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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화지, ‘고목유천도’

작성자普願|작성시간16.12.14|조회수36 목록 댓글 0

“하늘은 텅 비어있되 빈 것이 아니다”

 

 
▲ 마화지, ‘고목유천도’, 중국 남송, 종이에 먹, 30×48.7cm, 대북 고궁박물원.

“지금 내 병이 위독하니 급히 오도록 해라.”

장부국(丈夫國)에 있는 형 무착(無着)법사가 동생 천친(天親)에게 사신을 보냈다. 무슨 병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무조건 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유사국에 있던 천친은 사신을 따라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프다던 형은 멀쩡했다. 의아한 천친이 무착에게 물었다.

 

세친, 소승 입장서 대승 훼방
형 무착에 의해 과오 뉘우쳐
이후 다수의 대승경론 저술해

고목유천도는 변각구도 사용
자연의 한 부분만 제외하고
나머지 생략해 서정적 분위기


“형님. 어디가 어떻게 아프십니까?”

형이 대답했다.

“나는 지금 마음에 중병이 있다. 너로 인해 생긴 병이다.”

천친이 또 물었다.

“무엇으로 인해 생겼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형이 대답했다.

“너는 대승(大乘)을 믿지 않고 항상 훼방을 놓았다. 이 악업 때문에 너는 반드시, 영원히 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는 지금 근심과 고통으로 장차 생명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무착과 세친 형제는 부루사부라국(페샤와르) 사람이다. 아버지는 교시가(?尸迦)라는 성을 가진 국사(國師) 바라문이었다. 교시가는 아들이 셋이었는데 그 중 무착과 세친이 출가하였다. 무착은 일찍 출가하여 소승의 공관(空觀)을 익혔다. 이후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대승의 공관을 깨닫고 유식(唯識)사상을 체계화했다. 무착의 유식사상은 그의 저서 ‘섭대승론(攝大乘論)’에 잘 정리되어 있다. 무착의 뒤를 이어 유식사상을 완성한 사람이 동생 천진(天親)이다. 천친은 세친 혹은 바수반두(Vasubandhu)라는 범명(梵名)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그는 초기에 소승불교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출가하였다. 형 무착이 사신을 보내 동생을 오게 할 때만 해도 세친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집대성한 후 소승의 교리를 활발하게 전파하고 있었다. 무착은 동생 세친이 소승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한 동생이라면 대승의 수승함을 곧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착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형의 간략한 설명만 듣고서도 세친은 곧바로 대승의 의의에 통달했다.

‘고목유천도(古木流泉圖)’는 남송(南宋)의 마화지(馬和之,1131~1162)가 그린 작품이다. 그림은 아주 단순한데 그의 특징적인 필법이 잘 드러나 있다. 바위틈에서 솟은 고목과 새 두 마리가 전부다. 바위 밑으로는 보일 듯 말 듯 한 필치로 물결을 그렸다. 필법은 간결하다. 고목의 줄기와 가지를 보면 필선이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말거머리가 움직이듯 부드럽다. 이것이 마화지가 창안한 유엽묘(柳葉描)다. 그는 수목의 줄기와 가지를 그릴 때 유엽묘 혹은 마황묘(?蝗描)라 부르는 필선을 잘 구사했다. 유엽묘는 가늘고 부드러운 필선으로 인물의 옷 주름이나 수목을 묘사하는 필법이다. 마황묘는 거머릿과의 환형동물인 말거머리가 움직이듯 유연한 필선을 말한다. 그는 산수, 인물, 불상을 잘 그렸다. 특히 ‘버드나무는 조천리(趙伯駒), 소나무는 마화지, 마른 나무는 이성(李成)’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소나무를 개성 있게 잘 그렸다.

‘고목유천도’에서는 비록 당시 유행하는 변각구도(邊角構圖)를 차용했지만 마화지의 화풍은 남송의 주류화원화풍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전형적인 문인화가였다. 그는 당(唐)대에 인물화를 잘 그렸던 오도자(吳道子)의 필법을 배웠다. 오도자는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점과 획이 때때로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른 마화지의 유엽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마화지를 ‘소오생(小吳生)’이라고 불렀다.

‘고목유천도’의 구도는 남송 때 유행한 전형적인 변각구도다. 무게중심이 심하게 왼쪽으로 쏠려있고 오른쪽은 텅 비어있다. 그러나 오른쪽이 비어 있다 해서 미완성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대각선으로 배치한 바위와 고목 그리고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때문이다. 변각구도는 일각구도(一角構圖)라고도 한다. 자연의 한 부분을 화면 한 구석에 포치시키고 나머지 부분은 안개나 물 등의 여백으로 남겨두는 구도법이다. 남송의 화원화가인 마원(馬遠)과 그의 아들 마린(馬麟) 그리고 하규(夏珪)에 의해 형성된 구도법으로 흔히 이들의 화풍을 마하파(馬夏派) 화풍이라 부른다. 마하파화풍은 북송(北宋)의 곽희파화풍(郭熙派畵風)이 거대한 산수를 화면 가득 채운 반면 인물은 개미처럼 작게 그린 것과 달리 여백과 인물의 비중을 크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그 결과 먼 산은 생략되고 안개나 빈 공간이 강조되어 서정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송나라의 수도가 양자강 이남으로 옮겨진 것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마하파화풍은 조선 초기의 화원 이상좌(李上佐)의 전칭작품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화지는 화가였지만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린 화원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진사 시험에 합격해 벼슬이 공부시랑(工部侍郞)에 이른 문인화가였다. 그림 재주가 뛰어나고 예사(藝事)에 밝아 화원의 일을 총괄했다. 그는 고종(高宗)이 ‘시경(詩經)’을 쓸 때 매 편마다 그림을 한 장씩 그렸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시경’의 ‘소아(小雅)’편을 그린 ‘녹명지십도(鹿鳴之什圖)’와 ‘시경’의 ‘빈풍(?風)’편을 그린 ‘빈풍도(?風圖)’가 전한다. 시의도(詩意圖)로는 소식(蘇軾)의 ‘후적벽부(後赤壁賦)’를 그린 ‘후적벽부도(後赤壁賦圖)’가 전해지고 있으며 두순학(杜荀鶴,846~904)의 칠언율시 ‘동말동우인범소상(冬末同友人泛瀟湘)’의 시를 그렸다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형 무착의 말을 들은 세친은 놀라고 두려웠다. 즉시 형에게 대승을 설해 주기를 청했다. 형은 즉시 대승의 중요한 뜻을 간략하게 설했다. 동생은 매우 총명하여 대승의 이치가 소승보다 빼어남을 깨달았다. 대승의 뜻을 배우고 즉시 밝게 사유하여 앞뒤가 다 이치와 상응하여 어긋남이 없었다. 이에 비로소 대승이 위대함을 증험하였다. 만약 대승이 없었다면 삼승(三乘)의 도과(道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자신이 소승을 믿던 과거에 대승을 훼방하던 과보로 반드시 악도에 떨어질 것 같았다. 스스로 깊이 자신의 과오와 허물을 참회하고 싶었지만 어떤 방법으로 잘못을 면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형의 처소에 가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저는 옛날에 혀로 훼방을 놓았습니다. 지금 혀를 끊어서 이 죄를 없애겠습니다.”

무착법사가 말했다.

“네가 설사 천 개의 혀를 끊는다 해도 역시 이 죄를 없애지 못할 것이다. 네가 만일 이 죄를 없애고자 한다면 마땅히 방편으로 고쳐야 한다.”

세친법사는 즉시 형에게 죄를 없애는 방편을 설해주기를 청했다.

“너의 혀는 착할 수 있는데도 그로써 대승을 훼방했으니, 네가 만일 이 죄를 없애고자 한다면 착함으로써 대승을 해설해야 한다.”

무착법사가 죽은 뒤 세친은 대승론(大乘論)을 지어 모든 대승경들을 해석하였다. 세친법사는 ‘화엄경’ ‘열반경’ ‘법화경’ ‘반야경’ ‘유마경’ ‘승만경’ 등 여러 대승경론들을 지었다. 또 ‘유식론(唯識論)’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삼보성론(三寶性論)’ ‘감로문론(甘露門論)’ 등 대승론서들도 지었다. 진제(眞諦) 삼장이 번역한 ‘바수반두법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릇 이 법사가 지은 것들은 문장과 뜻이 정묘하여 보거나 들은 사람들은 믿고 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천축과 그 밖의 변방에서 대, 소승을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법사가 지은 것을 배움의 근본으로 삼았고 이부(異部) 및 외도의 논사들은 법사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승불교는 크게 용수보살을 시작으로 한 중관파(中觀派)와 무착과 세친을 따르는 유가학파(瑜伽學派)로 나눌 수 있다. 유가학파는 중도(中道)를 지향하는 중관사상이 지나치게 공성(空性)에 치우치자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나타나게 되었다. 유가학에서는 모든 것은 마음과 의식의 표상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에 유식학(唯識學)이라고 부른다. 중관파와 유가학파의 입장은 ‘고목유천도’를 보는 두 가지 관점에 비유할 수 있다. ‘고목유천도’에는 여백이 가득하다. 여백은 허공이다. 그런데 이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공한 것인가? 나중에 여기에 건물이 들어선다면 어떠할까. 건물이 있는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 건물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없다면 어떠할까. 멋진 건물이 있다 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공은 공이로되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그런 의미에서 유가학파는 중관학파의 공(空)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으면서도 이를 더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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