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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精舍

[스크랩] 도산서원답사기 - 1

작성자유승 박노동|작성시간12.07.24|조회수45 목록 댓글 0

 

 

 

도산서원 답사기

 

 


도산서원 현판

 

 

퇴계선생께서 세상을 떠난후 4년후인 1574년 제자들과 유림들이 힘을 합해서 그의 학덕을 승모하고 영남학파의

위세를 키우기위해 서원을 세웠으며, 그 다음해인 1575년에는 선조임금께서 한석봉 친필인 현판을 하사 하시어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1969년에는 사적170호로 지정하여 선생의 학문사상과 애국심을 기르는데 큰 역활을

하고있습니다.서원의 크기는 12채의 건물로 구성되어있으며 총98296평의 규모입니다.

 


서원 들어가는 길목에 추로지향 이란 비석이 서있는데,

공자의 77대 종손인 공덕성 박사가 도산서원의 원장자격으로  상덕사

(常德祠)를 알묘한 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휘호를 남겼는데, 

 

"경신년(1980)12월8일 삼가 도산서원에 나아가 퇴계선생의 신위에 절한뒤 강당에 올라 남겨주신 원규(院規)을

 읽고서 흠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여 이를 돌에새겨서 기록하다.곡부 공덕성은 쓰다" 

 

'퇴계 선생을 추나라의 맹자, 노나라의 공자와 같이 대학자이고, 성인이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퇴계란 선생의 호(號)인데 '퇴거계상(退居溪上)'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벼슬에서 물러나 시내 위에

집을 지어 물욕을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합니다.




서원 입구에있는 천광운영대에서 본 낙동강 시사단 입니다,


선생께서 즐겨 산책하시던 곳이라고 합니다,

 

춘풍(春風)에 화만산(花滿山)하고 추야에 월만대(月滿臺)라
사시(四時) 가흥(佳興)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물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늬 그지 있으랴

                                  도산십이곡 6수(전6곡중 6수)

 

봄바람에 꽃은 산에 가득 피어 있고, 가을밤에는 달빛이 누대(樓閣)에 가득히 비쳤으니,

춘하추동 사 계절이 각기 지닌 멋은 사람의 흥겨워함과도 다를봐가 없구나!
그러니 더군다나, 고기가 물에서 뛰놀고 소리개는 높이 날며,

흘러가는 구름은 그림자를 던지고,

밝은 햇빛이 온 누리를 비추는 저 대자연의 아름다운 조화에 어찌 한도가 있을 수 있겠느냐?

 

서원 입구에 들어서서 큰 느티나무를 지나노라면 열정이란 우물이 있고,



도산서당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로 역경 정괘(井卦)정열한천식(井열寒泉食)의 우물의 의미를 취하여 '열정'이라

하였다 합니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겨가지 못하고, 길어도 줄지않으며,오가는 사람 모두가 즐겨 길어 마시는것과 같이

사람들은 주인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레박으로 길어마시듯 자기의 노력에 의하여 인격과 지식을 쌓아

누구나 즐겨 마실수있는 샘물과같이 사회에서 꼭~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서원정문을 들어가기전에 역락서재가있습니다.




퇴계선생의 제자 정지헌(鄭芝軒)의 부친이 지헌(鄭士誠)을 취학시킬때 지어준 집으로

현판의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라 합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서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장소인 농운정사가 工자모양으로 서있습니다.

 



농운정사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함께 선생이 세운 건물로, 당시 문도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입니다.

제자들이 자율적으로 심체공부(心體工夫)에 전념하기를 바라던 선생의 정신이 반영되어

'工' 자형으로 건축되었다합니다.

공부하는 데 밝게 하기 위하여 사방에 창문을 많이 내어 채광을 살리고 맑은 공기가

들어오도록 해서 정신을 맑게 하였다합니다.

 

 공부하던 마루를 '시습재(時習齋)'라 하고 뜻은 '학이시습(學而時習) 불역열호(不亦說乎)' 즉 '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란 뜻입니다.

 나이 든 제자들은 동쪽방, 나이가 어린 제자들은 서쪽방에 기거토록 하여 제자들 간에 서로

부담이 없도록 하였다 합니다.

 



제자들이 쉬는 마루를 '관란헌(觀瀾軒)'이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낙동강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흐르는 물의 순리를 터득케 하였다 고합니다.

   觀瀾 : 觀水有術 必觀其瀾


 

도산서원은 도산서당을 근간으로 건립되었다 합니다.

퇴계선생께서 명종12년 57세때 공조참판에서 물러나셔서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시고 집을 짖기시작하여

61세때인 신유년(1561,명종16)가을에 비로서 완성한 집이라  합니다,법련이란 스님이 공사를 미쳐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그뒤 정일(靜一)이라는 스님이 이어서 완성했다 합니다,처음엔 초가로 지어졌었으나

제자인 한강정구 께서 안동부사로 있을때 기와를 이었고,사이가 벌어진 퇴마루를 달아내었다 합니다,

 

문집에 실려있는 詩  도산서당

 

大舜親陶樂且安(대순친도락차안) 순임금 친히 그릇 구워 즐겁고도  마음 편안했고,

淵明躬稼亦歡顔(연명궁가역환안) 도연명도 몸소 농사하며 참으로 기뻐했다지,

聖賢心事吾何得(성현심사오하득) 성현들의 그 심사를 내 어찌 얻었으리오마는,

白首歸來試考槃(백수귀래시고반) 늘 그막에 돌아왔으니 예서 숨어 살으리로다.

 

도산서당이 건축되던 당시는 선생과 동갑이었던 문정왕후(1501~1565)와 그 친동생인 윤원형이 국정을

 처단하던 어려운 시기여서 현실에서 개혁이 불가능함을 절감한 선생께선 선택의여지가 없이 물러나

후진양성에 전념하는길만이 유일하였음으로 이런 역사적 배경하에서 구상되고 지어졌다고 합니다.


 

 

서당은 단 세칸인데 서쪽은 부억이고 가운데는 방이고 동쪽은 마루입니다,

방 이름은 완락재(玩樂齋)이고,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입니다,

 

 

완락재(玩樂齋)는 도산서당의 가운데 방에 붙인 이름입니다,"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지내도

싫지 않겠다(樂而玩之足而終吾身而不厭, 名堂實記)"라는 주자의 말씀에서 취한것이라 합니다,

 

선생께서 남기신 詩  완락재

 

主敬還須集義功(주경환수집의공) 공경을 주장해도 집의(集義)공부 중요한데,

非忘非助漸融通(비망비조점융통) 잊고 돕지 않고도 점차로 융통해 지리라,

恰臻太極濂溪妙(흡진태극렴계묘) 주렴계의 태극도의 오묘한 경계 알고 보니,

始信千年此樂同(시신천년차락동) 비로서 천추에 이 기쁨 같은 것을 내 알았네


 

 

암서헌(巖栖軒)

도산서당 마루를 말합니다,선생이 명명한 것으로 그 배경에는 주자(朱子)에대한 다함 없는 존모(尊慕)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이 이름은 주자의 <운곡이십육영(雲谷二十六詠)>의 하나인 <회암(晦庵)>의

전구와 결구인 "오래되어도 자신이 없으니 암혈에 살면서 본밭고자 하노라 (自身久未能巖樓翼微效,)"에서

따온것이라 합니다,巖栖軒은 암혈지사(巖穴之士)인 은사(隱士)가 사는 집이란 뜻입니다,

 

선생께서 남기신 암서헌 詩

曾氏稱顔實若虛(증씨칭안실약허) 증씨는 안연더러 실하면서도 허한듯 하다했고,

屛山引發晦翁初(병산인발회옹초) 병산(유지휘)은 회옹(주자)에게 가르치던 처음이라,

暮年窺得巖棲義(모년규득암서의)  바위에 깃 드는 뜻 내 늦게서야 엿보았으니,

博約淵氷恐自疎(박약연빙공자소) 박약 공부 연빙 자세 모두 이루지 못해 두렵다네.


 

 

암서헌에서 마당 왼쪽을 바라보면 연이심겨진 연못이 있는데 이것을

정우당(淨友塘)이라 합니다,앞에보이는 살평상은 암서헌 옆에 부설된

마루로 선생제자 정한강이 선생을 위해 기증한것이라 합니다.

 

도산기에 "동쪽구석에 조그만 네모난 연못을 파고 그곳에 연을심어 정우당

이라 하였다,(塘之東偏鑿小方塘種蓮其中淨友塘)"고 기록하고있습니다,


  

 

연을심은 이유는 염계 周敦이(1017~1073)선생께서 지은 애련설에서 본받아

연꽃의 이미지를 통하여 군자의 고고한 삶을 지향했다 합니다,

 

연이 더러운 진흙에서 자라지만 깨끗함을 지닌것이 선비의 이미지와 닮았다.

한평생 알아주는이 없어도 저 홀로 은은한 향기를 발하듯 속세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고고히 살아가는 군자의삶을 본받고자 함이라 합니다,


 

대문은 그저 담이 뚝 끊어진곳의 작은 사립문입니다,암서헌에서 보면 오른

으로 약간 비켜있어서 들어오는자와 눈이  마주 치지 않게 하였다 합니다

 

완락재(玩樂齋)의 문을 열면 바로 보이며,문의 이름은 유정문(幽貞門)입니다,

서당을 출입하는 사립문 입니다,그윽하고 바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산속에 은거하는 선비의 정신을 그대로 나타낸 문이기도 합니다,

 

주역에있는 "도를 실천하는 길이 탄탄하니 숨은 선비가 마음을 곧고 올바르게

가지면 길하리라.(履道垣垣幽人貞吉, 周易履卦)"에서 취한것 이라 합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퇴계 선생께서 그토록 아끼시든 매화꽃이 만발하였습니다,

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평생 춥게살아도 그러나 그 향기는 팔지않는다.

그래서 선생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나 봅니다.


정우당 남쪽으로는 원래는 대나무로 보이지 안토록 가리워져 있었던곳 이라는데

지금은 터져있는 상태이고,정우당 연못 동쪽에 암서헌과 마주하여 몽천(蒙泉)

이란 샘을 만들고 그 위에 단을 만들어 절우사(節友社)라 불렀다고 합니다,


몽천(蒙泉)은 정우당 연못동쪽 산기슭에서 솟아나는 조그만 샘물입니다,

어린제자를 바르게 가르치다 즉 몽이양정(蒙以養正)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합니다,

 

도산기를 보면

"泉上山脚鑿今與軒對平築之爲壇而植其上梅竹松菊 曰節友社"

(천상산각착금여헌대평축지위단이식기상매죽송국왈절우사)

 

"샘위 산기슭을 파서 암서헌과 마주하여 평평하게 단을 쌓아 만들고 그위에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 등을 심어 절우사라 불렀으며"

서생들로 하여금 호연지기를 기르게 하셨다 합니다.

 

호연지기(浩然之氣) = 우리가 가지고있는 이기심을 줄이고 줄여서 나와 다른사람의 

구별이 없어지고 드디어 나와 우주와의 구별마져 없어지는 경지에 이르게되면 

<탁트이고 자유스런 경지에 이른사람 >즉 호연지기를 가진사람 이된다 고하였습니다.


 

玉같은 빛은 홀로 天地의 精氣를 모았고,

쇠같은 정신은 서리와눈의 무서움을 받지않는다.

(玉色獨鐘天地正鐵心不受霜雪驚)

 

竹者何哉乎(죽자하재호)          대라는것이 무엇인고하니,

其本固(기본고)                      그 근본은 굳고(단단하고),
其莖直(기경직)                      그 줄기는 곧고(바르고),
其心虛(기심허)                      그 마음은 비었으며,
其節堅(기절견)                      그 마디는 견고하고,
其行直(기행직)                      그 행실은 바르고,
其氣淸(기기청)                      그 기운은 맑고,
經霜雪而不고(경상설이불고)   서리와 눈을 맞고도 얼지않는것을보면,
可以爲人法(가이위인법)         가이 사람이 본 받을법하다.

 

소나무(松)

더우면 곳 퓌고
치우면 닢 지거늘
솔 아 너는 얻지  눈서리를 모르는가 
구천에 뿌리 곧은줄은 글로하야 아노라.


 

松柏貞姿 (송백정자) 소나무 같은 곧은모습

金石遐壽(금석하수) 쇠와 돌같은 오랜수명.


 

국화(菊)
국화야 너는 어이 모든꽃이피는 삼월 봄바람이 불때를 다 보내고서, 
낙엽이 떨어지는 추운날씨에 너혼자만 피었느냐,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찬서리 이겨내는,
높은 절개를 지닌것은 너 하나 뿐인가 생각하노라.

 

선생은 서당을 찾아오는 아이,노비,관리,할것없이 모두 방 밖에 나가 맞이하고,

전송하며,사람차별 안하는 인애사상(人愛思想)도 몸소 실천 하셨다 합니다.

 

 

 

이황(李滉) 생애와 업적


이황(李滉) : 1501(연산군7)~1570(선조3) , 경북 안동.
퇴계의 성은 李, 이름은 滉,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그는 연산군 7년(1501) 음력 11월 25일에

경상도 예안현(지금의 안동군 도산면 온혜동)에서 진사 이치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이 진사였던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양반이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서 그도

신분상으로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장래가 보장되는 양반가문 출신이었다. 그렇다고

퇴계의 가정 환경이 유복하여던 것은 아니다. 그는 태어난지 불과 7개월 되던 때에 당시

40세의 장년이던 부친을 여의었다. 그로 말미암아 부친의 훈도를 받지 못하고 또 빈곤한 생활

속에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을 여의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 가야 할 형편이었다. 퇴계

스스로 모친을 묘사하여 “뒤로 두 아들이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어도

부인께서는 그영진(榮進)을 기뻐하지 않고, 항상 세상의 시끄러움을 걱정하였으며 비록

문자는 익히지 않았어도 그 의리(義理)를 가르쳐 주고 사정을 밝히는 식견과 사려는

 

사군자(四君子)와 같았다.”고 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퇴계의 학문과 인격 형성에

모친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종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이렇듯 관직에서 끊임없이 은퇴하려는

 선생의 뜻과 어디까지나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한낯 ‘문서상의

임명과 사임’만이 계속된 것이 그의 노년기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道設)과 천명도설후서(天命道設後敍),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錄辨),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자성록(自省錄), 전습록논변

(傳習錄錄辨),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정문을 들어서서 전교당으로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뒤로 보이는 똑같은 모양의 건물이 광명실 인데 이곳은 서고(書庫)입니다.

퇴계선생께서 소장하던 책들과 서간집, 여러 임금께서 내려주신 책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가2003년4월에 국학진흥원으로 옮겨서 잘~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서 광명실 사이로 나 있는문이 진도문(進道門) 입니다.

도를 찾아 나아간다 는 뜻을가진 문입니다.

 

진도문을 지나야 서원의 중심이되는 전교당(典敎堂보물 제210호)앞에 서게됩니다.

유생들이 학문을 논하고 강의를 했든 집회장소 입니다.

 

이곳에 걸린 "道山書院" 이란 현판은 선조의 어명을 받아 조선조 최고의명필 한석봉이

어전에서 쓴 친필 글씨 입니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유생들이 묵었든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서 있습니다.

 

동재는 박약재(博約齋)입니다.

博學於文 約之以禮 (박학어문 약지이예)  학문을 넓게배워 예로 행하라.는 뜻이고

 

서재는 홍의재(弘毅齋)입니다.

士不可以不弘毅任重而道遠(사불가이불홍의임중이도원)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될것이니,

그 책임은 무겁고 도학의길은 멀기 때문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古者言之不出恥躬之不逮也(고자언지불출치궁지불체야)

옛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은것은 실천이 따르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서 였다

 

안동이 오늘날 조선의 추노지향 으로 불리는것은 이처럼 퇴계가세운 도산서당 으로부터

뻗어내린 유림의 숲 때문일 것입니다.

 

終日尋春不見去(종일심춘불견거) 봄을찾아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와,

歸來庭前一枝梅(귀래정전일지매)뜰에핀 매화꽃을보니 바로 이곳에 봄아 와있다.

 

퇴계는 이처럼 자신이 나무하고 고기잡든 고향이 바로 추로지향 이자 낙민의 땅임을

비로서 깨달았든 것입니다.

퇴계선생께서 57세~66세까지 약10여년 동안쓴 詩 중에서 도산서당에서 지으신 詩입니다.

 

서당을 고쳐지을 땅을 도산 남쪽에서 얻다.(改卜書堂得地於陶山南洞)

 

風雨溪堂不庇床(풍우계당불비상)  계상 서당에 비바람부니,침상조차 가려주지 못하여,

卜遷求勝편林岡(복천구승편림강)  거처옮기려고 빼어난곳을 찾아 숲과언덕을 누볐네,

那知百歲藏修地(나지백세장수지)  어찌 알았으리,백년토록 마음두고 학문닦을 땅이,

只在平生采釣榜(지재평생채조방)  바로 평소에 나무하고 고기낚던곳 곁에 있는줄이야.

 

명종12년 57세때에 지으신 詩입니다.

 

옥진각(玉振閣)

1970년에 건립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유물전시관인데 외부는 한식, 내부는 현대식입니다.

옥진각은 '집대성 금성옥진(集大成 金聲玉振)'을 줄인 말로 '집대성했다는 것은 금소리에

옥소리를 떨친 것이다'라는 뜻이담겨있습니다.

이곳에 진열된 유품은 모두가 선생이 사용하였던 일용품인 문방구와 실내 비품으로 하나같이

소박하고 검소하며, 외면적인 꾸밈과 사치를 떠나 오직 청빈에 만족하신 도학자다운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전시유물

 ⊙ 실내비품(室內備品)

     완석(莞席) : 왕골로 짠 자리 3개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 중 한 개의 배면에는

     '이첨지댁퇴계(李僉知宅 退溪)'라는 자필 글씨가 있습니다.

     안석(案席) : 가는 왕골로 짠 기대는 방석.

     장추(長 ) : 의이미(薏苡尾)로 만든 빗자루.

     등경(燈 ) : 등잔을 얹어 놓던 등잔걸이.

     백자타호(白磁唾壺):선생께서 사용하시던 타호(唾壺). 받침 접시 밑에는

     '산(山)'자가 묵서(墨書)되어 있습니다.

 ⊙ 문방구(文房具)

     매화연(梅花硯) : 벼루에 매화와 대나무[梅竹]을 조각하여 의장이 고상하고

    기법이 매우 정교한 것이 일품으로 퇴계 문인 김북애(金北厓:坼)가 선생에게 선사한 것이다.

     옥서진(玉書鎭) : 매화벼루에 따른 것인데 옥으로 만들어졌으며 글씨를 쓸 때 종이의 양쪽

     을 누르는 것입니다.

     흑단연(黑端硯) : 단계산 흑색의 돌벼루입니다.

     연갑(硯匣) : 벼루를 넣는 흑색 목제갑입니다.

     서기(書 ) : 오색(烏色)으로 된 목조 책상입니다.

 ⊙ 청려장(靑藜杖)

    선생이 평소에 사용하시던 일년초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입니다.

 ⊙ 매화등(梅花 )

    밑면의 지름이 28.5㎝, 높이 47.5㎝에 매화무늬 모양을 투각한 것이 특이하며 

    용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 투호(投壺)

    병[壺]을 놓고 일정한 거리(죽시 두 살 반)에서 청·홍의 죽시(竹矢)를 병 가운데

    구멍이나 귓구멍에 던져 넣는 기구. 놀음놀이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일명

   '정심투호(正心投壺)'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 혼천의(渾天儀)

    선생이 문인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으로 하여금 제작케 한 것인데 천체의

    운행과 성좌의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입니다.

 ⊙ 서적류(書籍類)

     성학십도(聖學十圖):유교철학을 알기 쉽게 10가지 도식(圖式)으로 나타낸

     것으로 선생 68세 때 17세의 어린 선조에게 올린 것이다. 선조 임금은 이것을

     병풍으로 만들어 두고 학문과 덕을 쌓았다. 성학십도는 안으로 성인(聖人)이 되고

     그후에 임금이 되어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성왕(聖王)이 되도록 하는 학문이다.

     사문수간(師門手簡)과 어제발문(御製跋文) : 선생이 제자 조월천(趙月川)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과 정조께서 열람하고 느끼신 소감을 적은 어필(御筆)이다.

     이퇴계서초(李退溪書抄) : 선생의 학문은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퇴계학파가

     형성되었다. 일본의 손시교쿠수이[村士玉水]가 선생의 서(書)를 뽑아 엮은 것으로,

     선생 8대손 초초암(草草菴)공이 복사한 것입니다.

     자성록(自省錄) : 선생이 평소에 친구나 제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손수 초록해

     두고 후일의 참고와 반성의 자료로 삼아오던 것이라 합니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 선생은 도산의 산수를 예찬하는 연작시조(連作時調)를

     12편이나 읊었는데, 이 책은 바로 그 시조집입니다. 전 6곡을 언지(言志)라 부르고

     6곡을 언학(言學)이라고 불렀는데, 모두가 학문(學問)과 지상(志尙)을 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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