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노론 집안끼리 혼인
-안동 일대에서 남인이 아닌 노론이나 소론에 속한 다른 집안은 없는가.
“봉화에 ‘버저이(法田)’ 강씨 집안이 유명하다. 족보상 본관은 진주 강씨지만, 봉화의 법전이라는 지역에 오래 뿌리내리고 살았기 때문에 법전 강씨라 부른다. 법전을 경상도 사투리로 ‘버저이’라 한다. 그래서 버저이 강씨라 하는데, 이 집안에서 ‘일당백’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출중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옛날에는 봉화도 안동에 속했는데, 안동 일대의 유명한 노론과 소론을 모두 배출한 집안이 바로 버저이 강씨다.
근래에도 판검사가 10여 명이나 배출됐다. 대법관 강신욱(姜信旭)씨, 국회의원을 지낸 강신조(姜信祚)씨가 바로 버저이 강씨다. 역암(?庵) 강진규(姜晉奎·1817~?)의 후손이다. 강진규는 고종 때 예조참판을 지냈다. 강진규는 노론이 아닌 소론 사람이다.
버저이에는 북향인 음지마을과 남향인 양지마을이 있는데, 양쪽 모두 인물을 배출했다. 음지마을에서는 강태중(무장현감)을 비롯해 참판이 3명 배출됐다. 강태중은 노론이다. 음지와 양지마을을 포함해 대과 급제자가 25장이나 나왔다. 노론 13장, 소론 12장이라 한다. 반면 인근 지역이라도 남인이 살던 ‘닭실’이나 ‘바램이’(봉화읍 해저리)에서는 대과 급제자가 매우 귀했다. 국회의원을 지낸 김중위씨의 고향이 바로 바램이이다. 그래서 ‘버저이 급제 3장보다 닭실과 바램이 1장이 더 귀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 외에도 전두환 정권 때 청와대 특보와 감사원장을 지낸 신현수(申鉉守) 씨 집안이 노론 집안이다. 경북 의성군 신평면의 신씨 집안이다. 전두환 정권 때에 신현수씨의 둘째딸이 김대중 대통령의 둘째아들인 홍업씨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외부에 알리지 않고 미국에서 올리려던 참이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신현수씨는 고민하다 하는 수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왜 사표를 내느냐’고 묻자, ‘딸이 김대중의 아들과 미국에서 결혼할 것 같다’고 보고했다. 이 말을 들은 ‘전통’은 신현수씨에게 여비를 주면서 ‘미국에 갔다오라’고 허락했고, 물론 사표도 반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국회의원을 지낸 강신조씨가 신현수씨의 외사촌이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영남의 같은 노론 집안끼리 줄을 찾아서 혼인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상주 봉대의 강씨들이 노론 집안이다. 일명 ‘봉대 강씨’라 한다. 국포(菊圃) 강박(姜樸·1690∼1742)의 후손이다. 국포 선생은 정미환국(丁未換局)이 발생해 소론이 다시 집권하자 기용되어 벼슬을 했다. 벼슬보다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영남의 남인들이 정권에서 소외된 시기는 몇 단계로 볼 수 있다. 거시적으로는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이 축출되면서 광해군의 정치적 사부이던 정인홍도 죽임을 당한다. 정인홍은 경상우도인 경남 출신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이 일이 영남 사림이 중앙정계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분기점이 된다. 그 다음이 숙종 때인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다. 이때 남인의 영의정이던 허적(許積·1610∼80)이 사약을 받으면서 남인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다음이 1694년 장희빈과 관련되어 발생한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이때부터 서애 유성룡의 후손인 매산(梅山) 유후조(柳厚祚·1798∼1876)가 대원군의 남인 중용책에 따라 좌의정에 오를 때까지 경상도 남인은 완전히 배척당했다.
물론 정조 때 번암 채제공과 같은 남인계 영의정이 배출됐기는 했지만 채제공은 근기(近畿) 남인으로, 경상도 남인은 아니었다. 근기 남인은 간혹 채용됐지만 경상도 남인은 철저히 배제됐다. 영조 4년인 1728년 발생한 무신란은 바로 이런 경상도 남인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다. 하지만 무신란으로 인해 영남은 더욱 철저한 감시 대상이 됐다. 무신란을 진압한 후 대구에 세운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이를 대변한다. 경상좌우도를 놓고 보면 무신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우도(경남)가 좌도보다 훨씬 더 천대받았다. 아무튼 유성룡 이래로 영남 출신이 재상에 오른 사례는 유후조가 유일하다.
경신대출척부터 유후조가 좌의정에 오른 시기까지를 계산하면 대략 200년이다. 200년 동안 지역차별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200년 동안 뭉친 영남의 한을 풀어준 사람이 박정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통이 집권하면서 전라도 차별이 시작됐다. 한을 푸는 것은 좋았는데 그 불똥이 전라도로 튄 것이다. 서울과 근기 노론에 향해야 할 불똥이 전라도로 튄 게 아닌가 싶다. 전라도에는 노론 집안도 물론 있었지만 남인 집안도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해남(海南) 윤씨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 집안이 남인이었고, 전라도에서 가장 물산이 풍부한 도시라 역대로 부자가 많이 살았던 나주가 전라도 남인의 근거지였다.
어쨌든 영남 남인이 탄압을 받을 때 영남권의 정서를 대변한 인물을 누구로 봐야 하나.
근래에도 판검사가 10여 명이나 배출됐다. 대법관 강신욱(姜信旭)씨, 국회의원을 지낸 강신조(姜信祚)씨가 바로 버저이 강씨다. 역암(?庵) 강진규(姜晉奎·1817~?)의 후손이다. 강진규는 고종 때 예조참판을 지냈다. 강진규는 노론이 아닌 소론 사람이다.
버저이에는 북향인 음지마을과 남향인 양지마을이 있는데, 양쪽 모두 인물을 배출했다. 음지마을에서는 강태중(무장현감)을 비롯해 참판이 3명 배출됐다. 강태중은 노론이다. 음지와 양지마을을 포함해 대과 급제자가 25장이나 나왔다. 노론 13장, 소론 12장이라 한다. 반면 인근 지역이라도 남인이 살던 ‘닭실’이나 ‘바램이’(봉화읍 해저리)에서는 대과 급제자가 매우 귀했다. 국회의원을 지낸 김중위씨의 고향이 바로 바램이이다. 그래서 ‘버저이 급제 3장보다 닭실과 바램이 1장이 더 귀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 외에도 전두환 정권 때 청와대 특보와 감사원장을 지낸 신현수(申鉉守) 씨 집안이 노론 집안이다. 경북 의성군 신평면의 신씨 집안이다. 전두환 정권 때에 신현수씨의 둘째딸이 김대중 대통령의 둘째아들인 홍업씨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외부에 알리지 않고 미국에서 올리려던 참이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신현수씨는 고민하다 하는 수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왜 사표를 내느냐’고 묻자, ‘딸이 김대중의 아들과 미국에서 결혼할 것 같다’고 보고했다. 이 말을 들은 ‘전통’은 신현수씨에게 여비를 주면서 ‘미국에 갔다오라’고 허락했고, 물론 사표도 반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국회의원을 지낸 강신조씨가 신현수씨의 외사촌이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영남의 같은 노론 집안끼리 줄을 찾아서 혼인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상주 봉대의 강씨들이 노론 집안이다. 일명 ‘봉대 강씨’라 한다. 국포(菊圃) 강박(姜樸·1690∼1742)의 후손이다. 국포 선생은 정미환국(丁未換局)이 발생해 소론이 다시 집권하자 기용되어 벼슬을 했다. 벼슬보다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영남의 남인들이 정권에서 소외된 시기는 몇 단계로 볼 수 있다. 거시적으로는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이 축출되면서 광해군의 정치적 사부이던 정인홍도 죽임을 당한다. 정인홍은 경상우도인 경남 출신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이 일이 영남 사림이 중앙정계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분기점이 된다. 그 다음이 숙종 때인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다. 이때 남인의 영의정이던 허적(許積·1610∼80)이 사약을 받으면서 남인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다음이 1694년 장희빈과 관련되어 발생한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이때부터 서애 유성룡의 후손인 매산(梅山) 유후조(柳厚祚·1798∼1876)가 대원군의 남인 중용책에 따라 좌의정에 오를 때까지 경상도 남인은 완전히 배척당했다.
물론 정조 때 번암 채제공과 같은 남인계 영의정이 배출됐기는 했지만 채제공은 근기(近畿) 남인으로, 경상도 남인은 아니었다. 근기 남인은 간혹 채용됐지만 경상도 남인은 철저히 배제됐다. 영조 4년인 1728년 발생한 무신란은 바로 이런 경상도 남인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다. 하지만 무신란으로 인해 영남은 더욱 철저한 감시 대상이 됐다. 무신란을 진압한 후 대구에 세운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이를 대변한다. 경상좌우도를 놓고 보면 무신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우도(경남)가 좌도보다 훨씬 더 천대받았다. 아무튼 유성룡 이래로 영남 출신이 재상에 오른 사례는 유후조가 유일하다.
경신대출척부터 유후조가 좌의정에 오른 시기까지를 계산하면 대략 200년이다. 200년 동안 지역차별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200년 동안 뭉친 영남의 한을 풀어준 사람이 박정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통이 집권하면서 전라도 차별이 시작됐다. 한을 푸는 것은 좋았는데 그 불똥이 전라도로 튄 것이다. 서울과 근기 노론에 향해야 할 불똥이 전라도로 튄 게 아닌가 싶다. 전라도에는 노론 집안도 물론 있었지만 남인 집안도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해남(海南) 윤씨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 집안이 남인이었고, 전라도에서 가장 물산이 풍부한 도시라 역대로 부자가 많이 살았던 나주가 전라도 남인의 근거지였다.
어쨌든 영남 남인이 탄압을 받을 때 영남권의 정서를 대변한 인물을 누구로 봐야 하나.
[편집] 시조 강이식
시조는 고구려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 장군이다. 일부 역사에 무지한 자들이 강이식장군을 수나라귀화인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나 강이식장군은 고구려에서 나고 자란 정통 고구려인으로 그의 친부는 요동성주 강철상(姜哲尙)공이다.고구려 망국 후 당과 신라의 김부식과 같은 역사의 폐륜아들로인한 고구려 역사 말살정책으로 단군으로부터 수천년간 내려온 고구려의 귀중한 선가(仙家)의 사서들이 모조리 불태워지면서 강이식장군의 함자로 소멸될 위기에 놓였었으나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강장군의 역사적 위업과 현 중국 만주 심양현 원수림에 있는 거북좌대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그는 597년 고구려 영양왕 8년 수나라의 수 문제가 지성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는 내용의 국서를 고구려에 보내자, "칼로써 대답하자"고 주장하며, 말갈병을 거느리고 수나라를 먼저 공격한 한
민족사 유일무이한 선제공격한 장군으로 이후 598년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임유관(臨楡關)에서 30만 수군을 대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612년 살수대첩에서도 총사령관으로 부장을지문덕 장군과 함께 큰 공을 세운 명장이다.
불과 수십 년전까지도 봉길선 원수림 역 앞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는 큰 비석이 있었으나 중국 문화혁명 때 소멸되고, 돌조각과 거북좌대만 묘역에 남아 있다.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871-1에 강이식 장군을 모신 봉산사가 있다.
[편집] 진양후 강진
강씨가 진주에 세거한 것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제가 안동지방 준재(俊才)를 발탁하기 위해 설과 하였을 때에
강진(姜縉)이 650년경에 태어나셔서 당제가 안동도부호부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인 676년 이전에 이미 과거에 장원급제하신 후 태중대부 판내의령 (太中大夫判內議令)을 역임하시어 정순(正順)의 시호를 받으시고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졌다.
이 때부터 진주강씨의 본관을 진주(晉州,진양,진산으로 불리기도 함)로 하게 되었다.
崇仁殿 四韻科 壯元 太中大夫 判內議令 贈諡 正順公 晋陽侯 唐帝擢 安東俊才 設科於平壤時得中官 亦唐帝所命也
이는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핵심 귀족이었던 강족(姜族)과 고구려유민들과의 단합을 두려워하여 한반도 최남단인 경남 진양후로 봉한것이다. 이후 진양은 진주로 개명되었으며 인물은 경남에서 가장 많이 나며 그 중 진주가 특출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고장으로 이름나게 되었다.
이렇듯 강진이 입조한 이래 진주는 고구려 후예들이 뿌리내린 영남의 명승지로 후일 명공거경 애국충신열사 및 독립운동가들이 무수히 배출되었다.
고구려의 후예들은 진주일대를 포괄하여 경남 부산등지에 가장 많이 살며 다음 전북,전남에 많이 분포 거주하고 있다.
일부 후예들이 경북지방에 정착하여 문벌을 떨쳤는데 당당히 영남문과 급제 배출 제1위의 태백오현 도은공,잠은공 형제가문이 그들이다.
[편집] 인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진주강씨는 325,288가구, 총 1,044,38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가장 많은 65,409명, 경기도가 52,957명, 경남이 35,072명, 부산이 31,969명 등의 순이다.[2]
남한의 전체 인구 중 7.29%로 김(21.59%) > 이(14.78%) > 박(8.47%) > 최(4.72%) > 정(4.37%) 다음으로 여섯번째(2.27%)로 인구가 많은 성씨이다.
[편집] 계파
이러한 진주 강씨는 크게 은렬공파, 인헌공파,박사공파, 소감공파, 관서공파5개파로 구성되는 데, 은렬공파가 가장 먼저 발원하였지만, 규모는 박사공파가 가장 크다.
인헌공파는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의 후손들의 파이기도 한데, 이 파만 별도로 금천 강씨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에서 '강(姜)'자를 씨(氏)로 삼는 성씨는 진주(晉州)를 단일본으로 하고 있다.
[편집] 은열공파
은열공파는 고려 때 강감찬장군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거란을 물리친 대영웅 은열공(殷烈公) 강민첨장군(姜民瞻將軍)을 중시조로 하는 파이다. 강민첨장군은 고려 광종 14년(서기 963) 11월 29일 진주 옥봉산(玉峰山)아래 개경향(開卿鄕 : 지금의 진주시 옥봉남동 622)에서 탄생하신 후 1012년(현종 3) 5월에 동여진(東女眞)이 영일(迎日)·청하(淸河) 등지에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등과 함께 안찰사로서 날카로운 못이 돋아난 일종의 철갑선인 과선(戈船=거북선의 효시)으로 격퇴하였고.
1018년에는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내침하자 대장군으로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패배한 소배압의 군사가 바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다시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대승을 거두었다.이것을 자주전투라 한다.
그 공으로 1019년에 응양상장군 주국이 되고,곧 이어 우산기상시에 올라 추성치리익대일등공신(推誠致理翊戴一等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이듬해 지중추사 병부상서가 되었다.
향수 59세의 수를 누리시고 세상을 떠나시니 현종임금이 3일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예관을 보내어 장사를 돌보게하였으며
태자태사(太子太師)문하시랑(門下侍郞)을 증직하시고 은렬(殷烈)의 시호를 내렸다. 또 조선 때 강세황의 후손으로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낸 강윤(姜潤·1830~1898)과 동생 강건(1843~1909)형제가 만든 휴대용 명품해시계는 수억원을 주고도 구하기 어렵다 한다. 또한 이들 형제의 큰아버지 강이중과 아버지 강이오는 혼천(渾天)시계를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편집] 박사공파
박사공파는 진주강씨의 인구 중 80%를 차지하는 대 문벌로 고려 때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을 이끌고 일본정벌에 나섰던 강계용(姜啓庸)을 중시조로 하는 파이다. 시조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 탄생 이후 700년여 고려 23대 임금 고종 때 이 땅에 동방(東方) 대성(大姓) 진산 화주의 대파조(大派祖)가 탄생하니 박사공 휘 啓庸(계용) 선조님이다.
강계용(啓庸)은 고려 때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내시다 통신사 서장관(書狀官)으로 고,몽 연합군을 이끌고 일본출정을 나가셨다가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돌아왔는데 일본은 이것을 신의 바람이 도왔다는 뜻으로 신풍(神風) 즉 가미가재로 부르게 되었다. 귀국 후 정 1품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진 후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 박사공파에서 진주강문을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들이 제일 많이 배출되었는데 고려 때 공양대왕과 사돈간으로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을 끝내 인정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강시(姜蓍),강회중(姜淮仲) 부자와 왕의 부마로 역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강회계(姜淮季)등은 고려조의 이름난 충신열사들이다.
조선 세종 때 세종을 도와 한글창제에 참여했던 강희안(姜希顔)과 대문장가 강희맹(姜希孟)형제는 진주강문이 낳은 대명필로 평가받고 있다.
[강항]은 강희맹의 후손으로 선조 때 석학으로 공조좌랑과 형조좌랑 등을 지내었다 모친 상으로 고향에 낙향해 있다가 정유재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불행히 가족이 모두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가 일본의 학자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그는 일본성리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가 31세 때 지어 남긴 서책과 글들이 현재 일본의 국보로 소장되어있다.
박사공의 아우인 강위용(姜渭庸)은 고려 때 사도소감(司徒少監)을 지냈으며 강문의 5대파조 중 소감공파의 파조이다. 4대손 강태(姜泰)는 가선대부 대상(嘉善大夫 大相)으로 있으면서 오랑캐의 침입을 당했으나 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엎드려 곡하면서 한사코 자리를 뜨지 않자 오랑캐도 감탄한나머지 해를 입히지 않았을만큼 대단한 효자였다.
[편집] 관서공파
관서대장군(關西大將軍) 강원로(姜元老)를 파시조로 하고 있다.
선대는 고려 중기 판문하시중(判門下侍中)을 지낸 강원용(姜遠庸)이 조부(祖父)이며 역시 보문각직제학을 역임한 강기문(姜起文)이 친부이다. 후손들로 많은 문하시중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 전객령 문하시중을 역임한 강윤보(姜允輔)는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도의교(道義交)를 맺기도 했으며 조선이 건국되자 바로 벼슬을 버리고 은거해버린 기인이다. 9세손 강행(姜行)은 1467(세조 13)년 이시애(李施愛)난을 평정했다
[편집] 인헌공파
인헌공파는 삼한벽상공신 여후(三韓壁上功臣呂侯) 강궁진(姜弓珍)을 파시조로 하고 있다. 강궁진은 문하시랑 강여청(姜餘淸)의 4대손이다. 강궁진은 왕건(王建)이 고려국을 건국할 때 정국평정 1등훈으로 태조 왕건으로부터 삼한벽상공신으로 봉해졌으며 여후(呂侯)로 있었다. 시조는 고구려 원수공(元帥公) 강이식(姜以式)장군으로 모시면서 관향을 금천(衿川)으로 하고있다.
그의 아들이 바로 한민족사 불세출의 발자취를 남긴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姜邯贊)장군이다 강감찬장군은 임헌복시(任軒覆試) 갑과에 장원급제한 인물로 중국 사신이 별이 떨어진 후 태어난 강감찬장군을 보고 문곡성이 태어났다고 경탄한 일화가 전해오며 한민족사 수많은 전설과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후 상원수로 거란 10만 대군을 귀주에서 전멸시켜 명실공히 고려를 아시아 최강국의 반열로 올려놓은 다시 없을 명장이었다. 강감찬의 출생지인 금천을 따서 인헌공파를 따로 금천 강씨로 부르기도 한다.
인헌공파의 인물로는 조선조 인조와 사돈인 문정공(文貞公)강석기(姜碩期)가 있으며 그는 조선 인조 때 우의정 세자부(世子傅)를 지냈다. 그의 딸이 소현 세자의 빈이 되는 민회빈 강씨이다. 소현 세자가 독살로 예상되는 죽음으로 제거되자, 그의 아내와 친모, 4형제가 모두 인조에게 숙청당하고 아들들은 제주도로 귀양보내져 결국 생을 마감했다.
강우규는 일제 시대 일본인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수류탄을 던진 항일 의사이다.
민족을 구한 강감찬장군의 인헌공파의 세계가 대체적으로 사적이 부실한 이유는 인조관련 소현세자빈 옥사 때 족친들이 풍비박산되어 고증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에 말미앎이다.
[편집] 주요 세거지
[편집] 제주도
제주도의 입도한 진주 강씨는 각각 1418년 태종 18년 강윤희(姜允熙) 공이 양녕대군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왔으며, 1436년 세종 18년에는 은둔생활을 위해 강인덕(姜仁德) 공이 입도를 하였고, 1506년 연산군 12년에는 갑자사화를 피해 강철(姜哲) 공이 입도하였다.[3]
강윤희(姜允熙)
중시조 은렬공 강민첨의 제 13세손으로, 진주에서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관을 역임하고, 이어 형조좌랑과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대사헌으로 역임하고 있던 1418년 태종 18년, 양녕대군의 폐출에 반대하다가 제주에 유배되었다. 당시 제주목 납읍에 정착하였고, 입도 후에는 학덕을 펼쳤다.
강인덕((姜仁德)
중시조 은렬공 강민첨의 제 15세손으로, 1406년 태종 6년에 출생하여, 은둔생활을 위해, 1436년 세종 18년에 제주도에 입도 하였다. 제주목 북포촌에 정착을 하여 학문에 힘썼고, 염통공악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묘는 상여오름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염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염통뫼라고 부르던 것에서 염통악파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강철(姜哲)
중시조 박사공 강계용(姜啓庸)의 11세손으로, 성종 중엽 한양에서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진용교위(進勇校尉)에 올랐다. 1506년 연산군 12년에 갑자사화로 재종형(再從兄) 대사간 강형(姜詗)이 화를 입자, 전라도 완산으로 피신했다가 멸문지화를 면하기 위해 제주로 입도하였다. 제주목 오라리에 정착하여 후진 교육에 힘썼다. 애월읍 물메오름, 수산봉에 묘가 있는데, 이 수산봉을 따서 수산파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