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과 영양남씨
남자현(南慈賢.872-1933)은 1920~30년대 전설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그는 남자 못지않은 배짱과 지혜로 무장투쟁과 군자금 조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만주 땅의 무장운동 세력들이 당파 싸움으로 헤매고 있을 때 혈서로서 단합을 이뤄낸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남자현은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 그는 남편이 순국한 후에 삼대 독자인 유복자를 두고 시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했다.
그는 1872년 12월7일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서 통정대부를 지낸 남정한의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일찍 한글과 한문을 깨치고 12살에는 소학.대학까지 마치는 등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다.
19살이 되던 해 그는 아버지의 제자였던 김영주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영주는 안동의 전통적 유학자 집안의 아들이었다. 남자현은 시집살이 5년 만인 1896년 진보면 홍구동 전투에서 의병으로 자원한 남편을 잃는다. 얼마 뒤 유복자 김성삼을 낳았다.
그 뒤 남자현의 삶은 엄청나게 바뀐다.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들은 그는 독립선언문을 각처에 배포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남편의 순국이 사실상 그의 애국심을 키운 것이다.
남자현은 3.1만세 시위 후 만주의 김동삼을 찾아가 그가 참모장으로 있는 서로군정서에 입단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사대부 집안의 며느리이자 의병의 미망인이 그 나이에 무장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1920~1930년대 만주 항일무장운동 진영의 유일한 여성대원으로 꼽힌다. 의열활동, 사분오열된 만주지역 무장단체의 통합, 군자금 조달, 여성들의 계몽을 위한 여성단체 조직 등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시 만주에는 90여개의 한인 독립운동단체가 활동했다. 이들은 출신지와 사상의 차이로 무력 충돌이 잦았다. 남자현은 금식과 혈서로서 단합을 호소, 1922년 8월 마침내 남만주 17개 단체가 통합을 이룬다.
1931년 국제연맹에서 중.일관계 특별조사단을 만주에 파견했을 때의 일이다. 남자현은 왼손 무명지를 잘라 흰 천에 혈서로 ‘조선독립원’이라고 쓴 뒤 손가락을 동봉해 조사단에 보내어 독립을 호소했다.
그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중 두 차례 국내에 잠입했다. 1922년 9월 참의부 중대장으로 남편의 옛 동지인 채찬과 함께 군자금 조달을 위해 국경을 넘었다.
1926년 4월에는 사이토 조선총독 암살을 하기 위해 박청산, 이청수 등과 함께 서울을 찾았다.
1933년 만주 전권대사 부토의 암살을 모의한 것이 발각돼 하얼빈에서 체포된 그는 8월6일부터 14일간의 단식 끝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항상 죽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갖고 다녔다. 중국인 노파로 변장해 장춘으로 가다 일본 영사관 헌병에 체포됐을 때도 지니고 있었다. 1962년 여자독립운동가로서는 최고인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다.
한편 남자현은 영양남씨(英陽南氏)후손이다. 영양남씨의 시조 남민(南敏)은 중국 당나라 사람이다. 처음 성과 이름은 김충(金忠)이다. 당나라 현종 때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신라 유린 땅(지금의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에 도착했다. 그가 이곳에 살기를 원하자 신라왕은 중국 여남에서 왔다하여 남(南)이라는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주었다. 그 뒤 영양현을 식읍으로 받아 터를 잡는다.
고려 후기에 시조 남민의 후손 3형제가 3개의 본관으로 갈라진다. 맏형 남홍보는 영양, 둘째 군보는 의령, 막내 광보는 고성을 각각 본관으로 삼는다. 인구는 ▲의령남씨가 150,394명으로 가장 많고 두 번째가 ▲영양남씨로 69,155명이다. ▲고성남씨는 9,982명이다.
역학에 정통하고 특히 예언에 뛰어난 남사고는 영양남씨 인물이다. 그는 설화 같은 삶을 산 기인이다. 조선조 중기의 학자였던 남사고는 역학 뿐 아니라 풍수. 천문. 복서(卜筮). 상법(相法)의 비결에도 도통했다.
그는 명종 말년에 1575년의 동서분당을 예언한다. 그는 또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고 말했는데 과연 그 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한편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는 영양남씨의 집성촌이다. 이곳은 둔덕진 곳에 있는 들이라고 해서 원두들, 원구 또는 원파(元坡)라고도 했다.
원구1리는 15세기 후기인 성종 때 종사랑(從仕郞)을 지낸 남준(南晙)이 평해에서 이곳으로 오면서 비롯됐다. 그 뒤 연산군 때 무안박씨의 박양기, 진성이씨의 이선도, 명종 때 대흥백씨의 백인국이 차례로 마을에 입주했다. 그래서 지금도 남씨, 박씨, 백씨의 3성이 이 마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원구2리인 옥금(玉琴) 마을은 안동권씨의 권재덕이 개척했다. 17세기경 서성(徐省)이 유배되어 이 마을 왼쪽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옥녀(玉女)가 거문고 타는 형국이라 하여 옥금이라 명명했다.
윗마을은 안동권씨, 아랫마을은 영양남씨가 살고 있으며 마을 이름은 오산(梧山)이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묘곡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상동(元上洞), 원중동, 원하동, 옥금동을 병합하여 원구동이라 해서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원구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구역상 원구1, 2리로 나누어져 있다.
원구2리인 옥금(玉琴) 마을은 안동권씨의 권재덕이 개척했다. 17세기경 서성(徐省)이 유배되어 이 마을 왼쪽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옥녀(玉女)가 거문고 타는 형국이라 하여 옥금이라 명명했다.
♣남씨(南氏)의 시조 ♣
지금 남씨 3관4파는 모두 시조의 기원을 남민(南敏)으로 하고 있고 그의 중국도래설을 정설로 인정한다. 중국도래설이란 755년(신라 경덕왕 14년)에 당나라 사신 김충(金忠)이 일본에서 돌아가는 길에 폭풍을 만나 영양 축도에 표착하였는데 그 당시 당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여서 김충은 당 천자에게 신라에 살게 해주기를 청했고 천자가 허락을 하자 경덕왕이 김충에게 영양을 식읍(食邑)로 주고 성을 남이라 하사하고 이름을 충이라 하게했다는 것이다. 이 기원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지는 아니하나 추측하건데 사고가 처음 족보를 만들면서 이것을 확립시키지 않았나 생각한다.
남씨 족보가 처음 체계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사고 때라 보면 사고의 출생년도가 1509년이므로 김충의 축산도 상륙에서부터 이때까지 750 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과연 750년 동안 남민의 이야기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을까? 계유보 수권(首券) 176 쪽 몽뢰 가첩(夢賚 家牒)에 있는 의령 후손 연년(延年)의 글에 보면 중국도래설은 사고의 가설이라 말하고 있다. 몽뢰 가첩은 필자에게 자료가 없어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1622년 이전에 만들어진 남씨 최고(最古)의 족보중의 하나이다. 같은 책 177쪽 병암(屛巖)의 글에 보면 중국도래설이 실증적으로 고증해서도 신빙성 없음을 말하고 있다. 시조 남민이 중국에서 왔고 본명이 김충이다는 것도 서로 모순이다.
김씨는 신라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나라 고유의 성씨로서 다른 나라에는 없기 때문이다. 남민이 최초로 살았다는 곳이 축산(丑山)이라 하고 축산에는 남민과 그의 후손들이 살았다는 김이부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아직도 동네 사람들에게 전해내려오고 있는데 한반도에 도착해서 남민이 남민 당대에 영양을 식읍으로 받았다면 과연 그가 영양현으로 가지 않고 바다가의 조그만한 어촌에 계속 머물러 있었겠는가?
이 이야기는 전부가 강한 유교적인 색깔을 띄고 있다. 김충이 중국사람이라는데서 모화사상(慕華思想)을 볼 수이고 왕으로부터 직접 성을 하사받았다고 이름을 충(忠)으로 고쳤다는 데서 권위주의적 유교 정신을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사고같은 유학자가 생각할 수 있는 전형적인 것일뿐더러 조선시대 유학자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고는 김씨라는 성이 우리 나라 고유의 성이며 그 당시 신라와 중국의 관직명, 사신의 왕래 등에 대한 실증적인 고증은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남씨의 시조는 원래 영양 김씨였는 것으로 추측 할 수 있다. 이 근거로는 지금도 우리 남씨는 영양 김씨와 결혼을 금하고 있는데 이는 남씨와 영양 김씨가 한 핏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유보 수권 54 쪽에 나와있는 남민이 처음 살았다는 동네를 사람들이 김이부동이라는 부르는 것도 남씨가 원래 김씨였음을 말해주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고가 아무 근거없이 어느날 갑자기 우리 남씨는 김씨로부터 나왔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기때문일 것이고 그 당시 사람들이 사고의 말을 수용했다는 것으로 봐서도 남씨가 김씨에서 나왔다는 것을 뒤받침한다 하겠다.
우리 남씨는 아마 고려시대에 성을 김씨에서 남씨로 바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김씨는 귀족의 성이었으므로 김씨가 평민의 성인 남씨로 바꾸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원
현재 남씨 각 파별로의 시조는 영양파는 홍보(洪補), 안동파와 의령파는 군보(君甫), 고성파는 광보(匡甫)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 판단할 때 홍보, 군보, 광보의 삼형제설은 근거가 없다. 이름의 끝자의 발음이 일치하고 한자도 비슷한데서 형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객관적인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1425년에 죽은 광보의 6세손 영번(永蕃)이 60살 정도 살았다면 그의 출생년도는 1360년 경이고 그의 아버지 승고(承顧)가 30살 되던 해에 영번을 낳았다면 승고는 1330년경에 출생한 것이되다. 광보는 승고의 5대조 할아버지이다. 계유보 수권 433쪽에 있는 1372년(공민왕 21년)에 만들어진 휘주(暉珠) 묘의 광기(壙記)와 437쪽에 있는 1390년(공양왕 2년)의 호적에 의하면 군보는 휘주의 5대조 할아버지이다. 휘주가 60살 정도 살았다고 하면 휘주는 1310년경에 출생한 것이 된다. 이로 볼 때 광보와 군보는 같은 시기의 사람이거나 이들 사이에는 많아야 1세대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추측할 수 있고 이들의 출생년도는 1150년 내외가 될것이다.
같은 책 412쪽 의령 후손 태보(泰譜)가 쓴 글을 보면 백운 이 규보(白雲 李奎報, 1168-1241)의 친구 중에 고성이 본인 남씨 친구가 있었다는 것으로 봐서 1200년 경에 이미 고성파가 성립했음을 알 수 있다. 고성파가 가장 나중에 형성된 것은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는 바이므로 이로볼 때 1200년 이전에 이미 영양파, 안동파, 의령파가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즉 남씨의 실제적인 기원은 최소한 1200 이전에 잡아야 한다. 과거의 종인들 중에서 홍보, 군조, 광보의 관직명칭이 충선왕(1308-1313) 이후에 만들어진 관직이므로 이들이 충선왕 이후에 관직을 했던 사람이라 주장하는데 이것은 제고를 해보아야 할 것같다. 만약 이러하다면 충선왕은 1308년에 왕에 오르는데 되었는데 군보의 5대손인 휘주가 1372년 죽고 광보의 6대손 영번이 1425년에 죽은 사실을 설명하기 힘든다. 안기부가 정보부로 명칭이 바뀌고 이후 기능상의 큰 변화없이 계속 존속하여 50년 정도가 지났을 때 어떤 사람의 할아버지가 안기부장을 했으면 그 손자는 그의 할아버지가 안기부장을 했다고 말할것인가 정보부장을 했다고 말할 것인가?
♣영양파 ♣
남씨는 영양에서 지방호족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초기 조상들의 묘지는 울진(蔚珍)이 주류룰 이루고 부인(婦人)들의 성씨를 살펴보면 울진 장씨, 울진 임씨, 강릉 최씨 등 울진 지역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고이 남씨의 본을 울진이라 하지 않고 영양이라 한 것은 족보에 나와 있는 조상 이전에는 남씨들이 영양에 주로 살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영양에 시작한 우리 조상들은 홍보 훨씬 이전에 울진으로 진출했을 것이다.
시조 홍보로부터 5세 혁과 삼기까지 초기 조상들을 살펴보면
1세: 시조 홍보(洪輔)
홍보의 관직은 족보에서 공식적으로는 중대광 도첨의 찬성사 상의도 감사(重大匡 都簽議 贊成事 商議都 監事)라 내세우지만 문헌상으로는 군기 주부 동정(軍器 主簿 同正)이라 한다. 중대광이란 고려 후기 종1품(從一品)의 계급을 말한다. 군기(軍器)란 군기시(軍器寺)의 줄임말이며 군기(軍器)를 담당하는 부서이고 주부(主簿)란 종7품 내지 정8품의 관직을 말한다.
2세: 겸(謙)
겸의 관직은 위위 주부령 동정(衛尉 主簿令 同正)이니 위위는 의장(儀裝)을 담당하는 관청을 말한다.
3세: 숙손(淑孫)
숙손의 관직은 급제 검교 예빈시 경(及第 檢校 禮賓寺 卿)이니 급제란 과거에 합격했다는 말이고 예빈시란 손님을 맞이하는 중앙관청이며 지금의 의전실과 같고 경이란 예빈시의 장을 의미하며 예빈경은 종3품이다. 검교란 말은 이 관직에 있는 사람은 임시직 혹은 명예직으로 이 명칭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다. 그러므로 숙손은 실제로는 예빈경보다 낮은 관직을 했었으나 명예직으로 이 명칭을 받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4세: 지탁(之卓)
지탁은 급제(及第)이다.
5세: 혁( ), 삼기(三起)
혁의 관직은 진사 검교 예빈경(進士 檢校 禮賓卿)인데 진사란 과거의 진사시까지 합격한 자를 말한다. 삼기는 진사이다.
홍보의 관직은 중대광이 아니라 군기 주부일 것이다. 이 이유로는 첫째 울진 장씨(蔚珍 張氏) 집의 족보에 이렇게 나와 있는데 이 기록외에는 달리 홍보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관직이 부풀려지면 부풀려졌지 절대 축소되지 않는 것이 족보의 철칙(鐵則)이다. 사고가 족보를 처음 만드면서 자신의 조상을 하나 하나 거슬러 올라갔을 것인데 그가 찾아낸 문헌상 최초의 인물이 바로 울진 장씨 족보에서 발견한 홍보일 것이다. 홍보가 문헌상 확인된 남씨 최초의 사람이므로 홍보가 영양파 남씨의 시조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고는 남씨의 조상이 홍보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 자연의 이치이므로 전해내려오는 구전을 첨삭하여 남민을 등장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이던 아니면 사고 이후의 사람이든 곤란에 빠지게 된다. 홍보가 문헌상 확인된 최초의 인물이므로 홍보를 시조로 내세워야 하는 것은 변경할 수 없는 사실인데 홍보의 직위가 너무 낮은 것이다. 종7품의 군기 주부가 자신들의 시조가 되면 가문의 체면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의 많은 성씨 중에 시조가 관직이 높지 않는 곳이 있는가? 그래서 부득이 하게 중대광이라는 관직을 갖다 부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둘째 이유로는 홍보의 아들 겸의 직위가 위위 주부령 동정으로 역시 군사와 관계된 하위 관직이라는 데 있다. 만약 홍보의 관직이 중대광이었다면 고려같은 문벌 사회에서 그의 아들이 이렇게 낮은 벼슬을 할리가 있겠는가?
고려말까지 번성하던 홍보의 가문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홍보의 후손들은 강제적이든 자의에 의해서든 간에 조선이 들어서면서 모두 관직을 잃고 울진에 다시 모이게 된며 이후 조선 500년 동안 그들은 영양, 울진, 청송 등에서 조용히 시골 사람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게된다. 의령파가 남재(南在)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면서 번성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녹사공파(錄事公派)
계보(係譜)는 홍보, 겸, 숙손, 지탁, 혁, 승경(承敬), 의(山+頭), 계문(啓文)으로 이어져 계문이 시조가 된다. 승경의 관직은 영경전 녹사(令慶殿 錄事)인데 영경전은 궁궐 이름인 것같고 녹사는 8품내지 9품의 관리를 말한다. 의는 진사이며 그의 묘가 예천에 있는 것으로 봐서 그는 개성에서 예천으로 내려가 수령을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계문의 관직은 진무 부위(振武 副尉)인데 부위란 하급 무관직인데 예천에서 역시 수령 노릇을 한 모양이다. 계문은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는 해에 관직을 버리고 예천 행솔리(杏率里)에서 울진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후 녹사공파는 울진에서 조용히 오늘에 이른다.
만호공파(萬戶公派)
계보는 홍보, 겸, 숙손, 지탁, 혁, 승고(承顧), 영번(永蕃), 호(顥)로 이어져 호가 시조가 된다. 승고의 관직은 중정대부 종부시령 판사(中正大夫 宗簿寺令 判事)인데 중정대부란 종3품의 계급을 말하고 종부시란 왕족을 기록하고 그들의 족보를 만드는 관청이며 판사란 그 관청의 장을 말한다. 영번의 관직은 신호위 보승 중랑장인데(神虎衛 保勝 中郞將)인데 신호위 보승이란 군부대이름이며 중랑장은 정5품 무관이다. 영번 역시 고려가 망하자 고향 울진으로 되돌아 갔다. 이로서 그의 후손들은 근세까지 중앙과 인연을 끊게된다.
만호공이라는 말의 유래는 호가 세종때 울릉도를 정벌하였는데 공을 세운 대가로 장군만호(將軍萬戶)라는 관직을 받게되므로서 유래한다. 만호는 종4품의 무관직이다. 아마 울릉도 정벌에 울진에 사는 남씨 씨족대표로서 받은 관직인 것같다. 그러나 만호공파는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는 사뭇 다른 길을 걷게 된다. 1993년 계유보에 나오는 살아있는 만호공파 남자의 총 인구수는 약 160명 내외가 된다. 격암 남사고는 호의 증손자로서 홍보의 11세손이나 사고의 가계는 사고의 아들대에서 끊어졌다가 1794년 정조(正祖) 18년에 출생한 21세(世) 명옥(命玉)에 의해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호공파는 울진에 살고 있다.
현감공파(縣監公派)
계보는 홍보, 겸, 숙손, 지탁, 혁, 승고, 영번, 의(臣+頁)로 이어져 의가 시조가 된다. 의는 정읍현감을 했었다. 그래서 이 파를 현감공파라 하는 것같다. 이들은 울진, 경주 보문(慶州 普門), 봉화 대현(奉化 大峴), 평해 방율(平海 芳栗) 등에 살고 있다.
반송공파( 松公派)
계보는 홍보, 겸, 숙손, 지탁, 혁, 승고, 영번, 영(領)으로 이어져 영이 시조가 된다. 이들의 살아있는 총 남자 인구수는 1993년 계유보에 의하면 남자가 약 50명 내외가 된다. 반송공파에서는 18세(世) 때 남자가 한 명뿐이다. 이 사람의 이름은 계적(啓迪)이다. 이들은 울진천(蔚珍川) 앞과 울릉도(鬱陵島)에 몇 명이 살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그의 자손이 항상 번성하는 것만은 아님을 본다. 이 파의 현 종인을 보면 1950년 내지 1960년에 태어난 남자들 중에서 그들의 배우자와 자식이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것이 많다. 종인들 간에 연락이 끊겼기 때문일 것이다. 반송공파가 바람앞의 촛불같음을 느낌다.
송정공파(松亭公派)
계보는 홍보, 겸, 숙손, 지탁, 혁, 승고, 영번, 수(須)로 이어져 수가 시조가 된다. 1993년 계유보의 책장 비율을 대충 세어보면 송정공파가 영양파에서 80% 정도이다.
▶수의 묘지(墓誌)에 있는 글이 재미있어 전문을 번역해 보면
감찰(관직명) 영양 남수의 묘지
監察 英陽 南須 墓誌
감찰공 남씨의 이름은 수이고 자는 000이며 헌 거사요 영해 영양인이다. (조선시대에는 영양은 영해부에 속해었다.)
監察公 南氏 名 須 字 000(3자 결) 軒居士 寧海 英陽人也
아버지는 중랑장(관직이름) 영번이고 할아버지는 판종부사(관직이름) 승고이며 증조 할아버지는 진사 혁이며 어머니는 전직(궁궐을 지키는 사람) 강릉 유의인 최씨의 딸이다. 父 永蕃 中郞將 大父 承顧 判宗簿事 曾大父 奕 進士 母 崔氏 殿直 江陵 有 之女
공은 1395년(태조 4년) 9월 19일에 태어났고, 1417년(태종17년)에 문선에 오르고(문선은 관리를 뽑고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문선에 오른다는 것은 관리의 예비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는 뜻이다), 1420년(세종 2년)에 대흥(성씨의 본을 말함) 백 승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서 3남1녀를 두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진이요 관직이 별시(군부대의 이름인 것같음)의 사직(정5품 무관)이고 둘째의 이름은 손이요 무과에 00 하고 셋째의 이름은 전이요 진사이며 따님은 세도있는 가문의 사람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현감을 지낸 윤 긍에게 시집을 갔다. 公 生於洪武 乙亥 九月十九日, 永樂丁酉 中 文選, 庚子 000 娶 大興白昇女, 生 三男一女 一曰 ' +辰' 別侍司直 二曰 蓀 武科 00 三曰 筌 進士 女 適 世家子 文科 行縣監 尹兢)
친손자들와 외손자들에 관한 자세한 것은 백씨(수의 부인을 말함)의 묘를 자세히 있으니 여기서는 적지 않는다.
內外兒孫 詳見 白氏墓誌 今不 錄
1425년(세종 7년) 다방(궁중에서 약을 지어 받치던 관청)에서 처음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그해 10월에 아버지 상을 당했다.
洪熙 乙巳 筮仕 茶方 十月 服斬衰 (서사: 처음으로 관직에 오름, 참최는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입는 옷)
1428년 (세종 10년)에 관직에 복직했고, 1432년(세종 14년)에 사선(임금의 식사를 만드는 관청)의 식의(정9품)로 자리를 옮겼고, 1434년(세종 16년)에 직장(종7품, 관청의 하급관리의 계급은 참봉, 봉사, 직장, 주부 순이다)으로 승진했고 1435년(세종 17년) 계선0의 주부로 승진했고, 1436년(세종 18년)에 상을 당했고 (그래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438년(세종 20년)에 통례문(의식을 관장하는 관청)에 복직했고, 00에 통찬(나라 제사 때 제사를 진행시키는 관직)으로 승진했고, 1440년(세종 22년)에는 승훈(정6품)으로 승진했고, 1441년(세종 23년)에는 판관(종5품)으로 승진했고, 1442년(세종 24년) 창사로 자리를 옮겼고, 1443년(세종 25년) 9월 큰 꾸지람을 받고 통례문의 통찬으로 되돌아갔으며 이때 계급은 승훈으로 낮아졌고, 1444년(세종 26년) 사헌부의 감찰(정6품)로 옮김에 0으로 공이 수망(관직의 후보자로 추천되는 세 사람 중의 첫째 사람)이었다.
宣德 戊申 還仕, 壬子 遷 司膳 食醫, 甲寅 升 直長, 乙卯 階宣0 升 主簿, 正統 丙辰 服 齊衰(주: 상복의 일종), 戊午 還 通禮門, 00 己卯 升 通贊, 庚申 升 承訓, 辛酉 升 判官, 壬戊 遷 倉使, 癸亥 九月 以大呵 還通贊 階承訓, 甲子 遷 監察 知司憲0 公 首望
그 해 9월에 용담(전라도에 있는 현)의 수령으로 나가 오로지 아래사람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스리니 읍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다.
是年 九月 出守 龍潭, 一以撫字 爲心 邑人稱之 (무자:아래 사람을 어루만져 사랑함)
1445, 1446, 1447년(세종 27, 28, 29년)에 그 해의 조선 최고수령이 되었다.
00 乙丑 丙寅 丁卯間 海居 最目
1448년(세종 30년) 봄에 남솔(원이 제한된 수 이상의 가족을 데리고 옴)로 인해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30년을 스스로 즐기다가 1477년(성종 8년)에 병으로 인해 죽으니 향년 83세였다.
戊辰 春0濫率0公公0 以溪山 自娛 凡三十年 成化丁酉 以病 卒于0(享으로 추측됨)年八十三 그해 12월 12일 을사일에 영해 남면(지금의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화전산 기슭에 장사지냈다.
是年 十二月 十二日 乙巳 于寧海 南面 花田山麓
수는 아주 꼼꼼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에 적혀있는 이런 세세한 내용은 본인이 기록해두지 않으면 남이 알기는 어려운 사실들이다. 수는 관직운이 그리 크게 따르지 않았던 것같다. 문선에는 그가 23세 되던 해에 올라갔으나 관리로 채용이 된 것은 5년이 지난 28 살때부터이고 이후 주변부서에서 말단관직으로 시작해 차근차근 올라가 46살 되던 해에 정5품까지 올랐으나 무슨 실수를 했는지 강등되게된다. 이때 수의 충격은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수가 관직생활에서 날짜의 달까지 기록한 것은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와 이때 그리고 현감으로 나가게 되는 해 세 곳뿐이다.
이후 수는 명예퇴직의 수순을 밝게 되는 것같다. 각 부서에서 근무한 연수를 차례대로 보면 다방에서는 5년, 사선에서는 4년, 통례문에서 4년인데 창사에서는 1년만에 쫓겨나 통례문에서 대기발령을 받다가 그의 관직생활의 명예를 높여주기 위해 사헌부 감찰(감찰은 정6품이지만 실세로서 명성이 높은 직위이다)로 잠시 감투를 쒸워준 이후 그가 실수를 한지 꼭 만 1년만에 어느 시골의 현감으로 내보낸 후 현감의 일회 임기가 만료되자(현감의 임기는 30-60 개월이다) 명예퇴직을 시킨 모양이다. 이때 수의 나이는 53세 관직에 첫 발을 내디딘지 25년되던 해이다. 쫓겨가는 수의 변명이 우습다.
수는 남솔(濫率)로 인해 그만두었다고 적고있는데 남솔이란 고을에 부임하는 수령이 그가 데려올 수 있는 식구를 초과하는 것을 말한다. 수의 아들은 3이고 그의 부모는 이미 다 죽었으니 그 당시로 봐서 결코 가족수가 많은 것은 아닐뿐더러 가족이 많으면 데리고 오지 않으면 될것이지 한참 일할 나이에 관직을 그만두고 이후 30년 동안 무직으로 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하튼 지금 종인들은 수를 부를 때 감찰 영양남공 수라한다. 수는 영양읍에서 이후의 여생을 보낸 것으로 보이며 그의 후손 12세 계조(繼曺)가 임진난을 피해 청송(靑松)으로 들어와서 청송파의 시조가 된다. 수의 초기 자손들 중에는 관직에 오르는 사람들이 더러 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후손들은 영양, 울진, 청송, 영해 등에 조용히 살게 된다.
수사공파(水使公派)
계보는 홍보, 겸, 숙손, 지탁, 삼기(三起), 봉우(鳳羽), 득량(得良), 희(禧)가 되며 희가 시조이다. 삼기는 진사이고 봉우는 문현감(文縣監)이며 득량은 수륙 병마절도사(水陸 兵馬節度使, 종2품이며 각 도의 군사를 통솔하는 무관)이며 희는 진사이다. 봉우 때 울진에서 경주(慶州)로 진출한 것으로 보이며 후손 일부는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으로 진출해서 현재 경주, 강원도 고성, 강원도 한성( 城)에 역시 조용히 살고 있다.
안동파, 의령파, 고성파
이들의 기원, 발전, 현상황에 대해서는 필자에게 자료가 없어 무어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군보가 왕명의 출납, 궁궐경호 등을 하는 실세부서인 추밀원에 근무한 것과 군보의 손자 의령파 천노(天老)가 고려 제일의 문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오른 것을 봐서 의령파는 고려조에서도 상당히 번창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조에서도 재(南在)가 이성계에 협력하므로서 번성의 길을 걷게된다. 의령파 중 좋은 쪽이던 나쁜 쪽이든 유명한 사람은 곤, 효온, 구만, 이 등이 있다. 남씨들 중 지금(1998년)까지 유명한 사람은 모두가 의령파라 하면 십중팔구 맞을 것이다. 안동파는 안동부근에 살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며 고성파는 사람수가 얼마되지 않는다.
▶맺음말
문헌상에 남아있는 남씨의 조상은 1150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이후 영양파는 고려의 몰락과 함께 몰락하여 현재까지 영양, 울진, 청송, 경주 등 경상북도 동쪽지방에 조용히 살고 있다.
족보는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역할은 거의 하지 못했고 큰 해악을 끼쳤다. 조선 500년 굴곡(屈曲)과 굴종(屈從)의 역사에 족보가 담당한 역할이 상당히 클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를 망치고 있는 권위주의(權威主義)와 존관천민(尊官賤民)의 풍토에도 족보의 역할이 작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전국의 아름다운 강산을 좀먹고 있는 숱한 묘들과 살아있는 힘없는 자를 위해 써야할 돈이 아낌없이 들어간 번쩍는 비석과 묘지를 볼 때 필자는 조상의 어리석음을 통탄한다. 우리 나라를 nova Egypt 로 만들고 있는 이런 한심한 작태는 중지되어야 한다. 족보에서 부계혈통만을 가지고 친족이라 하는것도 과학적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x 개의 성씨가 각 성씨마다 남녀 한 명씩 2x 명이 있고 유교에서 말하는 동성끼리의 혼인이 금지되어 있는 제도하에서 각 부부당 남녀 1명식의 자식을 낳는다면 n 세대가 지나면 A 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맨처음 조상의 피를 얼마나 가지고있을까? 계산해 보면 대략적으로 n 세대에서는 다른 사람의 피보다 1/2n 정도 처음 조상의 피가 그 후손에게 더 있음을 알 수 있다. n = 2 인 사촌인 경우는 25%, n = 3 인 8촌인 경우는 13%, n = 4 인 16촌인 경우는 6%, n = 5 인 32촌인 경우는 3%에 불과하다. 8촌 이상 넘어가면 혈연(血然)적 유사성은 거의 없음을 볼 수 있다. 족보는 없어져야 한다. 도대체 수십대 위 부계 조상이 같은 사람이 나와 성씨가 다른 사람과 나에게 어떻게 다른가? 족보는 페지되어야하고 족보대신 가보(家譜)가 족보를 대신해야한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조상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필연적으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다르고 인간이 무엇인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관점의 하나로 나의 생물학적 기원을 생각해보는 데서 자신의 조상을 연구하는 현대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조상이 큰 공명(功名)을 떨치지도 않았고 큰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산골에서 묵묵히 조용히 살아왔다는 데서 추호의 자격지심(自激之心)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러한 삶이 지금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인민을 착취하지 않고 제 땀을 흘려서 스스로 산 정직한 삶인 것이기 때문이요 우리 조상은 한때라는 식의 헛된 공명(功名)이야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인간은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에 의해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그가 무엇인냐에 의해 판단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2000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는 지금이 아마 남씨의 족보에 살아있는 자의 수가 가장 많이 올라와 있는 시대가 될 것이다. 한 남자당 최소한 두 명을 낳아야 이중 한 명이 남자가 되어서 현재의 인원이 유지가 되는데 요즘은 아이를 한 명 내지 두 명 정도만 낳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현대와 미래는 씨족의 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에 씨족간의 연락이 끊겨지고 족보의 간행도 얼마 후면 중지가 될 것이다. 족보는 더 이상 간행되어야 할 이유도 없고 간행되어서도 아니되지만 만일 후에 족보가 또 간행다면 족보의 관직위주의 기록도 이제는 일소(一掃)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인 권위주의에 족보의 이러한 면이 큰 기여를 했을 것이고 현대사회에서 관직은 과거와는 의미기 판이하게 달라졌기때문이다.
▶참고 문헌
남씨 기미 대동보(南氏 巳未 大同 譜), 1979
남씨 계유 대동보(南氏 癸酉 大同 譜), 1993
정승 6명등 배출…조선조 20대 명문 門閥
대구 경북 씨족사<13>영양 남씨(英陽 南氏)
영양남씨 영해 입향시조인 송정공 후손들이 인조8년(1630)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에 이주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 민속마을로 지정된 괴시마을은 전통성이 아직도 고스란히 잘 보존된 마을로 특히 경북지방에서 볼 수 있는 한국 반가(班家) 건축의 대표적 형태인 ㅁ자형 가옥이 14채 남아있어 그 당시 마을의 배치, 가옥의 좌향 및 공간특성을 보면 상류주택의 시대적 사회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영남남씨 집성촌인 괴시마을 내의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민속자료 75호로 지정된 영양남씨 괴시파종택과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괴시동 태남댁, 괴시동 물소와 고택, 괴시동 해촌 고택, 영덕 천전댁, 영해 입천정, 영해 주곡댁, 물소와 서당, 영해 경주댁, 영해 구계댁, 괴시리 괴정, 영덕 괴시리 사곡댁, 영덕 괴시리 영감댁, 영덕 괴시리 영은고택, 영덕 스므나골 재사 등 총 15개소가 위치하고 있다.
영양 남씨의 시조영양남씨의 시조 영의공(英毅公)은 중국 당나라 하남성 봉양부 여남(汝南) 사람으로 본래 성은 김씨(金氏)요, 이름은 충(忠) 이었으며 벼슬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서기 755년 신라 경덕왕 14년 당나라 헌종의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일본에 안렴사(按濂使)로 갔다가 소임을 마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동ㆍ남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훼손된 배에 의지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표류하다가 신라 유린지(有隣地)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항 명당산(明堂山) 죽도(竹島)에 표착하게 됐다.
그 당시 당(唐)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이고 표착지 축산항은 바다와 경치가 좋고 인심이 유덕하여 신라 경덕왕에게 신라에 살게 해주기를 청하여 경덕왕이 그 일을 당나라 천자(天子, 헌종)에게 알리니 헌종은 조서(詔書)를 내려 전하기를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을 신하에 대한 예로서 불러 올수가 없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신라에서 살게 하라”고 허락 하였다.
그 후 신라 경덕왕이 공(公)을 불러 이르되 군(君)은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으니 사성(賜姓)함이 마땅하리라 성(姓)은 남쪽에서 왔고 본고향이 여남이라 남씨(南氏)로 하고, 거동을 살피고 언행을 들으니 민첩하고 화용(和容)함이 가히 법(法)다운 지라 이름은 민(敏)으로 개명(改名)게 한 후 고은현(古隱縣)을 식읍(食邑)으로 하고 영의공(英毅公)이란 시호를 내리니 이때 나이 40세 이었다.쪯영양남씨의 연원과 분파영양남씨는 시조 영의공으로 부터 연원(淵源)이 되었으며 시조로부터 약550년간 세게(世系)를 알지 못하다가 고려 충렬왕(1274~1308) 때 장남 홍보(洪輔)는 영양군(英陽君), 차남 군보(君輔)는 의령군(宜寧君), 삼남 광보(匡譜)는 고성군(固城君)으로 봉해져 3형제가 분관하여 세보가 형성되었으며,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3본이다.
3본관의 후손들은 전국에 흩어져 세거지 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정승 6명과 대제학 6명, 판서 24명, 문과 급제자 140여명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조선조 20대 명문 문벌(門閥) 이었다.
영양남씨의 인물영양남씨 중시조(中始祖, 1世) 대광공(大匡公) 남홍보(南洪輔)는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받고 어지러울시 정치적 및 군사적으로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중대광 도첨의 찬성사 상의회의 감사라는 벼슬에 올라 영양군으로 습봉됐다.
영해(寧海) 입향 시조로 최초로 헌거사(軒居士) 하신 분은 영양남씨 8대손 송정공(松亭公) 남수(南須)로 태종17년(1417년) 문선에올라 세종 때 직장(直長, 종7품), 승훈(承訓,정6품), 판관(判官, 종5품), 사헌부 감찰어사, 용담현령사 최고참 수령으로 재직했고, 후손들은 문과 급제 11명, 무과 28명, 생진과 28명을 배출했으며 지난 1993년에 간행된 영양남씨 계유보에 의하면 송정공파는 영양남씨 중 80%를 차지하고 있다.영양남씨 대광공 14대이며 송정공 6대손인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 선생은 조산대부(朝散大夫) 판관공 남의록(南義祿)의 장남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영해부 의병장이 되어 7년간 경주성 및 영천성, 복성 등 다섯 곳의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홍의장군 곽재우장군의 진(陳)에서 승전책(勝戰策)을 작성했으며 성균진사(成均進士)로 영양남씨 중 유일하게 불천위(佛遷位)를 모시고 있다.
만호공이라는 말의 유래는 호가 세종때 울릉도를 정벌하였는데 공을 세운 대가로 장군만호(將軍萬戶)라는 관직을 받게되므로서 유래한다. 만호는 종4품의 무관직이다. 아마 울릉도 정벌에 울진에 사는 남씨 씨족대표로서 받은 관직인 것같다. 그러나 만호공파는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는 사뭇 다른 길을 걷게 된다. 1993년 계유보에 나오는 살아있는 만호공파 남자의 총 인구수는 약 160명 내외가 된다. 격암 남사고는 호의 증손자로서 홍보의 11세손이나 사고의 가계는 사고의 아들대에서 끊어졌다가 1794년 정조(正祖) 18년에 출생한 21세(世) 명옥(命玉)에 의해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호공파는 울진에 살고 있다.
▶수의 묘지(墓誌)에 있는 글이 재미있어 전문을 번역해 보면
감찰(관직명) 영양 남수의 묘지
監察 英陽 南須 墓誌
감찰공 남씨의 이름은 수이고 자는 000이며 헌 거사요 영해 영양인이다. (조선시대에는 영양은 영해부에 속해었다.)
監察公 南氏 名 須 字 000(3자 결) 軒居士 寧海 英陽人也
아버지는 중랑장(관직이름) 영번이고 할아버지는 판종부사(관직이름) 승고이며 증조 할아버지는 진사 혁이며 어머니는 전직(궁궐을 지키는 사람) 강릉 유의인 최씨의 딸이다. 父 永蕃 中郞將 大父 承顧 判宗簿事 曾大父 奕 進士 母 崔氏 殿直 江陵 有 之女
공은 1395년(태조 4년) 9월 19일에 태어났고, 1417년(태종17년)에 문선에 오르고(문선은 관리를 뽑고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문선에 오른다는 것은 관리의 예비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는 뜻이다), 1420년(세종 2년)에 대흥(성씨의 본을 말함) 백 승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서 3남1녀를 두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진이요 관직이 별시(군부대의 이름인 것같음)의 사직(정5품 무관)이고 둘째의 이름은 손이요 무과에 00 하고 셋째의 이름은 전이요 진사이며 따님은 세도있는 가문의 사람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현감을 지낸 윤 긍에게 시집을 갔다. 公 生於洪武 乙亥 九月十九日, 永樂丁酉 中 文選, 庚子 000 娶 大興白昇女, 生 三男一女 一曰 ' +辰' 別侍司直 二曰 蓀 武科 00 三曰 筌 進士 女 適 世家子 文科 行縣監 尹兢)
친손자들와 외손자들에 관한 자세한 것은 백씨(수의 부인을 말함)의 묘를 자세히 있으니 여기서는 적지 않는다.
內外兒孫 詳見 白氏墓誌 今不 錄
1425년(세종 7년) 다방(궁중에서 약을 지어 받치던 관청)에서 처음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그해 10월에 아버지 상을 당했다.
洪熙 乙巳 筮仕 茶方 十月 服斬衰 (서사: 처음으로 관직에 오름, 참최는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입는 옷)
1428년 (세종 10년)에 관직에 복직했고, 1432년(세종 14년)에 사선(임금의 식사를 만드는 관청)의 식의(정9품)로 자리를 옮겼고, 1434년(세종 16년)에 직장(종7품, 관청의 하급관리의 계급은 참봉, 봉사, 직장, 주부 순이다)으로 승진했고 1435년(세종 17년) 계선0의 주부로 승진했고, 1436년(세종 18년)에 상을 당했고 (그래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438년(세종 20년)에 통례문(의식을 관장하는 관청)에 복직했고, 00에 통찬(나라 제사 때 제사를 진행시키는 관직)으로 승진했고, 1440년(세종 22년)에는 승훈(정6품)으로 승진했고, 1441년(세종 23년)에는 판관(종5품)으로 승진했고, 1442년(세종 24년) 창사로 자리를 옮겼고, 1443년(세종 25년) 9월 큰 꾸지람을 받고 통례문의 통찬으로 되돌아갔으며 이때 계급은 승훈으로 낮아졌고, 1444년(세종 26년) 사헌부의 감찰(정6품)로 옮김에 0으로 공이 수망(관직의 후보자로 추천되는 세 사람 중의 첫째 사람)이었다.
宣德 戊申 還仕, 壬子 遷 司膳 食醫, 甲寅 升 直長, 乙卯 階宣0 升 主簿, 正統 丙辰 服 齊衰(주: 상복의 일종), 戊午 還 通禮門, 00 己卯 升 通贊, 庚申 升 承訓, 辛酉 升 判官, 壬戊 遷 倉使, 癸亥 九月 以大呵 還通贊 階承訓, 甲子 遷 監察 知司憲0 公 首望
그 해 9월에 용담(전라도에 있는 현)의 수령으로 나가 오로지 아래사람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스리니 읍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다.
是年 九月 出守 龍潭, 一以撫字 爲心 邑人稱之 (무자:아래 사람을 어루만져 사랑함)
1445, 1446, 1447년(세종 27, 28, 29년)에 그 해의 조선 최고수령이 되었다.
00 乙丑 丙寅 丁卯間 海居 最目
1448년(세종 30년) 봄에 남솔(원이 제한된 수 이상의 가족을 데리고 옴)로 인해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30년을 스스로 즐기다가 1477년(성종 8년)에 병으로 인해 죽으니 향년 83세였다.
戊辰 春0濫率0公公0 以溪山 自娛 凡三十年 成化丁酉 以病 卒于0(享으로 추측됨)年八十三 그해 12월 12일 을사일에 영해 남면(지금의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화전산 기슭에 장사지냈다.
是年 十二月 十二日 乙巳 于寧海 南面 花田山麓
수는 아주 꼼꼼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에 적혀있는 이런 세세한 내용은 본인이 기록해두지 않으면 남이 알기는 어려운 사실들이다. 수는 관직운이 그리 크게 따르지 않았던 것같다. 문선에는 그가 23세 되던 해에 올라갔으나 관리로 채용이 된 것은 5년이 지난 28 살때부터이고 이후 주변부서에서 말단관직으로 시작해 차근차근 올라가 46살 되던 해에 정5품까지 올랐으나 무슨 실수를 했는지 강등되게된다. 이때 수의 충격은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수가 관직생활에서 날짜의 달까지 기록한 것은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와 이때 그리고 현감으로 나가게 되는 해 세 곳뿐이다.
▶맺음말
문헌상에 남아있는 남씨의 조상은 1150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이후 영양파는 고려의 몰락과 함께 몰락하여 현재까지 영양, 울진, 청송, 경주 등 경상북도 동쪽지방에 조용히 살고 있다.
족보는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역할은 거의 하지 못했고 큰 해악을 끼쳤다. 조선 500년 굴곡(屈曲)과 굴종(屈從)의 역사에 족보가 담당한 역할이 상당히 클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를 망치고 있는 권위주의(權威主義)와 존관천민(尊官賤民)의 풍토에도 족보의 역할이 작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전국의 아름다운 강산을 좀먹고 있는 숱한 묘들과 살아있는 힘없는 자를 위해 써야할 돈이 아낌없이 들어간 번쩍는 비석과 묘지를 볼 때 필자는 조상의 어리석음을 통탄한다. 우리 나라를 nova Egypt 로 만들고 있는 이런 한심한 작태는 중지되어야 한다. 족보에서 부계혈통만을 가지고 친족이라 하는것도 과학적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x 개의 성씨가 각 성씨마다 남녀 한 명씩 2x 명이 있고 유교에서 말하는 동성끼리의 혼인이 금지되어 있는 제도하에서 각 부부당 남녀 1명식의 자식을 낳는다면 n 세대가 지나면 A 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맨처음 조상의 피를 얼마나 가지고있을까? 계산해 보면 대략적으로 n 세대에서는 다른 사람의 피보다 1/2n 정도 처음 조상의 피가 그 후손에게 더 있음을 알 수 있다. n = 2 인 사촌인 경우는 25%, n = 3 인 8촌인 경우는 13%, n = 4 인 16촌인 경우는 6%, n = 5 인 32촌인 경우는 3%에 불과하다. 8촌 이상 넘어가면 혈연(血然)적 유사성은 거의 없음을 볼 수 있다. 족보는 없어져야 한다. 도대체 수십대 위 부계 조상이 같은 사람이 나와 성씨가 다른 사람과 나에게 어떻게 다른가? 족보는 페지되어야하고 족보대신 가보(家譜)가 족보를 대신해야한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조상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필연적으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다르고 인간이 무엇인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관점의 하나로 나의 생물학적 기원을 생각해보는 데서 자신의 조상을 연구하는 현대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조상이 큰 공명(功名)을 떨치지도 않았고 큰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산골에서 묵묵히 조용히 살아왔다는 데서 추호의 자격지심(自激之心)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러한 삶이 지금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인민을 착취하지 않고 제 땀을 흘려서 스스로 산 정직한 삶인 것이기 때문이요 우리 조상은 한때라는 식의 헛된 공명(功名)이야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인간은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에 의해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그가 무엇인냐에 의해 판단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2000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는 지금이 아마 남씨의 족보에 살아있는 자의 수가 가장 많이 올라와 있는 시대가 될 것이다. 한 남자당 최소한 두 명을 낳아야 이중 한 명이 남자가 되어서 현재의 인원이 유지가 되는데 요즘은 아이를 한 명 내지 두 명 정도만 낳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현대와 미래는 씨족의 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에 씨족간의 연락이 끊겨지고 족보의 간행도 얼마 후면 중지가 될 것이다. 족보는 더 이상 간행되어야 할 이유도 없고 간행되어서도 아니되지만 만일 후에 족보가 또 간행다면 족보의 관직위주의 기록도 이제는 일소(一掃)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인 권위주의에 족보의 이러한 면이 큰 기여를 했을 것이고 현대사회에서 관직은 과거와는 의미기 판이하게 달라졌기때문이다.
▶참고 문헌
남씨 기미 대동보(南氏 巳未 大同 譜), 1979
남씨 계유 대동보(南氏 癸酉 大同 譜), 1993
정승 6명등 배출…조선조 20대 명문 門閥
대구 경북 씨족사<13>영양 남씨(英陽 南氏)
영양남씨 영해 입향시조인 송정공 후손들이 인조8년(1630)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에 이주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 민속마을로 지정된 괴시마을은 전통성이 아직도 고스란히 잘 보존된 마을로 특히 경북지방에서 볼 수 있는 한국 반가(班家) 건축의 대표적 형태인 ㅁ자형 가옥이 14채 남아있어 그 당시 마을의 배치, 가옥의 좌향 및 공간특성을 보면 상류주택의 시대적 사회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영남남씨 집성촌인 괴시마을 내의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민속자료 75호로 지정된 영양남씨 괴시파종택과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괴시동 태남댁, 괴시동 물소와 고택, 괴시동 해촌 고택, 영덕 천전댁, 영해 입천정, 영해 주곡댁, 물소와 서당, 영해 경주댁, 영해 구계댁, 괴시리 괴정, 영덕 괴시리 사곡댁, 영덕 괴시리 영감댁, 영덕 괴시리 영은고택, 영덕 스므나골 재사 등 총 15개소가 위치하고 있다.
영양 남씨의 시조영양남씨의 시조 영의공(英毅公)은 중국 당나라 하남성 봉양부 여남(汝南) 사람으로 본래 성은 김씨(金氏)요, 이름은 충(忠) 이었으며 벼슬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서기 755년 신라 경덕왕 14년 당나라 헌종의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일본에 안렴사(按濂使)로 갔다가 소임을 마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동ㆍ남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훼손된 배에 의지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표류하다가 신라 유린지(有隣地)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항 명당산(明堂山) 죽도(竹島)에 표착하게 됐다.
그 당시 당(唐)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이고 표착지 축산항은 바다와 경치가 좋고 인심이 유덕하여 신라 경덕왕에게 신라에 살게 해주기를 청하여 경덕왕이 그 일을 당나라 천자(天子, 헌종)에게 알리니 헌종은 조서(詔書)를 내려 전하기를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을 신하에 대한 예로서 불러 올수가 없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신라에서 살게 하라”고 허락 하였다.
그 후 신라 경덕왕이 공(公)을 불러 이르되 군(君)은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으니 사성(賜姓)함이 마땅하리라 성(姓)은 남쪽에서 왔고 본고향이 여남이라 남씨(南氏)로 하고, 거동을 살피고 언행을 들으니 민첩하고 화용(和容)함이 가히 법(法)다운 지라 이름은 민(敏)으로 개명(改名)게 한 후 고은현(古隱縣)을 식읍(食邑)으로 하고 영의공(英毅公)이란 시호를 내리니 이때 나이 40세 이었다.쪯영양남씨의 연원과 분파영양남씨는 시조 영의공으로 부터 연원(淵源)이 되었으며 시조로부터 약550년간 세게(世系)를 알지 못하다가 고려 충렬왕(1274~1308) 때 장남 홍보(洪輔)는 영양군(英陽君), 차남 군보(君輔)는 의령군(宜寧君), 삼남 광보(匡譜)는 고성군(固城君)으로 봉해져 3형제가 분관하여 세보가 형성되었으며,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3본이다.
3본관의 후손들은 전국에 흩어져 세거지 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정승 6명과 대제학 6명, 판서 24명, 문과 급제자 140여명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조선조 20대 명문 문벌(門閥) 이었다.
영양남씨의 인물영양남씨 중시조(中始祖, 1世) 대광공(大匡公) 남홍보(南洪輔)는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받고 어지러울시 정치적 및 군사적으로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중대광 도첨의 찬성사 상의회의 감사라는 벼슬에 올라 영양군으로 습봉됐다.
영해(寧海) 입향 시조로 최초로 헌거사(軒居士) 하신 분은 영양남씨 8대손 송정공(松亭公) 남수(南須)로 태종17년(1417년) 문선에올라 세종 때 직장(直長, 종7품), 승훈(承訓,정6품), 판관(判官, 종5품), 사헌부 감찰어사, 용담현령사 최고참 수령으로 재직했고, 후손들은 문과 급제 11명, 무과 28명, 생진과 28명을 배출했으며 지난 1993년에 간행된 영양남씨 계유보에 의하면 송정공파는 영양남씨 중 80%를 차지하고 있다.영양남씨 대광공 14대이며 송정공 6대손인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 선생은 조산대부(朝散大夫) 판관공 남의록(南義祿)의 장남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영해부 의병장이 되어 7년간 경주성 및 영천성, 복성 등 다섯 곳의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홍의장군 곽재우장군의 진(陳)에서 승전책(勝戰策)을 작성했으며 성균진사(成均進士)로 영양남씨 중 유일하게 불천위(佛遷位)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