도 있다. 그 의문의 정점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형을 받기 전 3년은 집에서 나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셨다. 또한 태어나서 얼마 안 돼서는 헤로데의 칼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가시기도 했다(마태 2,13).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미혼모의 몸에서 나셔서 외국인 노동자 아버지 밑에서 유아시절을 보냈고 서른 살에 집을 나와 노숙하며 죄인과 가난한 이들과 어울렸으며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 다음날 서른셋의 꽃다운 나이에 가장 지독한 형벌로 사형 당하신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 얼마나 비참해 보일까? 나는 십자가의 예수님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있다.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고등학생인 나는 내가 돌아보기에도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신부님이 되겠다는 생각도 그렇게 깊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친구 만나러 다니던(?) 예비 신학교에서 캠프를 따라가게 되었고 캠프 프로그램 중 나무 십자가에 자신의 잘못을 적어 못을 박고 십자가를 끌어안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기에 그 시간은 나에게 두려운 시간이었고 동시에 축복의 시간, 예수님과의 사랑의 시간이었다. 내 품에 끌어안은 작은 십자가에 달리신 작은 예수님 하느님이시라며 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냥 묵묵히 그렇게 계셨다(마태 27,43). 슬프고 아련한 사랑을 자신의 고통과 피로 보여주신 예수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는 그냥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나같이 보잘 것 없고 잘 살지도 못하는 못난 놈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때 나는 성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2.3. 감실 안에 성체로 계시는 예수님
예수님에 대한 마지막 묵상은 감실안의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당신이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희생하셨다. 그리고도 모자라 지금도 매일 미사 때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여 자신의 몸을 나누어 우리에게 나누어주신다. 끊임없는 이 사랑의 나눔은 모범이신 예수님의 절정을 보여주시는 듯하다. 사람이 되시고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고 결국 자신의 몸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는 삶. 감실에서의 예수님은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이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모방하여 내 삶에 옮길 수 있을까? 마태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22,37-39)” 하느님 사랑을 이웃사랑과 같다. 내가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는 그 분을 알고 사랑 할 수 있다. 이 사랑은 나의 이웃과 나누는 사랑과 같다.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이며 헐벗었고 병들고 감옥에 계신 예수님(마태 25,37-40)께 향하는 것이다.
Ⅲ. 이웃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우리 집 가훈이다. 어렸을 적 기억에 초등학교에서 집 구훈이 무엇인지 적어오는 설문지가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고심 끝에 정하신 가훈이다. 어린 나는 이 가훈이 퍽 멋있었다. 우리가족끼리의 사랑을 넘어 친구와 선생님까지 모두 사랑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설명이 더욱 나에게 감동적이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지 못한다.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진리는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교회에서 함께 믿음으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나만 창조하신 것도 아니고 나만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사랑받는 자녀들이며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신 것과 같이 서로 나누어야 한다. 이번 레포트를 마무리 하는 이번 장에서는 이웃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전개해 보겠다.
3.1. 이웃사랑에 대한 이해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가르치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도 모자라 현재까지도 성체로서 우리와 일치하시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이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신약 성경에서는 형제들에 대한 사심 없는 봉사와 만인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강조한다. 예수의 위대한 모범을 따라 제자들은 필요하다면 목숨이라도 바칠 만큼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도록 요구되었다.(갈라 5,13) 또한 이러한 사랑은 하느님께서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도 햇빛을 내려주시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고 보편적인 성격을 지녀야 한다(마태 5,44-48; 루카 6,32-36; 1요한 4,9-11).8) 타인의 선을 위한 이러한 헌신적인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신적 은총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3.2. 이웃사랑의 대상과 자세
위에서 서술한대로 이웃사랑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다. 나는 잊지 못할 나의 삶의 여정 속에서 이러한 보편적 사랑이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쌍한 이들한테도 당연히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군에서 전역한 후 인천 화수동에 ‘민들레 국수집’이라는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체험을 하게 되었다. 정부의 보조금 없이 지금은 환속한 전 수사 서영남씨는 오로지 하늘창고 에만 의지하여 하루 300여명의 노숙자에게 한 끼 7찬의 화려한 식사를 마련해주고 따뜻한 가족이 되고 있었다. 정말 기적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일을 하는 도중에도 얼굴 없는 후원자들이 끊임없이 작은 국수집 앞에 쌀이며 음식재료들을 두고 갔다. 서영남씨는 미국의 도로시 데이의 환대의 집을 모방하여 국수집을 열게 되었다고 말했다. 환대의 집은 사실 “5세기의 교회 공의회가 주교들로 하여금 교구마다 ‘환대의 집’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에서부터 시작한다. ‘환대의 집’은 가난한 이, 병든 이, 고아, 노인, 여행자, 순례자, 그밖에 여러 종류의 곤궁한 사람들에게 열려있었다.”9) 이 국수집도 마찬가지로 단지 배부른 한 끼 밥상만 주는 것이 아니라 짧게는 5년 길면 십여 년 노숙을 하거나 감옥에 갔다 오신 분들에게 사회에 적응하는 법 사람들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이들은 ‘민들레 가족’이라고 하여 서로 의지하며 있고 싶은 만큼 머물러 있을 수 있었고 이들을 대하는 서영남씨 또한 가족같이 대하여 주었다. 또 한 번은 서영남씨가 수사님이었던 시절 하던 교정사목을 잊지 않고 지금은 한 달에 한번 청송교도소에 자매상담을 나가는데 그 곳도 한번 따라갈 수 있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수갑도 안찬 수감자와 같은 식탁에 둘러 앉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무섭고 떨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두려움은 편견일 뿐이었다. 그곳에는 회개 한 사람, 하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정말 불쌍한 사람, 정말 사람이 그리운 사람들, 한 마리 되찾은 양이 될 사람들이 또 다른 소외를 받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여 투신하는 서영남씨의 이러한 모습은 나에게 큰 충격이자 감동이었다.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이 되셨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성체로 계속해서 사랑을 나누신다. 예수님을 추종하겠다고 다짐하고 살던 내가 본보기이신 예수님을 따라 이웃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면 될까? 답은 이미 예수님이 그리고 나의 이웃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제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그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주겠습니다.(야고 2,14. 18)”
맺음말
지금까지 나의 인생여정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려는 삶의 여정에 대하여 글을 써보았다. 이제 신학교에 입학한지도 6년차를 보내고 있다. 군생활 2년을 제외해도 3년의 시간동안 신학교 교육을 받았지만 신학에 대하여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지금까지 쓴 글을 읽어봐도 많이 부족함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앞으로의 삶의 확실한 이정표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이 보여주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나의 모토가 될 것이다.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고 나의 이웃(특히, 가난한 이들)들을 사랑하자. 예수님에게 그리고 나의 이웃들에게 나의 모든 것을 투신하자. 사도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4).” 복음 선포는 궁극적인 이웃사랑의 실천이다.10) 하느님에 대하여 많이 익히고 실천하며 기도하여 그 분의 ‘제자 됨’에 소홀함이 없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