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48. 스와트 평원으로
간다라 최고의 마애불상 ‘자하나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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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나바드 마애불> |
| 사진설명: 산중턱 바위면에 새겨진 불상의 상호는 매우 원만하고 잘 생겼다. 이런 부처님이 계신 스와트에 불교를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
현장스님이 “지리가 기름지지 않다”고 판단한 이유가 무엇일까. 직접 본 스와트 지방은 대단히 기름진 땅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지리(地利)가 좋지 않다’고 적었던 현장스님도 “포도가 많이 나고 사탕수수는 적게 수확된다. 금과 쇠가 토산품이며 울금향이 자라기에 좋은 토양이다. 나무와 숲이 울창하고 꽃과 과일이 무성하다. 추위와 더위가 적당하고, 비와 바람이 시절에 잘 맞춘다”며 스와트 땅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2002년 4월29일 현장스님의 기록들을 생각하며 스와트의 본향(本鄕)인 사이두 사리프로 향했다. 조금 전에 본 ‘니모그람 산악사원 유적지’와 ‘톱다라 스투파’의 잔영(殘影)이 눈에 아른거렸다. 스와트 강을 끼고 달리던 차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10여 호쯤 되는 마을로 들어갔다.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안내인이 “싱게르다르 스투파에 도착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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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싱게르다르 스투파. 주변의 밭에서는 지금도 기와조각과 토기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
우요삼잡을 마치고 스투파 옆에 앉아 주변 일대의 풍광을 둘러보았다. 암산(巖山)을 병풍삼아 중심부에 단아하게 자리 잡은 스투파의 위용은 대단했다. 높이도 높고 크기도 컸다. 복발탑(覆鉢塔) 형식을 취한 모습이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다. 인도 산치 대탑이 발우를 그대로 뒤엎은 형태라면, 싱게르다르 스투파는 ‘원통형 발우’를 엎은 것 같았다.
이슬라마바드 근방에서 본 마니꺌라 스투파, 카이버고개에서 만난 스폴라 스투파, 탁실라에 있는 발라 스투파와 외형은 비슷했다. 싱게르다르 스투파가 보다 호리호리하게 보인다는 점이 달랐다. 탑 부근에 ‘비하라’(僧院) 유적이 있었다. 지금은 밭으로 변한 곳인데, 여기서 토기파편과 기와조각들이 다수 출토된다고 안내인이 말했다. 실제 밭에 들어가 보니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밭둑엔 기와조각들이 쌓여져 있다.
‘원통형 발우’ 엎은 모양의 싱게르다르탑
싱게르다르 스투파를 일견하고 우리들은 스와트 강을 끼고 사이두 사리프 시내 쪽으로 10분 정도 달렸다. 길가 암벽에 새겨진 카르카이 마애불을 보기 위해서였다. 바위 면을 감실처럼 파고 들어가 새긴 마애불인데, 머리는 깨어지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상태였다. “오로지 대승불교만 행해진다”(왕오천축국전)는 스와트엔 간다라 등 다른 지역에선 보기 드문 마애불상이 다수 남아있다. 카르카이 마애불도 그 중 하나인데, 길가에 위치한 관계로 얼굴부분이 무참하게 파괴된 상태였다.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높이 3.7m인 마애불은 통견의(通肩衣)에 선정인(禪定印)을 한 좌상(坐像)이다. 일부가 깨졌지만 어깨엔 오히려 팽팽한 탄력감이 있어 보였다. 가슴은 발달했고 허리는 잘룩하며, 왼손을 밑에 오른손을 위에 올린, 선정인을 취한 손도 약간 파손된 상태다. “팔꿈치와 얼굴을 서로 연결하면 아름다운 삼각형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체는 결가부좌한 자세며, 발바닥과 발가락이 선명한 형태로 남아있다. 발바닥은 상당히 큰 편이다. 얼굴부분이 훼손된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웠다. ‘얼굴만 온전했다면 참으로 멋진 불상인데…’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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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붓카라 제1사원지. 거대한 스투파를 중심으로 주변에 작은 스투파들이 배열되어 있다. |
세레나 호텔에 짐을 풀고 중국 동진의 고승 법현스님(317∼419)의〈불국기〉에 나오는 스와트 부분을 읽었다. “오장국은 바로 북천축(북인도)에 속한다. 여기서는 모두 중천축(중인도)의 언어를 사용한다. 속인들의 의복이나 음식도 또한 중천축국과 같다. 불법(佛法)은 대단히 성하다.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을 승가람이라고 하는데 이 나라에는 약 500여 개의 승가람이 있으며,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다. 만약 객(客)비구가 오면 사흘 동안은 극진히 공양하지만 사흘이 지나면 스스로 안주할 곳을 구하도록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부처님께서 북천축에 오셨을 때 이 나라에 이르러 족적을 남겼다고 한다.” 다음날(지난해 4월30일). 스와트 박물관을 관람하고 ‘붓카라 제1사원지’로 출발했다. 거대한 스투파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작은 스투파들이 주변에 도열한 ‘니모그람 산악사원지’와 모습이 유사했다.〈대당서역기〉에도 붓카라 대탑에 관한 부분이 나온다. “몽게리성의 동쪽으로 4∼5리 가다보면 스투파가 있는데 상서로운 징조가 매우 많이 일어나고 있다. 옛날 부처님께서 인욕보살이셨을 때 이곳에서 갈리왕 - 당나라 말로는 투쟁(鬪諍)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가리(哥利)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 을 위하여 자신의 신체를 잘랐던 곳이다.”
산중턱의 큰 마애불 훼손 안 된 채 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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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붓카라 제3사원지. 지나가던 파키스탄인이 취재팀을 보고 스투파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
상서로운 징조가 많이 나타났다는 점 뿐 아니라 붓카라 대탑은 미술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동국대 문명대 교수에 의하면 간다라 불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3중으로 청석을 쌓고 그 안을 자갈돌로 채운 것, 심주(心柱)는 둥글게 자갈돌을 쌓고 중심에 청석 함으로 사리함을 만든 것, 기단 외벽을 벽돌로 마감한 후 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린 것, 사방에 사방불과 16방에 부조상을 안치하고 외벽을 따라 그리스식 원형 석주를 세우는 등 그리스풍이 짙게 남아있다는 점 등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붓카라 제1사원지를 참배한 다음 붓카라 제2사원지, 붓카라 제3사원지 등도 둘러보았다. 붓카라 제3사원지는 산허리를 잘라내고, 조성한 사원지인데, 방형의 굴실(窟室)에 스투파들이 안치돼 있었다. 인도 석굴사원의 차이탸처럼 스투파가 중앙에 자리 잡고, 주변을 돌아가면 예배할 수 있는 구조였다. 붓카라 제2사원지는 제1사원지와 대동소이했다. 중앙에 거대한 스투파가 있고, 주변에 작은 스투파들이 배열된 그런 구조였다.
사원유적지를 취재한 뒤 “간다라 최고의 마애불상”으로 평가되는 ‘자하나바드 마애불’로 향했다. 사이두 사리프 시내에서 스와트강을 끼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렸다. 30분쯤 달리자 마을이 나타났다. 안내인이 차에서 내려 산중턱을 가리키며 “저곳에 자하나바드 마애불이 있다”고 설명했다. 밀밭을 헤치고 산을 올랐다. 30분 쯤 올라가니 산 중턱에 거대한 바위가 있고, 그곳에 정말 잘생긴 부처님이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정좌하고 있었다. 산중턱에 있어 그런지 카르카이 마애불과 달리 전혀 파손되지 않은 상태였다. 도착하자마자 삼배를 올렸다. 마침 마애불 옆에서 소 먹이고 있던 현지인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탄력 있고 박력 있는 얼굴, 당당한 어깨와 잘룩한 허리, 긴장감 도는 체구 등 모든 것이 어제 본 카르카이 마애불과 비슷했다. 완형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이 카르카이 마애불과는 달랐다. 한 참을 쳐다보았다. 참으로 원만하고 잘생긴 상호(相好)였다. 이런 부처님이 계신 이곳이 이제는 이슬람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현장스님이 방문할 당시만 해도 이곳엔 불법(佛法)이 남아있었다. “이 나라(스와트·오장나국)는 부처님 법을 숭앙하고 존중하며 대승을 믿고 경배한다. 옛날에는 1,400개의 가람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무너져 황폐해졌다. 옛날에는 스님들의 수가 18,000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들은 모두 대승을 익히고 있으며 선정에 잠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능히 글을 잘 외지만 심오한 뜻을 그다지 깊이 궁구하지는 못하고 있다. 계행이 맑고 깨끗하며 특히 금주(禁呪. 다라니)에 능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변했다. 불교는 그나마 유적 속에만 남아있고, 밥 먹고 똥 누는 사람들 사이에선 사라진지 오래다. 무엇 때문에 불교가 쇠퇴하게 됐을까. 자하나바드 마애불 밑에 앉아 스와트평원을 바라보며, 항상 들고 다닌 화두를 꺼내들고 참구(參究)했다. 의단(疑團, 의심덩어리)은 독로(獨露, 스스로 드러남)한다고 했는데, 결코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쓸쓸한 마음만 안고, 마애불에 인사한 뒤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