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공자가 제자들과 더불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부국 강병의 논리가 아니라고 받아들여 주지 않는 무도한 임금에 실망을 느끼고, 다시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 줄 새로운 임금을 찾아가는 고단한 여행길이었습니다. 얼마를 가자 앞에 큰 강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일행 가운데 나루터가 어디 있는 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침 저만치에 밭을 가는 두 사람이 보였습니다. 혼탁한 세상을 떠나 숨어 사는 장저와 걸닉이었습니다. 공자는 제자 자로를 불러 그들에게 가서 나루터 가는 길을 묻도록 했습니다. 자로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나루터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묻자 장저가 되물었습니다.
"저기 수레에 올라 앉아 점잖게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
"공구이십니다."
"노나라의 공구란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그는 나루터 가는 길쯤은 알고 있을 텐테?"
장저는 더 이상 대꾸도 않고 부지런히 제 할 일만 했습니다. 답답해진 자로가 이번에는 걸닉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걸닉도 자로에게 되물었습니다.
"나루터 가는 길을 묻는 너는 누구냐?" "중유입니다."
"공구란 사람의 제자인가?"
"예, 그렇습니다."
"온 세상이 물처럼 거세게 흘러가는데 누가 감히 고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니 자네도 나쁜 사람이나 피해 다니는 그런 공자 같은 사람을 따라다니지 말고 차라리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우리들과 같이 지내는게 어떠한가?"
걸닉도 더 이상 자로를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머쓱해진 자로가 돌아와서는 공자에게 그들이 한 얘기를 전했습니다. 말을 다 듣고 나서 공자가 탄식하면서 말했습니다.
"날짐승이나 길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 온 세상에 질서가 잡혀 있다면 내가 구태여 바꾸려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공자가 살던 춘추 시대는 엄청난 혼란기였습니다. 그 혼란은 경제적 변화로부터 왔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주 산업인 농사에 소를 쓰기 시작했고, 새롭게 발견된 철이 농기구로 등장했습니다. 비료를 만들어 쓰기 사작했고, 관개 시설이 훨씬 좋아져서 농토에 물을 대기가 쉬워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고도의 경제 발전을 가져왔으며 아울러 농업, 공업, 상업의 분화를 활발하게 했습니다. 이 같은 경제 발전은 토지를 잠시 점유하고 이용한다는 생각에서 토지를 영원히 소유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따라서 힘이 센 나라들은 더 많은 토지와 그 토지에서 일할 수 있는 더 많은 사람을 구하게 되었고, 이 욕심을 채우는 방법으로 전쟁을 택했습니다.
땅과 사람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신분제를 비롯한 기존의 많은 제도를 무너뜨렸고, 그 결과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대부분의 군주들은 부국 강병을 위한 온갖 정책을 동원하여 민중으로부터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면서, 그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힘이 약한 나라는 금방 무너졌고, 신하들이 틈을 보아 제후를 쓰러뜨리고 땅을 나누어 갖기도 했습니다.
마치 홍수가 나서 뻘건 흙탕물이 거세게 흘러가듯 도도하게 흐르는 춘추 시대의 엄청난 사회 경제적 변화와 여기서 비롯된 어마어마한 혼란을 보면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간 사람이 공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세상을 버리고 숨어 살던 은사들, 바로 장저와 걸닉 같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비난도 "아침에 온 세상이 질서가 잡혔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바람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불행한 삶에서 피어난 위대함
동양에 살면서 공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자는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끼던 제자가 먼저 죽었을 때 정신을 잃고 통곡하기도 했고, 못된 인간들에 대해서는 불같이 성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아주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 진리를 찾았던 사람입니다. 알고 보면 매우 친근한 느낌이 드는 사람입니다.
공자는 2500여 년에 걸쳐 인류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중심 문화였던 유가 사상의 대표자입니다. 공자는 중국 문화의 출발점이었고, 주류였습니다. 한때는 한나라에서 신격화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사마천이 <사기>에 공자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다시 인간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공자의 위대성은 그가 성인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으며, 공자의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간 관계에서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서 기원전 479년까지 일흔세 해를 살았습니다. 공자는 주나라의 여러 제후국 가운데 약소국인 노나라 창평향의 추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지금의 산동성 곡부에 해당합니다. 본래 노나라는 주나라 초기의 공신인 주공의 후손에게 주어진 땅이었습니다. 공자가 꿈에도 그리돈 인물이었던 주공은 주나라의 문물 제도를 완비하여 통치 기반을 다진 사람입니다. 따라서 곡부는 비록 작은 땅이기는 해도 상당한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자사상의 성립은 이러한 문화적 토양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성이 공씨이기 때문이며, 뒤에 붙은 '자(子)"자는 선생님이라는 뜻의 존칭입니다. 공자의 이름은 구(丘)였습니다. 공자의 어머니가 니구산(尼丘山)에 빌어 공자를 가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공자의 집안은 몰락한 귀족이었고, 아버지 숙량흘은 하급 무사였습니다.
공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자에게는 10명이라고도 하는 많은 누나들과 몸이 성치 못한 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 중니(仲尼)인데, 중(仲)은 둘째라는 뜻이며 니(尼)는 앞에서 말한 니구산에서 따온 것입니다.
>공자의 아버지는 튼튼한 자식을 갖고 싶어서 뒤늦게 안징재라는 여자에게서 공자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때 숙량흘은 70세가 넘었고, 안징재는 나이 어린 소녀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공자의 출생에 대해 '야합해서 낳았다(野合而生)'고 하였습니다. 야합이란, 말 그대로 들에서 합쳐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이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생아였다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예전 학자들은 차마 공자를 사생아라고 할 수가 없어서 온갖 주장을 통해 미화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생아였다고 해서 공자의 위대성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점에서 더 돋보일 것입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은 공자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떤 일본 학자는 공자의 어머니가 무당이었거나 아니면 잔치 자리에서 춤추는 무녀였고, 맹인이었을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행사가 있는 곳들을 찾아 다녀야 했는데, 어려서부터 공자가 맹인인 어머니 손을 잡고 잔치 자리들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일찍부터 예절에 밝았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공자가 어린 시절에 가난하게 자랐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정원을 관리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도 했고, 창고에서 물건을 내주고 받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가 가축을 돌보는 일을 했을 때 가축들이 살지게 잘 자랐고, 창고 출납을 맡았을 때 셈이 정확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공자는 꾸준히 독학을 했던 것 같고, 20세 무렵부터 제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자가 살던 시대의 혼란은 주나라 초기의 굳건했던 신분제가 크게 흔들리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나라는 농경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 낸 강력한 가족제를 국가에 확대 적용한 봉건제 국가였습니다. 중국은 일찍부터 농경 사회로 자리잡았습니다. 농사에는 씨를 뿌릴 땅이나 열매를 맺도록 돕는 비와 햇빛도 필요했지만, 이것은 인간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농업은 많은 노동력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집단화가 필요했고, 이를 위한 가족 제도가 대가족제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만 많다고 농사가 잘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농업 중심의 대가족제는 효율적인 노동력의 통제가 중요했고, 농업 노동의 효율적 통제란 사실 대가족제의 효율적 통제였습니다. 그런데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사 경험이었고, 가장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은 노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노인 중심의 대가족제 윤리인 종적 윤리, 즉 가부장적 윤리가 자리잡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모계 사회로부터 부계 사회로의 사회 변화도 있었습니다.
이 같은 부자 중심의 종적 윤리를 국가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 봉건제였습니다. 기원전 1100년 무렵에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주나라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라고 불리는 종가집을 중심에 놓고서 정복한 여러 땅에 집안의 형제, 작은아버지, 조카 같은 친척이나 아니면 결혼으로 맺어진 사돈 식구들을 제후로 임명했습니다. 각각의 제후들은 자기가 받은 땅에서 다시 자기 집을 작은 종가집으로 놓고 자기의 형제, 친척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동양의 지혜
공자 이전의 교육은 전적으로 국가가 틀어쥐고 있었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귀족뿐이었습니다. 이 점은 책도 마찬가지여서 민간에서는 책을 만들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당시의 달라진 사회적 조건에 힘입어 일정한 예를 갖추고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여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중국에서 처음으로 사립 학교를 세운 셈이었고, 아울러 보통 교육, 평등 교육을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공자 학당의 교과서로는 주로 공자가 편찬한 시경, 서경, 주역, 예기 등이 쓰였습니다. 이밖에도 공자는 당시 242년간의 역사를 '옳고 그름'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기록한 춘추라는 역사책을 짓기도 했습니다.
공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책은 논어입니다. 반고가 지은 <한서예문지>에 따르면 논어는 '의논해서 편찬한 말'이라는 뜻입니다. 진시황의 분서 갱유를 지낸 한나라 초기에는 세 종류의 논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제나라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나라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온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공자가 살던 옛집의 벽 속에서 찾아낸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논어는 그 가운데 제나라 본과 노나라 본을 합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 편의 이름은 첫머리에 나오는 두 글자 또는 세 글자를 따서 붙인 것입니다. 논어는 송나라 때 이르러 대학, 중용, 맹자와 더불어 4서라고 칭해졌습니다. 그 내용은 대체로 공자의 말과 행동, 공자와 제자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제자의 말, 제자들 사이의 대화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제자들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한문으로 쓰여진 대부분의 동양 고정들이 그렇듯 논어도 많은 함축을 지니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논어를 읽으면 마치 인디언 추장의 말을 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쓰는 '살신 성인'이라든가 '극기 복례'같은 교훈적인 말들은 대부분 논어에 들어 있습니다. 논어는 도가 사상이 휩쓸던 위진 남북조 시대에도 노장, 주역과 더불어 삼현(三玄)으로 높여졌고, 예전 우리 나라 승려들도 논어를 필독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공자의 중심 사상은 인(仁)입니다. 논어에는 인이라는 글자가 무려 106번이나 나옵니다. 인은 보통 '어질다'는 뜻으로 새기지만 사실 그 풀이만으로는 공자가 말한 인의 뜻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인을 자비심, 인정 박애로 해석되는 Benevolence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도 마찬가지로 공자가 말한 의미를 다 담지 못합니다.
역대 학자들은 인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했습니다. 맹자는 '사람이 사는 편안한 집'이라고 했고, 주자는 '하늘과 땅이 만물을 만들어내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근대 중국의 학자 강유위는 '사랑의 힘'이라고 했고, 호적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밖에도 풍우란은 '완전한 덕'이라고 풀었고, 채원배는 '완성된 인격'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현대적인 어감이 아니어서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을 어떻게 새겨야 공자의 사상이 잘 표현될까요? 공자는 어떤 점에서는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비슷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소아시아 대륙을 중심으로 한 자연 철학이었습니다. 당시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연에 모여 있었으며, 그들은 만물의 본질을 자연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는 만물의 본질을 물이라고 했던 탈레스 같은 사람이고, 그 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물, 불, 흙, 공기 등을 가지고 자연의 본질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 같은 자연에 대한 관심을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 놓은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자신이 만든 말은 아니었지만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기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공자도 그 점에서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자 이전의 관심은 자연 또는 귀신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문제의 중심을 인간으로 돌려 놓았던 것입니다. 이 점은 논어 '선진'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느 날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자로가 다시 물었다.
"귀신 섬기는 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람도 다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
이 대화를 통해 공자의 관심이 귀신이 아니라 사람에, 사람에서도 죽음이 아니라 삶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가 주의를 기울였던 문제는 사람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공자가 얻은 해답이 인이었던 것입니다.
논어에 보이는 인은 대부분 공자 스스로 말한 것이거나 남의 질문에 대답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도 철학적인 말을 쓰면서 어렵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렇게 또는 저렇게 행동하라고 했을 뿐입니다. 인(仁)은 두 이(二)자와 사람 인(人)자를 합쳐 놓은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공자의 관심은 사람 이상이나 사람 이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위미에서 그는 신본주의자가 아닌 인본주의자였습니다.
중용에서는 인을 '사람'이라고(仁者人也)풀었습니다. 이 말은 맹자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여기서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사람답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을 '어질다'로 풀어서는 의미가 제대로 살지 않습니다. 인은 '사람다움'이라고 풀어야 합니다. 공자의 관심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길(道)인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공자가 추구한 사람다운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공자는 사람을 4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그중 맨 아래가 소인이고, 그 다음이 군자입니다.
논어에서는 군자와 소인을 여러 곳에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소인은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이로움이 될 만한 일을 보면, 먼저 그 일이 옳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또 소인은 남들과 같아지기는 잘하지만, 남들과 어울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군자는 남들과 어울리되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남과 같다면 자신의 존재 의미는 없습니다. 자신이 참다운 가치가 있다면, 자신의 역할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야 합니다. 군자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반대로 소인은 누구라도 그 사람을 대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남들과 참답게 어울린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주체가 될 때만 가능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고 주체를 잃고 남에게 얽매인다면, 그것은 참답게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군자는 다스리는 계층, 즉 군주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배 계층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군자의 의미를 지배 계층이 아니라 덕을 쌓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공자는 군자가 되려 하는 사람도 때로 사람답지 못한(不仁) 짓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소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사람다운(仁) 일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군자도 항상 사람다운 것은 아니며, 군자 위에 사람다운 사람(仁人)이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군자가 되기도 어려울 텐데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사람다운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공자는 논어 '이인'편에서 오직 사람다운 사람만이 정말 남을 좋아할 수도 있고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가 "너희들 중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쳐라"고 한 말과 비슷합니다. 정말 사람다운 사람은 자신의 사리 사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좋아하거나 미워하더라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는 또 사람다운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 있는 사람이 반드시 사람다운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의 용기는 참용기입니다. '진정한 용기란 아니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라고 ㅁ라하는 것'이라는 서양 속단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분명히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겪습니다.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은 정말 그 일로 해서 피해를 입거나 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아니라고 해야 할 자리이면 아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참다운 용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다운 사람은 맞설 자가 없다(仁者無敵)'고 한 것입니다.
공자는 뜻 있는 선비와 사람다운 사람은 구차스럽게 살기 위해 사람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며, 몸을 죽여서라도 사람다움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참된 용기를 지닌 사람은 일생에 딱 한 번 죽을 뿐입니다. 그의 숨이 끊어지는 날이 정말 죽는 날입니다.
그러나 비겁한 사람은 일생 동안 두고두고 죽습니다. 그가 사람답기를 포기할 때마다 그의 존재 의미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다움이란 개인에게는 자신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처럼 인을 실천하는 일, 즉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공자가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에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공자의 인은 사람다움을 구현하는 과정입니다.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예절을 갖추어야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음악을 잘 연주해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을 낮추어 개 같다, 돼지 같다 하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겉이 번드르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거나 훌륭한 글을 쓴다고 해도 기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 훌륭한 글을 쓴 사람들이 한편으로 정신대나 학도병에 지원하라고 열심히 외치고 다녔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이라면, 남에게 권하기 앞서 자신이 먼저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임이 분명하고 또한 사람다운 행동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자신의 임무이며, 죽은 뒤에나 그만 둘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자는 사람다운 사람 위에 다시 성인을 두었습니다. 사람다움의 완성이 성인인 것입니다. 논어 '옹야'편에 공자와 제자 자공의 대화가 나옵니다.
"만일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찌 사람답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반드시 성인의 경지일 것이다 요순도 오히려 그렇지 못할까봐 항상 근심했다."
이 대화를 통해 공자의 목표가 성인에 있고, 성인이란 현실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실천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다움의 실천
공자는 사람다움의 출발을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제)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충(忠)과 서(恕)를 말했습니다. 먼저 효와 제를 봅시다.
공자는 부모의 몸을 받드는 것을 효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짐승도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정성을 다해 부모의 뜻을 받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재아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3년상이 너무 길지 않느냐고 하면서 1년만에 상을 마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공자는 재아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쌀밥을 먹고 비단 옷을 입어도 편하겠는가?"
"예, 편할 것 같습니다."
"군자가 상을 당했을 때는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맛있지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마음 편히 안락하게 거처할 수 없기 때문에 3년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편하다면 네 생각대로 해라."
재아가 나가자 공자는 다른 제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재아는 사람답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날 수 있다. 3년상은 세상 사람이 다 지내는 것이다. 재아도 부모에게 3년 동안 사랑을 받지 않았는가?"
공자가 말하는 효는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것입니다. 보모의 마음을 헤아려야 스스로 편하기 때문에, 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스스로 편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효와 제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 실천 방법인 충과 서는 어떠한 것일까요?
어느 날 만년의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나이가 어린 제자 증삼을 불렀습니다.
"삼(參)아, 내 도는 하나로 꿰뚫어져 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공자가나가자 다른 제자들이 증삼에게 조금 전 선생님의 말씀이 무슨 얘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증삼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입니다."
증삼은 공자보다 마흔여섯 살 아래인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후에 공자의 학문을 정통으로 이은 사람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충이란 무슨 뜻일까요? 충의 본래 뜻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닙니다. 충(忠)은 가운데 중(中)자 밑에 마음 심(心)자를 붙인 것입니다. 글자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음속에 중심을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반대는 환(患)입니다. 환(患)은 중(中)자를 두 개 겹쳐 놓고, 그 아래에 심(心)자를 쓴 것입니다. 즉 마음 속에 중심이 둘이나 되어서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기 때문에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충은 무엇이 옳은지를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혀 흔들림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성실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제대로 다 발휘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서(恕)는 어떤 뜻일까요? 서는 같을 여(如)자 아래에 마음 심(心)자를 쓴 것입니다. 즉 남의 마음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픈데 저 사람은 얼마나 배고플까, 내가 힘든데 저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이처럼 남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이 서입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식이 내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모를 대하고, 반대로 부모가 내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가지고 자식을 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仁), 즉 사람다움의 실천은 중서의 실천이며, 중서의 실천이란 내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다하는 일이고 밖으로는 남과의 관계에서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부모와 형제 관계입니다. 따라서 효와 제가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근본이었습니다.
'답게' 하는 정치
공자는 사람다움의 사회적 실현을 통해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공자에게 정치란 사람답게 되도록 바로잡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로잡는 것일까요?
제나라 임금이 공자에게 정치가 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정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치고는 참으로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각각이 자신의 '다움'을 실현할 수 있도록 맡은 일을 다할 때 질서는 저절로 잡힐 것입니다. 실제 윗사람이 윗사람답게 아랫사람을 대하면, 아랫사람은 진정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법입니다.
공자는 도둑이 많아서 걱정이라는 임금의 이야기를 듣고서 "당신이 백성들의 물건을 욕심내지 않으면, 백성들은 상을 준다고 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갈했습니다. 공자는 정치란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며, 그 질서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사람됨됨이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논어 '자로'편에 이에 대한 유명한 대화가 나옵니다.
위나라 임금의 초청을 받은 공자가 제자들과 더불어 위나라를 향해 가고 있을 때,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해보려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떤 일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명분을 바로잡겠다."
"선생님은 사정에 너무 어두우십니다. 어째서 명분 같은 것부터 바로잡으려고 하십니까?"
"거칠구나, 자로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함부로 나서는 것이 아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할 수 없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질 수 없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문화가 일어나지 못하고, 문화가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할 수 없고, 형벌이 적절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데가 없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선생님이라는 호칭만큼 좋은 말도 드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육자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값이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선생이라고 부르게끔 되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선생님의 부인을 부르는 호칭인 사모님은 제비족들도 애용하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말의 인플레입니다. 호칭이 바르지 못하면 그런 호칭을 가진 사람의 말이 권위가 없어집니다. 말이 권위를 잃으면 그가 한 말대로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런 사회는 문화가 건강할 수 없으며 그런 문화에 바탕을 둔 법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마침내 대다수 민중이 입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법이나 힘으로 강제해서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덕과 예절로 바로잡으려 했을 뿐입니다. 공자는 정치와 형벌로 이끌면 백성들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처벌만 피하면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지만, 덕으로 이끌고 예절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기 때문에 벌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실정법 만능 사회에서는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법에만 저촉되지 않으면 죄인이 아닙니다. 공자는 법에 앞선 도덕을 말했으며, 실천에서는 윗사람이 모범을 보일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윗사람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더라도 아래서 행하지만, 윗사람의 몸가짐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을 내리더라도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물론 공자의 생각에는 당시의 시대적 한계 때문에 귀족제를 옹호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사상의 가치는 보편적인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한 데 있습니다. 공자는 사회 관계가 사람 사이의 신뢰에 바탕을 둔다고 생각했습니다.
섭나라 임금이 공자에게 자기가 다스리는 어떤 마을에서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쳤는데 그 아들이 증인을 섰다고 하면서 자기 나라 백성들의 정직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 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 줍니다. 정직이란 바로 그 속에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논어 '안연'편에 보이는 제자 자공과의 대화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정치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경제를 풍족하게 하고, 국방을 튼튼히하고, 백성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세 가지 중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 하시겠습니까?"
"국방을 포기하겠다."
"둘 가운데 다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경제를 포기하겠다.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예 사회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각각의 역할 다하는 사회, 이것이 공자가 바란 대동 사회였습니다.
노자
인생의 보배를 간직하라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제자 백가 가운데 도가 학파를 이루었습니다. 도가는 특히 공자와 맹자가 대표인 유가 사상과 대결하였습니다. 유가와 묵가의 싸움, 유가와 도가의 싸움, 유가와 법가의 싸움 등으로 이어진 전국 시대의 논쟁은 진한대를 거치면서 정리 과정에 들어갑니다. 평등의 이념을 강하게 내세웠던 묵가는 거의 자취를 잃었고, 유가는 법가 등 여러 학파의 이론을 흡수하면서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습니다. 또한 노장 사상은 민간의 주술적 신앙과 결합한 도교에 이용되면서 변형된 형태로 대중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립니다.
그러므로 진나라의 통일 이후 중국 역사에서 유가와 도가는 중국 사상의 커다란 두 흐름을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는 지배층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고, 도교는 민중의 의식 속에 '잡초와 같은 철학'으로 살아 남은 것입니다. 그러나 노장 사상은 단지 민간에서만 살아 남은 것이 아니라 지배 계층에서도 계속 읽혔기 때문에 전국 시대에 나온 어떠한 학파의 저술보다 다양하게 해석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자>의 저자인 가상 인물 노자는 신비화되고, 도가 학파의 상징적 존재가 됩니다. 특히 도교에서는 노자를 높이 받들어 중국 민중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게 됩니다. 우리가 '대륙적 기질'이다 '허허실실'이다 '외유내강'이다 하는 용어를 쓸 때, 그 의미는 노자의 사상과 연관이 깊은 것입니다.
고전 중의 고전
맹자라는 책은 맹자의 사상을 담고 있고, 순자라는 책은 순자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노자라는 책도 노자라는 인물의 사상을 담고 잇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노자라는 인물은 맹자나 순자만큼 행적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인물의 전기가 사마천의 <사기>에 들어 있는데, 이 기록에서 이미 노자는 전설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먼저 노자의 성명을 이이(李耳)라고 해 놓고, 다시 초나라 사람 노래자나 주나라 역사학자 담이란 인물이 노자일지도 모른다고 하여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노자의 나이가 160세 또는 200세라는 소문이 있다고 기록하여 노자를 신선처럼 여기게 하였습니다.
<사기>의 다른 기록에 비하여 노자에 관한 기록은 매우 못 미덥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노자의 전기를 거의 의심합니다. 예를 들어, 공자가 젊은 시절 주나라 도서관 관리자로 있던 노자에게 '예'를 물으러 갔다는 이야기나,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노자는 직책을 사임하고 길을 떠났는데 그 도중에 관문의 경비 책임자 윤회라는 사람의 간절한 요청을 못 이겨 도덕에 관한 책 상하편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신빙성이 없습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도덕에 관한 책 상하편'이 바로 <노자>라는 것인데, 지금 학자들은 이 책이 대개 기원전 350년에서 200년 경 사이에 집단 작업으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공자와 같은 시기에 공자보다 선배였던 노자가 <노자>라는 책을 쓴 것이 아니게 됩니다. 노자에게 예를 물으러 간 공자가 노자로부터 '교만하게 나서서 설치지 말라'는 내용의 주의를 듣고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노자를 용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했다는 대목도 논란이 많습니다.
중국 고대에는 족보책 두꺼운 집이 양반이라는 식의 논리가 통하여서, 자기 학파가 오랜 전통을 가졌다는 것으로 학파의 우월성을 증명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묵가는 우임금, 유가는 요순, 도가는 황제를 끌어와 연원이 깊음을 경쟁하였습니다. 노자가 공자보다 선배라는 이야기도 이러한 사고 방식에서 만들어진 허구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노자라는 책을 지은 사람과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다만 노자라는 책을 초기의 도가 사상을 연구하는 자료로 삼을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노자>는 81개 장, 5000자가 조금 넘는 분량이며, 각 장은 대개 짤막한 운문체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노자>를 '노자 도덕경'이라고도 부르는데, 제1장에서 제37장까지가 상편으로 '도경'이고, 제38장에서 마지막 제81장까지가 하편으로 '덕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1장의 첫 문장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로 시작되고, 제38장의 첫 문장은 "최상의 덕은 스스로 덕이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 이 때문에 덕이 있는 것이다."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국 장사라는 곳에 있는 한나라 때 고분에서 나온 책은 이것과 배열이 다릅니다. 장사 마왕퇴 고분은 1972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하였고, 이때 2000여 년 전의 여자 미이라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973년 2호, 3호 묘를 계속 발굴하였는데, 3호 묘에서 나무 조각에 쓴 글, 비단에 쓴 글이 나왔고 여기에 의학책과 <노자>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왕퇴 고분에서 나온 <노자>는 비단에 쓰여 있기 때문에 '백서 노자'라고 합니다. 백서 노자에는 상하편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자>는 원형이 이루어진 뒤에도 다시 정리되고 개정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노자>의 문장은 시구처럼 아름다우면서 내용이 의미 심장하여 기이한 책으로 알려졌습니다. 도교와 불교가 성행했던 시기에 노자, 장자, 주역을 '삼현(三玄)', 즉 깊은 이치를 담고 있는 세 책으로 높였습니다. 그 때문에 도가 사상가들뿐 아니라 유가와 불교 쪽에서도 <노자>를 연구하고 주석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노자>를 일관되게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하나의 책이 이처럼 여러 입장의 사람들에게 주목받았다는 것은 그 책의 무게를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r><노자>는 연원이 깊은 물줄기와 같아서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도와 노자의 도
큰 도가 사라지니 인의(仁)가 나오고 지혜가 생겨 큰 거짓말이 있게 되었다. 가까운 친척이 서로 화목하지 않자 효도니 사랑이니 하는 말이 생기고,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 나오게 되었다.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온 천하에 미치게 하면 천하가 태평해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공자가 강조한 도덕은 큰 도가 무너지고 가정이 불화하며 나라가 어지럽게 된 뒤에 그것을 수습하려는 것이었지만, 노자는 그것을 큰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갔을 때 노자는 이렇게 말하였답니다.
모기가 물어 대면 밤새 잘 수가 없다. 지금 인의 도덕을 말하는 것은 귀찮게 인심을 어지럽혀 혼란만 더하는 것이다. 백조는 매일 목욕하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는 매일 물들이지 않아도 검다. 하늘은 저절로 높고, 땅은 저절로 두껍고, 해와 달은 저절로 빛나고, 별은 저절로 늘어서 있고, 초목은 본래 종류가 여럿이다. 거기에 다시 인의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마치 북을 두드려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같다.
공자가 주나라의 통치 질서가 무너져 신하가 임금을 몰아내고,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빼앗는 사태를 보고, 주나라의 예법을 회복하기 위한 도덕 의식 개혁 운동에 몸바쳤습니다. 노자는 공자의 이런 노력이 백성들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하는 모기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노자는 잃어버린 양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북을 치면서 찾으면 양이 있는 곳을 더욱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큰 도를 찾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노자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유가의 도덕 규범은 그들이 지어낸 도일 뿐,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천지는 사람하는 마음이 없어 만물을 추구(芻拘)로 여긴다. 성인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백성을 추구로 여긴다.
'추구'는 풀로 만든 강아지인데, 제사 때 만들어 쓰고는 아무데나 버립니다. 이 주장은 유가에서 "하늘의 뜻은 인(仁)이다", "성인은 인의 실현자다" 하고 말하는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에 대하여 어떤 자애의 감정을 가진 조재가 아니며, 인간의 일에 대하여 무정하고 냉담합니다.
도는 공평 무사하여, 선인이니 악인이니 아름다우니 추하니 하는 인간적인 기준들에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가에서는 '지성이면 감천' 또는 '인자무적'이라 하여 하늘이 착한 사람을 편드는 것처럼 말하지만, 노자의 도는 인간의 바람이나 기대에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착하다 악하다 하고 구분한 것도 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노자의 도는, 악하다고 비난받는 사람이 잘살고 착한 사람이 고생하는 것에 대하여 인간적인 정의감을 발동하여 분노하고 벌을 내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도의 형상, 도의 작용, 도의 속성
큰 덕의 모습은 도와 같다. 도는 오직 황홀하기만 하여 그 형상을 분간해 인식할 수 없다.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그 속에 물(物)이 있다.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그 속에 형상이 있다. 도는 아득히 멀고 그윽이 어둡기만 한데, 그 속에 정기가 있다. 그 정기는 지극히 진실(眞)하다. 그 속에 믿음(信)이 있다.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있는데, 천지보다도 먼저 생겼다. 고요히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다. 짝도 없이 홀로 있다. 언제나 변함이 없다. 어디나 안 가는 곳이 없건만은 깨어지거나 손상될 위험이 없다. 그것은 천하 만물의 어머니가 될 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부르는 이름이 '도'이다. 억지로 이름붙여 '큰 것(大)'이라 한다.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夷)'라고 한다.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니 '희(希)'라고 한다.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니 '미(微)'라고 한다. 이 세가지는 말로 밝힐 수 없다. 그래서 혼합하여 '하나(一)'라고 한다. 그것은 위가 더 밝지도 않고, 아래가 더 어둡지도 않다. 긴 끈처럼 꼬여서 이어져 있으니 이름붙일 수가 없다.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 이것을 꼴 없는 꼴이라 하고, 실체(物)없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황홀이라고 한다.
도는 일(一)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고, 이는 삼(三)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陰氣)를 겉에 가지고 양기(陽氣)를 안에 간직하며, 충기(沖氣)로 조화를 이룬다.
천하 만물은 유(有)에서 나오고, 유는 무(無)에서 나온다.
도는 비어 있는 듯하나 그 작용은 가득 찬 듯 또는 아닌 듯하다. 깊고 아득하여 만물의 근원(宗)이며, 맑아서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나는 이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른다. 하느님보다 먼저인 듯하다.
도는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고 다른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사람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고,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황홀'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표현들을 보면 노자는 남들이 말하지 않았던 무엇을 본 듯하고, 그것에 '도'라는 이름을 붙이면서도 이름붙이기를 몹시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우리가 그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br>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글 속에 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내용이 들어 잇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인격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관념을 바꿔 놓는 내용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 '자연'이란 말로 도의 성질을 나타내 도가 무한하고 객관적인 존재라고한 것입니다.
중국 고대에는 자연계의 운행도, 인간 세상의 사건도 모두 상제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왕은 상제의 뜻을 받아 지상을 지배하는 하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왕을 천자(天子)라고 하였습니다.
천자는 상제에게 제사를 올리고, 상제의 뜻을 받들어 정치를 시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제사를 게을리 하거나 상제의 뜻에 어긋나는 정치를 하면 상제는 가물과 홍수, 그 밖의 천재 지변으로 왕에게 벌을 내립니다. 개인의 경우일지라도 사람답지 못한 행위를 한 자는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자의 도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의지가 없습니다. 인간의 기대나 의지에서 독립하여 존재합니다. 도란 인간의 역사에 관여한다고 믿어 온 상제를 부정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면서 만물의 근원입니다. 감각에 들어오는 만물은 총괄하여 '있는 것(有)'에서 나옵니다. '있는 것'은 인간의 감각에 잡히고 인간이 이름붙일 수 있는 한정된 것입니다. 도는 인간이 한정할 수 없는 존재, 이름붙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성격이 무한한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한 성격을 '무(無)'라고 하였습니다. 도는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거나 무엇에서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한다고 하고, 그러한 성질을 '자연'이란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인간도 크다. 우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인간이 그 하나를 차지한다. 인간은 땅을 딸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노자에서 말하는 '자연'이란 우리가 '자연 과학' 혹은 '자연 보호'라고 할 때의 '자연'과 전혀 다른 뜻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대상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의 상태와 성질을 나타낸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 '저절로 그러하다', '스스로 그러하다', '본래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도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어떤 존재의 영향도 받지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노자는 세계를 설명하는 범위를 넷으로 크게 나누어서 그 사이에 단계를 나누었습니다. 인간과 땅과 하늘은 결국 도를 본받지만, 도는 더 이상 본받을 것이 없고 스스로 그러한 존재입니다. 다만 인간은 언어, 지혜, 기교를 씀으로써 도의 자연에 거슬리고 어긋나는 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노자의 사상은 이 도 개념을 근거로 유가를 비판하면서 정치와 인생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노자의 정치론
나라는 작고, 백성 수는 적어야 한다. 온갖 도구가 있지만 쓰지 않게 하며 백성들이 생명을 중시하도록 하면, 살던 곳을 버리고 멀리 옮겨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배나 마차가 있어도 탈 필요가 없고,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다.
노끈을 묶어서 글자 대신 쓰던 고대의 소박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면, 먹는 그대로 맛있고 입는 그대로 아름답고 사는 그곳이 편하다고 여기고 그 풍속을 즐겨서, 이웃나라가 바라보이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줄을 때까지 서로 왕래가 없을 것이다.
총명과 지혜를 끊어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로 늘어날 것이다. 인과 의 같은 도덕을 끊어 버리면 백성들이 옛날처럼 효성스럽고 자애롭게 될 것이다. 정교하고 편리한 물건들을 없애 버리면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 이 세 가지 소극적 방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외모는 수수하고 마음은 소박하게 하며, 이기심과 욕망을 줄이게 한다.
똑똑한 사람을 높이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만든다. 얻기 힘든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한다. 욕망을 일으킬 만한 것을 보여 주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혼란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며, 의욕을 줄이고 뼈를 튼튼히 하여 늘 백성들이 무지(無知)하고 욕심이 없게 만들며, 지식인들이 제멋대로 주장할 수 없게 만든다. 무위(無爲)로 다스리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천하는 불가사의한 그릇이어서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없다. 잘하려고 애쓰면 실패하고, 꽉 잡고 장악하려 하면 천하를 잃고 만다.
언뜻 보면 원시적 자연 부락의 생활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고, 백성들을 아무 생각이 없고 그저 배부르면 좋은 '행복한 돼지'로 만들려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이 말드을 새기면, 단순히 원시 사회로 돌아가자거나 우민 정치를 해야한다는 주장만은 아닙니다. 이 말들이 겨누고 있는 현실 상황은, 생산력의 발달로 주나라의 종법 제도가 무너지면서 옛 귀족과 새롭게 신분 상승을 꾀하던 신흥 지주 사이에 이익 다툼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나온 여러 가지 정치적 이론들이 서로 논쟁하면서 직접 일하지 않고 지식을 밑천으로 살아가는 계층이 인기를 얻고 확대되어 간 상황입니다.
노자는 학자라는 자들이 학파를 만들고 서로 논쟁하는 것이 천하를 위하여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옳고 그름도 각기 달라 혼란만 더 한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 길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잘못 들어섰다고 생각되는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하를 평안하게 할 방도를 놓고 이론이 분분하여 어느 도가 올바른 도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노자는 이미 잘못 들어선 길을 포기하고 원점으로 돌아와서 생각하자고 주장합니다. 노자는 이러한 입장을 이론화하였습니다.
노자는 만물의 근원인 도의 성질이 '저절로 그러함(자연)'이듯이 인간을 다스리는 정치의 도는 '무위', 즉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위적으로 계획하고 조장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가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정치을 한 요순 임금은 "남쪽을 향하여 앉아 있는 것"으로 천하를 평안히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남면(南面)의 통치술'이라고 하는데, 임금이 자기 자리에 앉아 완전한 인격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들에서 일하는 백성들까지도 착하게 만든다는 것이빈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유가의 도덕적 모범과 다른 뜻입니다. 노자의 도는 유가의 도덕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위'의 통치술을 좀더 설명하면, '요점을 지킨다'는 방법과 '공평 무사하다'는 성격으로 표현됩니다. '요점'이란 곧 노자의 '도'이며, 그것은 저절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하를 천하에 맡기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저절로 그러한 것을 따르지 않고 사사건건 간섭하여 바로잡아 주는 것은 도를 잃었다는 증거입니다. 노자는 정치를 생선 굽는 일에 비유하여, 자꾸 이리저리 뒤적이면 생선이 다 부숴지고 타 버리는 것과 같이 정치가 백성들에게 끼어들수록 천하는 뒤죽박죽이 된다고 합니다.
도가 천지 만물에 대하여 인정 사정이 없는 것처럼 '무위'의 정치도 백성들에 대하여 인정 사정이 없습니다. 무위의 이 '공평 무사'라는 관념은 나중에 법가 사상의 법 개념에 영향을 미칩니다. 법가는 지위와 신분을 따지지 않고 인정 사정 없이 법을 적용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법가의 법이 국가의 이익을 가치 기준으로 삼은 반면, 노자의 무위는 백성들의 본래 그러한 삶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백성의 본래 그러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노자의 정치입니다.
큰길은 넓으나 백성들은 샛길을 좋아한다. 관청은 깨끗하게 지었으나 논밭은 황무지가 되었고, 창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데 권력자들은 좋은 옷을 입고 고급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밤마다 연회를 열어 음식이 싫증날 정도이다. 그러고도 재물은 남도록 가졌으니, 이것은 도둑질하여 사치에 쓰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도가 아니다.
무위의 정치는 통나무와 같은 자연 상태를 유지하여야 하고, 어쩔수 없어 관청에 기구를 설치하더라도 가능한 한 기구를 축소하여 자연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위태롭지 않다고 합니다. 놀고 먹는 자가 많거나 일하는 사람보다 감독자가 잘사는 것은 거꾸로 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요점을 지키는 정치를 가리킨 것입니다.
정치가 너그럽고 간섭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순박해진다. 정치가 자질구레한 구석구석까지 감시하면 백성들은 불만을 품게 된다.
최고 수준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게 할 뿐이다. 그 다음 수준의 통치자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고 칭송을 듣는다. 그 다음 수준은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그 아래는 백성들이 그를 경멸한다.
노자의 이러한 정치론은 현대 사회의 정치와 매우 거리가 먼 주장입니다. 인류 역사가 흘러온 방햐오가도 맞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인간의 계획과 노력의 가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노자의 무위의 정치는 '예측할 수 있는 정치'나 '위로부터의 개혁' 같은 방법과 180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노자의 '대도(大道)'라는 것은 전제군주의 교묘한 통치술의 모습을 띠기도 합니다.
장차 그것을 축소시키려면 먼저 그것을 확장시켜야 한다. 장차 그것을 약화시키려면 먼저 그것을 강화시켜야 한다. 장차 그것을 없애려면 먼저 그것을 진흥시켜야 한다. 장차 빼앗고자 하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은미한 지혜라고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 그러므로 강한 물고기가 부드러운 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국가를 이롭게 하는 수단을 백성들이 보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노자의 '대도'는 전제 군주의 비밀 정치를 옹호하고 군주의 통치술에 의존한 정치만을 논하였으며, '대도'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민주적인 논의와 제도적 장치를 통한 합리적 통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정치론은 전제 군주를 위한 '제왕학'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원초적 인간의 모습
호사스런 생활을 즐겼던 중국의 어떤 왕은 한끼 식사에 200가지 반찬을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우리는 어쩌면 고대의 제왕들보다 더 잘 먹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중국의 왕이라 해도 아르헨티나에서 생산된 바나나나 북태평양에서 잡아온 참치를 먹지는 못했을 것이고, 브라질산 커피의 맛은 몰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중국의 왕들이나 특별한 사람들만이 볼 수 있었던 책을 손쉽게 구해서 읽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노자라는 책은 그런 성격이 강합니다. 노자에서 말하는 도와 덕은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말해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왕이 된 기분으로, 노자가 인생을 어떻게 강의하였는지 살펴봅시다.
최고의 덕을 가진 사람은 의식적으로 덕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완전하게 나타난다. 수준이 낮은 사람은 의식적으로 덕을 얻고자 하며, 또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안달한다. 그래서 덕이 완전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최상의 덕은 덕을 얻고자 애쓰지 않고 또한 그것을 바깥으로 자랑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낮은 덕은 덕을 얻고자 애쓸 뿐 아니라 그것을 바깥에 나타내어 남에게 과시하려 한다.
높은 덕은 오히려 골짜기처럼 낮아 보이고, 넓은 덕은 부족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꾸준한 덕은 불건전한 것 같아 보이고, 진실한 덕은 변하기 쉬워 보인다.
정말로 덕을 지닌 사람은 갓난아이와 같다. 갓난아이는 무지하고 무심하므로 독충도 찌르지 않고 맹수도 덤벼들지 않고 사나운 짐승도 발톱을 대지 않는다. 뼈는 연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나 꽉 움켜쥔 주먹은 단단하다. 아직 남녀의 성교도 모르는데 고추는 서 있다. 정기가 최고로 충만해 있다는 증거이다. 하루 종일 울부짖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자연과의 조화가 최고로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연의 도를 따를는 사람은 총명하고 지혜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덕은 자연의 도가 인간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최고의 덕을 지닌 인간이 곧 본래 모습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어린아이와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은 이러한 본래 모습을 해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혜는 도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한 장식물에 지나지 않고 인간을 어리석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지식과 분별심이 발달하고 나서 인간의 기교에 의한 큰 거짓이 나타났다.
안다는 것이 사물의 실상을 아는 게 아님을 아는 것은 최상의 지혜요, 안다는 것이 사물의 실상을 아는 게 아님을 모르는 것은 착오다. 착오를 착오로서 자각하는 그것에 의해 비로소 착오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도를 체득한 사람은 착오에 빠지지 않는다.
인간은 분별하고 순서와 등급을 매기고 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위주로 생각하게 되어 자연스런 덕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세계를 인간의 잣대로 평가하면서 사람들은 원래 없던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만물을 창조한 인격적 존재 같은 것을.
제나라의 전씨가 저택 뜰에서 어떤 사람의 송별회를 열었다. 손님이 1000명이나 모여들었는데, 그중에 물고기와 기러기를 선물로 가져온 사람이 있었다. 전씨는 고마워하면서 말했다.
"아, 하늘의 은총은 참으로 깊도다. 인간을 위해 오곡을 만들고, 물고기와 새를 길러 인간에게 쓰이게 해 주시는구나."
둘러선 손님들이 입을 모아 전씨의 말에 찬동하였다. 그때 포씨의 열두 살짜리 아들이 나서며 말했다.
"당신의 말은 틀렸습니다. 천지 만물은 모두 우리들과 같은 동료입니다. 동료들 사이에 귀천의 차별은 없습니다. 다만 크고 작은 차이, 지혜와 힘의 차이에 따라 서로 잡아먹고 있을 뿐이지, 다른 것에게 소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제멋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을 잡아먹을 따름이지 하늘이 인간에게 먹이기 위해 그것들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모기나 파리 떼가 인간의 피를 빨고 호랑이와 늑대가 동물을 잡아먹는다고 해서, 하늘이 모기와 파리를 위하여 인간을 만들고, 호랑이와 늑대를 위해서 동물들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원초적 인간의 모습은 서로 평등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자는 더 나아가 가장 도에 가까운 인간은 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큰 이익을 주면서도 자기를 주장하여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도의 본래 모습에 가깝다.
만들어 내고도 소유하지 않으며, 일을 하고도 공로를 자랑하지 않으며,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이것을 '심원한 덕(玄德)'이라고 한다.
원초적 인간은 평등한 관계일 뿐 아니라 이기적이지 않고 양보하며 겸손하다고 합니다. 노자는 '원수를 은혜로
인생의 무게를 지키는 방법
정말로 흰 것은 언뜻 보면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큰 사각형은 각이 보이지 않는다. 큰 그릇은 완성이 더디다. 큰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는다.
정말로 똑바른 것은 마치 굽어 있는 것 같고, 정말로 능란한 것은 마치 몹시 서투른 것 같고, 진정한 웅변은 오히려 말주변이 없는 것 같다.
원초적인 삶의 모습을 잃고 세상이 지혜와 총명의 격전장으로 변해갈 때, 진정한 인생의 무게를 지키려는 사람은 먼저 통속적인 가치를 뒤집어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세상 속에서 실현할 특별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수컷의 강함을 알고 암컷의 약함을 지켜 가면, 온갖 냇물이 모여드는 계곡이 된다. 그러면 도가 몸에서 떠나지 않고, 무심한 갓난아이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영광이 무엇인지를 다 안 다음에 치욕의 입장을 지켜 가면, 만물을 포용하는 골짜기가 된다. 그러면 도가 온전히 그 몸에 실현되어,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통나무같이 자연 그대로의 소박한 상태로 되돌아간다.
세상에서 물만큼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물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
재주의 날카로운 칼끝을 누르고 마음의 이해 타산을 버리고 지혜의 빛을 감추고 속세의 먼지 속에 묻혀 산다. 이것이 도와 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 모습이며,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도의 작용 방식이다.
모든 현상은 세계의 어머니(道)로부터 태어난 자식이다. 모든 현상의 근원인 도를 알아야 그 자식인 사물을 알고, 그래야 일생을 통해 불행이나 재난을 만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노자는 어린아이나 새싹처럼 부드럽고 약하게, 물처럼 겸허하게, 골짜기처럼 포용력 있게, 통나무처럼 본래 모습을 지키는 것, 즉 근원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무게를 간직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장자는 세속적 가치를 버리고 나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반면, 노자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행동 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성적이고 수동적이며,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가치들로서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노자는 이것으로 분열된 세상의 거짓으로 치닫는 도도한 흐름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노자는 자기의 방법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첫째 포용하여 사랑할 것, 둘째 요점을 단단히 지킬 것, 셋째 천하의 앞에 나서지 말 것입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어긴다.', '물러서는 것이 전진하는 것이다.' 이런 노자의 말이 모택동의 유격 전술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국민당의 초토화 작젼에 밀리면서 모택동 군대는 1억 5000만 리 대장정에 올랐습니다. 그때 유격 전술의 전법은 '적이 공격해오면 달아난다. 적이 쉬고 있으면 괴롭힌다. 적이 후퇴하면 쫓아간다'였습니다.
<한비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송나라의 한 시골 사람이 가공하지 않은 옥돌을 주워 대신인 자공에게 선물로 바치려 했다. 그런데 자공은 극구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나이가 자공을 만나 말했다.
"이것은 값비싼 보물입니다. 대신 같은 고귀한 분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우리 같은 천한 자들이 가질 물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거절하시는 겁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자네는 옥돌을 보배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받지 않는 것을 보배라고 생각하네."
노자의 철학에서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이 모두 값진 것이 아닙니다. 명예나 권력이나 돈이나 모두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노자가 추구한 것은 공자처럼 도덕을 닦아 훌륭한 인격을 완성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인격도 남들의 입방아에 날리는 쭉정이 같은 것입니다. 노자가 보배라고 생각한 것은 기본적인 생명의 욕구,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끝으로 인생의 본래 모습을 지키며 살다 간 노자의 독백을 들어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치 진수 성찬이라도 받아 놓은 듯 신바람이 났네.
화창한 봄날 정자에 올라 꽃 구경이라도 하듯이.
그러나 나만은 담담하고 조용하고 마음이 동하는 기미도 없네.
마치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마치 아주 지쳐 돌아갈 집도 없는 강아지처럼.
사람들은 무엇이든 남아돌 만큼 가지고 있지만
나만은 모든 걸 잃어버린 것 같네.
야, 나는 바보 같구나. 아무것도 모르고 멍하니.
세상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는 그저 멍청할 뿐.
남들은 딱 잘라 잘도 말하는데, 나만은 우유 부단, 우물쭈물.
흔들흔들 흔들리는 큰 바다 같네.
쉴 줄 모르고 흘러가는 바람이네.
장자
광활한 정신 세계의 끝없는 이야기
몇 해 전에 어느 대학의 철학과 2학년생들에게 '노장 철학'을 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노장 철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고, 노자와 장자는 중국 고대 도가 사상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똑같은 철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고, 노자나 장자라는 인물이 어디서 무엇을 한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노자>와 <장자>라는 책을 중심으로 강의를 하게 됩니다. 그때 한 여학생이 <장자>를 읽고 써낸 독후감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대로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아프리카에는 양과 닮은 스프링 복이라는 야생 동물이 있답니다. 그놈들은 수백, 수천 마리씩 떼를 지어 풀밭을 찾아 다니는데, 풀밭을 만나면 뜯어먹고 다 먹으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풀밭이 있어도 계속 달리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건 앞쪽에서 풀을 죄다 뜯어먹어 버려 먹을 게 없어진 뒷놈들이 앞에 가는 놈들을 밀어붙이기 때문이랍니다.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점점 더 빨라져 새로운 풀밭이 나타나도 먹지 못하고, 떼를 지어 계속 달리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한꺼번에 몰살하는 수도 있답니다.
장자의 눈으로 우리 현대인들을 본다면, 바로 이 스프링 복이라는 양떼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는 날마다 바쁘게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바쁘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고,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장자와 함께 산에 오르면 이런 대화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 아래 차들과 사람들을 보게 분주히 무엇인가를 쫓아 다니지 않는가. 저들이 무얼 찾고 있는지 알겠는가?"
"저 사람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바쁘게 뛰고 있습니다. 벌건 눈으로 권력과 명예와 부와 사치 향락을 쫓는 자들도 있겠지만, 저나 선생님처럼 실업자가 되어 산기슭이나 어슬렁거리는 것보다는 부지런히 살아가는게 좋지 않습니까?"
"답을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왜 딴소리를 하는가. 나도 실업자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닐세. 그건 그렇고 나는 저 사람들이 저렇게 바삐 찾아 다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네. 저들은 매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게 분명해. 그러니까 열심히 찾아 다니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저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이제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아."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道)
도는 길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니면 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이 길을 넓히지, 길이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길 아닌 곳으로 가면 가시덩굴이나 진흙탕에 빠져 고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길로 가야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人道)입니다. 요즈음은 인도보다 차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람이 갈 길에 차들이 점점 쳐들어와 인도가 차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공자가 말한 인도는 '효제 충신'이었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 하고 남에게 미더워야 한다. 이 인도를 잘 닦으면 어진 사람(仁人)이 된다. 어진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고, 남과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남의 감정과 고통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인도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仁)은 모든 도덕의 근원이다.'
차는 사람이 몰고 가는 것이므로 차도도 결국 인도입니다. 공자는 어진 사람이면 차를 타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바람이 치는 날 막뒤집힐 듯한 우산을 요리조리 가누면서 인도로 걸어가는 사람과 자가용 뒷자리에 편안히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도로 가는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그러나 공자는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걸아가는 사람에게 흙탕물을 튀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정도의 배려만 있으면 이런 불평등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길을 넓히는 데 반대하지 않으며, 때로는 새 길을 만들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장자는 공자의 말이 그럴듯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속임수라고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차도로 가도 좋고 길을 넓힐 수도 있다는 공자의 말은, '사람다운 사람'의 이름을 빌린 인간들이 길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옹호해 주고, 가난한 백성이 부역과 전쟁에 동원되어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서 죽고 마는 상황을 합리화시켜 준다고 장자는 생각하였습니다. 공자가 군대(군사력), 식량(경제력), 백성들의 신뢰(권력의 정당성) 가운데 정치가가 끝내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은 백성들의 신뢰라고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장자의 비난은 너무 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자는 '부국 강병'을 외치는 법가나 '도덕 정치'를 외치는 유가나, 춥고 배고픈 백성들의 눈으로 보면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자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길이란 무엇인가. 공자가 말하는 길은 진정한 길이 아니다. 진정한 길은 어떤 사람만이 만들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만 편하게 가는 그런 길이 아니다.'
한번은 장자가 문혜군이라는 왕을 초청해 놓고, 소 잡는 기술자를 강사로 내세워 도를 강의하게 하였습니다. 강사는 먼저 실기로 왕에게 시범을 보였습니다. 그의 손놀림과 자세, 칼을 쓰는 동작은 마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혜군이 경탄하며 말했습니다.
"아아, 훌륭하도다!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도 있는가?"
소 잡는 기술자가 칼을 놓고 말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이 아니지요. 제가 처음 소 잡는 일을 시작했을 때는 보이는 것이 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자 소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마음으로 소와 만날 뿐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췄고, 마음만이 움직입니다. 오직 소의 결대로 칼을 움직여 살과 뼈 사이의 큰 틈을 쪼개 벌리고, 뼈와 뼈 사이의 빈 곳에 칼을 밀어넣고, 소의 몸 중 원래부터 빈 곳을 따라가니 뼈나 살이 엉겨붙은 곳에 칼이 닿는 일이 없고, 하물며 큰 뼈에 닿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솜씨 좋은 사람도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이 엉긴 곳을 베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백정은 다달이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칼은 지금 19년이 되었습니다. 잡은 소는 수 천 마리가 됩니다. 그런데도 칼날은 금방 숫돌에 갈아 낸 것 같습니다. 원래 소의 뼈마디 사이에는 빈 틈이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집어 넣으니, 거기에는 자연히 넉넉하고 넓어 아무리 칼날을 휘저어도 반드시 남는 구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19년이나 쓴 칼날이 아직도 금방 숫돌에 갈아낸 것 같지요.
하지만 살과 뼈가 얼키고 설킨 곳에서는 저 역시 어려워집니다. 두렵고 조심스럽기만 하고, 눈이 한곳에 고정되어 손놀림이 더뎌집니다. 따라서 칼의 움직임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래서 찢고 벌려 다 가르고 발라내면, 마치 흙덩이가 땅에 쌓이듯 고깃덩이가 쌓이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저는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돌아보며 흐뭇해 합니다. 그리고는 칼을 닦아 넣어 두지요."
"정말 훌륭하다. 나는 그대의 말을 듣고 비로소 양생의 비결을 알았다."
위의 예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는 빈 것이다. 그것은 무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낳고 포용할 수 있다. 만물 중 하나인 인간은 도를 따라야 한다. 도를 벗어나면 오직 스스로를 상할 뿐이다. 도를 따르지 않고 쓴 칼날이 무디어지듯이."
"도는 원래 그런 것이고, 인간이 이렇게저렇게 넓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도는 자기들이 지어낸 도이다. 그들은 '이것이 사람이 갈 길이다'하고 가르치지만 '도는 이것이다'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도는 말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도는 감각과 사유로 알 수 없다
<장자>에는 '혼돈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쪽 바다의 황제는 숙이고, 북쪽 바다의 황제는 홀이며, 중앙 땅의 황제는 혼돈이다. 숙과 홀이 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나면 혼돈이 지극히 대접해 주었다. 숙과 홀은 혼돈의 덕에 어떻게 보답할까 의논한 끝에 이렇게 결정했다.
"사람은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혼돈은 홀로 이것이 없으니 우리가 뚫어 주세."
그리하여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일주일째에 혼돈은 죽고 말았다.
도는 우리의 감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오관은 각기 외부 사물의 모양과 색깔, 냄새, 맛, 촉감을 받아들이지만, 도는 오관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하고 말했습니다. 감각 뿐만 아니라 생각으로도 도를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무엇을 위해 도를 가르친 것일까요?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알아야 할 것은 무한하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쫓는 일은 위태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알았다고 여기는 것은 더욱 위태롭다. 착한 일을 하더라도 유명해지지 말고, 나쁜 짓을 하더라도 형벌에 걸리지는 말라. 중도(中道)를 기준으로 삼으면 몸을 상하지 않고, 생긴 대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으며,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고, 타고난 수명을 다할 수 있다.
장자는 통이 커서 별을 따다 공기놀이를 하는 이야기나 기를 타고 우주 여행을 하는 이야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 자잘합니다. 겨우 몸 다치지 말고 오래 살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젊은 남자들이 군대 갈 때, 어른들이 한결같이 충고하는 말과 다를 게 없습니다.
"건강이 제일이다. 몸조심하거라."
"앞에 나서지도 말고 뒤에 처지지도 마라. 그저 중간만 가라."
이런 이야기는 철학이라기보다는 비굴하고 교활한 처세술 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질서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공자의 도를 비웃은 장자의 '큰 도'는, 사실 개인의 생명과 그것의 온전한 발현을 이루어 가는 문제와 단짝입니다. 이런 점에서 유가의 문제나 장자의 문제나 모두 인간들 속의 인간의 삶의 문제였습니다. 다만 장자는 유가에서 규정해 놓은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할 길'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를 위한 철학일까요?
기계를 싫어하는 인간 기계들
어떤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주 옛날에는 여자들만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여자들이 모여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너무나 힘든 노동에 시간을 죄다 써 비린다. 이것을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를 의논했답니다. 결국 '우리들의 말에 절대 복종하면서도 힘이 세 일을 잘하는 동물을 만들자'고 결론이 났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남자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엔가 직접 들에서 일하지 않고도 밥을 먹는 사람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어떤 숨어 사는 노인이 공자를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웃은 것이나 맹자가 "육체를 쓰는 사람이 정신을 쓰는 사람을 먹여 주고, 정신을 쓰는 사람이 육체를 쓰는 사람에게 받아 먹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당연한 관계'라고 한 것에도 이런 사정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맹자는 정신을 쓰는 사람은 육체를 쓰는 사람을 '위하여' 살아야 하고, 엄격한 자기 규율로 정의롸 도덕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훌륭한 어머니를 만난 덕택에 들에 나가 뙤약볕을 쬐면서 땅을 파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직접 경험해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장자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모양입니다. 지방 관리에게 쌀 꾸러 갔다가 푸대접 당하는 이야기, 짚신을 엮어서 생활한 이야기, 누더기를 입고 거지꼴로 위나라 왕을 만난 이야기 등이 나옵니다. 장자의 제자들 중에는 직접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사냥도 하고 고기도 잡았겠지요. 춘추 시대에 나온 철제 농기구가 장자가 살던 시대에는 이미 널리 보급되었으며, 소를 농사에 이용하고, 거름을 주는 방법을 개발하는 등 농업 생산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새 발명품 중에 물을 길어 올리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 당대에 손꼽히는 부자였던 자공이 길을 가다가 한 농부를 만났습니다. 농부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뭄으로 시들어 가는 곡식에 뿌려 주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돈버는 재주가 뛰어났던 자공은 새로운 발명품들에 대한 소식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농부에게 새로 나온 물 긷는 기계를 권했습니다. 농부는 자기도 그런 기계가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일부러 쓰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새 소식을 전해 주려 한 자공을 무안하게 만듭니다. 기계를 사용해서 편해지면 인간의 본마음이 변질된다고 하면서, 자기는 땀 흘리는 것을 일부러 선택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장자>에 실려 있는 이 이야기는 기계나 노동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기계를 사용하여 더 많이 생산하는 사회적인 변화가 생산을 담당하는 농부들에게 돌려주는 이득은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옛날 방식으로 살 때는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일한 만큼 수확하여 그에 맞추어 먹고 살았지만, 이제는 관리들이 와 세금도 내라 하고, 일하는 데도 간섭하고, 부역이나 전쟁에 끌고 가려 하니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기계가 가져다주는 편리함은 인간의 자연스런 자기 발현을 포기하는 대가로 주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기계와 인간의 문제인 동시에 인간과 인간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기계는 오히려 묵자 학파나 장자 학파에서 더 잘 만들었습니다. 고대인들도 자동으로 일하는 기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시기 문헌에는 전쟁 무기용 발명품들도 나오고,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3일 밤낮을 자동으로 날아다닌 모형 비행기 이야기도 나옵니다.
장자의 시대보다 뒤에 쓰여진 것이지만, 역시 도가 사상가들의 저술인 <열자>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나라 제5대 천자 목왕이 서쪽 제후국들을 둘러보는 길에 어느 나라에서 언사(偃師)라는 이름을 가진 기술자를 선물로 받았다. 그는 천자를 위해 특별히 솜씨를 발휘하여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었다. 걸음걸이도 능숙하고 몸놀림도 능란하여 살아 있는 사람과 다름없었다. 턱을 움직여 노래부르고 손을 흔들어 춤추는 모양을 보고, 천자는 진짜 인간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런데 연기를 한 차례 끝낸 이 인형이 천자를 모시고 있는 총회에게 윙크를 하는 게 아닌가.
천자는 크게 노하여 당장 언사를 즉이려 하였다. 언사는 벌벌 떨면서 인형을 풀어헤쳐 천자에게 보였다. 가죽, 나무, 아교, 옻, 백흑(白黑), 단청(丹靑)을 합쳐서 만든 것이었다. 천자가 하나하나 살펴보니, 안에는 간, 쓸개, 심장, 폐, 비장, 신장, 창자, 위장이 있고, 겉에는 근육과 뼈, 마디, 가죽과 털, 이빨과 머리털이 있는데 모두 모조품이었다. 천자가 시험 삼아 인형의 심장을 떼어내니 입으로 말을 하지 못했다. 간을 없애니 눈으로 보지 못했다. 신장을 없애니 발로 걷지 못했다.
천자는 비로소 기뻐하며 말했다.
"사람의 기술이 이처럼 조물주와 같을 수 있는가!"
진짜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완벽한 인형을 상상한 도가 사상가들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왕과 대신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억지롤 물렁뼈가 되어야 하는 광대를 대신할 기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없었을까요?
<장자>에 매미 잡는 사람 이야기, 호랑이 사육사 이야기, 활 잘 쏘는 사람 이야기 등등이 나오는 것은, 이 책을 쓴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웠거나 애착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근대 이전의 기술은 '예술'의 의미를 가지듯이 <장자>에는 예술로서의 기술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장자의 무리들은 육체를 쓰는 사람들의 편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라면 철저하고 한맺힌 것이어야 할 텐데 어째서 장자의 이야기는 그토록 화려하고 황당한 것일까요?
장자의 우주 여행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은 몇 천 리인지 알지 못한다. 한번 떨쳐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쪽 바다로 옮겨 간다. 남쪽 바다는 하늘의 못(天池)이다. <제해>는 괴상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 "붕이 남쪽 바다로 옮길 때, 물길을 갈라치는 것이 3000리요, 요동쳐 오르는 것이 9만 리이며, 여섯 달을 가서 쉰다"고 하였다.
매미와 산비둘기는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용을 써서 날아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가지에 겨우 오르며, 때론 거기에도 이르지 못해 땅에 떨어지는데, 어찌 9만 리를 솟아올라 남쪽으로 간단 말이냐."
야외로 소풍가는 이는 세 끼 먹고 돌아와도 배가 부르며, 백 리를 가는 이는 밤새 양식을 찧고, 천 리를 가는 자는 석 달 동안 양식을 모은다.
이 두 벌레가 무엇을 알겠는가?
너무도 유명한 <장자> 첫문장입니다. 큰 뜻을 품고 길을 떠나는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붕정 만리(鵬程萬里)'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조선 시대 실학자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매우 신기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한 뒤로는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를 벗어나는 데 이용하였습니다. 개화기 선각자들도 지구의를 갖다 놓고 빙빙 돌리면서 사람들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천하의 중앙은 어느 나라일까요? 중국일까요, 미국일까요? 이리 돌리면 이 나라고, 저리 돌리면 저 나라가 됩니다. 우리도 부강해지면 천하의 중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거나 우주가 넓다는 생각은 이미 2300년 전에 장자의 머리 속에 있었습니다. 장자는 자기의 우주 여행 보고서를 이렇게 썼습니다.
"하늘의 푸르고 푸른 것이 자기의 본래 모습일까? 저쪽에서 이 땅을 보라. 그러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자는 어떤 우주선을 타고 갔을까요? 지네는 다리가 많은데도 뱀보다 느려 뱀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발 없이 빨리 가는 뱀은 형체도 없이 자기보다 빠른 바람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발도 없고 형체도 없지만, 우주의 끝까지 달려갈 수 있습니다. 장자는 자기의 정신을 천지 자연의 기에 태우고 여행한 것입니다.
맹자처럼 정신을 쓰는 사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쓰는 사람도 생각을 합니다. 농부도 이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계가 편리하지만 자기를 빼앗아 간다는 것도 알고, 위정자들이 어떻게 도둑질하는지도 압니다. 장자는 이 정신을 타고 천지를 왕래하였습니다.
맹자가 정신을 쓴 것은 집안 걱정, 나라 걱정, 헐벗고 굶주리고 외롭고 약한 삶들을 걱정한 것이었지만, 장자가 저 위에 올라가서 보니 두 나라의 전쟁이란 것이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는 꼴이었습니다. 좀더 올라갔더니 땅더어리는 물과 흙으로 되어 있고, 다시 더 올라갔더니 마치 하나의 달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더 넓게, 더 멀리 보고와서 세상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육체를 써, 서류나 장부를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동료들에게 정신을 쓰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는 어디에 있는가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도는 어디에 있는가?"
"없는 곳이 없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지적하여 말해 보시오."
"쇠파리에 있다."
"도가 어찌 그렇게 지저분한 데 있는가?"
"가라지나 피 같은 잡초에 있다."
"어째서 더 하찮은 것에 있는가?"
"옹기 조각에 있다."
"왜 점점 더 심해지는가?"
"똥 오줌에 있다."
"....."
장자가 말하였다.
"당신의 질문은 본질을 물은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물을 벗어나 도를 이야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지극한 도는 이와 같고, 위대한 말도 이와 같다."
도는 바로 우리들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것은 고상하고 깨끗하고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 우리가 만지는 그릇 속에, 농부가 이용하는 거름 속에, 우리와 더불어 사는 하찮은 미물들 속에 있습니다. 도는 많이 배운 사람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육체를 쓰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공자나 맹자가 말하는 도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고, 땀흘리며 일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질까요?
도를 분열시킨 것
<장자> 33편 중 두 번째 편의 제목은 '제물론'입니다. 제물론은 모든 이론을 가지런히 한다, 다시 말해 서로 다투는 온갖 의견들을 잠재운다는 뜻입니다. 전국 시대는 나라간의 전쟁과 학파간의 이론 경쟁이 치열한 시기였고, 장자는 이러한 상황이 평화와 공존의 상황으로 바뀌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인들이 자기 주장을 퍼뜨리고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나설수록 세상은 더 혼한스러워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짝을 여는 도둑에 대비하려면 반드시 끈으로 묶고, 자물쇠를 채워야 한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현명함이다. 그러나 큰 도둑은 궤짝을 지고 상자를 들고 주머니를 둘러메고 달아나면서 오히려 끈과 자무로시가 약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현명함이란 결국 큰 도둑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아닌가(지식인이란 자들은 나라를 전쟁으로 빼앗는 군주들의 종이 아닌가)?
도덕은 명예욕 때문에 흔들리고, 지략은 전쟁 속에서 나온다. 명예욕은 서로를 파괴하고, 지략은 전쟁 무기가 된다. 이 두가지는 흉한 것이니 추구할 만한 것이 아니다.
장자는 침략 전쟁으로 나라를 훔치는 군주에게 봉사하는 지식인들의 이론이 어떠한 맹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깊이 문제 삼았습니다. 그는 당시 지식인들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론들은 어떻게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너와 내가 논쟁을 하여 네가 이겼다면, 과연 너는 옳고 나는 틀린 것인가. 내가 너를 이겼다면, 과연 나는 옳고 너는 틀린 것인가.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없어 제삼자를 부른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바르게 판정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 너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너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나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다르므로 어떻게 바르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와 의견이 같은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같으므로 이렇게 바르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너와 나와 제삼자가 모두 서로 알 수 없는데, 또 다른 사람을 부른다고 되겠는가.
논쟁자들은 왜 논쟁을 마무리할 수 없는 걸까요? 그것은 옳고 그름의 표준을 삼을 수 있는 기준이 없고, 언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분열시키고 시비를 일으키는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하나라면) 이미 하나라고 했으니 말한 것이 있는가. 이미 하나라고 했으니 말한 내용이 있지 않은가. 하나인 세계와 하나라는 말이 있으니 둘이 되고, 둘과 하나가 셋이 된다. 이 이하는 계산이 뛰어난 사람도 다 헤아릴 수 없는데, 처음에 여럿일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결국 언어를 가지고 세계를 말하면, 하나인지 둘인지도 합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자는 통일된 전체상을 보지 못하고, 만물을 낱낱이 구분하여 한 모퉁이를 본 것을 가지고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논쟁을 거부하였습니다.
유명한 논리학자 혜시는 장자의 친구였습니다. 둘은 이런 논쟁을 하였습니다.
장자와 혜시가 호의 다리 위에서 한가하게 거닐고 있었다.
장자 : 피라미가 자유롭게 놀고 있구나.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지.
혜자 :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 줄 아는가?
장자 :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을 아는가?
혜자 : 나는 자네가 아니니 자네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니니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틀림없네.
장자 :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세. 자네가 나에게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 줄 아느냐고 물은 것은, 이미 내 말을 알아듣고서 물은 것이네. 어떻게 알았는지 말하겠네. 나는 이 물가에서 알았네.
느긋한 마음으로 산책하면서 무심코 한 말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혜시와 그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벌건 얼굴로 대꾸하는 장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푸르른 수풀과 맑은 시내, 싱그런 바람을 맞으며 장자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을 아무 부담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그리는 유려한 곡선과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그 모습을 보고 장자는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고, 자유스런 모습이라고 느꼈습니다. 혜시도 장자의 기분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지만 습관적으로 말장난을 걸었습니다. 장자는 이런 말장난이 싫었습니다.
장자는 여기서도 만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자기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장자는 물고기와 통할 수 있었습니다. 만물이 하나임을 아는 사람만이 시비를 초월하고, 선악과 생사를 초월하여 무한한 자유의 세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 세상에 쓸모 없는 존재는 없다
장자의 '만물은 연관되어 있다'는 사상은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기초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꽃은 향기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똥은 더럽고 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꽃이란 식물이 물과 햇빛과 영양분을 받아들여 피운 것이고, 식물에게 좋은 영양분은 똥에 들어 있습니다. 꽃은 줄기나 잎, 공기나 물, 거름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연관을 아는 사람은 단순히 꽃은 아름답고, 똥은 더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구분되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또 좋아함과 싫어함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싫은 것을 버리게 합니다. 이러한 분별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고 싫은 것을 벗어나려 경쟁하고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연관되어 있고 세계가 하나임을 아는 사람을 지극한 사람, 달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장자의 친구 혜시가 선물로 받은 박씨를 심었는데, 지금까지 보지 못한 큰 박이 달렸습니다. 너무 커서 바가지를 만들면 펑퍼짐해서 물을 뜰 수가 없고, 물을 담으면 무게를 견디지 못해 쪼개졌습니다. 쓸모없는 박이라고 투덜거리는 혜시에게 장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호수에 띄워 놓고 배처럼 쓰지 않느냐?"
박은 바가지를 만들어 쓴다는 사람들의 분별, 선입견에 갇혀서 너무 큰 박은 쓸모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직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장자는 사람들이 인위적인 분별 규정 때문에 세계의 본모습을 못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만 따진다면, 우리가 걸어갈 때 필요한 길의 너비는 30센티미터면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강 위에 30센티미터 폭의 다리를 만들어 놓으면, 곡예사의 연기 무대는 될지 모르나 보통 사람들은 다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장자는 이런 비유를 써서 우리가 밟지 않는 땅도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주관적인 편견을 벗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자는 사람들이 미인 대회를 열어 고르고 고른 미인이라도 물고기가 보고는 물 속으로 숨고, 새들에게 다가가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이 보고는 결사적으로 도망칠 것이니, 미인 대회에서 뽑은 미인은 진정한 미의 기준에 맞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견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판단 차이를 비유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장자는 세상에서 소외된, 세상의 기준에서 비정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온전한 덕과 인간미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주장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름 모를 풀 한 포기나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싫어하고 미워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서로를 포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맹자
유가의 파수꾼
전국 시대 강력한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제나라의 선왕은 천하 통일의 야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선왕이 맹자를 보고 말했습니다.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이 한 일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공자나 그 제자들이 두 사람에 대해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잘 아는 '참다운 임금의 길'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은 춘추 시대 초기에 강력한 패권을 쥐었던 제후들입니다. 사실 논어에는 두 제왕에 대한 공자의 평가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공자 문하에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맹자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다만 힘에 의한 통치를 반대하는 맹자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제선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덕을 가져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백성을 아끼고 보살피는 왕이라면, 아무도 그가 온 세상의 왕이 되는 걸 막을 수 없습니다."
"나같이 모자라는 사람도 백성을 아끼고 보살필 수 있겠습니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제가 전에 어떤 신하에게 들으니, 왕께서 이런 적이 있으셨다지요?"
맹자는 제선왕에게 자기가 호홀이라는 신하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해 줍니다.
왕이 하루는 당 위에 앉아 있는데, 그 아래로 어떤 신하가 소를 한마리 끌고 지나갔다. 물끄러미 보고 있던 제선왕이 신하에게 물었다.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는가?"
"예, 흔종(새로 만든 종의 갈라진 틈을 소의 피로 메우는 의식)에 쓰려고 합니다."
"놓아주도록 해라. 벌벌 떨면서 죄도 없이 죽으러 끌려가는 모습을 차마 못 보겠구나."
"그러면 흔종을 그만둘까요?"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느냐? 양으로 바꾸도록 해라."
맹자가 이런 일이 있었는지를 묻자 왕이 대답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면 참다운 임금 노릇을 하실 수 있습니다. 큰 소를 작은 양으로 바꾸게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임금이 참 인색하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왕께서 정말 그 소가 불쌍해서 그러신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백성들이 있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제나라가 작기는 하지만 아무려면 소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저는 정말 소가 불쌍해서 양으로 바꾸라고 한 것입니다. 선생이 제 마음을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임금을 인색하다고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요. 큰 소를 작은 양으로 바꾸셨으니까요. 그런데 소는 불쌍히 여기시면서 어찌 양은 불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 참, 저도 그 마음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요. 그러고 보니 소가 아까워서 양으로 바꾸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백성들이 인색하다고 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렇게 낙심할 일은 아닙니다. 임금께서 소는 보셨지만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셨을 뿐입니다."
"아, 선생의 말씀을 듣고 나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참답게 왕 노릇하는 데 알맞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이 임금께 자기는 3000근 정도 무게도 넉넉히 들 수 있지만 깃털 하나는 들지 못하며, 아주 작은 것까지도 볼 수 있지만 수레에 가득 실은 장작 한 짐은 보지 못한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믿을 수 없지요."
"왕의 마음 씀씀이가 소에게까지 미쳤으면서도 백성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백성들에게 참답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훌륭한 정치를 안 하시는 것이지 못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맹자의 말솜씨는 대단했습니다. 누구든 맹자에게 걸리면 빠져나올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앞의 대화에서도 제선왕은 점점 맹자의 의도에 말려들어가 마침내 올바른 임금의 길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맹자는 의기가 굳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 임금에게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맹자의 뛰어난 말솜씨에 대해 공도자라는 제자가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선생님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들 말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어찌 말하기를 좋아하겠는가. 어쩔 수 없어서 그럴 뿐이다. 우임금은 황하를 다스려서 온 세상을 편하게 했고, 주공은 오랑캐를 막아 내고 사나운 짐승을 쫓아내서 백성을 편하게 했으며, 공자는 춘추를 지어 못된 신하와 불효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나는 이 분들을 본받아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고 못된 이론들을 막아내려고 한다. 말솜씨가 뛰어난 것이 어찌 말하기를 좋아해서겠는가?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공자의 뒤를 이어
맹자는 기원전 372년에 나서 298년에 죽었습니다. 공자가 죽은 뒤 100년쯤 지나서 태어난 셈입니다. 앞의 대화에서 보았듯이 맹자 스스로도 공자를 이었다고 자부했으며, 후세 사람들 또한 맹자를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亞聖)'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선지 생존 연대가 잘 맞지 않는 문제가 있음에도, 맹자가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인에게서 배웠다고 전해집니다.
맹자는 전국 시대의 철학자였습니다. 전국 시대는 공자가 활동했던 춘추 시대보다 혼란이 더 심했습니다. 봉건 체제 내의 하극상이 매우 잦아졌고, 민중에 대한 수탈이 극에 달했습니다. 맹자의 표현처럼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그득하고, 살아 있는 민중들도 굶주린 기색이 뚜렷했습니다. 그래서 위로는 부모를 모시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지배자들은 사치와 탐욕, 그리고 침략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점차 몇몇 세력 있는 제후들에게로 힘이 모아졌고, 맹자는 그 가운데 일부 임금들에게 질서 회복의 기대를 걸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제선왕, 양혜왕, 등문공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후들은 맹자의 뛰어난 말솜씨에 걸려들기는 했지만, 그의 말대로 실천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왕들에게 환영받은 주장은 부국 강병 전략인 합종책과 연횡책이었을 뿐입니다.
맹자의 이름은 가(軻)이고,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와 아주 가까운 추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추나라는 오늘날 중국의 산동성 남쪽 지역에 해당합니다. 맹자에게는 성장과 관련된 몇 가지 고사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 교육을 위해 애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맹자 어머니도 아들 교육을 위해 무던히 애썼던 모양입니다. 처음에 맹자네는 묘지 근처로 이사를 갔습니다. 거기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장사지내는 일이었기에, 맹자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장사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곤 했습니다. 이런 모습에 놀란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집을 옮겼습니다. 이번에는 시장 부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물건을 팔고 사는 흉내를 내면서 놀았습니다. 맹자 어머니는 다시 학교 부근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공부하는 흉내를 내면서 놀았고, 그제서야 맹자 어머니는 마음을 놓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유명한 '맹모삼천지교'입니다.
'맹모단기지교'라는 일화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란 맹자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맹자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하던 공부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이때 비단을 짜고 있던 맹자 어머니는 틀에 걸린 비단을 칼로 끊어 버림으로써 아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고 합니다.
맹자의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공자가 했던 것처럼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면서 도덕을 바탕으로 한 왕도 정치를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나라 수도의 직문(稷門)아래에 학자 단지를 세워 놓고, 훌륭한 선비들을 초빙하여 우대하였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을 직하학파(稷下學派)라고 불렀는데, 맹자도 한때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맹자의 주장에는 임금들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민본 사상이나 혁명 사상이 그랬습니다. 따라서 어느 임금으로부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70세 무렵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했습니다.
맹자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 책이 <맹자>입니다. 이 책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맹자가 쓴 글도 있고, 제자들이 정리한 것도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맹자는 모두 일곱 편이고, 각 편이 상하로 나뉘어 있습니다. 뒤에 주자가 대학, 중용, 논어와 한데 묶어 4서로 만들고 나서 유명한 책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인간의 참 모습인가
공자가 살던 시기에도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심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공자는 "인간의 본성은 소로 비슷한데,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는 말을 했을 따름입니다. 본성론은 맹자에 이르러 철하그이 중심 주제로 자리잡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당시의 급격한 사회 변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혈연 관계에 기초한 강력한 통치력을 갖추고 있던 주나라가 후기에 접어들며, 혈연 관계가 점점 엷어지면서 큰 혼란에 빠졌고, 이 틈을 타서 제후들은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끊임없이 벌여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자식을 서로 바꿔서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전국 시대 중기와 후기의 사상가였던 맹자와 순자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관심이 논의의 핵심 주제가 된 것은 이런 사회 변동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맹자 이전에는 어떤 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을까요? 성(性)은 심(心)과 생(生)을 합쳐 만든 글자입니다. 글자대로 풀면, 성의 본래 뜻은 '마음속에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는 도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리적 욕구와 감정이 같이 들어 있습니다. 원시 상태에서 인류가 본 자신의 모습은 도덕적인 면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생리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이 더 자연스러운 본질로 보였을 게 당연합니다. 이 같은 생각은 맹자 무렵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맹자는 여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도덕성을 인간의 본질로 본 맹자의 성선설은 그때까지 내려온 인간의 자기 규정을 뒤엎은 혁명이었습니다.
맹자 당시에 인간의 본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들이 있었을까요? <맹자>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첫째, 본래는 착한 요소도 없고, 악한 요소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둘째, 착해질 수 있는 요소와 악해질 수 있는 요소가 동시에 들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두 견해는 결과적으로 선으로도, 악으로도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채우고 있는 내용을 본다면, 정반대인 셈입니다.
셋째는, 날 때부터 본성이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에 맞서 맹자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고 했습니다. 맹자의 이러한 주장은 공자가 사람의 본질로 내세운 사람다움, 즉 인(仁)을 체계화한 것이라고 평가됩니다.
그러면 맹자의 주장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맹자는 용자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구를 위해 신발을 만들어 준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발 크기를 모른다고 해서 신발 모양을 삼태기처럼 만들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의 발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맹자는 사람의 겉모습에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겉모습만이 아니라, 맛을 보고 소리를 듣고 모습을 보는 데도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외모나 감각 기관에만 공통점이 있을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공통점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도덕적 품성이라는 것입니다.
외모나 감각으로부터 마음의 공통점을 이끌어 낸 것은 뛰어난 유추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비약이기도 합니다. 사실 미각, 청각, 시각 자체는 생리적 본능에 속하는 감각이며, 맛있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소리가 듣기 좋다거나 하는 느낌들은 감각 능력을 통한 결과로서 의식 형태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런데 맹자는 본질적으로 선의 요소가 마음에 들어 있다는 가설을 입에 맛보는 기능이 있다는 생리적 사실과 일치시켰습니다. 이것은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을 하나로 보는 유가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는 증거로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예를 들었습니다. 누구든 길을 가다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즉시 '저런, 저거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황급히 달려가 아이를 구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나중에 어린애를 구해 준 것을 빌미삼아 그 아이의 부모와 사귀어 보려 해서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이나 벗들에게 침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사람들로부터 물에 빠지는 아이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비난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본 순간 생겼던 순수한 마음, 이 마음을 맹자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라고 부르며,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합니다.
맹자는 이런 마음말고도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다고 합니다. 이 마음들을 잘 기르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착해질 수 있는 네 가지 실마리(四端)'라고 합니다. 맹자는 이 네 가지 단서가 사람 마음에 있는 것은 몸에 팔다리 네 개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맹자는 4단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선천적인 요소를 '양지', '양능'이라는 말로도 설명했습니다. 양지 양능이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린 아이가 제 부모를 따를 줄 아는 것처럼,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니고 따져 봐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갖춘 것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맹자의 양지 양능은 뒤에 명나라 때 나온 양명학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맹자의 인간 규정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은 이상과 다릅니다. 악한 행동과 그로 인한 혼란이 꼬리를 물로 일어납니다. 본래 착한 사람들이 왜 악한 행동을 하게 될까요? 그들의 나쁜 행동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맹자는 사람들이 하는 나쁜 짓은 본질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나쁜 행위 자체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맹자는 그 증거로 산을 비유로 들어 말합니다.
본래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무꾼들이 매일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내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풀을 뜯어 먹여서 헐벗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헐벗은 산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산은 처음부터 나무가 없는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산의 본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본성도 매일 나무를 잘라내듯 착한 마음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나쁜 환경 때문에 악한 짓을 하는 것이지, 그것이 본래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맹자가 산을 비유로 든 것은 썩 어울리는 설명은 아닙니다. 하지만 맹자는 환경적 요소에 따라 좌우되는 감정과 욕구를 악의 근원으로 보고, 그러한 힘은 내적인 자발성에 근거하지 않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세워 갔습니다.
군자의 본성과 소인의 본성
맹자가 살던 시대에는 노예부터 귀족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맹자가 본성이 착하다고 한 그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보편적인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중 어떤 계층에 강조점이 있는 것일까요?
물론 맹자가 착하다고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맹자는 분명히 남에게 차마 나쁜 것을 못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했고, 또 4단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맹자의 말 가운데는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보입니다.
입이 단맛을, 눈이 아름다운 빛깔을, 귀가 밝은 소리를, 코가 향기를 좋아하고 팔다리가 편안함을 원하는 것이 본성이긴 하다. 하지만 그 속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命)'이 있기 때문에 군자는 본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맹자는 감각적·생리적인 것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본성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를 군자에 한정짓고 있습니다. 맹자가 부정한 감각적 생리적 본성이란 배고픔, 목마름, 피곤함 같은 것입니다. 배고픔을 의지로 참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각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맹자가 말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란, 배고프다고 느끼는 것 자체는 내 의지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본성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군자입니다. 따라서 군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본성으로 보기도 한다는 말이 됩니다. 맹자는 그런 사람들을 소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군자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의예지입니다. 인의예지는 감각이나 생리적 욕구가 아닌 마음속의 도덕 의지에서 나옵니다. 맹자는 감각 기관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소인이고 마음이 하고자 하는 옳은 방향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군자이며, 감각 기관은 천한 것이고 마음은 귀한 것이라고 합니다.
소인은 일정한 생활 근거가 있을 때는 변치 않는 마음이 있지만,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어지면 마음도 변하는 사람입니다. 군자는 이와 달리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을 때도 마음이 변치 않는 사람입니다. 즉 소인은 자기 밖의 변화에 따라 안이 달라지는 사람이지만, 군자는 밖의 변화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맹자는 군자를 선비, 대인이라는 말로도 부릅니다.
그러면 맹자가 말하는 군자·선비·대인은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지위에 있고 어떠한 역할을 하는 사람일까요? 맹자는 소인과 대인이 사회에서 하는 역활을 다음과 같이 나눕니다.
대인이 할 일이 따로 있고, 소인이 할 일이 따로 있다. 사람이 살아가자면 여러 공인들이 만든 물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만일 그 모두를 반드시 스스로 만들어 쓰게 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을 끌어다가 일에 지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어떤 사람은 몸을 수고롭게 한다고 했다.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사람은 남을 다스리고, 몸을 수고롭게 하는 사람은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다.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남을 먹여 주고, 남을 다스리는 사람은 남에게 얻어먹는 것이 온 세상에 통하는 원칙이다.
대인은 마음 고생을 하면서 남을 다스리고, 그 대가로 남이 생산한 식량을 먹는 사람입니다. 소인은 몸 고생을 하면서 남에게 다스림을 받고,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 사람입니다. 맹자가 본 본성이 착한 사람은, 사실상 통치 지위에 있거나 아니면 통치 지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맹자는 현실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지배 계층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들의 내면에 본질적으로 들어 있는 선의 요소를 완전히 발휘하여 현실의 혼란을 종식시킬 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맹자의 주장에는 지배 계층의 입장에 선 군자·대인·선비의 교화에 의해 세상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한계가 보입니다. 실재로 주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지배층을 군자라고 불렀으며, 피지배층은 소인 또는 민(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춘추 시대의 혼란은 신분 질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신분 질서의 변화는 지배 계층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피지배 계층에서도 엄청나게 심했습니다. 이러한 신분 변화를 통해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난 계층도 많아졌으며, 이들을 일반 백성(民)과 구별하여 소인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맹자가 모든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함으로써 소인과 민까지를 포함시킬 수 있게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피지배 계층인 소인과 민에게 지배 계층인 군자·대인·선비의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 근거를 주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점이 유가가 민중 중심의 묵가 사상과 본질적으로 다른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맹자의 성선설에는 지배 집단이 피지배 집단보다 도덕적으로 뛰어나다는 의미 외에 다른 가치는 없는 것일까요? 물론 맹자의 주장이 후대 정권 담당자들에 의해 지배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쓰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역사상 지배 집단은 언제나 피지배 집단보다 도덕적으로 뛰어나며, 따라서 피지배 집단을 교화할 능력과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리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 맹자 사상의 긍정적인 점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당시는 엄청난 변화의 시대였습니다. 피지배 계층인 민중도 그러한 변화 속에서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맹자는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이전까지는 노동 도구로서만 의미가 있었던 민중에게도 인간의 본질인 선의 요소가 들어 있음을 인정하여, 민중을 도덕적 실현이 가능한 범주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비록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 정도의 의미이긴 하지만, 민중을 주체적 인간으로 파악하려 한 노력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둘째, 맹자는 군자·대인·선비에게 통치의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지배를 합리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도덕 실천을 통한 자아의 완성이라는 책무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정치 사상에서 보이는 것처럼 민중을 위해 지배 계층의 더 많은 양보를 확보해 내려 했습니다.
셋째, 맹자가 살았던 때는 전국 시대 중기였습니다. 당시는 이미 주나라 왕실이 유명 무실해졌고, 그 틈을 타서 힘을 길러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제후들이 큰 세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맹자는 그들 가운데 몇몇에게 천하 통일의 기대를 걸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힘을 길러서 통일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맹자의 생각과 맞지 않았습니다. 맹자는 이런 거싱 모두 이익 추구에서 오는 것이며,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생리적 본성을 중시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배 집단 혹은 지배 집단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본성이 감각적인 부분이 아니라 도덕적인 부분임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유가의 파수꾼
맹자가 살던 시기에 유가는 어떤 계층으로부터도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맹자는 사람들이 대부분 양주 아니면 묵적을 따른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맹자의 비판 의식은 우리 나라 조선 후기에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양 사상의 유입에 대응하는 척사 위정 논리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유가 이론은 지배 집단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뜻이 강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맹자는 전통 질서와 신분제를 부정하는 민중 중심의 이론을 단호하게 배척했습니다.
맹자가 배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크게 세 가기 사상입니다.
하나는 양주의 사상이었습니다. "내 몸의 털 한 가닥을 뽑으면 온 세상이 잘된다고 해도 나는 하지 않겠다"는 말에서 보이듯 양주의 사상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였습니다. 남으로부터 빼앗기지 않지만 결코 남을 위해 희생하지도 않겠다는 사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양주의 사상은 노장 계열의 사유 체계로 봅니다. 이러한 사유는 언제나 지배 집단의 강압에 희생당하기만 하는 피지배 집단의 소극적인 저항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는 일반인의 개성이 존중되지 않는 봉건제 사회였습니다. 전국 시대의 혼란이 봉건적 질서의 붕괴에서 왔다고 보는 유가가 피지배 집단의 개성을 논함으로써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양주의 사상을 큰 적으로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맹자는 양주의 사상을 따지면, 결국 자기 임금을 부정하게 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두번째 배격 대상은 묵자였습니다. 묵자는 지배 집단을 향해 피지배 집단을 똑같이 사랑하고, 이익을 함께 나누자고 외쳤습니다. 게다가 주장만으로 그치지 않고 집단을 통한 사회적 실천으로까지 나아갔습니다. 맹자는 묵자의 무차별한 사랑은 자기 아버지를 남의 아버지와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기 아버지에 대한 부정이 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세번째 배격 대상은 허행으로 대표되는 농가였습니다. 그들은 지배 계급이 노동하지 않는 것을 반대하면서, 임금도 백성과 함께 농사지어 먹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맹자는 그들이 농사를 직접 짓기는 하지만 모자나 솥은 자신들이 생산한 곡식과 바꿔 구입한다는 데 착안하여, 지배 집단도 분업의 논리에 따라 다스리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맹자가 주 공격 대상으로 삼은 사상들은 모두 지배 집단에 불리한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맹자 사상의 또 다른 모습인 보수적 성격을 볼 수 있습니다.
참다운 임금의 길
맹자는 전국 시대의 혼란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왕도 정치의 실현이라고 보았습니다. 맹자의 왕도 정치 이론은 성선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성선의 근거는 하늘에 있습니다. 왕도 정치는 도덕의 근원인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일인 동시에 하늘로부터 받은 인간의 착한 본성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인류는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자연의 꼭대기에 하늘을 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맹자의 하늘은 단순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도덕의 근원이었습니다. "사람이 제 마음을 다하면 자기의 본성을 알게 되고, 자기의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고 한 말은 이러한 맹자의 생각을 잘 나타내 줍니다.
하늘이 도덕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는 이론으로도 연결됩니다. 맹자는 도덕의 근원인 하늘이 덕이 많은 사람을 택해 임금을 시킨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통치자는 하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도덕에 바탕을 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착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 본성을 잘 기르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임금은 어진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잘 기르면 왕도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왕도 정치는 덕으로 하는 정치이고, 그 반대는 힘으로 하는 패도 정치입니다. 사실 고대부터 오늘까지 어떤 통치 집단도 국가와 사회와 민족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집안을 위해 일한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힘으로 다스리는 독재 권력도 언제나 민주를 가장합니다. 맹자가 주장한 참다운 임금의 길은 바로 이 같은 통치 집단의 허위 의식에 대한 지적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맹자가 양나라 혜황을 만났다. 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선생께서 천리길을 멀다 않고 저희 나라를 찾아 주셨으니 저희 나라에 무슨 이로운 일이 있게 될까요?"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임금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로울까를 따지면 벼슬아치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안에 이로울까를 따지게 되고, 선비나 일반 민중들은 어떻게 하면 내게 이로울까를 따지게 됩니다. 그러면 나가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맹자는 철저하게 이익을 배격했습니다. 심지어 맹자는 전쟁이 이롭지 못하다고 설득함으로써 초나라와 진나라의 싸움을 말리려 했던 송경이라는 사람을 보고,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설득해서는 안되며 오직 인과 의로써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 인과 의에 기초한 왕도 정치란 어떤 모습일까요?
양혜왕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온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어떤 지방에 흉년이 들면 그 곳 뱅성들 가운데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다른 지방으로 옮겨 주고, 거동이 어려운 노약자를 위해서 곡식을 날라다 줍니다. 다른 지방에 흉년이 들어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합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저만큼 백성들에게 마음을 쓰는 임금이 없는데, 어째서 이웃 나라 백성이 줄지 않고 우리 나라 백성이 늘지 않는 것일까요?"
당시 제후국들은 독립적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모두 주나라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언제라도 국경 통과세만 내면 다른 나라에 가서 살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 백성들을 크게 위한다는 소문이 나면 그 나라로 백성들이 몰리는 것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느는 것은 노동력과 군사력이 느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한 나라를 만들어 천하를 틀어쥐려는 야심을 가진 양혜왕이 백성이 늘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맹자는 양혜왕의 고민에 찬 질문에 대해 첫 마디부터 비꼬는 태도로 응수합니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까 제가 전쟁에 빗대어 말씀드리지요. 한참 맞붙어 싸우다가 힘이 달려 갑옷도 내던지고 무기를 질질 끌면서 달아나는데, 어떤 자는 쉰 걸음 도망가서 멈추고 어떤 자는 백 걸음 도망가서 멈추었습니다. 쉰 걸음 도망간 자가 백 걸음 도망간 자를 비웃으면서, '야, 이 비겁한 놈아!'하면 어떻겠습니까?"
"말도 안 되지요. 백 걸음이나 쉰 걸음이나 달아난 것은 마찬가지지요."
양혜왕은 맹자의 논리에 걸려들었습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맹자는 흐르는 물처럼 자기 주장을 펴 나갑니다.
"그런 이치를 아신다면 이웃 나라보다 백성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요. 백성들의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다면, 곡식이 다 먹지 못할 정도로 많아지겠지요. 가는 그물로 어린 물고기까지 잡지 못하게 한다면, 다 먹지 못할 만큼 물고기가 많겠지요. 적절한 때에만 나무를 베어 내게 한다면, 재목이 쓸 수 없을 만큼 많아지겠지요. 이렇게 하면 산사람이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며, 죽은 사람 장사지내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왕도 정치의 시작입니다.
백성들에게 집 주변 땅에 뽕나무를 심게 하면 50세 이상 노인들이 비단옥을 입을 수 있고, 닭·돼지·개 같은 가축의 번식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면 70세 이상 노인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겠지요. 한 가구가 농사지어 먹을 수 있을 만한 땅에 농번기의 일손을 빼앗지 않는다면, 식구들이 굶주리지 않겠지요. 학교 교육을 잘 실시하고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를 되풀이해서 가르치면, 머리 허연 노인들이 짐을 진 채 길을 가지 않게 되겠지요. 이렇게 하고서도 왕 노릇 하지 못한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위의 대화에서 보았듯이 맹자가 무조건 도덕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제적 토대가 없는 왕도 정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민중의 삶을 확보해 주고 나면 왕 노릇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정전제를 실시하여 그 땅에서 난 수확에 대해 10분의 1의 토지세만 걷어야 한다는 견해와, 점포세와 국경 통과세를 폐지 하자는 명자의 주장들은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안이었습니다.
음악도 여자도 제물도 민중과 함께
맹자가 하루는 제나라 성왕을 만나 물었습니다.
"어떤 신하에게서 들으니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는 데 사실입니까?"
왕은 얼굴이 벌개지며 부끄러운 듯 대답했습니다.
"사실 제가 좋아하는 음악은 유행가입니다."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습니다. 본래 음악이란 가곡이나 유행가나 원리는 같으니까요. 그런데 혼자서 음악을 즐기는 것과 남과 더불어 함께 즐거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좋을까요?"
"그야 여럿이 즐기는 게 좋겠지요."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즐기는 것과 몇 사람이 즐기는 것은 어떨까요?"
"많은 사람이 즐기는 것이 좋겠지요."
제선왕도 맹자의 말에 말려들었습니다. 맹자는 신이 나서 거침없이 하고 싶은 얘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음악을 가지고 얘기해 보지요.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는데 배성들이 듣고는 머리를 흔들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우리 임음 음악 되게 좋아하지. 우리는 이 지경으로 사는데 말야'라고 말합니다. 또 왕께서 사냥을 나가는데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머리를 흔들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우리 임금 사냥 되게 좋아하지. 우리는 이 지경으로 사는데 말야'라고 말합니다.
또 반대로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는데 백성들이 듣고는 좋아서 벙글대며 '우리 임금 다행히 건강하신가 봐. 어쩌면 저리도 연주를 잘 하실까'라고 말합니다. 또 왕께서 사냥을 나가는데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좋아서 벙글대며 '우리 임금 다행히 건강하신가 봐. 어쩌면 저리도 사냥을 잘 하실까'라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왕께서 백성과 함께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며칠 뒤 제선왕이 다시 맹자를 보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왕도 정치를 할 수 없나 봅니다. 제게는 재물을 좋아하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어려움이 되겠습니까? 재물 좋아하는 것을 백성과 함께 하십시오. 떠나는 사람이 언제나 임금 창고의 곡식을 가지고 떠날 수 있고, 그대로 머물러 사는 사람들이 언제나 임금 창고의 곡식을 먹을 수 있으면 됩니다."
"아, 그렇겠군요. 그런데 제게는 또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제가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게 무슨 흠이 되겠습니까? 여자 좋아하는 것을 백성과 함께 하십시오. 그래서 시집 못 간 처녀와 장가 못 간 총각이 없게 하시면 됩니다."
며칠 뒤 제선왕이 맹자를 보고서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터덜대면서 물었다.
"문왕의 사냥터가 사방 70리였다는 말이 정말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사냥터는 사방 40리밖에 안 되는데도 백성들이 넓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문왕은 사냥터가 사방 70리나 되었지만 그 사냥터를 백성과 함께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성들은 오히려 좁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왕께서는 사방 40리의 사냥터를 혼자서만 쓰면서 그 안에 들어와 사냥을 하거나 나무를 베면 벌을 줍니다. 이것은 나라 안에 사방 40리짜리 함정을 파 놓은 것과 같으니, 어찌 넓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맹자의 왕도 정치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보면, '민중에 의한' 정치나 '민중의' 정치는 아니었고 단지 '민중을 위한' 정치였습니다. 하지만 2000여 년 전의 절대 군주들에게 백성들에 대한 양보를 요구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맹자는 군주들을 향해 민중을 위하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이 백성이고 그 다음이 국가이며 가장 가벼운 것이 임금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 것이라고 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덕이 없는 임금, 즉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임금은 갈아엎어야 한다고까지 했습니다.
백성이 따르지 않는 임금
맹자는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는 사람이 왕이 될 수 있으며, 그 천명은 덕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천명을 받았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맹자는 민중이 따르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요임금이 순에게 왕위를 주었다. 그러자 순은 요의 아들이 있는데 자신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숨어 버렸다. 백성들이 모두 순을 쫓아갔다. 순은 신하인 우에게 왕위를 주었다. 우도 순의 아들이 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숨어 버렸다. 역시 백성들이 우를 쫓아갔다. 우도 신하인 익에게 왕위를 주었다. 익 또한 우의 아들이 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숨어 버렸다. 그러나 백성들은 익을 쫓아가지 않았다.
맹자는 백성이 따르지 않는 임금은 이미 천명이 떠난 임금이며 따라서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맹자는 그런 점에서 하나라를 무너뜨리고 은나라를 세운 탕임금의 혁명이나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혁명을 긍정했습니다. 그는 탕왕이 하나라의 폭군 걸을 죽은 것이나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 주를 죽인 것은 못된 사나이 하나를 죽인 것일 뿐, 신하가 임금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맹자는 또 이 혁명 전쟁이 아주 치열해서 피가 강물처럼 흘러 쇠절구공이가 둥둥 떠내려갔다는 옛 기록을 부정합니다. 백성들이 따르는 임금이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한 사나이를 치는데 전쟁이 심했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맹자의 혁명론에는 한 가지 필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혁명 주체에게 민중의 뜻에 근거한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봉건 왕조의 교체는 언제나 혁명이냐 아니냐의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5·16rhk 12·12의 주체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혁명이라고 강변하지만, 역사가 준엄하게 군사 쿠테타로 규정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맹자의 혁명론은 지배 집단에게는 반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임금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주장이었습니다.
꿋꿋함은 어디서 오는가
<맹자>에 나타난 맹자의 모습은 당당합니다. 그런 꿋꿋함은 어디서 왔을까요?
맹자는 제자 공손추와의 대화에서 용기 있는 옛 사람으로 북궁유와 맹시사, 그리고 증자를 듭니다. 북궁유는 바늘로 눈을 찔리면서도 깜박거리지 않고, 모욕을 당하면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반드시 보복을 하는 사람입니다. 맹시사는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이길 것처럼 대드는 사람입니다. 증자는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보아 거리낌이 없으면 천만 명과도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용기를 평가하고 나서 맹자는 자기가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고 덧붙였습니다. 맹자의 꿋꿋함은 바로 호연지기에서 온 것입니다.
호연지기가가 무엇이냐는 공손추의 질문에 대한 맹자의 첫 마디는 "설명하기 어렵구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호연지기가 온 세상을 꽉 채울 수 있는 도덕 기운임을 밝힙니다. 호연지기는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실천을 통해 쌓은 정당함에서 나오는 기운입니다. 사실 맹자 이전의 기에 대한 이해는 대자연의 기운이나 인간의 혈기와 같이 자연적인, 또는 생리적인 것이었습니다. 맹자는 호연지기를 도덕적 실천을 길러진 도덕 기운으로 파악함으로써 기 개념을 확대 발전시켰습니다.
호연지기를 가진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맹자는 세상에 살면서 올바른 자리에 서서 도를 실천해 가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귀로 유혹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고, 위협이나 무력에 굴복하지 않으며, 가난 같은 어려운 상황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맹자는 이런 사람을 대장부라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강한 자기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선이며 그 근거는 하늘이라고 하면서, 왕도 정치를 통해 인간의 선한 본성을 사회에 실현해 보려고 했습니다. 맹자는 자기 마음을 다함으로써 사람의 본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을 하늘의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맹자가 바라본 사람은 사회를 떠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존재이며, 그 경우 강한 힘은 인간 본질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한다고 본 것입니다. 맹자의 사상은 후대 유학자들의 참된 표본이 되었으며, 지배 계급에게는 항상 경종이 되었습니다.
순자
화려한 삶, 어두운 죽음
순자는 공자와 맹자를 이어 유가 철학을 발전시킨 사람입니다. 순자가 언제 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대체로 기원전 298년 무렵에 나서 238년 무렵에 죽은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기원전 298년은 공자가 죽은 지 200년쯤 뒤이고, 맹자가 죽은 무렵입니다. 당시는 혼란이 극에 이른 전국 시대 말기였지만, 한편에서는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순자의 이름은 황(況)이고, 자는 경(卿)입니다. 순(筍)자가 손(孫)자와 발음이 비슷해서 손경이라고도 불렀는데, 경이란 벼슬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기도 했기 때문에 순자를 귀족 출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국 고대의 가장 믿음직한 역사서인 <사기>는 순자의 일생을 50세 무렵부터 적고 있습니다. 50세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젊은 시절의 순자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이 점은 순자에 대한 뒷 사람들의 평가가 별로 긍정적이지 못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순자는 공자나 맹자의 삶과 비교해 볼 때 살아 있을 당시 상당한 영광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순자는 조나라에서 태어났으며 50세 무렵에 제나라로 갔습니다. 당시 제나라로 모여든 학자들을 직하 학파라고 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수자는 직하에서 가장 덕망 있는 학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직하의 최고 사상가가 맡는 좨주 벼슬을 세 번이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좨주는 대부 정도에 해당하는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술을 부어 제사하는 일을 담당하는 벼슬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덕망 있는 사람에게 맡겨지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순자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로부터 참소를 당한 순자는 제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갑니다. 진나라는 당시 최강대국이었으며, 부국 강병을 주장하는 법가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덕을 강조하는 순자의 사상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그 뒤 순자는 조나라에 잠시 머물렀다가 나중에는 초나라의 실력자 춘신군 밑에서 난릉이라는 지역을 맡아 다스리게 됩니다.
난릉은 사방 백 리 정도의 작은 고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가 순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본 시기였습니다. 춘신군이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에서 살해당하자 순자는 그대로 난릉에 정착합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짓는 일로 여생을 보냅니다.
순자의 제자 가운데서 법가 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세운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한 이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한비자와 이사를 유가 사상가로 보지 않고, 순자를 법가 사상가로 보지도 않습니다. 순자는 유가와 법가의 갈림길이었던 셈이며, 순자의 현실 지향적 사고가 법가 사상의 모체가 된 것입니다. 덥스는 순자를 원시 유가를 틀에 구어 낸 사람이라고 평하였습니다. 순자가 예를 강조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구체화시킨 점에 대한 평가일 것입니다. 이런 평가는 순자의 사상 속에 현실 지향적 측면이 들어 있음을 잘 지적한 것입니다. 사실 후대 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순자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유를 통해 유가의 본질인 인본주의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순자는 사후에 몹시 불행해졌습니다. 죽은 뒤에 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송나라 이후 성리학자들은 공자의 맥을 정통으로 이은 사람으로 맹자를 꼽았고, 그 뒤로는 도통이 끊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평가가 나온 근본적인 이유는 순자가 인간의 본질을 악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 현대로 들어오기 직전까지 순자는 사상사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습니다.
순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책이 <순자>입니다. <순자>는 본래 323편이었다고 하는데, 한나라 때 유향이 32편으로 정리했습니다. 책의 편제는 대화체가 많은 논어나 맹자와는 달리 논문식으로 되어 있으며, 제자들의 기록이라고 짐작되는 일부분을 빼면 대부분 순자가 직접 쓴 글로 보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기> 가운데 많은 부분을 순자가 지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증자가 그의 문인들과 함께 지었다고 하는 <대학>도 순자의 글로 보기도 합니다. <순자>에 들어 있는 대부분의 글은 표현이 소박하며 꾸밈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글의 전개 방식의 체계적이며, 비교적 논증이 세밀합니다. 이 점은 순자의 철학이 객관적 방법론 토대 위에 서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악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악하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면, 착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이 점은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을 선으로 규정한 철학자가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어떤 사람이 인간의 본성을 착하다고 생가가하는 것과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 자신이 과연 착하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는 문제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악한 사람인간의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기 마련입니다. 아마 이런 탓이었을까요? 순자는 생존 당시를 빼놓고는 역사적으로 별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송나라 이후의 유학자들은 순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순자는 무슨 근거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것일까요? 순자도 맹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선천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본성이란 배우거나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도덕적인 측면에 주목한 맹자와 달리 순자는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주목했습니다. 이 욕구는 귀가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눈이 좋은 빛깔을 보고 싶어하는 감각 기관의 이기적 욕구와도 통합니다. 순자는 이러한 생리적 욕구에 바탕한 이기심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욕구대로 간다면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순자가 볼 때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들이 악한 행위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고 해 봅시다. 피곤하면 쉬고 싶은 게 인간의 생리적 욕구입니다. 그 욕구대로라면 아버지와 자식 사이라도 일을 하다 피곤해지면 서로 상대방에게 남은 일을 맡기고 자기는 얼른 들어가 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실제 행동은 반대로 나타납니다. 서로 자기가 남은 일을 다 할테니 먼저 들어가 쉬라고 합니다. 이처럼 스스로 자신의 악한 본성을 거스르는 착한 행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순자는 인간의 마음 작용을 성(性), 정(情), 려(慮), 위(僞)의 4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이 4부분은 마음이 움직이는 순서이기도 합니다. 이 4단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펴봅시다.
첫 단계인 성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으로서, 삶의 자연스러운 본질이자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배고프면 먹고 싶고, 목마르면 마시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은 생리적 본성입니다.
두번째 단계인 정은 밖에 있는 사물들과 만나서 생기게 되는 감정입니다. 좋다, 나쁘다, 기쁘다, 노엽다, 슬프다, 즐겁다 하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세번째 단계인 려는 구체적인 감정이 생긴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의 사고 작용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네번째 단계인 위는 선택이 끝난 후 실행해 나가는 의지적인 실천입니다.
위에서 말한 4단계를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해서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가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본성은 끊임업이 먹고 마시고 싶다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입니다. 그때 떡과 음료수를 본다면, 입에 침이 고이면서 저 떡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음료수를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감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당연히 먹을 자격이 있는데도 누군가가 부당하게 먹지 못하게 한다면, 노여워질 수도 있고 슬퍼질 수도 있습니다. 또 내게 먹을 차례가 돌아오면, 기쁘다 즐겁다 하는 감정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본성과 감정대로 움직이지만은 않습니다. 내 곁에 나보다 더 불쌍한 어린아이나 노인이 있다면 고민에 빠질 것입니다. 모른척하고 나 혼자 먹어 버릴 것인가, 아니면 나누어 먹을 것인가? 먹을 것이 많지 않으니까 그냥 다 주어 버릴 것인가? 만약 그 자리에 주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음식들이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허락을 받기 위해 주인이 올 때가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먼저 먹고 볼 것인가?
이런 고민의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습니다. 나 혼자 다 먹어 버릴 수도 있고, 불쌍한 어린이나 노인과 나누어 먹든가 다 주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고, 그냥 먹고 달아나 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나 혼자 다 먹어 버리거나, 주인이 오지 않더라도 그냥 먹고 달아나는 것이 본성에 충실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본성의 욕구와 반대 방향으로 행동을 선택하고 굳센 의지로 본성을 억누르면서 참아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참는 작용이 순자가 마음의 네번째 작용으로 파악한 위입니다.
사람들의 심리 상태에 대한 순자의 분석은 심리학자를 방불케 합니다. 순자는 본성대로 가면 결과가 악이고,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적 실천대로 가면 선이기 때문에 성은 악이고, 위는 선이라고 합니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았다고 해서 본성대로 살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의지적 실천을 통해 본성이 가져올 악한 결과를 변화시켜 갈 것이냐가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순자의 철학이 갖는 가치는 위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순자의 철학은 의지에 기초한 실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라는 글자를 한자 사전에서 찾아보면 거짓이라는 뜻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위자의 의미를 거짓이라는 뜻으로 새기면 순자의 철학은 죽습니다. 여기서의 위는 사람 인(人)과 할 위(爲)를 합쳐 놓은 글자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 즉 의지적인 실천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순자의 철학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었으며, 그 속에는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착하다고 한 맹자의 주장은 본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사람이 타고난 본성과 후천적인 의지에 의한 노력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이빈다. 그리고 맹자의 말대로 본성이 본래 착한 것이라면, 현실의 인간은 대부분 태어나면서 바로 자신의 착한 본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셈이라고 비판합니다. 또 인간이 본래 착한 존재라면 애초부터 훌륭한 임금이나 좋은 제도 따위는 필요가 없게 된다고도 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맹자의 인의 도덕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을 들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주장의 근거를 인간 내면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는 현상에서 출발하여 인간 내면으로 거슬러 들어가서 본성이 악하다는 규정을 내립니다. 순자는 사회가 잘 다스려지는 상태는 선이고, 혼란한 상태는 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실은 혼란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적 혼란은 인간의 이기적 욕구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순자는 맹자와 달리 선악을 가르는 기준을 인간 외적인 현실에 두었습니다.
맹자는 모든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강조점은 군자에게 두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생리적인 면에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생리적인 면을 본성으로 보는 사람들은 소인이고, 군자는 도덕성만을 본성으로 본다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사실상 군자의 도덕성만을 인정한 것이며,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는 도덕성에 근거한 군자의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토양만을 인정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순자는 어떨까요? 순자가 본래부터 악하다고 한 그 본성은 누구의 본성을 가리킬까요?
순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합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의 표본이었던 요순의 본성과 가장 악한 사람의 표본이었던 걸임금이나 도척의 본성이 같다고 보았습니다. 순자가 같다고 본 본성은 당연히 생리적·감각적인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도덕성은 본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부차적인 노력인 셈이 됩니다.
물론 순자도 맹자처럼 군자와 소인을 나눕니다. 그렇다면 이런 구별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요? 순자는 사람의 성품과 지능,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은 군자와 소인이 같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것을 구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소인은 본성이 하고자 하는 욕구를 그대로 따라가지만, 군자는 교육과 예를 통해 절제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의지적인 노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순자가 그러한 의지적인 노력을 제도화하려고 한 것이 예였습니다.
인간의 홀로서기
당시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정치와 가장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하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이 덕이 가장 높은 사람을 뽑아서 통치를 맡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진 임금이 나온 것도 하늘의 뜻이고, 포악한 임금이 망한 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상 지배 권력이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일반 민중들은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재해나 일식, 월식 같은 급작스러운 자연 현상의 변화가 보이면 하늘로부터 다스림을 위임받은 임금들의 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보았고, 그래서 하늘에 빌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순자는 인간과 하늘이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합니다. 잘 다스려지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다만 통치자가 하기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연 현상은 자연 현상일 뿐이고, 인간 행위는 인간 행위일 뿐입니다. 이러한 순자의 이해는 하늘을 도덕 근원으로 이해한 맹자와 전혀 다릅니다. 순자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하늘로부터 인간을 독립시켰습니다.
순자는 하늘에 빌고 매달리는 행위를 비웃었습니다. 기우제를 지내니까 비가 왔다고 합시다. 순자는 이런 일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는데도 비가 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낮과 밤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변하는 것고 인간의 삶과 인과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인간을 하늘과 대등한 자리로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순자는 기우제 같은 것도 아주 의미가 없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제례와 상례 그리고 점을 치는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자가 이런 일에 대해 의미를 둔 것은 미신을 믿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순자는 이런 행위들에 대해 문화적인 기능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였습니다. 일반 민중들은 그런 일이 귀신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식인들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삶을 장식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일반 민중들에게까지도 상례와 제례가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순자는 상례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밝히고 죽은 이를 슬픔과 존경으로 따나 보내는 것으로,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꾸미는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제례와 대해서도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산 사람의 감정을 꾸미는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순자는 사람들에게 있는 지성과 감정을 다 인정한 셈입니다. 지성적인 판단으로 보면 귀신이란 없으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감정의 측면에서 보면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불안한 감정이 지나치면 아무것에나 의지하려는 미신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슬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순자는 지성과 합리를 강조했지만, 인간의 이런 정서적인 부분도 그냥 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 예식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고 순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제사, 점, 기우제 등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순자는 본질적으로 하늘을 자연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하늘은 사계절의 변화를 보이는 기계적인 하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은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자료를 제공해 주는 존재입니다. 그 가운데 사람이 있는 것이며, 사람은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늘, 땅과 대등하게 만물의 변화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순자의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에 대한 강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과의 관련성을 부정한 것은 프로메테우스처럼 하늘에 맞서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늘로부터 벗어난 인간을 세우는 힘은 무엇일까요? 순자는 결국 그 힘을 인간 자신에게서 찾았습니다. 앞에서 본 의지적인 노력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순자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하늘의 뜻에 맡겨 놓고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데서 벗어나, 인간이 반드시 하늘을 이겨야 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내 놓았던 것입니다. 순자의 철학은 운명론에 대한 부정이었고 인문 정신의 극치였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순자의 이런 점에 주목해 유물론 철학의 창시자라고 평가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규범 : 예
순자는 질서 잡힌 사회는 좋은 것이고 혼란스런 사회는 나쁜 것인데, 인간이 타고난 본성대로 가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악한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적 행위를 통해 질서 있는 사회로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의지적인 행위를 제도화한 것이 예입니다. 그는 예에 의한 통치를 강조했습니다.
순자는 인간이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물건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혼자서 그 여러 가지 물건들을 일일이 만들어 가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와 따로 떨어져 혼자 살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까닭입니다. 순자는 또 사람들이 힘센 것으로 따지면 소를 따를 수 없고, 달리기에서는 말을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말과 소를 부리면 살 수 있는 까닭은 사회 조직을 이루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순자는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도 화합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모두가 화합하여 하나가 되면 사회의 힘이 풍부해지고 강해지며 그 결과로 어떤 것이든 이겨낼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제물은 부족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서로 더 많이 갖기 위해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다투지 않고 화합하게 할 수 있는 통제 수단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예입니다. 순자는 사람에게 예가 없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의 구분 자체는 자연적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분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아껴줌은 인위적인 노력입니다.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이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순자는 예를 통해 인간의 행위를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규제하려 하였습니다. 이 경우 예를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최대한 고르게 채우기 위한 방법인 셈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의식과 예절을 통해 사람들의 감정을 순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요청되는 행위 규범인 예의 제도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요? 예 자체는 의지적 노력을 구체화시킨 것일 뿐 인간의 본질은 아닙니다. 따라서 타율적인 규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자는 구체적인 예의 제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이라고 했습니다. 성인이란 과거의 훌륭한 임금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회는 항상 바뀌는 것이고, 예는 언제나 구체적이며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사회가 바뀌면 여기에 따라 구체적인 예의 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순자는 예가 바뀐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핵심은 현실 중시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는 변법이 행해지던 사회였고, 변법의 생명은 그 이전의 제도와 예법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가의 시의성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떠한 제도도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 정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순자의 현실 중시 관점은 복고적인 모습을 보였던 맹자의 관졈과 다릅니다. 순자는 적어도 현실 중시, 아니면 미래 지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과거에 만들어진 예의 제도만 강조한다면 권위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권위적의는 변화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청조적인 지성을 묵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순자는 예의 제도가 바뀔 수 있다고 봄으로써 예의 탄력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예전의 훌륭한 임금들이 만들어 낸 예의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또 누구일가요? 순자는 오늘날의 임금들이 옛 훌륭한 임금들을 이어받아 예의 제도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순자는 예를 만들고, 그 예를 가지고 남들을 가르치는 역할이 통치자들의 몫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물론 이 경우 그러한 통치자들은 후천적인 인위적 노력을 통해 자신이 타고난 본성의 악한 본질을 극복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힘이 센 군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군자를 의미합니다.
이 같은 순자의 주장에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통치자의 권위를 더 보강해 준 면이 있습니다. 즉 본래의 악한 모습을 극복하고 남을 다스리는 지위에 오른 사람만이 선한 것이며, 그로부터 통치받는 사람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악한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순자가 이처럼 모든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규정하고, 이 악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예에 의한 교육을 성인의 몫으로 돌리고, 그 구체적인 실현을 통치자 한 사람에게만 인정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순자가 살전 시기는 전국 시대 말기입니다. 전국 시대 말기는 양면성이 있었습니다. 한쪽으로는 혼란이 더 심해졌지만 동시에 다른 한쪽으로는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의 가능성은 덕에 의한 것보다는 변법에 기초한 무력에 의해서였습니다. 비록 무력 통일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혼란의 종식인 동시에 법질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순자는 혼란의 원인이 인간의 무한한 욕구에 있다고 보았고, 동시에 통치자의 교화가 무한한 욕구들을 조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순자는 이런 간절한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지금 통치자들이 모두 자신의 생리적, 감각적 욕구대로 전쟁과 침략을 일삼고 있지만, 통일과 동시에 자신의 본성이 더 이상 욕구대로 움직이지 않게 인위적인 의지로 억누르면서 나아가 모든 사람들의 욕구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다스려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같은 통일이 가능한 상황과 통일을 가능하게 할 현실적 힘의 주체에 대한 순자의 기대를 '후왕 사상'이라고 합니다. 후왕이란, 과거의 훌륭한 임금을 뜻하는 '선왕'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현실의 군주를 의미합니다.
후왕 사상을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연관해서 생각해 봅시다. 전국 시대 후반에 올수록 주나라가 임명했던 구 귀족의 몰락이 심화되고, 신진 지주 계층의 성장이 두드러집니다. 아울러 구 귀족들을 돕던 관리들의 세습도 점점 없어져 갔습니다. 따라서 그나마 지탱되어 오던 구제도나 문화 유습은 급속히 무너져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같은 사회 변화는 모든 제도의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라 해도 도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순자에게 과거의 제도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강한 현실 의식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후왕 사상이었습니다.
후왕은 현실적으로 철저한 세습제의 부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순자는 말한 후왕은 지금 있는, 또는 앞으로 올 군주를 의미합니다. 순자는 주나라의 통치가 이미 무너졌다는 현실 긍정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의지적인 노력으로 극복하고 동시에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군주를 후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의 통치가 피치자 모두의 생리적·감각적 욕구를 잠재우고 선왕의 훌륭한 정치를 현실에 맞추어 되살려 낼 수 있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순자가 이처럼 사회의 통제 수단으로 강조한 예는, 한비자와 이사에 의해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생각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하지만 법가 사상은 순자의 예에 대한 생각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병으로 치면 예는 사전 예방이고, 법은 병에 걸린 다음에 하는 치료입니다. 또 순자는 예의 제도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법가 사상이 말하는 법은 불변이어야 했습니다. 순자의 후왕 사상 또한 신진 지주 계층에서 올라 온 당시 모든 임금들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 되어 후대 통일 국가의 통치자를 옹호하는 이론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폭군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습적 군주들의 권위에 대한 부정은 곧 폭군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습니다. 순자는 서민도 재상이 될 수 있고, 왕이나 귀족들도 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당시는 이미 이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순자는 군주란 민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민중의 뜻을 거스르는 폭군은 혁명의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폭군을 길길이 뛰는 난폭한 말이나 철모르는 갓난아기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배를 띄우는 물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위하지 않는 군주는 물이 배를 뒤엎듯이 혁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순자의 혁명론은 맹자의 혁명론과 다릅니다. 맹자의 혁명론도 민중이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민중의 뜻에 근거를 둔 것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늘의 뜻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하늘을 끊어 버렸습니다. 순자의 혁명론은 직접적인 민중의 의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대의멸친(大義滅親)
위(衛)나라 대부 석작은 아들 석후(石厚)를 가만히 불렀다.
“너는 요즘 누구와 교유하고 지내느냐.”
“공자 주우(州旴)와 친하게 시귀고 지냅니다.”
“당장 관계를 끊어라!”
“예에?”
“주우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느냐?”
“총명하고 활달하며, 무술을 좋아해 위나라의 큰 인재가 될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잔인하고 거칠다. 무엇보다 그는 역심을 품고 있는 자이다.
그가 반역을 하게 되는 날 너 역시 반역의 무리로 엮여들어 처형될 게 뻔하다. 알아 듣겠느냐?”
그러나 석후는 발칵 화를 내었다.
“아버지, 그런 식으로 인간을 보지 마십시오!”
“무어라?”
“우리들 세대는 우리들의 식(式) 이 따로 있는 법입니다. 사람 사귀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아버지와 의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주우공자와는 친교를 끊지 않습니다!”
그런 후 석후는 발딱 일어나 밖으로 휭하니 나가버렸다.
'저녀석의 내일이 암담하구나!'
이튿날 아침 일찍 석작은 위왕 장공을 뵈러 입궐했다. 애첩의 몸에서 태어난 주우의 난폭함을 간하기 위해서였다.
“소신이 아는 바로는, 자식을 귀여워한다는 것은 올바른 길을 가르쳐 나쁜 길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주우 얘기요?”
“그렇습니다.”
“그의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거요?”
“거칠고 교만하며 사치스럽고 음탕하며 잔인합니다.”
“그대가 말하는대로 라면 주우는 천하의 최고 못된 놈이겠구려.”
“그의 성격이 그렇게 형성된 것은 대왕의 총애와 대우가 너무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겠소.”
“만약에 주우를 태자로 책봉하시려거든 일찍 정하십시오.”
“무어요? 그건 또 무슨 논리요?”
“이대로 내버려두면 대왕의 총애를 믿고 화를 불러일으킬까 염려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총애를 받고 교만하지 아니하는 자 없으며, 결국은 비굴해져서 남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바뀌며, 그 원망하는 생각은 굽힐 줄 모르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 주우를 태자로 서둘러 책봉하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군주로서의 아름다운 길을 닦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가 그래도 옳은 길을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오?”
“그 땐 만백성을 위하여 태자에서 폐하셔야지요.”
대부 석작의 간언을 잠자코 듣고 있던 위왕 장공은 불쑥 다른 질문을 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행하는 옳지 못한 길에 무엇이 있겠소?”
“사도(邪道)에는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신분이 낮은 자가 귀인을 방해하는 것이며, 젊은 자가 연장자를 물리치는 것이며, 멀리 있는 자가 가까운 자에게 무관심하는 것이며, 신참이 고참을 앞지르는 것이며, 녹(祿)이 적은 자가 녹이 많은 자를 능가하는 것이며, 옳지 못한 것이 바른 것을 격파하는 일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행해야 될 바른 길도 있겠구려.”
“당연히 있습니다. 군주가 의(義)를 제시하면 신하된 자는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이며, 어버이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를 다해야 하며,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형을 존경하는 것이 여섯가지의 정도(正導)라 합니다.”
“결국은 올바른 도를 행하지 아니하고 나쁜 길을 가는 일은 화를 불러 일으킨다는 얘기 아니오?” “그렇습니다. 군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가급적 화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를 불러 일으키는 일을 한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느끼는 바가 크오. 그러나 주우를 태자로 책봉하지는 않겠소!”
간언을 마치고 대궐에서 물러나오던 석작은 속으로 탄식했다.
'왕께서 내 말을 듣지 않으시니, 이로 인해 위나라에서는 피바람이 일겠구나!'
장공은 주우를 내치고 완(完)을 태자로 책봉했다. 또 다른 애첩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가 곧 환공이다.
석작은 자신의 시대가 끝난 것을 알아차리고 대부 벼슬을 내놓고는 들어 앉아버렸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석작은, 주우가 반란을 일으켜 환공을 죽이고 대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군!'
다시 몇 해 지나고서였다. 대부 중궁이 석작을 찾아왔다. 주우의 정치가 염려스러워 자문을 얻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보십니까. 주우가 군주로서 훌륭하게 지탱해 낼 것 같습니까?”
석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질렀다.
“나는 덕으로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말은 들었지만 무력(武力)을 믿고 잔인한 일을 범하며 백성을 다스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소!”
“그 점이 몹시 염려됩니다!”
석작은 중궁에게 다시 말했다.
“무력을 믿고 잔인한 일을 범하며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마치 실을 풀려다 오히려 엉클어뜨리는 일과 같소이다! 그런데 주우는 무력을 믿고 잔인한 짓을 예사로 저지르고 있소. 두고 보시오. 백성들이나 대신들이나 왕족들까지도 그를 찬성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 주우는 배반당할 것이오.”
“과연 그렇게까지 될까요?”
“무력은 불과 같이 가공스러운 것이오. 불을 처리하지 않으면 오히려 자기 몸을 태우는 결과가 온단 말이오. 주우는 자신의 군주를 시해하고 백성들을 잔인하게 부리고 있소. 이 중요한 시기에 군주로서 명심해야 할 덕행에 몰두하지 아니하고, 무도한 짓을 감행해 엉뚱한 야망이나 성취시키려 날뛰고 있으니, 결국은 주우는 망하고 말 것이오!”
중궁은 하릴 없이 물러갔다.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석후가 석작을 찾아왔다.
“왕실 친척들이나 대신들은 물론 백성들까지도 주우를 따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왕으로서의 주우의 지위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까요?”
그 순간 석작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다! 대의멸친이다! 나라를 위해서는 부자지간의 정도 돌보지 않겠다!'
그렇지만 석작은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신하로서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뜻인가.”
“오래 전부터의 친구로서 우정을 다짐하는 뜻도 있습니다.”
“그럴듯한 생각이다. 그러니까 만백성들이 주우를 군주로서 인정하지 않으니, 그를 군주로서 인정받는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는 얘기지?”
“그렇습니다. 묘책이 없을까요?”
“있지. 꼭 한 가지 방법이 있지.”
“가르쳐 주십시오!”
“주나라 천자(天子)를 뵈어라.”
“뵈어서는요?”
“즉위를 인정받으면 주우의 어려운 처지도 저절로 풀릴 것이다.”
“그럴 것 같습니다. 한데, 천자는 어떻게 만나 뵙지요?”
“천자께서 가장 신임하는 군주부터 만나 그에게 부탁하면 된다.”
“그가 누구입니까?”
“진(陳)나라 환공이다. 환공이야말로 지금 가장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는 분이다. 다행히도 지금 우리 위나라는 진나라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니, 가서 부탁하면 진의 환공은 반드시 주우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
“가르쳐 주신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우를 뫼시고 가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게 되어 석후는 위의 군주 주우가 주나라 천자를 만나러 갈 때, 멋모르고 동행했다.
주우와 석후를 진나라로 떠나 보낸 석작은 가만히 사람을 시켜 진왕에게 올리는 편지를 가져가게 했다.
-우리 위나라는 작은 나라입니다. 더구나 저는 늙어서 정무를 처리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권세를 당할 수도 없습니다. 얼마 뒤에 도착하여 대왕을 알현하게 될 주우와 석후는 군주를 시해한 무지막지한 놈들입니다. 바라건대, 놈들이 도착하거든 즉시 처형해 주시어 대의(大義)를 바로잡아 주십시오.
멋모르고 진나라로 들어선 주우와 석후는 진의 병사들에 의해 속절없이 묶였다.
“어? 이거 왜 이러나!”
주우가 소리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둘은 진왕 앞으로 끌려갔다.
“이놈들, 너희들이 왜 포박당했는지 그 이유를 알겠느냐!”
주우가 대꾸했다.
“모르겠소.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오! 나는 위나라의 왕이오. 우리 위나라와 그대의 진나라는 사이좋게 지내온 나라가 아니오. 나에 대한 대접이 이럴 수는 없소!”
“왕이라고? 대접이라고? 네놈은 왕이 아니라 주군을 시해한 역도가 아닌가!”
“도대체 나를 묶으라고 시킨 장본인이 누구요?”
“충신 석작이다.”
“무어요?”
석후가 비명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네 부친께서 너를 벌주라며 과인에게 부탁하셨다.”
“무슨 근거로?”
“네 부친께서는 네게 사악한 주우와 사귀지 말라고 그렇게도 타일렀거늘 결국 네놈은 주우와 공모해 주군을 시해하고 대역을 범하는 짓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말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라고 부탁했을 리가 없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로구나. 원래 너의 부친 석작은 훌륭한 충신이다. 주우의 대역을 미워한 나머지 그를 치려다가 자기 자식인 석후 네놈도 대역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의를 위해서 너까지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충신이다.”
“용서해 주십시오.”
“세상이 어지러워짐에 따라 도(道)는 타락하고 폭행은 일어난다. 신하로서 군주를 시살하고, 자식으로서 제아비를 살해하는 행위가 곧 그것이다.”
“군주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자는 주우이지 전 아니지 않습니까!”
“그토록 주우와의 우정을 밤낮으로 들먹이던 네놈이 막상 죽을 사정에 처해지자 혼자 살겠다며 벌써 발뺌하는 참인가!”
“주우의 강요에 의해 행동했을 뿐입니다.”
“너의 아비 석작은 순신(純臣)이다. 주군에 대해 딴 마음이 없는 충신을 말한다. 그런데 네놈은 순신의 자식 같지가 않구나. 그래서 너를 베는 것이다. 여봐라, 이자들을 데리고 나가 목을 쳐라!”
[출전:'좌씨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