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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진 송 씨 네

송가(宋家)네 본관과 은진 송씨(本貫과 恩津 宋氏)(3)

작성자재규어|작성시간09.11.22|조회수715 목록 댓글 0

 본관은 문헌에 172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현존하는 것은 여산(礪山)·은진(恩津)·진천(鎭川)·연안(延安)·야성(冶城)·청주(淸州)·신평(新平:洪州)·김해(金海)·남양(南陽)·복흥(福興) 등 10여 본이다. 그 중 여산송씨·은진송씨·진천송씨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그밖의 송씨는 이들 3본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도시조는 당(唐)나라의 호부상서 송주은(宋柱殷)인데, 한국에 귀화한 내력은 분명하지 않다. 그의 후손 자영(自英)의 세 아들 유익(惟翊)·천익(天翊)·문익(文翊) 3형제가 각각 여산송씨·은진송씨·서산송씨의 시조이며, 진천송씨는 인(仁)이 1세(世)로 되어 있고, 은진송씨는 천익의 후손 대원(大原)이 1세로 되어 있다. 송씨끼리는 이본(異本)이라도 통혼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다.

 

조선시대에 총 27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196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6만 968가구에 인구 34만 9462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17위였고, 1985년 조사에서는 가구수 13만 1891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1.3%로 순위는 274성 중 제17위였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63만 4345명, 가구수 19만 6641가구, 286성 중 제18위로 전체인구의 1.4%를 차지한다.


(1) 여산 송씨(礪山 宋氏)

시조는 고려 때 유익(惟翊)이며, 고려 충렬왕 때 중찬(中贊)을 지낸 송례(松禮)의 아들 염(琰)·분(玢)의 형제대에서 원윤공파(元尹公派)·밀직공파(密直公派)·소윤공파(少尹公派)·지신공파(知申公派)·정가공파(正嘉公派)의 5파로 갈라졌는데, 앞의 3파는 염의 아들이고 나머지 2파는 분의 아들이다. 여산송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2명(영의정 1명, 좌의정 1명)과 왕비 1명, 그리고 많은 판서급 인물을 배출했는데, 5파 중에서도 특히 지신공파와 정가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지신공파에서는 현수(玹壽)를 비롯하여 세림(世琳)·세형(世珩) 형제, 상현(象賢)·상인(象仁) 형제, 성명(成明)·진명(眞明) 형제, 그밖에 인명(寅明)·문재(文載) 등의 명신들이 나왔다. 현수는 단종의 국구(國舅)로서 단종복위운동 사건 이후에도 세조의 아낌을 받았으나 금성대군(錦城大君)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세림은 문장·서화에 뛰어났고, 세형은 명종 때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오르고, 대사헌, 호조·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상현은 임진왜란의 절신으로 유명하고, 상인은 인조 때 암행어사·부사·관찰사 등을 지냈다. 성명은 예조·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진명은 호조·이조·예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인명은 좌의정에 올라 당쟁의 타파에 공이 컸으며, 문재는 관찰사·대사헌·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정가공파에서는 영의정 질(帙), 중종의 부마 인(寅)과 문림(文琳)·언신(言愼) 등이 나왔다. 질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며, 그의 손자 인은 중종의 부마가 되고 도총관(都摠管)을 지냈으며, 시문과 서예에 능하였다. 문림은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오르고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언신은 병조·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광해군 원년 관찰사로 있을 때 처음으로 족보를 만들었다 한다.


원윤공파에서는 익필(翼弼)이 대표적 인물이다. 선조 때의 대학자로서 당대 '8문장(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서출(庶出)이라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여산송씨의 5파 중에서 원윤공파는 전라남도 고흥(高興), 밀직공파는 경상북도 영덕(盈德), 소윤공파는 전라북도 부안(扶安)·익산(益山), 지신공파는 전라북도 부안, 정가공파는 경기에 밀집해 있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가구수 7만 2763가구로, 송씨의 37%를 차지한다.


(2) 은진 송씨(恩津 宋氏)

시조는 고려 때 판원사(判院事) 대원이며, 그의 6대손 유(愉)의 후대에 계사(繼祀)·계중(繼中) 형제가 있는데, 계중이 사직공파(司直公派), 계사의 아들 요년(遙年)·순년(順年)이 각각 목사공파(牧使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로 크게 갈리고, 이 3파는 다시 후대에서 50여 파로 갈라진다.

 

은진송씨는 조선시대에 좌의정 2명, 대제학 1명과 많은 학자·명신을 배출했는데, 특히 목사공파와 정랑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목사공파에서는 준길(俊吉)과 규렴(奎濂)·상기(相琦) 부자가 대표적 인물이다. 준길은 당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서 대사헌·병조판서·우참찬·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규렴은 대사간·대사헌·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는데, 서예에 능하고 학문이 뛰어나 시열(時烈)·준길과 더불어 '3송(宋)'의 칭을 들었다.

 

그의 아들 상기는 노론(老論)의 중신(重臣)으로 대사헌·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유배되어 죽었다. 이밖에 명흠(明欽)·문흠(文欽) 형제가 문장과 서예로 명성을 떨쳤다. 정랑공파의 대표적 인물은 노론의 영수 시열을 비롯하여 인수(麟壽)·기수(騏壽)·덕상(德相)·환기(煥箕)·치규(穉圭)·근수(近洙) 등이다.

 

 시열은 인조 때 36세로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효종 때 이조판서, 현종 때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했는데, 숙종 때 서인(西人)이 노·소론으로 갈리면서 노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오던 중 정읍(井邑)에서 사약(賜藥)을 받았다. 그의 일생은 바로 조선 당쟁사의 축도라고 할 만하다.

 

인수는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때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으로 있다가 파직되고 사사(賜死)당하였으며, 그의 종제인 기수는 대사헌·이조판서·중추부지사에 이르렀다. 덕상은 정조 때 한성부 좌윤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환기는 정조 때 예조판서·이조판서·우찬성 등을 지냈다. 치규는 당대의 거유(巨儒)이며, 근수는 우의정을 거쳐 고종 때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병선(秉璿)은 고종 때 대사헌 등을 지내고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자결하였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가구수 6만 4590가구로, 송씨의 32.8%를 차지한다. 


(3) 진천 송씨(鎭川 宋氏)

시조는 신라의 대아찬(大阿湌) 순공(舜恭)이지만, 세계상(世系上)의 1세는 고려 중기에 평장사를 지낸 인(仁)이다. 조선시대 주요 인물로는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우고 중추부지사를 지낸 입(岦), 정묘호란 때 안주(安州)에서 후금(後金)의 침략군과 용전 끝에 전사한 영구(英耇),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올라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우의정에 추증된 영망(英望), 숙종 때 경기·강원·황해도 관찰사와 공조판서를 역임한 창(昌) 등이 있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가구수 8,925가구로, 송씨의 4.5%를 차지한다.


(4) 야성 송씨(冶城 宋氏)

야성송씨의 주요 인물로는 중종·명종 때 문과와 중시에 각각 급제하여 장령(掌令)·상주목사·대구부사 등을 지내고 외숙 윤원형(尹元衡)의 행패를 탄핵하다가 유배된 희규(希奎), 일경의 감시를 피해 애국지사들의 행적과 사료(史料)를 모아 《기려수필(騎驪隨筆)》을 남긴 상도(相燾) 등이 유명하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가구수 5,765가구로, 송씨의 2.9%를 차지한다.


(5) 남양 송씨(南陽 宋氏)

남양송씨의 조상은 당(唐)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한 규(奎)라고 하며, 그의 후손 진(進)이 고려 때 호장(戶長)·중윤(中尹)을 지냈다. 《남양송씨세보》에 의하면 1세인 진의 후손 공절(公節)의 아들 침(琛)은 공이 커서 남양군에 봉해졌으며, 손자 인(寅)은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수절하였다.

 

공절의 6대손 호(浩)는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고, 그의 아들 세충(世忠)도 덕행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손자 선(瑄)은 선조 때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다. 이밖에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제(悌)·덕일(德馹)은 숙질간인데, '남양송씨 쌍충(雙忠)'으로 유명하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가구수 3,154가구로, 송씨의 1.6%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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